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민주주의ㅡ⑩] 제4장 ‘삼권분립’과 ‘일원제’
김정호 북경대 박사/전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자문위원
제1장 중국 ‘인민대표대회’의 역사
제2장 노동자 농민의 정권인가?ㅡ 국체(國體)와 정체(政體)
제3장 민주주의 측면 (지난 호)
제4장 ‘삼권분립’과 ‘일원제’
중국의 정치제도를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삼권분립’을 실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절대 권력은 부패한다.”는 격언이 있듯이 권력이 한 부문으로 집중되다 보면 독재가 출현하기 쉽다는 논리이다. 오직 입법‧행정‧사법으로 권력이 분산되고 상호 견제할 때만 독재의 출현을 방지할 수 있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삼권분립은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절대적 조건이라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 민주주의 국가는 인민(人民)의 의지를 잘 반영하고 그에 따라 권력이 사용되어야 하는데, 삼권분립의 경우 ‘인민의 의지’를 인위적으로 분리시키고 상호 대립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인민의 의지는 이렇듯 ‘분리’될 수 있는 것일까? 둘째, 인민이 선출한 대표들은 어떤 조건에서 인민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이며, 과연 삼권분립을 통할 때만 독재의 출현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일까?
본장에선 그간의 논의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상기한 의문들에 답하도록 한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 정치제도와 사회주의 정치제도 간의 원리적 차이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길 기대한다.
1. ‘고도한 집중’의 조건은 ‘고도한 민주’이다.
민주와 집중은 대립물의 변증법적 통일 관계에 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삼권분립’을 실행하는 부르주아 정치제도에도 민주와 집중의 요소가 존재하고, ‘일원제’인 사회주의 정치제도에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존재한다. 차이점은 양자에 있어 민주와 집중이 어떤 방식으로 통일되어 있느냐에 있다. 또한 어떤 제도에서 민주와 집중이 더욱 발전하며 고도의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느냐에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치 그것들이 따로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민주와 집중은 비유하면 동전의 양면과 같다. 민주가 없으면 집중도 있을 수 없고, 집중이 없으면 민주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이 같은 이치를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민주주의가 없는 국가는 진정한 통일과 집중을 달성하지 못한다. 비록 독재정권이 단기적으로 강압적인 통일을 이룰 수는 있지만, 장기간 그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치적 억압에 억눌린 민중은 언젠가는 폭발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억압된 사회는 또한 언로가 막히고 창의와 혁신이 말살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사회발전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이런 사회는 국제경쟁에서 뒤처지고, 결국은 민중의 저항 때문에 무너지고 만다.
반대로 집중이 없는 민주주의 역시 지속될 수 없다. 수많은 사회집단과 계급‧계층이 자기주장만 할 뿐 사회적 공감대를 이루어 낼 수 없다면, 그런 사회 또한 내분에 의해 종국에는 해체되거나 국제 경쟁에서 낙후되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만약 어떤 사회가 장기간의 고도한 집중과 통일을 달성하면서 발전을 계속한다면, 그 이면에는 반드시 이를 뒷받침하는 민주주의가 존재한다고 봐야한다. 중국사회 역시도 그런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중국의 인민대표대회제도는 입법‧행정‧사법 등 국가권력이 인민대표대회를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는 전형적인 ‘일원적’ 국가 형식을 취한다. 이 같은 제도 하에서 중국은 ‘G2’라는 신조어가 말해주듯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으며, 또한 날로 그 왕성한 생명력을 더해가고 있다.
다른 한편, 지금까지 소개하였듯 중국의 민주주의 또한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인민대표대회제도로 상징되는 중국의 민주주의는 인민주권의 실현, 선거 등의 형식적 민주주의의 실천에 있어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인민과 그 대표는 심지어는 자본주의 국가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소환•파면권’을 실질적으로 향유하고 있다. 그간 한국과 서구 언론의 의도적 왜곡보도로 인해 우리가 이 같은 중국의 독특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눈에는 다소 낯설게 보이는 중국식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 그 이론적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국의 인민대표대회제도 이론은 맑스주의의 ‘의결과 집행의 통일’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871년 프랑스 노동자계급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혁명에서 승리를 거둔 후 ‘코뮨’이라는 대표기관을 통해 자본가계급의 의회를 대체했다. 파리코뮨은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노동자대중이 직접 선거로 뽑은 대표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언제든 자신들이 선출한 대표들을 소환하고 파면할 수 있었다.
