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노동자대회 특별호] 국내외적 누란,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노동자의 매로 세상의 불의를 쳐라!!

전쟁 같은 노동자의 삶과 죽음

분열시켜 지배하라!” 자본과 권력의 영속적 모토

모든 불평등과 불균형의 기원은 착취체제와 제국주의 체제다

비유로서의 전쟁이 아니라 실제 전쟁의 참화가 다가온다

_ 누가 과연 세계 전역에서 전쟁의 유발자고 9.19군사합의를 파기했는가?

야수 같은 미제의 실상을 은폐, 희석시키는 러시아, 중국 제국주의론

인식상의 혼란과 동요를 척결하고 올바른 실천으로 나아가자

 

전쟁 같은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를 맞는 2022년 이 순간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전쟁과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매일 같이, 매순간 삶과 죽음을 오가는 전쟁터처럼 참혹하고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듭니다.

청년들 상당수가 은행 빚에 쪼들리고 있고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 만성화된 실업으로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으며, 직장을 구하더라도 태반이 비정규직입니다. 상당수는 비좁고 열악한 주택환경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습니다.

실업과 불안정 노동이라는 실업의 한 형태인 비정규직은 개개인들의 능력과 조건 때문이 아니라 어떤 측면에서는 피할 수 없는 타고난 ‘운명’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 줌도 안 되는 자본가들과 부자들, 고관대작들의 자식들은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는 물론이고 금주택, 금주식, 금싸라기 땅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 땅의 대다수 청년들은 태어났더니 비정규직이 보편적인 노동형태가 되어 그들에게 저임금과 빈곤과 불안정 노동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를 사회적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비참한 운명을 강요하는 건 바로 자본입니다. 이 비참한 운명은 사회, 바로 이 자본주의 착취사회가 강요하는 사회적 운명이며,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를 철폐하면 사라질 과도적 운명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국가보안법으로 강제로 틀어막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숙명으로 알고 살아가며 ‘자연적 운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숙명과 같은 삶 속에서 비참하고 고통스러워도 삶을 이어가는 청년들, 청년 노동자들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10~30대의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라고 합니다. 20대 사망자 가운데 절반 정도가 자살로 비통스럽게 삶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삶이 죽음보다도 더 참기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다른 위안과 출구를 찾지 못하고 극단적인 죽음으로 자기 삶을 자기 손으로 끝장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게 자기결정권,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주적 존재가 선택하는 길인가요? 아니면 사회가 죽음으로 떠미는 타살인가요? 자살은 자살로 은폐된 간접적인 타살의 일종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보다 직접적으로 사회적 타살을 당하는 청년들, 청년 노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10대 청소년 실습생들도 연이어 일하다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구의역 김군의 끔찍한 사망, 청년 노동자 김용균의 사망에 이어, 최근 SPC그룹 계열사 SPL 경기 평택 제빵공장에서는 20대 여성 노동자가 샌드위치 소스를 만들다가 상반신이 배합기 내부 기계에 끼어 사망하는 끔찍한 일도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SPL은 책임을 은폐하고 유족을 조롱, 회유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청년들의 끔찍한 고통을 목도하고 있는 와중에 우리는 우리 눈앞에서 수백 명의 청년들과 시민들이 압사당하고 중상을 당하는 이태원 참사를 목격해야 했습니다. 이 이태원 참사에 대해 “국가는 없었다!”고들 하면서 국가와 권력의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당연한 요구입니다. 윤석열 정권은 이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묻는 초월자의 자세를 취하며 생명을 살리기 위해 눈물 나는 노력을 한 소방관들과 일선 경찰들에게 책임을 묻고 꼬리를 자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참사의 모든 한 가운데에 다른 누구도 아닌 윤석열 정권이 있습니다. 이미 참사가 나기 4시간 전부터 총 79건의 다급한 112신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다급한 목소리는 철저하게 외면당했습니다. 대다수 경찰병력은 윤석열의 경호대로 나서거나 집회를 통제, 관리, 진압하기 위해 나가있었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없었다!”는 요구는 이 참사의 한 가운데 정권이 있고, 국민을 대참사로 몰아넣은 국가의 책임을 요구하고 있는 요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국가에 대한 환상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현대사를 보면 국가가 있던 곳에서 참상과 학살극들이 벌어졌습니다. 세월호 참사 원인 역시 세월호 선박 자체의 결함과 선사의 책임, 선원들의 책임으로 몰아가려 하지만, 가족들은 이미 “세월호 참사의 진짜 원인을 밝혀야 한다”며 아직까지 진상규명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이미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 내 조사관들도 내인설이 아닌 수중 물체, 잠수함의 충돌로 참사 원인을 규정하고 있으며, 국제적인 한미해상 훈련 와중에 충돌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고 있습니다.

