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주의 ‘전위’, 유고 시장사회주의
* 이 글은 [현장과 광장] 5호에 노동자정치신문 편집위원장 명의로 기고한 글입니다.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해체의 주된 내적 원인은 ‘민주적 사회주의자’, 실은 범무정부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치’, ‘참여’의 부족,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의 결여, ‘국가의 강화’, ‘지령경제’, ‘명령경제’ 등이 아니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사회주의 중앙집중 계획의 약화와 분산적 계획, 사적경제 및 암시장 등 이중경제를 통해 발생하는 자본주의적 시장-상품 관계의 강화, 당의 전위성 및 지도성 약화, 당 및 인민 내부의 공산주의 사상의 약화 등이었다. 외부적으로 제국주의자들의 공세와 함께, 이러한 내적 문제들은 하나로 긴밀하게 연결된 문제로 서로가 서로를 부추기면서 사회주의를 약화시켰는데, 중앙집중 계획의 약화와 분산적 계획은 부르주아적 이기주의와 혼란을 가져오고 이것이 민족별, 지역별 갈등과 대립을 부추기면서 민족문제를 대두시키기도 했다. 동유럽과 쏘련 사회주의의 해체가 사회주의적으로 통일된 민족들의 분열과 갈등, 연방탈퇴로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쏘련에서 후르시초프 수정주의 하에서 1962년 9월 쏘련 경제학자인 리베르만(Liebermann, Y.)이 제창한 리베르만 방식은 위로부터의 계획 대신에 자본주의 이윤 제도를 도입하여 생산 기준으로 삼고 이윤 크기에 따라 보상을 하는 제도였다. 이러한 정책은 후르시초프 실각 이후 1965년 9월 브레즈네프 시절에는 코시킨(kosygin) 개혁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의무적 계획지표를 30개에서 8개로 삭감하고, 생산에 관한 결정권과 이윤의 상당 부분을 기업단위에 넘기고, 당의 주도적 역할을 약화시키는 자본주의적 시장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그 수정주의의 정점에 사회주의의 결정적인 배신자였던 고르바초프의 ‘쇄신’(페레스트로이카), ‘개방’(글라스노스트) 노선이 있었다.
수정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적 요소를 강화하면서 인민들을 속이기 위해 레닌 당시 도입한 신경제정책(NEP)을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레닌 당시의 신경제정책은 제국주의 침략과 내전으로 황폐화된 생산과 경제를 복구하기 위해 취해진 불가피한 일시적 방책이었다. 그럼에도 레닌은 그것이 자본주의적 요소에 대한 일시적 후퇴이면서도 자본주의적 요소를 포위전략으로 섬멸시키는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조치로 인식했다. 레닌은 이에 따라 신경제정책을 “계급화해”가 아니라 “이권양도 투쟁의 한 형태이며 다른 형태의 계급투쟁의 연속”,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격렬하게 필사적인 투쟁”(V. I. 레닌, ≪신경제정책(NEP)론≫, <현물세 ― 신정책의 의의와 그 조건들>, 1921년 3월 말-4월 21일, 백승욱 편/해설, 새길)으로 농민과의 동맹을 강화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공고하게 하기 위한 방책이라고 강조했다. 신경제정책을 전략적 후퇴의 측면에서만 보면서 포위, 공세, 섬멸이라는 본질적인 측면을 간과하는 것은 반레닌주의적인 기회주의 노선이자 수정주의적 노선인 것이다.