파리코뮨은 입법기관이면서 또한 집행기관의 역할을 겸했다. 맑스는 이러한 권력형식을 ‘의결과 집행이 통일’된 통치모델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인민의 대표들이 의결과 집행이 통일된 권력을 직접 행사하는 것이었으며, 맑스는 그것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계급 정권의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코뮨은 의회식이 되지 말아야 하며, 응당 입법과 행정을 동시에 하는 사업기관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맑스엥겔스선집>제2권, 인민출판사 1972년판, p375, 베이징.
애석하게도 파리코뮨은 단지 70일 간만 존속했다. 그 존속 기간이 너무 짧아 노동자계급은 응당 코뮨식의 기관을 자신의 대의기관으로 삼아야 한다는 맑스의 이론은 더 이상 구체화 되지는 못했다. 이러한 파리코뮨의 전통은 이후 러시아혁명을 통해서 계승되었다. 1905년과 1917년 두 차례 혁명 과정에서 출현한 러시아 노동자계급과 근로대중이 창조한 ‘소비에트’의 경험을 평가하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의회제공화국이 아니라 (노동자대표소비에트에서 의회제공화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후퇴다), 밑으로부터 위까지 전국의 노동자와 빈농 그리고 농민 대표 소비에트로 구성되는 공화국이 필요하다.”*
* <레닌선집>제3권, 인민출판사 1972년판, p15, 베이징.
맑스와 레닌의 국가이론은 사회주의국가의 권력은 인민에게 속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보통선거의 기초위에서 조직된 인민대표기관이 인민이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최고 권력기관이 된다. 그것은 최고 입법권뿐만 아니라, 또한 최고 영도권과 다른 국가기관에 대한 최고 감독권을 지닌다. 지구상 첫 번째 사회주의국가였던 소련이 그러하였으며, 뒤이어 나타난 일련의 사회주의국가들의 국가형식 역시 모두 그러하였다. 비록 명칭과 구체적 조직형식에 있어선 다양한 차이가 있긴 하였지만, ‘의결과 집행의 통일’이라는 맑스주의의 원칙에 입각한 인민대표기관의 위상과 직능에 있어서는 대체로 일치하였다.
중국의 인민대표대회제도 또한 이 같은 원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현행 헌법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일체의 권력은 인민에게 속한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그중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전체 인민이 국가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최고의 권력기관’이라고 분명하게 규정한다. 어떤 다른 국가기관도 이 같은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에 군림하거나 동격의 지위를 갖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전국인민대표대회와 그 상무위원회가 통과시킨 법률 혹은 결의는 다른 일체의 국가기관에 대해 구속력을 가지며 반드시 준수되고 집행되어야 한다. 국가원수를 비롯한 기타 국가기관들도 모두 전인대에 책임을 지며, 사업보고를 하고 그 지도와 감독을 받는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국가에서 왜 민중은 자신의 권력을 의회에 위탁하면서도 완전히 그것을 신임하지 못한 채 행정부나 사법부를 통해서 그것을 견제해야 하는 것일까? 이 같은 불신임이야말로 ‘삼권분립’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 거기에는 상당한 역사적 배경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삼권분립 이론이 처음 등장했던 계몽주의 시기까지 되돌아가 보아야 한다.
2. ‘삼권분립’ 그 협소한 부르주아민주주의
1) 공공의지(公意)는 분할할 수 없다ㅡ루소
루소는 18세기 ‘사회계약론’을 제기했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이다. 당시 프랑스 절대왕조 하에서 볼테르나 존 로크 등 여러 종류의 ‘주권론’이 존재하였지만, 그중에서도 루소는 천부인권론과 사회계약설에 기초한 ‘인민주권론’을 주장하여 단연 시대를 앞서가는 사상가로 가장 추앙받았다. 이러한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혁명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 서구 민주주의의 이론적 뿌리로 간주된다.
루소의 인민주권론에 있어 핵심 개념은 ‘공공의지(공의, 公意)’이다. 루소는 자연 상태에 있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고립되었으며, 누구든 평등하고 자유로웠다고 간주했다. 자기애와 동정심의 본능에 복종하였으며, 탐욕과 억압이나 욕망과 교만도 없이 소박하고 단순하고 고독한 삶을 살고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 [중] 허친화 장하이빈 편집 주편집: <서양헌법사>, 베이징대 출판사 2006년판, pp. 256-257, 베이징.
