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은 “내외 침공자에 대한 정의의 방어 항쟁” _ “기억이 말살당한 곳에는 역사가 없다.”(화산도 저자 김석범)
자르면 하나가 되고 안 자르면 둘이 되는 것은 무엇이냐 라는 수수게끼를 들은 적이 있는데, 38선이 답인 이 물음은 단지 비유적인 말짓기놀이가 아니라, 민중의 아주 절절한 집합적 무의식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일로, 판문점은 바로 38선의, 동서를 잇는 접점인 동시에 남북으로 갈라진 통일로를 잇는 터뜨려야 할 봇물이 가득한 둑이기도 합니다.
누가 우리나라 지도 위에 38선을 그었습니까? 동서로 뻗은 38선.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미군이 북쪽에 주둔한 소련군에게 통지를 해서 지리적으로 어림짐작으로 그어진 것이 38선의 시작입니다. 북쪽은 소련군이 일본 관동군의 무장해제, 남쪽은 미군이 일본 제17방면군 무장해제. 그 경계선이 38선입니다. 임시로 그어진 것이 오랫동안 목숨을 지탱한지 70여 년. 어떻게 하면 잘라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통일로의 남북의 접점인 판문점이 없어지면 되지 않겠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저도 통일 갈망자 중 한 사람입니다. 하나의 조국, 하나의 조선이 일제 통치하의 식민지 시대부터 고향 상실, 조국 상실의 유랑민 디아스포라의 신세. 한 나라의 국민은 국적의 뒷받침이 필요하다면, <국적>이 없는 저는 이 나라의 국민은 아니나, 삼천리강산에 존재하고 있는 한겨레의 일인인 해외 동포입니다. 해외 동포는 한겨레가 아닌가요?
통일로의 38선 분단의 교차점인 판문점에서는 미국과 북한의 병사들이 아무 말 없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70년 동안이나. 8.15이후 9월에 남쪽을 점령해 군정을 선포한 미군은 일제시대부터 지하 조직인 건국동맹 활동을 해 온 여운형 등이 참여한 조선인민공화국을 강제 해산, 11월에 한반도로 돌아온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냉대하고, 오직 한달 빠른 9월에 귀국해 국내에 아무런 정치, 경제적 발판이 없었던 이승만이 친일파 세력을 등에 없고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줍니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4개국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었습니다. 그 준비를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46년 1월부터 서울에서 열렸습니다.
한편으로 일본은 미국의 군대만이 점령을 하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일본이 4개국에 의한 분할통치(동북지방으로부터 홋카이도 땅은 소련.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 지방은 미국. 시코쿠와 쭈고쿠 지방은 영국. 수도인 도쿄는 4개국에 의한 분할 통치)가 행해질 예정이었는데, 미국의 반대로 미국 한 나라만이 점령하게 된 것입니다. 도리가 거꾸로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쁜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은 격인데, 그 벼락이 번뜩 한번만 스쳐 지나간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70여 년 동안 벼락, 우레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일정한 정치적 기반을 닦아 놓은 이승만은 미소 공위에서의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위한 신탁통치 문제 토의를 무시하고 신탁통치 반대, 남한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6월초에는 전북 정읍에서 대대적인 운동의 봉화를 올리고 미군정의 뒷받침을 받으면서 단정 수립으로 치달리게 됩니다.
1947년 5월 제2차 미소 공위가 결렬, 신탁통치안이 폐기되자, 미국은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의 조선 문제를 UN에 상정할 수 없었다는 결정을 무시해 어거지로 47년 9월 제3차 UN총회에 상정하여 남한 만의 단독 선거를 실시하도록 했습니다. 새로 8개국이 참가하여 만들어진 UN한국임시위원회가 48년 1월 남쪽만의 선거를 위한 선거 감시단을 서울에 파견했습니다. 30명의 UN 감시위원이 미군점령 하 총 인구가 약2천만 명인 남한의 선거를 감시한다는 자체가 비현실적이었습니다.
