미라이 학살을 잊지 말자! 1968년 3월 16일 미라이에서 미군은 광란의 학살을 자행했다!
(이 글은 2018년 3월 17일 미라이 학살 50주년을 맞아 미국의 진보언론인 ‘민주주의 지금 당장 필요해Democracy Now!’에서 했던 방송을 번역한 것입니다. 미라이 학살 55주년을 맞아, 당시 미국이 저지른 만행을 다시 되돌아봅시다.(역주)
https://www.youtube.com/watch?v=osW9U36KkDs
역자: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에이미 굿먼(Amy Goodman): ‘민주주의 지금 당장 필요해(Democracy Now)!’ 방송 democracynow.org,온라인 채널에서 전쟁과 평화 보도 시작합니다. 저는 에이미 굿먼입니다. 오늘은 현대 미국역사에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는 1968년에 일어난 일을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1968년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흑인인권운동가)와 로버트 케네디(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동생)가 암살당한 해이며, 콜럼비아 대학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아우르는 전국적으로 일어난 역사적인 학생들의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이 있었으며, 소련 정부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시카고에서 일어난 민주당 전당 대회와 베트남 전쟁이 고조되는 해였습니다.
에이미 굿먼: 오늘로부터 50년 전인 1968년 3월 16일 미군들이 남베트남에 있는 미라이 마을을 공격했습니다. 미군들은 현지시각 오전 7시 30분에 마을에 도착했고, 미군들은 베트콩이 없었음에도 단 4시간 동안 500여 명의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노인을 포함한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고, 이 사건이 바로 후에 미라이 학살로 불리게 됩니다. 미군들은 여성들을 강간했고, 마을을 불태웠으며, 학살로 죽은 마을주민의 시신을 심하게 훼손했습니다. 학살에 참여했던 한 미군 병사는 “살아 숨 쉬는 건 뭐든 죽이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학살 50주년을 맞아 이를 잊지 않기 위해 베트남 미라이 마을에선 오늘 추모제가 열렸습니다. 미라이 학살의 생존자들은 1968년 3월 16일에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리기 위해 모였습니다.
(화면이 바뀌면서 학살 당시 생존자의 인터뷰를 보여준다)
팜티뚜언: 대략 170명 정도였고, 170명 모두 다 미군이 쏜 총에 맞고 죽었어요. 미군들이 다 쏴 죽였어요. 일단 미군들은 총을 한 번 쏴서 학살을 시작해요. 그러다가 한 1분 정도 좀 쉬다가, 다시 두 번째로 학살을 시작하고, 그다음 세 번째에도 그렇게 했어요. 당시 나이가 80이었던 내 아버지는 부상을 입고 쓰러지더니 기어오르려 했던 것 같아요. 나는 쥐 죽은 듯이 진흙 속에서 가만히 누워 아버지를 조금씩 쳐다볼 수 있었어요. 난 아버지를 봤지만, 아버지에게 숨으라고 말하지 못했어요. 그놈들이 내 목소리를 듣고 쏴 죽일까 봐 말이죠. 난 아버지에게 죽은 척하며 누워있으라고 소리치고 싶었어요. 만약 그랬다면 그놈들은 다신 총을 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놈들은 내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아버지 머리에 총을 쏴 머리 절반을 날려버렸어요.
(다시 뉴스 에이미 굿먼으로 돌아온다.)
에이미 굿먼: 미라이 대학살 이후, 미군부는 미라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은폐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1969년 11월 젊은 기자 시모어 허쉬(Seymour Hersh)*는 윌리엄 캘리라는 26살의 젊은 미군이 109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살해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할 생각이었습니다. 2015년 시모어 허쉬는 ‘민주주의 지금 당장 필요해(Democracy Now)!’에도 나와서 미라이 학살 당시 미국 군인들이 어떠한 짓을 자행했는지를 얘기했습니다.
* 저명한 기자로 올해(2023년) 2월에는 노드스트림 폭파가 미국의 계획임을 폭로하기도 했다.(역주)
(2015년 당시 시모어 허쉬의 인터뷰로 화면이 전환된다.)
