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사] 우리는 20세기 페테르부르크가 아닌, 21세기 이 땅에서 혁명을 하려고 한다!

2022년 4월 30일

 

《민족과 계급》은 두 개의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은 전체 제목이기도 한 <민족과 계급>이고, 2편은 <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이다. <민족과 계급>은 변혁, 그것도 분단사회인 한국사회 변혁의 특수한 성격의 문제다. <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은 <민족과 계급>의 연장선으로, 변혁적 인식과 실천적 전망을 가로막는 진보진영 내부에 침투한 오열(五列)과 오열적 인식, 즉 정치적 기회주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레닌은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기대하는 사람은 평생 혁명을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혁명의 특수성의 문제다. 변혁의 보편적 특성과 함께 특수한 성격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러시아 혁명은 국가권력의 타도와 그 타도된 자리에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를 세우는 혁명의 보편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상부구조가 봉건 황제 체제와 군주제적 ‘제국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발전(서구에 비해서는 저발전, 금융적으로는 외국(특히 프랑스))에 종속된 상태였다. 또한 노동자들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농민 비중이 압도적으로 차지하는 가운데, 노동자·민중의 고통이 가중(한 편으로는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으로 다른 한 편으로는 지체 속에서 이중적 고통)되었고, 마침내 제국주의 체제의 가장 약한 고리를 끊고 혁명에 성공했다. 그것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라는 두 단계를 거쳐 성공했다. 소비에트 체제는 러시아에서 나타난 특수한 봉기 체제이자 대중국가 형성의 근간이 되었다.

중국혁명 역시 권력을 획득하는 혁명의 보편적 문제가 있다. 중국은 제국주의(일본제국주의를 비롯해 조차지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의 반식민지였고, 러시아보다도 압도적인 농민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혁명은 프롤레타리아가 영도하지만, 농민군이 압도적인 조건 속에서 대장정이라는 독특한 근거지 이동으로 혁명의 거점을 활용하며 이루어졌다. 봉건모순과 식민지 모순이 중첩되는 가운데 반봉건에서 반일항쟁으로 주요모순의 변화가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일본제국주의와 투쟁하면서 국민당과 두 차례나 반일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다. 국민당이 일제와의 항쟁은 피하면서 공산당을 주적으로 간주하고 공세를 취할 때, 공산당은 반일항쟁의 주도자로 민중의 바다 속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며 민심을 획득하여 중국혁명을 성공시켰다.

러시아와 중국혁명처럼, 한국 사회변혁에서도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가 있다. 한국에서의 변혁 역시 “혁명의 근본문제는 국가권력의 문제임을 인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여전히 이 문제를 간과하는 개량주의, 청산주의가 대세가 되어 있다. 그러나 러시아식 혁명을 그대로 모방하는 교조주의의 문제도 일부 나타나고 있는데, 우리사회의 구체적 조건과 실정에 맞는 변혁전망을 마련하기 위해서 이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사회는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다. 이는 한국사회 변혁의 보편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여전히 미제국주의가 ‘점령군’으로 있는 자본주의 사회이며 분단사회다. 이북에는 사회주의 체제가, 이남에는 친미반공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이는 한국사회 변혁의 특수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한국사회에는 민족문제 해결과 국가보안법 철폐와 같은 민주주의적 요구, 노동자들의 권리 쟁취와 같은 요구들이 당면 과제로 남아있다. 한국사회에는 분단모순과 계급모순이 중첩되어 있다. 이 중첩된 문제들을 통일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통해 통일단결된 하나의 전투적 대중정당을 건설하여 각 시기마다 힘을 배분하고 적절하게 배치하여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통일단결된 전투정당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사상적 지표가 필요하다. 청산주의, 좌·우익 기회주의, 소부르주아 사상을 넘어 맑스-레닌주의의 혁명적 사상을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맑스-레닌주의의 혁명적 사상을 강화한다는 것이 이를 교조적으로 인식, 적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맑스-레닌주의는 도그마가 아니라 부단히 발전시키고, 창조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사상이다.