당초 UN한국임시위원회 내부에서 단선 반대 의견도 강했고, 위원장인 인도 대표 메논도 단선에 반대였는데, 메논을 찬성파로 회유하는데 이승만이 온갖 술책, 특히 미인계로 메논을 함락시켜 찬성파로 돌렸다고 합니다. 메논과 친일파 시인 모윤숙의 관계는 세상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더 두드러지게 모윤숙 자신이 회고담에 쓰고 있다는 것이 <한국현대사 산책 (2)>(강준만)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신동아>1983년 3월 호의 잊을 수 없는 메논 위원장과 나의 우정”이라는 글에서 모윤숙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의 건국과 우리의 우정은 미묘한 함수관계에 있었고, 만약 나와 메논 위원장의 우정이 없었다면 남쪽만의 선거는 어쩌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안 되었을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은 어찌 되었을까?’(<신동아>1983년 3월호. “잊을 수 없는 메논 위원장과 나의 우정”). 열렬한 친일파 시인이었던 모윤숙의 어버이같은 말씀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 정부의 정통성을 가로채고,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최초의 제노사이드 감행을 서슴지 않은 것입니다.
남북을 통해 단선 단정 반대 운동이 치열하게 확대되는 과정에서 단정 반대 남북통일을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4월 초에 <4・3> 무장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소위 <4・3> 사건. 교통사고도 사건, 이웃 사이의 폭력 싸움이 일어나도 사건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국가 권력에 의한 대학살, 대학살 사건… 편의상 쓰고 있는 것이지만 그만 두어야 할 호칭입니다. 아직 <4・3>은 정명을 못 하고 있습니다. 이름 바로 짓기, 역사 바로 세우기, 내외 침공자에 대한 정의의 방어 항쟁이 왜 이름 없는 무명비로 제주 평화공원 기념관에 떳떳한 이름을 새기지 못 한 채 아직 고요히 누워 있습니까? 이름 없는 백비에 정명을 해서 바로 세워야 합니다. 왜 70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정명을 못하고 있는가? <4・3> 역사 바로 세우기, 자리 매김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3>의 역사 자리 매김은 동시에 8.15 이후 한국 해방 공간의 역사 바로 세우기, 역사 재검토, 재심과 불가분의 과업으로 생각합니다. 해방공간 안에서 학살을 동반한 폭력행사로 세워진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을 꾸며내는데 온갖 술책이 동원되었으며, 그 중 대학살을 당하고 이승만 정부 수립의 희생양으로 바쳐진 것이 제주도입니다.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과 <4・3> 대학살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이것을 똑똑히 밝혀야 하겠습니다. 이승만 정부가 제정한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3.1 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운운으로 시작됩니다. 이승만 정부와 3.1 운동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이라는 것은 바로 중경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말인데, 이승만 정부가 임정의 법통을 계승했습니까? 3.1운동을 탄압하는 일제와 더불어 행동한 친일파, 해방 후에는 친미파로 변신한 민족 반역자들이 토대가 되어서 세워진 정부입니다.
1987년 9차 헌법 개정 전문에 처음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로 시작됩니다. 한마디 더 붙이면 불의에 항거한다는 것은 이승만에 대한 항거라는 뜻입니다. <…3.1 운동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 나라와 독립의 권리를 천명한 3.1 정신은 지금도 인류 사회와 국제 질서의 표현적인 원리로 존중되고 있습니다. 또한 상해임시정부에서 오늘의 참여 정부에 이르는 정통성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상은 2005년 제86주년 3.1절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한 담화의 첫 부분입니다. 여기에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뿌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노무현 참여정부는 당당히 그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언명이기도 합니다.
정통성 없는 이승만 정부가 국제적으로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제주도를 어린아이까지 다 포함한 빨갱이의 섬, 소련의 주구라는 구실을 붙여 철저한 멸공통일의 단독 정부를 세우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만행을 벌린 것입니다. 제주도 30만 도민이 없어져도 대한민국의 존립에는 하등의 문제가 없다. 미중앙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의 언명. 누구를 위한 대한민국인가.
15년 전 <4・3>의 55주년 당시 2003년 4월 12일 동아일보 칼럼 <기억의 부활>에 저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습니다.
“기억이 말살당한 곳에는 역사가 없다. 역사 없는 곳에는 인간의 존재가 없다. 다시 말해서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사람이 아닌 주검과도 같은 존재다.