천안함 침몰로부터, 세월호 참사에서도 밝혀내야할 진실들이 있습니다. 아니 이미 상당부분 밝혀진 진실을 국민의힘, 민주당 같은 정치권, 언론과 (관제) 전문가들이라는 자들이 합세하여 이 진실을 뭉개고 있습니다.

국가는 없었던 것이 아니라 국가 본연의 모습이 수많은 참사를 불러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참사의 한 가운데에 국가가 있었고, 제국주의가 있습니다. 국가는 제주4.3, 여순항쟁, 4.19항쟁, 광주항쟁, 현대의 역사 고비마다 노동자 민중의 자주적인 정치적 지향과 요구를 무참하게 짓밟고 대량 살육을 자행해 오기도 했습니다.

이태원 참사도 국가권력이 정권을 비호하고 시위를 통제하는 데에는 수천 명의 병력을 투입하며 ‘직무’의 본질에 합당하게 처신하면서도 민중의 안녕과 삶을 지키는 문제는 아랑곳하지 않는 직무유기적 성격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구의역 김군, 김용균의 죽음,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들의 중대재해 사망이 일어날 때마다 “죽음의 외주화가 직접적인 원인이다”, “자본의 비용절감 때문에 노동자들이 죽었다”고 외치지만, 그 이후로도 죽음의 외주화는 계속되고 있고, 1인 승무, 1인 근무는 계속되고 있으며, 노동자들의 참혹한 중대재해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2021년에만 전국 건설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노동자가 무려 417명이나 됩니다.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마지못해 제정된 중대재해처벌법도 자본의 요구에 의해 누더기가 되었고, 일부 중대재해에 대해 책임을 묻더라도 불구속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윤석열 정권은 이 누더기법 조차도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분열시켜 지배하라!” 자본과 권력의 영속적 모토

 

그런데 권력이 세월호, 이태원 참사의 원인을 은폐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처럼, 자본가들도 자신들의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반하장으로 노조 혐오증을 조장하고, 특히 투쟁하는 노동자들한테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MZ세대 운운하며 이들에게 ‘공정과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대대적인 캠페인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조선일보를 필두로 많은 언론들이 여기에 동참하여 여론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최근 11월 10일 ‘제3회 현대차정몽구재단 미래지식 포럼’ 주최로 대대적인 온라인 토론회가 열렸는데, 이 토론 제목은 ‘기회는 누구의 몫인가’였습니다. [현대차정몽구재단]과 [조선일보 더나은미래]가 공동주최하는 토론회였습니다. 비정규직 탄압의 주범이자 ‘불법파견 범죄자’ 소리를 듣고 있는 정몽구와 극우 파쇼 신문 조선일보가 공동주최하는 토론회니 얼마나 파렴치하고 악랄하게 자본의 이해를 대변할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이들은 마치 이 땅 청년들의 대변자이며, 이 사회 모순을 해결하는 주체인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며 “더 나은 미래”를 열어가자고 선동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동원된 자본의 주구인 신재용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SK하이닉스의 ‘성과급 논란’사례를 들며 청년들의 요구를 빌어 공정과 기회를 운운하고 있습니다. 직무급, 성과급제 도입이 마치 공정하고 평등한 기회의 보장으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무성과급제 도입은 노동자 내부를 경쟁으로 분열시키고 노동자들을 평가를 독점하는 자본가들의 노예로 만듭니다. 직무성과급제 도입은 성과제도의 맨 위쪽에 위치한 극소수 노동자들한테는 유리할지로 모르지만,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자본의 비용을 줄여 총액임금을 삭감시킵니다. 게다가 성과급제 도입은 성과 결과에 따라 퇴출제와 연결되어 쉬운 해고를 가져오게 됩니다.