맑스-레닌주의의 현대화와 토착화가 가장 중요하다. 맑스-레닌주의의 교조화는 지금까지 맑스-레닌주의 원칙을 고수·강화하는 것이 중대한 과제인 관계로,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서서히 맑스-레닌주의 교조화가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맑스-레닌주의의 교조화는 우리사회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과 경험을 무시하고 러시아 혁명의 경험과 교훈을 그대로 적용하려는 시도다. 소련에 대해서는 인식하려고 하면서, 정작 같은 민족인 이북에 대해서는 국가보안법을 핑계로 인식하지 않고 회피하려는 흐름이다. 우리는 20세기,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21세기에, 우리가 발 딛고 숨 쉬고 있는 분단된 반도 이남에서 혁명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민족과 계급》은 맑스-레닌주의를 교조적으로 적용하고 러시아식 혁명을 모방하려는 교조주의 세력과의 논쟁이자, 이를 통해 변혁의 특수한 경로를 밝히려는 투쟁이다. 변혁의 특수한 경로를 개척하는 분단문제와 통일문제는 1948년 단정(단독정부)·단선(단독선거)에 맞서 통일조국 건설을 열망했던 민중의 요구와 해방의 전망을 21세기 역사적 상황 속에서 계승·발전시키고, 이남에서 변혁의 경로를 마련하는 문제다.

질적으로 서로 다른 모순은 질적으로 서로 다른 방법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무산계급과 자산계급과의 모순은 사회주의 혁명의 방법으로 해결하며, 인민대중과 봉건제도와의 모순은 민주주의 혁명방법으로 해결하며, 식민지와 제국주의 모순은 민족혁명전쟁의 방법으로 해결하며, 사회주의에서 노동계급과 농민계급과의 모순은 농업집단화와 농업기계화의 방법으로 해결하며, 공산당 내의 모순은 비판과 자기비판의 방법으로 해결하며, 사회와 자연과의 모순은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과정이 변화하여 낡은 과정과 낡은 모순이 없어지고 새로운 과정과 새로운 모순이 발생하면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도 따라서 다르게 된다.

마오쩌둥의 이 주장은 모순의 특수성을 의미한다. ‘민족문제’ 해결을 주장하면서 “질적으로 서로 다른 방법”인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혁명”을 주장하면 모순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해결하지도 못하게 된다. 심지어 마오는 “서로 다른 모순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해결한다는 이것은 맑스-레닌주의자들이 엄격히 준수해야 할 원칙이다.”라며, “자기들이 철칙이라고 하는 공식을 어디에나 천편일률적으로 억지로 틀에 맞추기만 하면,” “혁명을 좌절시키거나, 또는 원래 잘 되어오던 일을 망쳐버릴 따름이다.”라고 비판했다.

민족문제는 남과 북의 민족분단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다시 민족의 대단결을 통한 통일 추구와, 그 통일을 가로막는 미제와 국내 반민족분단 고착세력에 대한 투쟁을 중심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분단이 휴전협정에 불과한 전쟁의 연장인 정전협정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로 해결되어야 한다. 평화협정 체결의 방해자인 미제를 축출해야 한다. 평화협정 체결은 남북 간 대립으로 생기는 긴장을 완화함으로써 국가보안법에 기반을 둔 통치 체제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게 된다.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약화시키고, 국가보안법을 철폐하여 우리사회를 보다 민주적으로 변화시키고, 변혁의 토대 및 조건을 구축해야 한다.

‘우리민족끼리’ 자주통일을 하자는 것은 통일을 가로막는 외세, 즉 미제국주의를 반대·척결하고, 남과 북이 자주적으로 통일하자는 민족문제 해결의 요체인 동시에 광범위한 통일전선의 문제다.

이 요구를 노사협조주의로 반대하고 심지어 ‘범죄’라고 인식하는 것은 한평생 국가보안법 탄압을 당하면서도 민족문제 해결에 헌신하고 있는 분들과 단체에 대한 극단적 종파주의이자, 혁명의 특수성을 부정하는 교조주의의 발로이다. ‘우리민족끼리’ 요구는 1948년 단정·단선에 맞서 싸우며 광범위한 남북연석회의를 만들었던 것처럼, 지금도 마찬가지로 광범위한 통일전선 기구가 될 수 있다.

남과 북은 같은 민족으로, 남과 북을 고립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지역적이고 분단적인 관점이다. 남북문제를 미국·일본·러시아 같은 국제관계로만 보고 그 모순을 국제주의로 푼다는 것은 민족문제를 말하면서도 그것을 사실상 도외시하고 기권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로자 룩셈부르크가 국제주의를 말하면서도 민족자결을 부정한 것처럼 공허한 국제주의로 전락하는 길이며, 민족문제의 특수한 역사성을 부정하고 계급문제 일반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선혁명론은 러시아 혁명론의 기계적 모방이다. “남쪽 내부의 계급모순을 타파하는 문제가 선차적이다.”라는 선변혁론은 남쪽 내에서 계급투쟁에 집중하여 변혁주체를 형성하고 변혁을 달성하여 이후 통일하자는 것이다. 이 주장은 남쪽 내부의 노동자계급의 ‘고유한’ 노자 간 모순에 집중하여 투쟁하고 노동자의 변혁역량을 축적·강화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의의가 있다. 그런데 이는 민족문제 해결을 근본 변혁과정에서 지렛대로 사용하려는 관점이 빠진 과거 피디(민중민주) 노선의 오류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다.