그런데 쏘련에서의 이러한 수정주의는 전례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유고 시장사회주의 노선은 사회주의권 내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수정주의 노선이었다. 유고에서는 기업의 ‘자치’와 ‘자율’이라는 미명 하에 노동자 자주관리를 내세운 시장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하였다. 유고사회주의는 민족주의적, 수정주의적 경향을 이유로 1948년 6월 코민포름(국제공산주의정보기구)에서 제명됐다. 이후 유고 사회주의는 ‘사회주의로 가는 유고의 길’로 당시 스탈린 시대의 중앙집중 경제와 다른 수정주의의 길을 본격적으로 가기 시작했다. 1952년 유고에서는 노동자 자주관리와 시장 사회주의의 실험이 본격 채택되었고 후르시초프 수정주의의 등장 이후에는 더욱 더 탄력을 받고 진행되었다. 유고를 필두로 후르시초프 수정주의의 대두 이후인 1960년대 중반에는 체코슬로바키아, 1968년에는 헝가리에서 ‘시장 사회주의’ 노선이 동유럽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1980년대 들어서 실업, 외채, 인플레이션, 과잉생산, 빈부격차의 증대, 지역, 연방 간 분열의 심화 등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이 격화되자 유고에서는 다시 중앙계획의 강화 등 사회주의 계획의 요소를 도입하려는 조치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이미 자본주의 시장 요소에 포위된 유고 사회주의 내부의 모순을 극복하고 붕괴를 막기에는 불철저했고, 때가 늦었다.
1. 맑스레닌주의 국가론의 왜곡과 폐기
유고 사회주의는 맑스주의 국가론에 대한 연구를 통해 시장 사회주의의 논리적 근거를 마련하려 했다. 1948년 7월 21일에 유고 공산당 제5차 대회에서는 ‘이행기에 있어서 국가의 역할’과 ‘당과 국가의 관계’ 등 맑스주의 국가론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했다.
이 무렵 그들이 가장 중요시한 것은 맑스의 사상가운데 무산계급이 요구하는 것은 오직 ‘점차 사멸되어가는 국가’라는 것과 ‘생산자간의 자유연합’에 관한 부분이다. 그들은 이것을 과학적 사회주의의 핵심이자 실질로 간주하고, 현실 사회주의운동이 오직 이러한 방향으로 전진할 때만이 정확하게 맑스 레닌주의 원칙에 부합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맑스 레닌주의로부터 벗어난다고 보았다 …. 반드시 국가권력의 중앙집권주의에 대해 비판과 억제의 태도를 취하여 가능한 빨리 국가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사회주의 자치는 노동인민이 사회사업에 직접 참여하고 결정하는 방식을 통해 ‘당이 없는 직접사회주의 민주주의 길을 실현’하고, ‘국가의 특정 기능들이 소멸하는 길’, ‘국가의 특정 기능들을 사회자치기능으로 전화시키는 길이라고 규정하였다.(김정호 북경 인민대, 「연합노동의 좌절, 연방의 해체」, 레디앙 연재기사)
사회주의에서 당과 국가기관은 노조와 당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 결합하여야 한다. 사회주의에서도 역시 당은 노동자계급의 가장 선진화된 부위 즉 전위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고 이를 통해 국가 기구에서 주요한 위치를 담당하고 전체 사회의 균형적 발전과 전체 인민의 물질적, 문화적, 계급적 발전을 위해 사회주의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다만 국가 기구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당이 곧 국가기구로 단순히 대체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당은 국가기구와 적극 결합하되 단순히 그것에 흡수되고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기구와 각종의 대중조직을 지도하는 전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당의 국가와의 긴밀한 결합은 당이 지도단위임을 단순히 자임한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당은 사회주의 경제와 정치, 이데올로기 투쟁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국가 기구와 각종 대중기구 내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을 때 당과 국가와의 결합은 제대로 실현되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 인민들의 계급의식이 상승하고 사회주의가 발전할수록 국가 기구 내에 비당원의 비중도 점차로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당과 국가와의 결합에 있어서 관료주의적이고 인민들 위에 군림한다거나 대중들로부터 지도력을 인정받는 것을 행정적 명령이나 법령으로 대체한다거나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결합방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고에서는 당과 국가, 또는 당과 프롤레타리아 대중들과의 올바른 결합방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결합 자체를 거부하고 당과 국가를 분리시켰다. 