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선생의 무정부주의적 비평에 대한 비평

박노자 선생이 “반쏘 반북주의적 관점으로 사회주의가 대중화 되겠는가?”를 공유하면서 간략한 논평을 남겨 주셨다. 박노자 선생이 위 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비평을 해주신데 대해 감사드린다.
박노자 선생은 “물론 중요한 긍정적 교훈들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쏘련의 과거나 북조선의 현재는, ‘사회주의’에 관한 한 일차적으로 ‘반면 교사’에 더 가깝습니다”라고 한다.
쏘련의 과거나 북조선의 현재가 ‘사회주의’라고 작은 따옴표로 인용을 한 것으로 볼 때 사회주의가 아니었다는 것이며,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만큼 비판적인 내용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노자 선생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내용들을 보면 한국사회 대다수 ‘좌파’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무정부주의적 관점에 사로잡혀 쏘련과 조선의 사회주의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박노자 선생은 쏘련과 조선의 사회가 “그 본질상 위에서 당-국가 관료들이 노농대중들을 권위주의적으로 ‘영도’하는 시스템”으로  “당연히 ‘사회주의’는 아닙니다”라고 주장한다.
박노자 선생은 여기서 그 ‘영도'(지도라고도 한다.)가 ‘권위주의적’이어서 문제인 것인지 아니면 당과 지도자의 지도 행위 자체가 문제인지 분명하게 답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당과 지도자의 인민대중들에 대한 ‘권위주의적’ 지도가 문제였다면, 인민대중 속에서, 인민대중과 호흡하면서 제대로 된 지도를 했어야 한다고 해야 하는데 지도 자체, 권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는 당-국가는 물론 ‘국가’ 그 자체를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진정한 사회주의는 직접 생산 담당자들의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평등한 조합적 조직체고, 그런 무권력, 무서열 평등 사회로 가는 것은 결국 인류의 유일한 희망입니다.”(박노자)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는 당-국가는 물론 ‘국가’ 그 자체를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는 주장은 전형적인 무정부주의자들의 주장이다.
맑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의 흔적(모태)가 남아 있는 낮은 수준의 공산주의(사회주의)와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 두 단계로 나눴다.
전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시기로 자본주의 반혁명 분자들의 준동, 중앙집중적 경제의 운용, 인민대중의 공산주의적 의식을 강화하는 문화혁명 등을 통해 자본주의 모태와 싸우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화해야 하는 시기라고 했다. 물론 이 시기는  국가와 계급이 소멸되는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를 예비하며 국가소멸로 나아가는 반(半)국가의 시기라고도 했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는 공상주의자가 아니었기에 국가소멸로 가는 시기는 장구한 세월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계급과 국가가 소멸되는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는 언제, 어떻게 소멸될 수 있는가?
먼저 국내외적으로 반혁명 분자들의 준동이 사라져야 한다. 이 말은 국내의 반혁명 세력들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를 분쇄하기 위해 침략전을 벌이고 문화적,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치는 제국주의자들이 사라져야 한다는 말이다. 제국주의 체제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국가가 소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혁명의 현실성이 전혀 없는 공상적이고 전형적인 무정부주의의 주장이다. 그밖에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농촌과 도시의 차이와 대립도 사라져야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조건이 마련된다.
실제 맑스, 엥겔스, 레닌은 무정부주의자들이 국가소멸의 경제적, 정치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즉각적인 소멸을 주장한다고 비판했다.
유고에서 일찍이 ‘시장사회주자’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중앙집중경제를 비판하며 자치와 분산,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이미 80년 초에 실업, 외채위기, 인플레이션, 경제종속 같은 전형적인 자본주의 현상들이 나타나다가 망국과 내전의 위기를 자초했듯이, 강성했던 쏘련이 약화되고 해체되었던 것은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시절부터 평화이행이니, 전인민의 국가니, 해빙이니 하며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약화시키고 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약화시키다가 고르바초프 때 결정적으로 개혁, 개방 명목으로 공산당의 영도 포기와 다당제 도입, 국유기업의 사유화, 제국주의 문화 수용 등으로 제국주의 체제에 투항했기 때문이다.
박노자 선생이 몸소 겪었던 망국의 설움은 당이 혁명성을 상실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약화되었기 때문이지 당과 국가의 영도 때문이 아니었다.
박노자 선생은 ‘권위주의’적 영도 운운하는데 엥겔스는 “권위에 대하여”에서 권위 자체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바가 있다.

“프루동이 그리는 미래 이상 사회는 대개 노동자 자신이 자치 관리하는 기업을 경제 단위로 하여 지역·지방·국가로 연합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 프루동의 경우, 국유화가 아니라 ‘사회화’이다”(《아나키즘》, 玉川信明, 오월)

“진정한 사회주의는 직접 생산 담당자들의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평등한 조합적 조직체고, 그런 무권력, 무서열 평등 사회로 가는 것은 결국 인류의 유일한 희망입니다.”(박노자)

무정부주의의 시조격인 프루동이 그리는 이상 사회의 상과 박노자 선생이 그리는 ‘사회주의’의 상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은가.
“직접 생산 담당자들의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평등한 조합적 조직체”는 누가, 어떻게 전국적, 전 세계적으로 집중시키고 통일시키는가?
이 때 이해관계의 불일치는 누가 조정하는가? 직접 생산자들 개인, 개별이 자신들의 이해를 전 사회의 이해 보다 우선할 때 누가 공산주의적으로 전 사회의 이해를 우선시하며 이들을 설득하고 지도할 수 있는가?
맑스주의에서는 심지어 계급과 국가소멸이 되는 공산주의가 도래한다고 해도 여전히 생산과 행정의 중앙집중은 필요하다고 했다. 이 때의 국가소멸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인민대중이 구 지배계급의 잔존세력들)을 억압할 필요성도 사라지기에 국가의 본질적 성격이 사라지는 것이지 생산과 행정이 분산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쏘련은 민중들의 빠른 신분상승, 생활 개선이 가능한 방향으로 초고속 근대화를 이루어내고 지구적 탈식민화에 이바지한 사회이었지요.”(박노자)

노예처럼 억압 받고 착취 당하던 민중이 지배계급으로 ‘신분상승’하고, 당시의 물질적 수준의 한계 속에서, 실업을 근절하고 무상체제를 강화함으로써 민중의 빠른 “생활개선”이 가능한 사회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례를 따라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이 투쟁함으로써 복지와 권리를 향유하게 된 것은 쏘련의 위대한 성취 때문이 아닌가.
식민지ㆍ반식민지를 해방하는 동력을 제공하고 파시즘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지구적 탈식민화에 이바지” 한 것만 하더라도 스탈린과 쏘련인민들이 인류에 기여한 불멸의 공적이 아닌가.
박노자 선생이 무상체제의 교육 혜택을 누린 것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미제의 포위말살 공세와 싸우며 사회주의를 일궈가는 조선과 쿠바는 또 어떤가.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당과 지도자의 지도는 이민위천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으며, 민주집중제는 민주를 바탕으로 하며, 중앙집중은 인민대중의 광범위한 민주주의와 참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지도자와 인민대중, 민주와 집중, 중앙집중과 참여를 대립시키는 것은 무정부주의자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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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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