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에서 과학으로》(엥겔스) 2장 변증법에 대해

일시: 2022년 6월 1일(수) 19시

(이번 세미나는 사정상 오늘 수요일 합니다.)

장소: 노정협 사무실(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93-45 4층)
온오프 병행

* 세미나는 격주 화요일에 합니다.

* 직접 참여하기 어려운 동지들을 위해 영상으로도 세미나를 같이 합니다. 영상으로 참여하실 분들은 안내 전화로 참여 의사를 밝히면 초대하도록 하겠습니다.

* 지속적 참여가 어려운 분들은 부분 참여도 환영합니다.

* 지방에 계신 분들은 2인 이상의 팀을 구성하면 직접 방문해서 세미나를 같이 진행합니다.

참가 문의: 010-3398-0248

엥겔스의《공상에서 과학으로》는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은 공상적 사회주의, 2장은 변증법, 3장은 사적 유물론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서문, 특히 1892년 영문판 서문은 그 자체로 독자적 의의를 가지는 부분으로 철학사의 발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중 2장 변증법을 공부합니다.
완성된 저작은 아니지만, 《자연변증법》을 따로 저술한 엥겔스는 변증법(정확히는 유물변증법)의 대가이기도 합니다.
변증법에 대해 가장 명확하고 풍부하게 인식하려면 따로 철학해설서를 보는 것도 좋지만 가장 좋은 것은 대가들의 고전적 책을 직접 읽는 것입니다.
변증법을 가장 간략하게 정의하면 “자연과 사회, 사유의 일반적인 운동 법칙과 발전 법칙에 관한 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맑스주의에서 변증법에 반대하는 사유방식은 형이상학이라고 합니다.
엥겔스는 변증법의 기본원리는 모든 것(자연, 인류의 역사, 정신활동)을 고립과 정지 속에서가 아니라 연관과 상호작용, 운동하고 변화하며, 발생, 소멸 속에서 고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사물이 상호 연관, 침투되어 있고 서로를 제약하고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엥겔스는 “경직된 대립”을 거부합니다.
엥겔스는 “그런 것은 그런 것이고 아닌 것은 아니다. 이런 일에서 벗어난 것은 악에서 오느니라”라며 일도양단하는 사고방식을 비변증법적 사고, 즉 형이상학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레닌은 《철학노트》에서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변증법은 부정의 요소를 그것도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포함하고 있지만, 변증법에서 특징적이고 본질적인 것은 노골적인 부정, 무익한 부정, 회의적인 부정, 동요, 의혹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을 보존하는, 즉 어떠한 동요도 없는, 어떠한 절충주의도 없는, 연관의 계기로서의, 발전의 계기로서의 부정인 것이다.(레닌, 철학노트)

변증법의 방법론대로 하면 맑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조차도 노골적, 무익한, 회의적 부정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철폐하면서도 무정부주의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을 그대로 수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철폐하려는 것은 착취와 수탈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철폐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재벌해체가 급진적인 주장 같은데, 실은 재벌을 해체해서 개별기업으로 쪼개는 것은 반동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재벌은 몰수해서 사회전체의 이름(국가)으로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합리적 핵심은 보존하고 또 철폐하기도 하는 ‘지양’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도 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으면서도 상호 전제하고 있기도 합니다. 자본이 없으면 노동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가지고 자본가들은 자기들이 노동자를 먹여 살린다고 큰 소리를 치지만 이는 노동자가 없으면 자본가도 있을 수 없다는 반대의 사실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자본가들은 무위도식, 기생충 같은 존재이고 노동자들의 집단적 생산, 서비스로 자본가들을 먹여 살리고 향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가 소유한 공장과 기업이 없으면 노동자는 당장 일자리를 잃고 길거리로 쫓겨나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폐업협박, 자본철수 등으로 노동자를 협박하여 자신들의 이해를 일방적으로 관철시키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만을 본다면 이러한 공세와 협박에서 노동자들이 벗어나기 힘듭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와 자본가가 서로와 관계 맺고 제약한다는 사실로부터 노사협조주의가 배양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변증법의 원리에 따라 자본주의가 영원한 생산양식이 아니라 소멸할 수밖에 없는 과도적 생산양식으로 보면 이 상호제약은 곧바로 사라집니다. 기생충 같은 착취자들이 없어도, 오히려 없는 것이 생산과 인류발전에 커다란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본주의에서 노자관계는 대립의 측면이 절대적이고 상호관계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이와 반면에 남과 여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모순관계에 있지만 적대관계가 아닙니다. 물론 이 모순을 잘못 풀면 적대관계로 전환하기도 합니다.
대가답게 엥겔스는 2장에서 변증법의 풍부한 사례들을 쉽고 풍부하게 설명하는데 태아살인, 낙태, 생명과 죽음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러저러한 동물이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를 알고 있으며 또 확신있게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좀 더 엄밀하게 연구하여 보면 종종 그것이 매우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태아의 치사를 살인으로 인정할 수 있는 합리적 한계를 발견하느라고 헛수고를 하였던 법률가들이 잘 알고 있는 바이다.
이처럼 죽음의 순간을 확정하는 일도 역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생리학이 밝힌 바로는 죽음이라는 것은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순간적 현상이 아니라 대단히 장구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생물체는 주어진 각 순간에 바로 동일한 것이면서도 또 동일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제의 나와 동일한 인물입니까? 전면 새로운 인물입니까? 형이상학적, 형식논리학적 관점으로 보면 답이 안 나옵니다.
오늘의 나는 부단한 세포의 사멸과 형성에 따라 어제의 나에 비해 부단히 변화한 존재임에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나는 나이지 어제의 나와 전연 새로운 존재는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의 생명도 상호대립하면서도 상호침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엥겔스는 “자연은 변증법의 시금석이다”라고 했는데 자연에서 변증법의 원리가 작동하는 사례들은 무한히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철학의 기초》에서도 배우는 바이기도 합니다.
백마디 말보다는, 엥겔스의 저작을 직접 읽는 것이 변증법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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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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