노동자 내부가 분열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갈라치기 한다고 해서 비정규직의 처우와 비정규직 존재가 변화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가 일부 나아지고 정규직이 된 사례가 있다면 노동자들의 피눈물 나는 투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장년을 쳐서 청년의 삶이 나아진 적도 없습니다. 중장년의 삶과 노동권의 후퇴는 청년의 조건을 후퇴시키며 필연적으로 중장년, 노년이 될 청년의 미래도 악화시킵니다.

4포, 5포, 7포는 청년들의 삶을 표현하는 조어지만 청년들의 문제는 특정한 세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체 노동자 민중의 삶이 악화 되면서 덩달아 청년들의 삶도 악화된 것입니다.

얼마 전 기아차 퇴직을 앞둔 정규직 노동자가 분신 사망했습니다. 기아차 자본과 언론들은 퇴직 뒤에도 차량 할인 혜택 정도로 자살 했다며 고인을 매도하지만, 이 분신의 본질은 노동자들을 청년과 중장년, 노년으로 갈라치기 하고, 더욱이 한 평생 이 사회 발전과 생산에 성실하게 복무한 노동자들을 비열한 이기주의자 취급하고 여기에 동조하는 일각의 흐름들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사회적 존경과 대접을 받으며 존엄해야 하는 노년의 삶도, 퇴직 이후에 죽기 전까지 비정규직 노동에 시달리거나 고독고, 병고, 빈고로 시달리다가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런데 자본은 전라도, 경상도로 지역을 분열시킨 것도 모자라 이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여성과 남성, 실업자와 비실업자들, 사업장별로, 이제는 세대를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분열시켜 지배하라!” 이것은 자본과 권력의 영속적 모토입니다. 제국주의 역시 민족들을 분열시켜 패권을 유지하고 영구적으로 지배하려 합니다.

 

“모든 불평등과 불균형”의 기원은 착취체제와 제국주의 체제다

 

사악한 정몽구 재단과 조선일보는 이들은 “경제·식량·에너지 위기가 전 세계를 덮친 가운데 기후변화, 양극화 등 사회문제는 날로 심화하고 있다. 모든 불평등과 불균형을 바로잡을 기회가 아직 남아있을까.”를 화두로 던지고 있습니다.

“경제·식량·에너지 위기가 전 세계를 덮친” 것은 마치 황사 같은 자연현상으로 덮친 것이 아닙니다. 경제위기는 바로 자본주의 과잉생산 공황의 문제입니다. 신용제도는 평소 자본주의 생산의 지렛대이고 활력소입니다. 그러나 과잉생산이 누적되고 생산물이 판매되지 않으면 기업들은 부채를 갚을 길이 없고 은행도 덩달아 대출을 줄이거나 금리를 올리고 파산 상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은행의 금리인상은 기업뿐만 아니라 개인의 부채위기를 낳아 소비를 더 위축시키게 됩니다. 이제 신용제도는 생산의 걸림돌이자 연쇄적인 파멸의 촉진자가 됩니다. 레고랜드 사태 등 부동산 시장의 위기로 표출되고 있는 한국경제의 위기 역시 신용위기로 나타나고 있지만 과잉생산 공황으로 인해 생겨난 신용위기로 이것이 과잉생산 공황을 더 부추기는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인플레이션은 양적완화라고 자본주의 경제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주로 은행과 기업을 구제, 지원하고 전쟁비용을 대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무차별 살포했기 때문에 벌어졌습니다. 미국발 고금리는 인플레이션 위기를 해결하고 달러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자기 자신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이지만, 결국 다른 나라의 자산가격 하락을 유발하고 희생양으로 삼는 제국주의 폭거입니다.