민족문제를 논하면서도 정작 민족문제 해결의 수단과 방도는 없이 실업·정리해고·노동3권 같은 오직 노동자계급의 ‘고유한’ 문제만을 취급할 수 있을 뿐이다. 미제를 축출하는 과제도 남과 북의 민족전체 과제다. 단적으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문제를 보더라도 이는 조미 간 문제이며, 남북 간 문제이기도 하다.

선변혁론과 다르게 선통일론은 분단과 통일문제를 우선·집중적으로 해결한다는 의미가 있으나, 선변혁론이 가지고 있는 변혁노선을 상실하거나 부각시키지 않는 몰계급적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반미·반제 투쟁은 국내 통치계급과의 투쟁이기도 하다. 현대제국주의는 형식적으로 현지 통치권력을 내세워 자결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위장하여 지배를 한다. 현지 통치권력과의 투쟁을 회피하면서 반제투쟁을 하는 것 역시 진보정치세력들의 자주성을 상실하고 양당체제의 부속물이 되게 하면서 우경기회주의로 경도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의 경제·정치적 권리 획득 없이는 통일운동의 주체도, 변혁운동의 핵심적 영도세력도, 전망도 마련하지 못할 것이며, 반대로 분단 통일의 전망 없이 노동자계급의 당면 문제도 해결하기 어렵고 노동자계급이 영도세력이 될 수도 없다.

변혁은 변혁을 위한 주체와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통일과정을 변혁과정과 분리시킬 수 없고, 변혁적 전망 없이 통일을 구할 수 없다. 통일적 전망 없이 변혁도 성취할 수 없다. 이 양자는 통일적인 문제로. 노동자의 제반 권리 쟁취, 평화협정 체결, 미군철수, (연합)연방제의 문제로 나타난다. 이남에서 이 과제를 추진할 수 있는 진보적 권력의 형성도 필수적이다.

민족문제 해결과 남북의 통일은 가장 높은 수준의 단결이다.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는 씨줄과 날줄의 문제다. 특히 북의 사상과 체제에 대한 인식은 국가보안법이 가리고 있는 북의 현실을 온전하게 인식하는 길이며 우리운동의 전망과 관련된 문제로 중대한 문제다.

민족을 강조하면서 계급을 외면하면 우편향이 되고, 계급을 강조하면서 민족을 도외시하면 좌편향이 된다. 일면적으로 ‘좌파’는 계급문제에만 집중하고 몰두하며, ‘자주파’는 분단 통일, 반제문제에만 집중하고 몰두하는 양자편향을 극복하고 통일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는 하나의 당 아래 통일적 인식으로 정세적 필요와 세력관계에 따라 적절히 배치할 문제다.

무엇보다도 진보진영 내부에 내면화된 국가보안법적 인식, 즉 반공·반북주의 척결이 필요하다. 북을 적대시하면서 반공이 아니라는 것은 자기최면에 불과하다. 진보진영 내부의 반공·반북주의가 상당 부분 우리운동의 분열 원인이다. 진보정치세력의 분열은 대중운동의 분열이자 노동자·민중의 분열이다. 한국사회를 변화, 개조시키겠다는 진보진영이 분열되고, 남과 북의 분단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에 대한 통일적 인식으로 통일단결된 당건설이 필요하다.

“성직자의 속임수에 굴복하지 말고 종교 마약을 제거하라!”라는 설명을 담은 소련 [Безбожник](무신론자)지의 한 포스터

 

2편 <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은 앞에서 말했듯, 정치적 기회주의에 대한 폭로이자 투쟁이다. <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은 원래 다부작 연재로 기획되었지만, 첨예한 정치적 논란을 낳으면서 연재를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은 국내외적으로 정세가 첨예해질수록 계속되어야 했다.