시모어 허쉬: 그날 아침, 미군들은 베트콩과 전투를 치를 것이라 생각하며 일어났습니다. 미군들은 기꺼이 전투를 치를 마음이었죠. 찰리 중대는 베트콩과의 교전에서 적군 저격병에 의해 20명이나 잃었습니다. 미군들은 철저히 앙갚음을 하고 싶었고, 현장에서 적을 본 적이 없었지만 무고한 베트남 사람들에게 응징을 가했습니다. 학살에 가담했던 미군들은 일정하게 수행된 전투 없이 대략 3~4개월 동안 베트남에서 복무했죠. 그게 바로 베트남에서 전개된 게릴라전의 방식이었고, 비록 다른 이야기지만 우리가 그 전쟁에 참전하지 말아야 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날 아침 미군들은 조국을 대표하여 살상을 자행하고 죽을 준비를 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명예를 위해서이기도 했습니다. 미군들은 착륙했고, 당신이 요리를 하듯이 아침식사를 위해 밥을 데우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일을 하고 있던 여성과 아침밥을 기다리는 아이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미군들은 베트남 민간인들을 도랑에 몰아넣고 마구잡이로 처형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모어 허쉬: 켈리중위의 중대, 그러니까 켈리 중위는 소대 이상의 병력을 이끌었습니다. 3개 소대가 미라이 지역으로 갔고, 민간인들을 모아놓은 다음에 도랑으로 몰아넣었죠. 미라이에 갔던 또 다른 중대는 그냥 따라 갔는데, 사람들도 모아 놓지도 않았으며, 마을에 있는 집 사이로 다니며 민간인들을 죽이고 여성들을 강간하며, 사살된 시신들을 훼손시켰습니다. 이 중대는 마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도망가서 모습을 감추거나 죽을 때까지 이러한 짓을 지속적으로 했습니다. 그 마을에 살고 있던 민간인 500에서 600명 중에 최소 400명과 또 다른 몇몇 사람들이 그날 오후 1시까지 전부 사살됐습니다.
시모어 허쉬: 학살이 일어나고 있던 어느 시점에 바람직한 한 미군이며 한 헬리콥터의 조종사인 톰슨이 미라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목격했고, 학살 현장 근처에 자신의 헬리콥터를 착륙시켰습니다. 톰슨은 2명의 소총수로 구성된 소규모 전투 병력을 휘하에 두고 있었는데, 두 명의 소총수에게 켈리 중위를 포함한 미군들에게 총을 겨누라고 명령했습니다. 당시 켈리 중위는 미군 병사들이 대략 10명 정도 혹은 그 이상의 베트남 민간인이 있는 도랑에 수류탄을 던지고 있던 학살 과정 현장에 있었습니다. 톰슨은 자신이 소지한 총을 켈리에게 겨눈 다음 민간인을 데리고 갔고, 민간인 피해자들을 데리고 나가기 위해 몇 변의 이동을 했으며, 민간인들을 구한 뒤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습니다. 물론 톰슨은 그 일로 인해 즉시 군 내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에이미 굿먼: 이 영상은 시모어 허쉬가 ‘민주주의 지금당장 필요해!’에서 했던 인터뷰였습니다. 미라이 학살과 미군부의 미라이 학살 은폐에 대한 시모어 허쉬 기자의 보도는 미국인들이 바라보는 베트남 전쟁의 인식을 많이 바꾸게 했습니다. 허쉬는 이 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라이에서 저지른 미군의 대량 학살로 유죄 판결을 받은 군인은 윌리엄 켈리 중위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켈리 중위는 처음에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지만, 가택 연금 상태로 겨우 3년 반만 복역했습니다. 다음은 베트남 다큐멘터리인 ‘미라이에서 울려퍼지는 바이올린의 전율(The Sound of the Violin in My Lai)’에서 몇몇 부분을 제외한 뒤 편집한 영상입니다.
베트남측 다큐멘터리 나레이터: 미라이 학살이 발생한 이날 미군에서 발생한 사상자는 오직 한 명으로 광란의 학살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흑인 병사 허버트 카터(Hebert Carter)뿐이었습니다. 허버트는 자신이 발에다 스스로 총을 쏨으로써, 이 광란의 학살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허버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논밭 한가운데에 서서 우리를 향해 친근하게 손을 흔드는 베트남 노인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미군들은 그 노인에게 총을 발사하여 죽였습니다. 나는 그 마을에서 베트콩을 전혀 보지 못했으며, 불타는 오두막에서 나와 도망치는 아주 불쌍한 농부들이 미군에 의해 총에 맞고 죽는 것만 목격했습니다.”