이른바 곡물 위기, 에너지 위기도 상당 부분 ‘서방’제국주의 체제가 주도하는 전쟁과 러시아에 대한 제재 때문에 초래됐습니다. 양극화는 한 쪽에서는 거대 자본가들의 독점이 강화되고 부가 자본가들의 손에 집중되고 은행이 신용을 집중시키는 반면에 바로 그 명백한 이유 때문에 다른 한 편에서는 압도적 다수의 노동자들, 민중이 실업과 빈곤, 주택, 부채 문제 등으로 고통 받고 참상을 겪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경제가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고 해서 노동자와 민중의 삶과 복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착취와 탐욕과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파괴하는 제국주의 이해에 따라 지배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불평등과 불균형을 바로잡을 기회”는 바로 자본가들의 착취체제, 제국주의자들의 지배체제를 타도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비유로서의 전쟁이 아니라 실제 전쟁의 참화가 다가온다

누가 과연 세계 전역에서 전쟁의 유발자고 9.19군사합의를 파기했는가?

 

앞에서 노동자의 삶이 전쟁과 같다고 했습니다. 야간노동과 장시간 노동과 자본의 감시와 통제 밑에서 밀도 있는 중노동을 감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이 노동은 전쟁과 같습니다. 노동자들의 삶의 현장도 연대와 단결이 아니라 분열과 경쟁을 조장하고 싸움을 부추기는 정글과도 같습니다. 중대재해는 전쟁터에서 전쟁을 치르는 병사들의 운명과도 같이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며 전쟁과 같은 노동을 비극적으로 멈추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년들과 노동자들의 사망이 아무리 처절하고 원통하고 비참해도 “전쟁과 같은”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일종의 비유입니다.

실제의 전쟁은 이 보다 수천 배 참혹하고 한반도 전체를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파멸로 몰아갑니다. 인류전체의 생사도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전후 우리 세대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전쟁의 재앙이 현실로 닥쳐오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이미 수십만이 죽고, 천만 명 이상이 난민이 되는 전쟁이 9개월 가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에서 국제적인 전쟁은 먼 유라시아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아닙니다. 이 전쟁에는 직접적인 당사자들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물론이고 미국과 나토 등 서방세계 전체가 관여하고 있습니다. 나토는 러시아를 향해 동진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시아로 동진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이 나토의 전쟁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윤석열은 나토 정상회의에 참여하여 아시아판 젤렌스키가 되고 그리하여 한국을 아시아판 우크라이나로 전쟁 참화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미국은 대만의 민주주의 운운하며 대만을 중국으로부터 분리독립시키려 기도하며 분쟁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인권 운운하며 홍콩, 대만, 신장위구르 등지에서도 마찬가지의 교활한 책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시아판 나토는 비단 한반도 전쟁뿐만이 아니라 대만과 동중국해, 러일, 중일 영토분쟁, 미국과 대만분쟁 이 모두에 자동개입하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윤석열은 집권 전부터 참수부대니 선제타격이니 하며 호전적으로 북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미제는 핵폭격기를 비롯해 수백 대의 폭격기와 항공모함을 동원해 북침전쟁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에 맞서 북에서도 연거푸 탄도미사일을 발사하고 남과 북에서 서로 해상경계선을 넘어 미사일과 포탄을 퍼붓는 아찔한 상황까지 연출되고 있습니다. 이제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긴박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 맞서 노동자들이 앞장서 전쟁반대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그런데 전쟁반대는 순진하게 평화의 염원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전쟁의 진짜 주범이 누군지, 누가 진짜 도발자고 누가 침략자인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 합니다. 노동자들은 자본과 제국주의 언론들의 보도를 무조건적으로 추종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지금 여론이라는 것이 십중팔구 저들의 이해와 요구에 맞게 각색되고 왜곡된 것이기 때문에 전면 부정하는 것이 올바른 인식을 가지는 출발점입니다. 저들 언론은 매사를 전도하고 현혹시킵니다. 국내외적으로 자본언론의 사명은 진실을 추구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진실을 조작, 은폐, 호도하는데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언제나 북(조선)은 악마고 침략자고 도발자였습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에서는 푸틴과 러시아가 도발자고 전쟁광이고 악마가 되었습니다. 반면 젤렌스키는 침략자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구국의 영웅으로 서방 세계의 추앙을 받고 있고 잔학한 나찌의 후예들과 세계에서 몰려든 극우 파시스트 지원병들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전사로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 시진핑은 현대의 폭군, 황제로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저들이 왜곡한 진실, 조장한 여론과 지배적 인식과 싸우며 역사적, 과학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노동자의 지혜와 안목을 총동원해 사태의 진짜 원인을 살펴보면 상대방을 악마로 보는 자들이 진짜 악마고 피에 굶주린 자들이라는 것을 밝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현대사에서 벌어지는 분쟁과 전쟁, 암살, 쿠데타, 정치공작에 미제가 배후에 있지 않은 적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전쟁의 진짜 도발자는 항상 인권과 민주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남의 나라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일삼았던 미국과 서방제국주의였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의 시작도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켰다고 알려진 2월 24일이 아닙니다. 멀리는 소련 사회주의 해체 이후부터 펼쳐진 나토의 동진과 러시아 고립화, 비교적 가까이는 미국이 돈을 되고 부추긴 2014년의 우크라이나에서 반러 레짐체인지(정권교체)와 극우 학살자들인 신나찌 세력들의 득세와 두 차례에 걸친 민스크 협정의 파기, 돈바스 지역의 자결권 요구에 대해 자행한 14000여 명에 달하는 인민들의 살상이 전쟁을 불러일으킨 원흉들입니다.