하지만 자연 상태에서 생존을 위협받은 개인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공동체의 힘으로 자유를 보장받게 되었다. 본능에 따를 자유를 잃은 대신 소유를 법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새로운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렇듯 고립, 평등, 자유로운 개인으로부터 출발해서 어떻게 정치사회를 건설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루소는 개인의 권리를 전체 집단의 ‘공공의지’를 대표하는 대표에게 양도하는 계약의 체결을 통해 해결한 것으로 해석한다. 즉 “우리 모두는 자신과 그 모든 역량을 공공의지의 최고 지도하에 놓는다. 이와 함께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모든 구성원이 전체의 불가분의 일부임을 받아들인다.”*라는 것이다.
* 루소, <사회계약론>, 호조무 번역, 상무인서관 1980년판, pp24-25, 상하이.
이처럼 루소의 인민주권론에 있어서 ‘공공의지’는 핵심적인 개념인데, 루소는 이 ‘공공의지(公意)’를 개개인의 공통 이익으로, 각 개인의 개별 이익의 공유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간주하였다. 즉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합의한 공통된 인식이란 뜻이며, 이는 오늘날 ‘여론’과 비슷한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주권자인 인민이 자신의 천부인권을 일부 제약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에 위임하는 조건으로, 정부는 ‘공의’에 따라 권력을 행사할 것을 약속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인민주권론에 따르면 정부는 단순히 공의를 집행하는 집행자에 불과하게 된다.
인민주권 이론의 또 다른 중요한 관점은 주권의 ‘분할 불가론‘이다. 이는 공공의지(公意)의 성격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이다. ‘각 개인의 개별 이익의 공유 부분’으로 형성된 공의는 다시 쪼개질 수는 없는 일이다. 이처럼 공공의지의 분할 불가론은 ‘주권’ 역시도 분할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루소의 이 같은 사상은 당시 유행했던 봉건귀족과 신흥 부르주아계급이 권력을 분점 한다는 전통적인 ‘혼합정치체제’ 이론 수준을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삼권분립’ 이론에 대한 사실상의 부정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삼권분립에 의한 권력의 분할과 견제는 사실상 공공의지의 분할과 대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루소는 국가권력이 공공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공공기관의 분업체계를 갖추거나, 각국의 상황에 따라 국가권력이 서로 다른 형식을 취할 수 있다는 점까지는 부인하지 않았다.)
인민주권론의 세 번째 중요한 관점은 주권은 “양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루소의 인민주권 이론에 비추어 보면 주권은 공동체 최고의 권력으로 반드시 전 인민의 공공의지에 의해 결정되고, 이를 입법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대표에게 주권이 양도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 <서양헌법사>, p258.
이는 공공의지가 “양도될 수 없는” 성질을 갖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루소는 대표에게 주권을 이양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주권 왜곡을 경계하였는데, 이러한 이유에서 루소는 당시 영국 의회정치에 대해서 매우 냉소적이었다. 그는 “영국 인민은 의회 의원의 선거 동안만 자유롭다. 의회 의원이 선출되는 즉시 영국 인민은 노예가 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라고 풍자했다.
* https://book.interpark.com/product/BookDisplay.do?_method=detail&sc.prdNo=244788384.
자연히 루소의 인민주권 이론에 입각할 경우 ‘직접민주주의’는 가장 이상적인 정치제도가 된다. 그러나 당시 이미 국가 규모가 방대해졌던 점을 감안하여 루소는 대의제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대표는 유권자의 직접적인 감시를 받아야 하며, 주권자인 인민이 그에게 위임한 ‘공공의지‘를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그 주된 임무라고 보았다.