유고는 1952년 11월 제6차 공산당 대회에서 당의 역할이 ‘지령’에서 ‘설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이유로 공산당이라는 명칭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변경하고 당의 전국중앙위원회를 폐지했다. 뿐만 아니라 “당의 전국중앙위원회를 폐지하고, 각 공화국‧자치성 공산연맹중앙위원회 통제하의 유고연맹주석단 및 그 집행국을 설립하였는데, 이로 인해 당 중앙의 집중통일적 지도력의 급속한 약화가 초래되었다.”(같은 글) 이러한 조치는 단순히 당기구의 분산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고 각 연방의 자치화라는 명목으로 국가 기구 자체를 분산화 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유고에서는 맑스가 《자본론》에서 공산주의 사회의 경제적 조직화 원리를 언급할 때 묘사했던 ‘생산자 간의 자유연합’을 유고 사회주의 생산의 조직원리로 가져가려 했다. 맑스는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을 둘러싼 생산자들의 관계가 생산자와 생산자와의 직접적 관계가 아니라 상품을 매개로 나타나고 인간이 만들어낸 상품이 자본이 되어 인간을 지배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자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결과 미지의 자연을 신으로 간주하여 종교를 만들고 자신이 만들어낸 종교를 숭배하는 물신숭배로 나타나는데 맑스는 이것을 빗대어 자본주의 상품 물신성이라고 했다. 맑스는 이 자본주의 물신성은 “인간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일상생활의 현실적 관계가 투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 비로소 소멸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맑스는 비현실적인 몽상가가 아니었다. 맑스는 이러한 ‘자유인들의 연합체’가 사회주의 건설 초기에 즉각적으로 건설될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고 길고 고통에 찬 역사적 발전수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자유인들의 연합체의 총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이 생산물의 일부는 새로운 생산수단으로 역할하여 사회에 남는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연합체 구성원에 의해 생활수단으로 소비되며, 따라서 그들 사이에 분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분배방식은 사회적 생산조직 자체의 성격에 따라, 또 생산자들의 역사적 발전수준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 사회적 생활과정[즉, 물질적 생산과정]이 자유롭게 연합한 인간들에 의한 생산으로 되고 그들의 의식적 계획적 통제 밑에 놓여지게 될 때, 비로소 그 신비의 베일이 벗겨진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회는 물질적 토대 또는 일련의 물질적 생존조건을 가져야 하는데, 이 조건 자체도 또한 하나의 길고 고통에 찬 역사적 발전의 자연발생적 산물이다.(맑스, 《자본론Ⅰ》상, 비봉출판사, 김수행 역, 101쪽-102쪽)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달리 기업들의 무정부적인 개별적 생산이 아니라 사회적 계획 하에서 생산을 계획하고 생산물을 분배한다. 사회주의에서는 개별 기업의 이윤이 목적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균형적인 발전과 인민의 풍요로운 발전을 위해 생산과 분배를 집단적인 사회적 통제 하에 둔다. 이 사회적 통제를 사전에 기획하고 주도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이다.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이전의 단계인 사회주의에서의 사회화는 핵심 기업과 금융기관의 국유화로 나타난다. 국유화는 사회적 생산의 주요한 형태이다. 이밖에 쏘련에서 사회화의 형태는 농업에서 나타난 국영농장(소프즈)과 협동조합 형태의 집단농장(콜호즈)이 있었다.