작금의 미국을 등에 업은 남과 북의 군사적 대치에 대해서도 저들은 북이 9.19군사합의를 파기했다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사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으며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하는 자들, 세력, 국가들이 있습니다. 이곳 한반도에서 미국의 70여년에 걸친 대북적대시 정책, 즉 북을 포위 말살시키기 위한 정치 군사적 공세와 경제재재가 고조되는 전쟁위기의 근본 원인이었습니다. 북핵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불과합니다. 미국의 핵독점과 핵패권에 대한 자위권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 북핵입니다. 원인이 사라져야 결과도 사라집니다. 미국의 핵위협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 북핵이 사라진다면 그건 강도 앞에서 무장해제를 하는 격입니다.

최근 사례만 보더라도 북은 선도적으로 핵시설 일부를 파괴한데 이어 하노이에서의 조미 정상회담에서 인민생활에 고통을 주는 부분에 대해서도 제재를 해제하면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점차적으로 비핵화 조치를 취하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조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군산복합체를 위시한 전쟁광들은 하노이 회담을 파탄으로 내몰았습니다. 대신 저들은 리비아식 운운하며 서방 제국주의에 폭격을 당하고 그 지도자였던 카다피를 참혹하게 살해하는 것으로 끝났던 리비아식 해법을 북에 일방적으로 강요했습니다.

9.19군사합의는 2018년 역사적인 4.27판문점선언에 이어 평양에서 남과 북이 체결한 ‘9월 평양공동선언’의 부속 합의서로 나왔습니다. 저들은 북이 9.19군사합의를 파기했다고 극렬하게 비난하지만, 9.19군사 합의의 모체가 됐던 판문점 선언과 평양공동선언을 파기한 게 과연 누구입니까? 미제는 한미 워킹그룹을 앞세워 사사건건 남과 북의 합의 이행을 가로막았고 여기에 굴복한 ‘소대가리’ 문재인 정권은 미국 눈치만 살피다가 남과 북의 합의를 파탄으로 내몰았습니다. 얼빠진 문재인은 한반도의 운전자이기는커녕 운전대에 손도 대지 못하고 차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이로써 북이 2020년 6월 격분하여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문재인은 남과 북 합의를 다 망쳐놓고 임기 말에 종전선언을 추진한다고 발표했으나 이는 남북선언 파탄의 책임을 은폐, 모면하기 위한 기만적인 정치쇼에 불과했습니다.

남과 북 사이에 체결한 역사적인 판문점 선언과 평양공동 선언의 핵심정신은 남과 북의 자주권입니다. 외세의 간섭 없이 우리민족끼리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자는 자결권입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고작 몇 년 전에 우리 눈앞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시치미를 떼고 9.19군사합의 파기니 하며 세상의 눈을 속이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은 영국에 이어 세계패권을 차지한 이래 전 세계 경찰을 자처하며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파괴와 학살을 일삼고 내정에 개입하고 인권을 유린해 왔습니다. 우리는 제국주의 반대를 소리 높여 외쳐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제국주의입니까? 누가 우리가 맞서 싸워야할 적들입니까?