<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에 대한 비판과 폭로는 이른바 쿠바사태, 실은 쿠바 내에서 서방제국주의와 결탁한 세력들의 반혁명 음모를 ‘민주주의 투쟁’으로 간주하며 지지를 보내는 세력들, 반소·반북에 사로잡혀 현실사회주의를 ‘관료독재’·‘지령경제’·‘명령경제’니 하면서 당의 지도적 역할과 지도자를 부정하고, 중앙집중주의 경제를 부정하고 적대시하면서 ‘범무정부주의’적 자유주의 사상인 ‘민주사회주의론’을 유포하는 세력들, 반제를 강도 같은 미제를 위시로 한 서방제국주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를 제국주의로 보고 ‘미중패권주의,’ ‘미러패권주의’ 반대로 보는 <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의 신사조까지 다양한 세력, 영역들까지 포괄해야 했다.

한 사회의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고 하는데, 이 지배계급의 사상은 지배계급을 타파하여 이 사회를 진보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진보진영’ 내까지 깊숙하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은 진보진영 내부에 침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제국주의 프로파간다에 빠져 있는 세력들이다. 특히 분단사회에서 분단이데올로기,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는 대중들의 인식뿐만 아니라 ‘진보’ 운동진영 내에도 깊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친미숭배, 반공·반북주의 사상은 한국사회의 ‘국교’와도 같다. 그런데 이 사회의, 이 시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인 이 친미숭배-반공·반북주의 사상은 ‘진화·발전’한다. 반북 적대와 혐오는 이제 확장되어 반중혐오(시노포비아)로, 최근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계기로 반러혐오(루소포비아)로 무한 확장되고 있다.

[노동자 연대]는 대표적인 트로츠키주의 세력으로, 소련 해체에 대해 진정한 혁명을 할 때가 왔다며 환영하고 현실사회주의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이었다. 그런데 최근, 원조 <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인 [노동자 연대]도 울고 갈, 급부상하고 있는 신 <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이 있으니, 바로 [사회진보연대]다. [사회진보연대]와 그 학생조직인 [학생행진]은 심지어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을 지지하였고, [조선일보]의 칭찬까지 받은 것도 모자라, 적극적으로 기고까지 하는 데에 이르렀다.

우리는 신 <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인 [사회진보연대]의 극우적 타락상과 그 근본원인에 대해 여러 차례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들의 우경적인 타락은 소련 사회주의의 통일단결된 당을 ‘일괴암주의’ 운운하며 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비난하고, ‘사회운동’ 운운하며 ‘범무정부주의’적 사고에 빠진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사고와 사상을 논리적 극한으로 밀어간 결과로 나타났다. 그런데 한국사회 이른바 진보세력들 상당수도 실은 맹아·잠재적으로 [사회진보연대]다. 각자 경계해야 한다.

미국 주도의 세계화가 끝나면 민중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는 진보 좌파 일각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하지만 나는 오늘날의 세계화 위기는 진보의 기회보단 문명적 퇴보의 위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세계화의 최대 수혜자인 중국은 시진핑 집권 이후 세계가 수용하기 힘든 행보를 이어 가는 중이다. 기존 패권국인 미국과 신흥 패권국으로 성장하는 중국이 충돌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의 도전이 세계화의 결함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되레 세계를 이전보다 퇴보시킨다는 점이다. 독재·인권탄압·언론통제, 중국이 곧 천하라는 식의 중화민족주의 등은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현대의 지향을 역행한다. 특히 코로나19 사태 이후 그 속도가 더 빨라졌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와 경제적 블록을 형성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세계 수출의 15~20%를 차지하는 중국의 이와 같은 행보는 세계화의 근간을 무너뜨린다…

한국의 좌파는 전통적으로 반세계화에 친화적이었다. 노동자·민중의 이해란 측면에서 일견 타당한 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세계화의 결함을 해결하는 대안적 세계화 프로그램이 전제될 때만 타당하다. 세계화 자체를 ‘적’으로 삼는 반세계화 편향은 결과적으로 중국·러시아·선진국의 우파 포퓰리즘이 보여주듯, 세계화가 만들어 놓은 작은 진보마저 해체한다. 문명적 퇴보다.(한지원, “야만이 세계화를 대체할 순 없다”, 매일노동뉴스, 2022.04.28.)