사회주의에서 대다수의 기업은 국가 소유이다. 문제는 그 국가의 성격이 대중국가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국가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국유화는 사회화의 주요한 형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 국가 내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주도성과 계급적 이해가 철저하게 관철되는 프롤레타리아적 국가의 성격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에 자본주의에서 대다수 기업은 자본의 소유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국유기업이 있지만 그것은 자본의 이해에 철저하게 복무한다. 자본주의 국유화는 자본주의 초기에 독점자본이 형성되기 이전에 철도와 항만, 도로 등 거대자본이 들어가는 부분에 국가가 직접적인 자본투자를 하여 국유화를 하고 독점자본이 형성되면 이것을 독점자본에게 매각하는 사유화로 나타난다. 철도, 도로, 항만, 전기 등 이른바 사회간접자본을 이루는 기업의 국유화를 통해 국가는 자본의 생산과 물류비용을 줄여서 사적 자본의 자본축적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또한 공황기에 국가는 부도기업을 인수하여 국유화하고 다시 국유기업이 살아나면 독점자본에 사유화하는 것으로 독점자본의 이해에 복무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국가는 대중국가가 아니라 독점자본에 종속되는 자본가 국가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에서의 국유화가 진정한 사회화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소멸이 필요하다. 국가의 소멸과 함께 대중들이 진정으로 사회의 주체가 될 때 국유기업은 진정으로 사회화된 기업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즉각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발전의 수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쏘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은 발전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라 후진적인 국가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은 더욱 더 길고 고통에 찬 역사적 발전의 과정이 필요했다.
레닌 역시 사회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급의 철폐는 오래고 곤란하고 또 집요한 계급투쟁에 의하여 수행되는 사업으로서 이 계급투쟁은 자본의 권력이 전복된 후에 부르조아 국가가 파괴된 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확립된 후에(낡은 사회주의와 낡은 사회민주주의의 속물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형태가 달라질 뿐, 많은 점에 있어서 일층 더 가열하여지는 것이다 … 계급을 폐절하기 위해서는 한 계급의, 즉 착취자들을 전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반항을 무자비하게 분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 모든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와 절연하고 자유와 평등일반에 관한 모든 시정배적 미사여구(사실에 있어서 이러한 미사여구는 맑스가 오래 전에 지적한 바와 같이 상품 소유자들의 ‘자유와 평등’,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자유와 평등’을 의미한다)와 절연할 수 있는 피억압계급 중의 한 계급의 독재의 시기가 필요하다.(레닌, 〈헝가리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인사〉,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도서출판 앎과 함, 136쪽)
이처럼 국가의 소멸을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의해 부르주아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사회주의 국가가 필요하다. 더군다나 한 국가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강화된다고 하더라도 제국주의 국가가 버티고 있는 한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강화하고 보전하기 위해서 더욱 더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고에서는 이 과정을 사회주의 건설 초기에 즉각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려 했다. 유고 사회주의는 착취자들의 저항을 제압하고,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계급의 독재라는 무기를 스스로 내던져 버렸다. 국가의 폐지라는 목표를 위해서 역설적으로 지배계급으로 무장하고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계급의 독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맑스-레닌주의 국가론이 아니라 무정부주의적인 국가론에 다름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국가의 완전한 폐지를 목표로 하지만, 국가의 사멸을 주도하는 사회주의 건설의 결과로 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에 의해 폐지된 연후에만 이 목표가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후자(무정부의자/글쓴이 주)는 국가가 폐지될 수 있는 조건을 이해하지 않으면서 일시에, 그것도 완벽하게 국가를 폐지시키려 한다 …. 무정부주의자들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국가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을 거부하가까지 하며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도 거부하고 있다.”(레닌, 《국가와 혁명》, 논장, 김영철 옮김, 139쪽-140쪽)
유고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타도했지만 “프롤레타리아트가 타도된 국가의 자리에 무엇을 채워야 하고 어떻게 혁명적 권력을 행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저 모호하고 애매한 관념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같은 글, 140쪽)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에서 국가가 소멸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노동자계급과 민중에 의한 자본가 계급에 대한 독재와 지배의 성격으로서의 계급국가의 성격이 소멸되는 것이지 일상행정과 경제의 조직화에 있어서 중심 기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유고는 사회주의 건설 초기에 당과 국가의 기능을 분산시키고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소멸을 경제와 행정의 조직화의 기능마저도 사라지는 것으로 왜곡했다. 이렇게 유고 사회주의는 맑스-레닌주의 국가론을 왜곡하고 폐기한 것처럼 사회주의 생산의 조직화도 왜곡하고 폐지시켰다.