여기서 비록 루소는 공공의지가 어떻게 형성되는지의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루소가 말한 인민주권론에 입각할 경우 그것에 가장 근접한 국가 형식은 다름 아닌 ‘일원제(一院制)’가 된다. 왜냐하면 일원제 국가에선 인민이 직접 뽑은 대표들이 최고 권력기구인 의회를 구성함으로써 비교적 직접적으로 인민의 의사를 반영하고, 중요한 국사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행정과 사법 권력은 이 같은 의회의 결정을 충실히 집행하는 기구에 불과하게 된다. 한국의 헌법학계에서도 이 점에 대해선 유사한 해석을 내린다. 즉,
“인민주권론에 따르면 대표는 인민에 의해 통제된다. 만약 모든 인민이 모이는 것이 어렵다면 직접민주주의를 국민투표로 대체할 수도 있다. 이때는 강제위임(羁束委任)의 원리를 적용하고 당선자는 유권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정부는 대표에게 복종하고, 대표는 인민에게 복종한다. 그렇게 되면 모든 권력이 국민제안과 국민투표제(직접민주제)를 통해 항상 인민에게 복종하는 단원제 국회에 집중된 회의정체(会议政体)가 인민주권원리의 논리적인 결론이다.”*
* 성낙인,<헌법학>,법문사 2009년판, pp.126~127.
계몽사상가 대다수가 귀족적 이성주의에 머물러 있던 당시에 루소의 이 같은 이론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동시대 다른 사상가들보다 한 차원 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루소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공공의지(公意)’를 핵심으로 하는 인민주권 이론을 체계적이고 명확하게 제시한 것은 이후 정치사상계와 헌정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이와 비교할 때 ‘삼권분립’은 그 이론적 뿌리를 ‘국민주권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민주권설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부르주아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 시에예스(Sieyès)가 주장하였다. 그는 루소의 인민주권설과 격렬히 대립했다. 국민주권설의 핵심은 인민주권설과 다르게 주권이 개개의 인민이 아닌 추상적 개념인 ‘국민(nation)’에게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국민주권론은 추상적인 ‘국민’을 국가를 구성하는 ‘인민’의 상위에 위치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국민 스스로 주권을 행사할 수 없기에, 반드시 대표가 국민의 이름으로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국민주권은 직접적으로 ‘대표제’와 일치하게 된다.
* 성낙인,<헌법학>,법문사 2009년판, p125.
결과적으로, 당시 신흥 부르주아계급이 혁명에서 승리함으로써 국민주권론은 지배적인 이론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같은 국민주권론 원리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프랑스 ‘1791년 헌법’은 선거권을 인민의 고유한 권리가 아닌 일종의 ‘공무(公务)’로 간주하였으며, 이에 따라 보편선거가 아닌 ‘선거제한’의 원칙을 채택하여 선거인의 범위를 납세액에 의거해 결정하였다. 이런 점 때문에 일본 학자 스기하라 야스오는 프랑스의 ‘국민주권’의 주체는 군주나 다른 특권계급 혹은 일반 민중도 아닌 부르주아계급이라고 단정 지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국민주권설의 중요한 관점이 ‘자유위임(구속위임 금지)’ 원칙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인민주권이 주장하는 ‘강제위임(구속위임)’ 원리와 상반되는 것인데, “의원은 국민 전체를 대표하며, 그 발언과 표결은 원래 선거구의 민의에 구애받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 [중] 허지웅, “주권론의 역사궤적”,<월단법학잡지> 1997년 1호,pp26-27. <서양헌법사>, p489에서 재인용.
이 주장은 표면적으로는 선출된 대표들이 자신을 뽑아준 지역 유권자들의 협소한 이익에 구속되어 전체 국민의 이익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앞세운다.
하지만 이 원칙은 동시에 대표가 유권자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혐의를 면하기 어렵다. 그럴 경우 인민의 ‘공공의지’는 대표 개인의 ‘의지’로 바뀌어 지고, 인민주권은 ‘대표주권’으로 변질되게 된다. 이는 두말할 나위 없이 소수계급의 합법적 통치를 위한 길을 활짝 열어준 셈이 된다.
‘삼권분립설’은 이 같은 ‘국민주권설’과 내적으로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국민주권설에 입각할 경우 추상적인 ‘국민’의 의사를 앞세우기 때문에, 이 경우 자칫 대표는 유권자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독재를 할 가능성이 발생한다. 이 같은 대표의 독재를 막기 위한 장치로써 국민주권설의 제창자들이 착안한 것이 일찍이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주장했던 ‘삼권분립’ 원리를 도입하는 방안이다. 즉 입법‧행정‧사법 권력을 서로 분리시켜 상호 견제케 함으로써, 대표가 설령 유권자의 통제로부터 벗어난다 할지라도 인민을 억압하는 절대 권력으로 변모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몽테스키외가 1748년 <법의 정신>을 출판할 무렵에는 원래 이 책에서 말하는 ‘3권 분립’은 가장 중요한 행정권을 군주에게 부여하고, 입법권을 귀족에게, 사법권은 시민(부르주아지)에게 나누어 주는 정도를 상정했다. 이러한 권력분담을 통한 상호제약 중 시민(부르주아지)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가장 작았다. 이 책에서 “군주 없이 귀족 없고, 귀족 없이 군주 없다”고 적고 있는 것처럼, 군주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야말로 몽테스키외 ‘3권 분립’ 사상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세력은 당시는 귀족계급이었다.
