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고전읽기] 《동맹에 보내는 중앙위원회의 1850년 3월의 호소》(맑스/엥겔스) “노동자들의 전투 구호는 영속 혁명입니다”

일시: 2022년 10월 25일(화) 19시

* 세미나는 격주 화요일에 합니다.

* 직접 참여하기 어려운 동지들을 위해 온라인 세미나를 같이 합니다. 온라인으로 참여하실 분들은 안내 전화로 참여 의사를 밝히면 온라인 세미나 링크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참가 문의: 010-3398-0248

 

우리는 맑스의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중 그 두 번째 저작인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을 하기 전에 맑스/엥겔스의 《동맹에 보내는 중앙위원회의 1850년 3월의 호소》를 공부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동맹은 [공산주의자동맹]을 말합니다.

《호소》는 짧은 글이지만 프롤레타리아 당, 계급운동의 정치적 ‘자주성’, ‘독자성’ 같은 지극히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이 문서는 봉건세력에 맞서는 투쟁에 있어서 소부르주아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이 원칙적인 태도인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맑스와 엥겔스가 취한 입장은 모든 상황에 다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지만, 계급운동, 진보운동, 당운동의 전진을 위해 취해야할 일반적 원칙은 지금도 우리가 특별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계급운동, 진보운동이 정치적 독자성, 자주성을 가져야 한다는 명제는 지금 우리에게도 지극히 중요한 현실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맑스와 엥겔스는 정치적 자주성, 독자성이라는 것을 공동행동을 부정하는 것이라고는 결코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칼 마르크스 전기》(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비록 프롤레타리아트가 쁘띠부르조아 층과 경계를 그을 것을 제안하긴 했지만, 그들에게는 어떤 분파주의적 행위도 낯선 것이었기 때문에 결코 그들은 투쟁의 특정 단계에서 노동자와 쁘띠 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의 공동 활동이 지니는 의의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편지(호소)’에서, 프롤레타리아 당은 반혁명 세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자들과 한시적으로 동맹이나 블록을 형성해도 좋으나, 그럴 경우 독자성을 확보하고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에게 얽매이지 않는 혁명적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맑스와 엥겔스는 당시 독일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당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그들의 계급적 본질로부터 다음과 같은 원칙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당파에 대한 혁명적 노동자 당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혁명적 노동자 당은 자신이 전복하고자 하는 분파에 대항할 때에는 이들 민주주의 당파와 공동보조를 취한다. 이들 민주주의 당파가 전진을 멈출 때 언제나 이들 민주주의 당파에 반대한다.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사회 전체를 변혁할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사회 상태가 변화되어 현존 사회가 가능한 한 자기들이 견딜 만하고 살기 편하게 되는 것을 갈망한다.”