미제는 미국의 강도적 패권을 위협하는 중국을 반대하여 자신들의 영구적 패권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반공 기치 하에 대만 국민당 장제스와 같은 반동 파쇼분자들을 수십 년간 옹호하고 중국과 대만의 민족적 통일과 평화를 상징하는 일국양제를 사실상 부정하고 중국을 사사건건 자극하는 것이 미국입니다. 미국은 이제는 대만을 부추겨 대만의 분리독립을 통해 중국을 약화, 해체시키려고 합니다.

 

야수 같은 미제의 실상을 은폐, 희석시키는 러시아, 중국 제국주의론

인식상의 혼란과 동요를 척결하고 올바른 실천으로 나아가자

 

전쟁반대 목소리가 전쟁의 진짜 원흉, 배후를 규명하지 않으면 공허할뿐더러 심지어 그 범죄자들의 책동에 놀아나게 됩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침략 학살극을 자행해 온 미제와 나토 제국주의, 전쟁하는 국가가 되고 있는 일제와 팔레스타인인의 독립을 막고 학살하는 시오니즘 이스라엘이야말로 제국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아주 혼란스럽습니다. 근자에 와서는 진보진영 내에서조차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도 제국주의로 규정하고 미중 패권주의 반대, 미러 패권주의 반대로 돌려 제국주의 만행을 은폐, 희석, 전가시키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야수와 같은 진짜 제국주의자들의 이해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한반도에서는 미제를 위시로 한 제국주의 전쟁 책동은 미일한 동맹과 그 반대편의 조중러 동맹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러시아, 중국이 제국주의라면 북은 미제국주의에 맞서 중국, 러시아와 손잡고 다른 제국주의를 불러들이고 있다는 말입니까?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과연 미일한 동맹이 침략적입니까? 조중러 동맹이 침략적입니까? 이 동맹 사이에서 양비론과 중립성을 자처하는 것이 과연 계급적 관점입니까? 계급의식 말살적 관점입니까?

최근 북의 군사적 위협에 맞선다는 명목으로 동해에서 자위대까지 참여하는 한미일 합동 군사훈련이 전개됐습니다. 최근에는 욱일기 모양의 자위대 깃발에 경례까지 했습니다. 이에 대해 민주당에서는 한미동맹만 있으면 충분한데 자위대를 끌어들였다고 윤석열 정권과 국민의힘을 비난했습니다. 제국주의 일본 군대가 다시 공공연하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도 한일 동맹의 배후에는 언제나 한미동맹이 버티고 있습니다. 한일군사정보협정을 연장케 한 것도 미국이고, 강제징용,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같은 역사왜곡에 맞서 싸우지 말고 일본과 화해협력하라고 압력을 넣고 있는 것도 미국입니다.

미국의 관리와 통제 하에서라는 조건이 있지만, 일본의 패전 이후에 전쟁하는 국가로 부활시켜 세계 패권을 관철시키려는 것이 미국의 전략이었습니다. 미국은 자위대를 끌어들인 주범이고 한미동맹은 한미일동맹과 순망치한의 관계에 있습니다.

탄소 중립, 기후위기에 있어서도 자연적 중립이 아니라 자본주의, 미제국주의를 규탄하고 싸워야 하듯이, 핵문제, 전쟁문제에서도 원흉은 미제를 위시로 하는 제국주의 체제입니다.

노동자는 노동자의 눈으로, 노동자의 과학적, 역사적 인식대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노동자의 인식의 통일을 가로막는 혼란과 동요를 척결하고 인식의 통일을 이뤄야 합니다. 인식의 통일에서 올바른 실천의 통일로 나아가야 합니다.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노동자의 매로 세상의 불의를 쳐서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과학적 인식에 목말라 진리를 갈구하며 실천했던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2022년에 철저하게 계승하는 것입니다. 전쟁을 막고 전쟁과 같은 노동자 민중의 삶을 누란의 위기로부터 구하는 것입니다. 노/정/협

이 기사를 총 396번 보았습니다.

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