베트남측 다큐멘터리 나레이터: 레 여사는 운이 좋았습니다. 레 여사는 학살에서 살아남은 소수 생존자 중 한 사람입니다. 여기 있는 것은 미라이 학살 당시 이 길가에서 사망한 대다수의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102명의 민간인을 기리는 추모비입니다. 하벌(Haeberle)의 신경계는 이 끔찍한 학살현장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도록 강철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갓난아기 또한 죽은 엄마의 가슴에 매달린 채 살해됐습니다. 레 여사와 레 여사의 아들은 학살에서 살아남았는데, 학살당한 3~4명의 마을주민 시신 아래 묻혀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근처에 있던 조카 쭝보(Chung Bo)는 형 쭝남(Chung Nam) 미군이 쏜 총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형 위에 누워 있었지만, 둘 다 미군에 의해 사살됐습니다.
베트남측 다큐멘터리 나레이터: 눙 여사와 난 자매 또한 학살의 생존자이긴 하나, 그들의 생존 이야기는 좀 특수한 경우였습니다. 그들은 미군 헬기 승무원인 휴 톰슨과 래리 콜번 그리고 글렌 안드레오타에 의해 구출됐습니다.
팜티눙: 우린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왜냐하면 미군들이 우릴 손으로 가리키며 헬리콥터에 대려가 태웠기 때문이죠. 제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서 그들에게 정말 고마움을 느낍니다.
팜티난: 그들은 광란의 악마처럼 사격을 했습니다. 미군들이 접근하자 전 대피소를 향해 달렸습니다. 헬리콥터가 우리 근처에 창륙했고, 헬기에 있던 미군 몇몇이 손을 흔들자, 그제야 우린 대피소 밖으로 나올 수 있었죠. 그 미군들은 우리를 배에 밀어 넣고 출발했습니다. 우린 죽은 듯이 무서웠죠. “이 미군들이 바다 한가운데에 우릴 마음대로 떨구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더군요. 그로부터 시간이 좀 흐른 뒤, 미군 헬리콥터가 착륙했고, 헬기에 있던 미군들이 우리보고 멀리 도망치라고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제야 우리가 이 학살로부터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나 할까요.
휴 톰슨: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분노를 느꼈는데, 그 분노는 학살당하는 베트남인을 향하는 것이 아닌 그날 미라이에서 미친 짓거리를 한 미군들로부터 느꼈습니다. 전 제 대원들에게 보다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해 정말 미안함을 느낍니다. 전 미군 참전용사들에게 그 날 일어났던 일에 대해 아주 강력히 유감을 느낍니다. 미라이 학살 만행은 정말 옳지 못한 흑역사였고, 그런 행위는 전쟁에도 해당될 수 없는 끔찍한 짓이었습니다. 전 지금도 이러한 비극적인 학살극이 절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에이미 굿먼: 방금 본 영상은 ‘미라이에서 울려퍼지는 바이올린의 전율(The Sound of the Violin in My Lai)’에서 퍼온 것으로 쩐반튀(Tran Van Thuy)가 다큐멘터리 감독을 맡았고, 평화운동가가 된 다른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들과 함께 오늘 미라이 현장 추모식에 있었던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 마이크 보엠(Mike Boehm)이 제작했습니다. 다음은 또 다른 미군 참전용사로 미라이 학살 50주년을 맞아 베트남을 되찾은 에릭허터(Eric Herter)의 발언입니다.
에릭 허터: 그저 ‘미안하다’라는 말만 하는 것은 베트남에서 침략 혹은 여기서 뭐라고 부르든 간에 미국에 의해 당시 자행된 일에 대한 표현으로는 적절치 않습니다. 미라이 학살은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그건 정말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이건 정말 마음을 다해 생각해 표현한다 해도 정말 진심으로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전 현재 미국인들이 그걸 인정하고 있지 않다고 봅니다.
에이미 굿먼: 방금 인터뷰는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 에릭 허터가 미라이 학살 50주년을 맞아 추모 현장에서 오늘 한 발언이었고요. 미군이 500명 이상의 베트남 여성과 아이 그리고 노인을 학살한 날짜는 1968년 3월 16일이었고, 미라이 학살 이후에도 베트남 전쟁은 또 다른 7년 동안 진행될 예정이었습니다. 몇몇 학자들의 추정은 베트남 전쟁 당시 최소 380만 명의 베트남인이 죽었고, 캄보디아에서 80만 명 이상이 죽었으며, 또 다른 100만 명이 라오스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반면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군의 전사자는 5만 8,000명이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돌아와서 오늘 미라이 학살 50주년을 기리기 위해 베트남에 간 두 명의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이자 평화운동가와의 이야기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노/정/협
이 기사를 총 240번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