대략 40년 후인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할 무렵 형세는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을 쓸 무렵과는 상당히 달라졌다. 새롭게 변화된 형세에서 쟁점은 군주와 귀족 간의 권력관계보다 혁명세력 내부의 평민(인민대중)과 시민계급 간의 권력관계를 조정하는 일이었다. 이처럼 변화된 형세에 맞추어 부르주아지계급은 기민하게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 이론을 자신들 주장에 접목시키고 그것을 유리하게 변용시켰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삼권분립’이론은 사실상 인민주권설을 부정하고 나타난 국민주권설과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다. 국민주권설을 따를 경우 대표가 설령 유권자의 뜻을 어길지라도 이미 선출된 대표를 소환하거나 파면할 근거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대표는 얼마든지 추상적인 ‘국민’의 뜻을 따른다는 명목을 내세워 자신을 변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인독재 혹은 절대 권력의 탄생 가능성은 국민주권설 하에서 실제적 현실성을 갖게 된다. 이 때문에 ‘삼권분립’은 이처럼 ‘국민’의 뜻을 내세워 대표가 인민 위에 군림(독재)할 가능성에 대비한 방어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인민주권설은 애초부터 삼권분립의 근거인 ‘독재권력의 출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왜냐하면 인민이 직접 선출한 ‘다수의 대표’로 최고 권력기관인 의회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생각을 해보자! 중국의 최고권력기관인 전국인민대표대회는 3000명에 가까운 대표들로 구성되는데 이들에 의한 독재가 가능한가? 좀 더 범위를 확장하면, 현재 중국의 5개 행정단위에서 선출된 인민대표대회 대표는 모두 262만3000명이며, 이들이 지방권력을 장악하고 있다(제3장 참조). 이들에 의한 독재는 가능한가?
이 제도 하에서 인민의 ‘의지’는 직접적으로 ‘국가의지’로 전환된다. 만약 여기서 대표가 자신을 선출한 인민의 뜻에 어긋난 행동을 할 경우, 인민은 즉시 그 대표를 소환하고 파면할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관련한 사례를 앞서 전인대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따라서 독재의 출현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삼권분립을 해야 할 근거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처럼 권력의 ‘분산’(삼권분립)이 아니라 ‘집중’(일원제)에 의해서 독재의 가능성이 오히려 줄어든다는 사실은 얼핏 보면 아이러니처럼 보인다.
정리하자면, 삼권분립이 인민을 진정한 주권자의 지위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은 다음 세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삼권분립은 사실상 대표의 ‘개인 의지’로 ‘공공의지’를 대체하는 것을 용인한다.
둘째, 인민이 직접 선출한 대표로 구성된 의회가 다른 국가권력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게 됨에 따라서 의회권력은 사실상 부차화 된다. 이 때문에 인민의 의사와 무관한 권력이 실질적 권력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예컨대 사법부는 대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일 경우가 많은데, 대법원장 등 사법부 수장은 보통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는 경우가 많다.
설령 행정부의 수장(대통령, 수상)을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한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통령은 일단 선출된 후에는 그가 선거공약을 어길지라도 현실적으로 파면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대통령 역시 ‘국민주권설’에 따라 자신의 의지가 국민의 뜻을 대표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 우리는 현재의 윤석열 대통령한테서 이런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그는 말끝마다 ‘국민의 뜻에 따라’ 또는 ‘국민을 위해’라는 말을 되풀이 한다.
또한 헌법에서 명문상으로는 파면권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현실에서 대통령에 대한 파면은 대단히 어렵다.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 등 복잡한 절차를 걸쳐야 하는데, 이미 국회는 유권자의 통제를 벗어난 대표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들은 순전히 당파적 이해에 따라 움직일 가능성이 크며, 따라서 이들 대표와 마찬가지로 대통령 역시 선거가 끝난 후에는 유권자들의 통제 밖에 있게 된다.