봉건제에 맞서 싸우는 투쟁에서 소부르주아 분파들은 자신들의 이해가 충족되면 투쟁을 멈추고 이들이 권력자들이 되었을 때는 노동자계급의 전진을 막고 심지어 노동자들의 혁명투쟁을 진압하고 노동자들을 학살하기도 합니다. 이는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과 노동자계급의 6월 봉기에서 여실히 드러난 바 있고, 이는 뼈저린 교훈이 되었습니다. 독일에서도 당시까지 권력을 잡지는 못했지만 소부르주아들이 보이는 태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로부터 맑스와 엥겔스는 “영속혁명”이라는 전략적 과제를 제시합니다. 트로츠키가 일국에서의 혁명의 건설과 세계혁명, 국제주의를 대립시키며 “영속혁명”을 심각하게 왜곡시켰지만, 이는 맑스와 엥겔스, 레닌, 스탈린이 제시한 혁명의 원칙이자 목표입니다. 이는 중단 없는 혁명, 계속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들은 기껏해야 상술한 요청들을 실현한 정도에서 되도록 빨리 혁명을 결말짓고자 한다. 반면에 우리의 이익과 과제는 모든 크고 작은 유산 계급들이 지배적 지위에서 배제될 때까지, 프롤레타리아가 국가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프롤레타리아들의 연합이 한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지배적인 나라들에서 충분히 발전하여 이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들 사이의 경쟁이 종식되고 적어도 결정적인 생산력들이 프롤레타리아의 수중에 집중될 때까지 혁명이 영속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적 소유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없애 버리는 것이고, 계급대립들을 얼버무리는 것이 아니라 계급들을 폐지하는 것이며, 현존하는 사회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영속혁명”의 관점에서 소부르주아 세력에 대해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취해야할 태도를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수한 이해를 은폐하는 일반적인 사회 민주주의적 문구들이 횡행하는 당 조직, 그들이 아끼는 평화를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타의 요구들은 제기하지 말아야할 그러한 당 조직으로 노동자들을 밀어 넣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한 연합은 오직 그들에게만 이롭고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전적으로 해로운 결과를 낳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들는 어렵사리 얻은 자신의 독자적인 지위를 상실할 것이며 또다시 공식적 부르주아 민주주의파의 부속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연합은 아주 단호히 거부되어야 한다. 노동자들, 특히 동맹은 박수갈채를 보내는 합창단이 되어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에게 봉사하는 처지로 전락할 것이 아니라, 공식적 민주주의자들과 나란히 서서 비밀조직이든 공개조직이든 간에 노동자 당의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고 각 소조가 노동자 결사들의 중심점과 핵심이 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해야 한다.”

심지어 혁명적 “흥분을 최대한 오래 지속시켜야 한다. 이른바 과도한 행동, 즉 증오하는 개인이나 증오심밖에 불러일으키지 않는 공공건물에 대한 인민들의 복수 같은 사례들을 막아 서기 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사례들을 허용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지도권 자체를 손에 넣어야 한다”며 오늘날 맑스주의를 비폭력 평화주의, 휴머니즘 사상 정도로 왜곡시키는 소부르주아 평화주의자들이 들으면 화들짝놀랄만한 ‘극단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지도권 자체를 손에 넣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맑스와 엥겔스의 이 주장은 한 평생을 지주와 자본가들, 제국주의자들에게 억압당해 온 노동자 농민 등 기층 피억압 계급, 피억압 민족의 인민들의 불타는 복수심이 혁명 과정에서 극단적으로 표출되기도 했고 이에 대해 혁명적 당들이 실제로 고민하기도 했던 문제이기도 합니다.

맑스와 엥겔스의 “호소”는 당시의 공산주의자 동맹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170년이 넘는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 진보운동, 계급운동에게 지극히 중대한 교훈을 줍니다.

이는 특히 “비판적 지지”라는 명목으로 운동의 독자성, 자주성을 상실하고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소부르주아가 아니다.)의 한 분파에게 끊임없이 종속되어 자신의 독자적, 자주적인 정치적 입장을 약화, 혼란시키는 흐름이 운동의 독자적 전진을 막고 그로써 반민족, 반민중적인 부르주아 양당 체제를 지속시키고 있는 우리에게 중대한 경고이자 교훈입니다.

물론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맑스와 엥겔스는 특정한 시기, 특정한 국면에서 공동행동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제기했습니다. 공동전선으로 표현하든 통일전선으로 표현하든 더 큰 적에 맞서 적들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을 결집시키고, 적들을 고립시키고 아군을 최대한 확보하는 운동의 기본적 원칙이자 특정한 전술이기도 합니다. 맑스와 엥겔스가 경고한 “연합”은 운동의 독자적 원칙을 상실한 “이러한 연합”이지 “연합”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맑스와 엥겔스는 선거에서도 이러한 원칙들, 전술들이 제시되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이는 “사표론”을 제시하여 ‘진보’, ‘노동자’ 후보에게 끊임없이 사퇴압박을 하고, 여기에 강박되어 독자성을 상실하고 자신의 선명한 요구를 내걸기를 주저하는 우리의 ‘진보’운동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해당됩니다.