한미 FTA를 비롯해 제국주의가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인 자유무역주의는 경쟁력 있는 산업에서는 자유무역의 강권을, 경쟁력 없는 영역에서는 보호무역의 장벽을 만들어 왔다. 이는 사실 총포로 무장한 겁박으로 ‘개방’을 강요한 침략을 수반했다. 그런데 이 자본의 세계화와 국제화는 내적으로는 농민에 대한 수탈과 노동자에 대한 착취였고, 외적으로는 노예노동과 식민지 약탈과 대량학살로 점철된 약탈적 자본주의 세계화였다. 이 자본주의 세계화는 제국주의 질서인데, 현대에 와서 이 패권·폭력적 질서를 추동해 온 것은 미제국주의를 우두머리로 한 서방제국주의자들이었다. 서방제국주의자들은 전 세계를 강도처럼 침략하고, 약탈하고, 파괴하고, 학살하고 있다. 미제국주의는 자기들의 침략상을 은폐하고 제국주의 패권을 지속하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를 제재하고 위협하고 있다. 조선과 쿠바, 베네수엘라 등 진보적인 정권에 대해 ‘자유’와 ‘인권,’ ‘인도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체제를 위협·고립시키고 말살하여 레짐 체인지(정권교체) 기도를 하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예의 그 전도된 인식으로 이 ‘미국식 민주주의,’ 미제국주의의 ‘세계화’보다 중국과 러시아를 더 혐오하고 적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미국식 ‘세계화’야말로 가장 극렬하고, 가장 파괴적이고, 가장 약탈적인 ‘야만’이다.

맑스가 일찍이 《자본론》에서 이 자본의 세계화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다.”라고 폭로했듯이, 이 세계화는 자본과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다. 미제국주의 중심의 일극 체제의 다극 체제로의 변화는 이곳 동아시아에서도 한미일 동맹에 맞서는 조중러 동맹으로 나타나고 있다. 과연 조중러 동맹은 ‘야만’이고, 미일한 동맹은 그보다 진보적인 세계화인가?

[사회진보연대]가 [조선일보]의 찬사를 받고, 지배계급의 이해에 적극 복무하는 것은 현실사회주의를 부정하고 반제국주의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범무정부주의’의 정치적 특성상 혁명적 전망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화의 결함을 해결하는 대안적 세계화 프로그램”은 반미·반제여야 하고, 사회혁명의 전망을 갖고 있어야 가능하다.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제국주의, 부르주아의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와 싸워야 가능하다. [사회진보연대]는 우리에게 교사다.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보여주는 반면의 교사다.

미소 양대 세력의 대결을 제국주의적 경쟁으로 보지 않는 좌파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대다수 좌파가 옛 소련을 사회주의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진보연대는 적어도 1940년대 이후의 소련은 국가자본주의라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의 경쟁은 “제국주의 대 제국주의가 맞붙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비록 사회진보연대가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은 극구 피하지만 말이다.(강동훈, “사회진보연대는 길을 잃고 있다: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진보성이 있는가”, [노동자연대] 413호, 2022-04-20)

[노동자 연대]는 [사회진보연대]가 미제국주의에 대한 반대의식이 약하다고 비판하면서, 미소의 냉전은 제국주의 대 공산주의의 대결이 아니라 “제국주의 대 제국주의가 맞붙는” 것이고, “소련은 국가자본주의”로 보는 [사회진보연대]가 이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정말 점입가경의 <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의 이전투구이지 않은가? [사회진보연대]와 [노동자 연대]는 공히 길을 잃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최근에 와서는 중국과 러시아를 제국주의로 간주하고, 반미·반제를 ‘중미패권주의’ 반대로 보는 인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의 이러한 전도된 인식은 역사성이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에서는 “반제를 ‘미중·미러패권주의’ 반대로 내거는 인식상·실천상 오류 1~3”으로 이를 집중 비판하고 있다.

1편 <민족과 계급>에서는 애초에 발표된 글 중에서 민족문제 관련 부분과 유물론에 대한 속류적 해석에 대한 비판 일부를 추가했다. <민족과 계급>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도 ‘후속편’으로 계속될 것이다. 진리추구의 과정이 항상 그렇지만, 특히 국가보안법이 버티고 있는 우리사회에서 <민족과 계급>은 완결적인 글이 아니다. 국가보안법이 험악하게 살아 있고 앞으로 더 험악하게 정세가 악화될 것이 필연적인 상황에서, 이 정치·인식적 난관을 뚫고 철저하게 왜곡·굴절된 북의 체제와 사상에 대해서 독자·과학적으로 인식하는 진리추구의 도정에 있는 글이다.

마지막으로 출판 후원을 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더불어 추천사를 써주신 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추천사를 써주신 분들 모두 형식적으로 추천사를 쓰지 않았다. 성실하게 《민족과 계급》 전체를 검토하고, 날카로운 인식으로 비평해주셨다. 추천사는 비평 형식을 빌리고 있으나, 그 자체로 각자의 세계관이 담겨 있으며 고유한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추천사가 이 책을 풍부하고 다채롭게 만들어 주었다. 노/정/협

《민족과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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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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