셋째, ‘삼권분리’ 이론을 따를 경우 위상이 대등한 권력끼리 서로 대립함으로써 인민의 의지(공의)는 더욱 분산되게 된다. 이럴 경우 인민은 더욱 무력해지면서, 자신이 선출한 대표의 독단을 제어할 수 있는 역량을 상실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주권의 특징 중 하나는 ‘불가분성(不可分性)’에 있다. 이는 최종적으로 ‘공공의지’ 즉 인민의 의지가 ‘단일하다’는 데 그 뿌리를 둔다. 그럼에도 이 같은 인민의 의지를 그 단순 집행자에 불과한 권력자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갈라놓을 수 있도록 방치할 경우, 결과적으로 주권자인 인민은 무력화되고 만다. 물론 국가기관 내의 분업은 필요하지만, ‘삼권분립설’은 인민의 단일 의지 하에 집행 상의 편의를 위한 ‘기술적 분업’을 ‘인민의지의 분할’로 변질시켰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실제로 삼권분립이 독재자의 출현을 결코 막아내지 못했던 사례를 우리는 무수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히틀러,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 제3세계 국가들에 있어 빈번히 발생한 쿠데타 등이 그것이다. 또 그런 정도는 아니더라도 의회와 행정부가 대립하면서 국정을 볼모로 사회 전체를 끝없는 대립과 갈등으로 몰고 가는 사례 역시도 주변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이 점은 ‘삼권분립’의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일원제’를 실행해온 사회주의 국가에서 과거 일인독재가 발생했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일원제 원칙 자체의 문제이기보다는, 그 제도가 오히려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원인이 크다.
앞서 제1장 중국의 인민대표대회의 역사에서 보았듯이, 신생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은 정치‧경제 등 사회 전 방면에 걸쳐 일정한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일종의 역사법칙에 따른 자연스런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역시도 1789년 프랑스 대혁명부터 보더라도 부르주아계급의 권력이 안정되고 민주주의제도가 정착되기까지는 최소 15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중국에서 인민대표대회제도는 문혁기간 중 거의 파괴되다시피 하였다. 그리하여 인민대표대회는 자신의 고유한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으며, 이 틈에 개인 우상화가 나타났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본격적인 개혁개방 정책이 실시되면서부터 사회주의 건설은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섰다. 인민대표대회제도 역시도 이때부터 정상적인 발전도상에 올라섰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중국사회에 확고한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앞으로 이 제도의 정착과 함께 과거와 같은 개인독재가 출현할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끝으로, 국민주권설이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협소한 선거구(지역적)의 이해를 벗어나 전체 국민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논리에 대해서 살펴보자.
인민주권설에 입각하여 대표가 선거구 주민들의 뜻을 직접 반영한다고 해서, 그들이 전국적 무대인 국회에서도 협소한 지역구의 이익만을 대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속단이다. 진정한 인민의 대표는 의회의 각 층차(중국의 경우 향‧진, 현, 시, 성, 중앙)에 걸맞게 안건을 제출하고 사안을 논의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예컨대, 전국적 사안이 논의되는 전인대에서 대표는 집행기관(국무원, 법원, 검찰청)의 사업보고를 듣고 이를 심사하며, 다음 해 사업보고와 예산안을 토론하는 등 중대한 국사를 결정해야 한다. 대표들은 또한 ‘개별 대표 의안’이나 ‘제안’을 제출할 수 있으며, 일정 수의 동의를 받으면 정식 법안을 제출할 수도 있다. 이들 제안이나 법안에는 대표 자신이 속한 선거구의 문제점과 유권자의 청원이 담겨질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단지 자신 선거구 내의 문제라면, 그 단위 인대 내에서도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 굳이 전국적 사안으로 제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전국적 사안일 경우라야 비로소 전인대 전체 회의에서 토론되고 최종적으로는 대회에서 결정 된다.(혹은 상무위원회 결정 사항으로 남겨진다.) 이렇게 볼 때 일원제 정부이거나 인민주권설에 입각한다고 해서 대표가 자신의 협소한 선거구의 이익에 갇힌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우리는 오히려 의원이 유권자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 나라에서, 차기 선거 당선을 위한 선거구 관리 차원에서 국가의 이익은 뒷전에 둔 채 갖가지 ‘뒷거래’를 하는 경우를 수없이 목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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