오랫동안 기억을 말살당한 <4・3>은 한국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 입 밖에 내지 못 하는 일, 알고서도 몰라야 하는 일이었다. 하나는 막강한 권력에 의한 기억의 타살, 다른 하나는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이 스스로 기억을 망각 속에 집어 던져 죽이는 기억의 자살이었다. <4・3>문제의 올곧은 해결은 아직 멀었지만, 공권력에 의한 재평가와 아울러 진상 규명, 명예회복 사업으로 더욱 큰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지만, 한없이 죽음에 접어드는 깊은 망각 속에 얼어붙었던 기억이 지상으로 솟아나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영원히 말살당할 수 없었던 기억의 부활이자 기억의 승리다. 어처구니없는 학살은 영원히 터부로 은폐하고 놀라운 허위로 역사를 꾸며 오면서 <기억의 암살자>노릇을 해 온 지난 날 위정자들의 책임은 막중하다.”
이호철의 <남과 북 진짜 진짜 역사 읽기>에 따르면, 이승만은‘…그렇게 그 때의 <단정>수립으로부터 67년이 지난 현 정권의 저 꼬락서니의 뿌리였다는 소리도 일단은 나 리승만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도 문화도 송두리째 미국화되었다아, 나 리승만까지도 그때부터 이미 반은 미국사람이었다아…하는 소리도..,.일리가 없지 않다고 여기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가령 저승보다 천당보다 더 멀리 떠있는 딴 별에서 이승만이 뉘우친다 하더라도 본인이 뿌리가 되어 저지른 죄과는 씻어버리지 못 할 것입니다. 1948년 8월에 제정된 반민법(반민족행위특별처벌법)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으로 49년 8월에 해체됩니다. 1947년 1월부터 활동을 개시, 불과 8개월 만에 끝났으며, 그 동안 체포 408명, 기소 221명, 그러나 거의 집행유예 등으로 석방, 악독 친일 경관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도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습니다.
일제시대의 민족반역자 친일파들에 대한 재판, 해방 후 이 역사적이며 민족적인 과업을 수행 못 한 채, 반민법의 해체, 없어진 것입니다. 이제는 친일파들에게는 백주에 치매망량(魑魅魍魎)의 대로행(大路行), 대낮에 온갖 도깨비가 설치고 다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빨갱이 짓 외는 무슨 짓을 해도 무방하다는 면죄부 부여, 한국은 친일파 천국이 되었습니다. 예컨대 프랑스의 제2차 대전 후의 전후 재판, 대독일 협력자들에 대한 재판 판결은 2천명 이상의 사형, 791명의 처형, 30만 8천명의 유기, 무기의 금고형 등을 내리고 있습니다. 중국도 한간(漢奸) 재판에서 제 나름의 판결을 내리고 있습니다. 무풍지대는 한국뿐.
한국에서도 전범과 다름없는 민족반역자에 대한 재판을 그저 형식적으로 끝내고 지나간 것입니다. 이로서 친일파들의 영화영달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고마운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모신 친일파들이 뿌린 화근이 이호철 책 속의 이승만의 말대로 후대의 썩어 빠진 한국사회의 뿌리가 된 것이고, 지난 번 천만 촛불 데모로 시원히 다 없어진 박근혜 친일정권이 그 마지막 모양새, 이승만의 말로 하자면 꼬락서니였음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해방공간은 반통일, 분단의 역사 형성이기도 합니다. 이승만 정부의 가짜 정통성 꾸미기 해명과 <4・3>의 진상규명, 역사 바로 세우기는 불가분의 역사적 요구로 이제 나오고 있습니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2003) 결론에 <4・3> 학살을 국가 범죄로 규정하고 최종 책임은 미국과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다고 명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상 보고서 결정 이후 십 수 년이 경과됨에도 불구하고 국가 범죄의 책임 추구는 수수방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다시 망각 속에 사라지고 말 듯 합니다.
내년 <4・3> 은 70주년을 앞두고 <4・3> 문제와 더불어 해방 공간의 총체적인 역사 청산, 재심의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해방 공간의 역사 재심, 청산은 앞으로 남북 평화통일의 든든한 담보, 초석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남북 평화 통일의 달성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1990년 동서독일 통일에 못지않은 세계적인 평화의 보편화에 이바지 할 것입니다.
2017년 9월 17일 김석범
(서울시 은평구 제정 제1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수상 소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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