“Ⅰ. 지방 당국과 정부 위원들의 술책과 구실에 의해 노동자들이 배제되는 경우가 결코 없도록 할 것.

Ⅱ. 모든 곳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파 입후보자들과 나란히 노동자 입후보자들을 내세울 것. 후보자는 가능한 한 동맹원들 가운데서 내세우고 모든 가능한 수단을 다 동원하여 그들이 당선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노동자 입후보자가 당선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 할지라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입후보자를 내세워야 한다.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자신들의 역량을 가늠하며 자신들의 혁명적 입장과 자신들의 당의 관점을 공공연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이때 노동자들은 예를 들어, 그렇게 하면 민주주의 당파를 분열시키며 반동에게 승리의 가능성을 줄지 모른다고 하는 민주주의자들의 허튼소리에 농락당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모든 공문구들은 결국 프롤레타리아를 기만하기 위해서 하는 소리들이다. 그러한 독자적인 진출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당이 이루게 되는 진전은 몇 명의 반동분자들이 대의 기관에 들어감으로써 생길 수 있는 불이익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만일 민주주의파가 처음부터 단호하게 테러리즘으로 반동에 맞섰다면, 선거에서 반동배가 끼칠 영향력이란 이미 애초부터 절멸되어 있을 것이다.”

1850년의 “민주주의 당파를 분열시키며 반동에게 승리의 가능성을 줄지 모른다고 하는 민주주의자들의 허튼소리”는 21세기도 계속되고 있으며, 그 허튼소리에 지금도 “농락당”하고 있기도 합니다. 게다가 오늘날 민주당파들은 민주주의 당파가 아니라 국내외 지배계급을 수호하는 양대 지주들 중 한 세력입니다.

민주당이 “처음부터 단호하게”, 국민의힘에 맞섰다면, 오늘날 극우 파쇼적인 윤석열 정권은 들어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윤석열 정권은 바로 민주당과 문재인 정권이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물론 민주당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기층 세력들은 구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문재인 집권 초기 4.27선언 국면에서 민족문제, 민족자결의 관점에서 일시적인, 조건부의 상층 통일전선을 배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것이 평화협정 체결 및 미군철수, 국가보안법 폐기, 한미일 동맹 반대라는 운동의 독자적 요구를 소홀히 하는 것으로 나타나서는 안 될 문제였습니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말한다면,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이 권력을 잡은 시점에 국민의힘을 주된 투쟁 대상으로 간주하고 집권 세력과의 투쟁을 회피하는 것은 심각한 우경화이고, 문재인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이 시점에까지 민주당을 주된 투쟁 대상으로 돌리는 것은 명백한 좌편향입니다. 여기에 더해 문재인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윤석열 정권을 지지하고 윤석열 정권에 기대를 품는 것은 극단적인 우경화입니다. [사회진보연대]와 [학생행진]의 교훈이면 충분합니다.

맑스와 엥겔스가 제시하는 원칙은 오늘날까지 적용되는 원칙이지만 기본적 원칙입니다. 통일전선의 원칙과 전략 및 전술은 다시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 코민테른 7차 당대회에서 유명한 ‘디미트로프 테제’를 보면서 구체적으로 다시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맑스와 엥겔스는 “호소”에서도 21세기 우리 사회의 (범)무정부주의자들에게 직접적인 교훈이 될 만한 입장을 제시합니다.

“노동자들은 … 단일한 불가분의 독일 공화국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공화국 내에서도 권력을 국가 권력의 수중에 아주 철저하게 집중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지역들의 자유니 자치니 하는 민주주의자들의 요설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1793년 프랑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독일에서도 아주 엄격한 중앙 집권화를 실현하는 것이 진정한 혁명적 당의 임무이다.”

물론 엥겔스는 1885년 단 주에서 “지방적이고 지역적인 자치가 정치적이고 국민적인 중앙 집권과 모순되지 않듯이”라며, 자치와 중앙집권을 통일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중단 없는 혁명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노동자들의 전투 구호는 영속 혁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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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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