2. 분산화와 시장의 강화가 초래한 자본주의적 모순의 첨예화
유고 사회주의는 생산의 중앙집중화를 대신하여 ‘민주화’, ‘권력분산’, ‘노동자자치’ 등의 구호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1950년 6월 26일 유고연방공화국 인민의회는 <노동자의 국영기업과 고급경제연합조직의 집체관리에 관한 기본법령>을 통과”시키고, 노동자 자주관리를 실시하게 되었다.
노동자 자치는 기업관리제도에 있어서의 일대 근본적인 변혁이다. <노동자자치 법령>이 규정한 중요한 조치사항을 보면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적절히 분리한 뒤 민주적으로 선발된 노동자 관리위원회가 기업에 대한 경영권을 행사한다. 둘째, 기업경영권 가운데서 노동자집단의 주도적 지위를 확립하고, 기존 기업경영자의 지위와 역할을 변경, 기업경영자는 노동자집단의 일개 고용원으로서 더 이상 국가기구의 파견 대리자나 기업 내 정책결정권자로서의 지위를 갖지 않는다. 셋째, 기업 내에 광범위하게 직접민주제를 실시, 기업간부와 노동자위원회 그리고 관리위원회 성원에 대한 민주선거제와 정기윤번제를 시행한다.(김정호 북경 인민대, “연합노동의 좌절, 연방의 해체”, 레디앙 연재기사)
이러한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에 의한 자치적 생산의 확대와 함께 유고연방 내부의 개별 자치공화국 단위에서의 생산의 분산화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러한 자치와 분산화는 1, 2차 정치개혁을 통해 점차로 확대 실시되었다. 유고공산당(유고 공산주의 동맹)은 이러한 자치와 분산의 시행으로 인해 민족 간 모순이 줄어들고 기업 내부의 노동자들의 참여와 권리가 증대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노동자 자주관리법은 1950년 법령이 제정되고 52년부터 실시되었다. 노동자 자주관리는 맑스의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이라는 생산원리에 근거하여 만들어졌다. 이때의 구호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게’라는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의 구호를 빗대어 ‘권력을 생산자에게’였다. 이러한 구호에 입각하여 노동자 자주관리는 기업의 노동자총회에서 선출된 노동자평의회에서 관리위원회를 선출하고, 이 평의회와 관리위원회에 의해 기업이 관리되고 운영되었다.
노동자총회는 생산, 재정, 기업확장 계획, 기술변경 등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이해관계와 밀접한 문제들을 다뤘다.(조우현 엮음, 《세계의 노동자경영참가》, 289쪽 참고) 그럼에도 이때까지는 여전히 중앙계획이 중심적인 요소였고, 시장적 요소는 부분적으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부터 시장 사회주의가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했다. 유고 공산주의 동맹 내부의 대표적인 시장 사회주의자인 카르텔은 “시장이 바로 노동에 따른 분배의 실험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인인 것이다”(《현대사회주의 비교연구》, 최성 엮음, 학민사, 252쪽)라고 주장했다. 유고 공산당 서기장인 티토는 카르텔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자치기관의 결정이 무시된다거나, 행정적인 개입이 행해진다거나 하는 경향이 흔히 보여 진다. 분배에 있어서도 경제연합 등에서 실질적으로 그것이 결정되고, 기업의 결정권이 형식적인 것으로 되고 있는 것이 허다한데, 직접 생산자의 권리를 무엇보다도 확대해야만 한다. 투자정책에 있어서도 정치기관이 거의 모든 자금배분을 결정하고 있는데, 생산기구 외적인 요소가 투자정책을 결정하는 한, 실로 효과적인 분업체제가 생겨날 수 없다.(《현대사회주의 비교연구》, 최성 엮음, 학민사, 252쪽)
이미 이때를 전후하여 유고 내에서는 식량품과 연료비등 물가가 수십 퍼센트 상승하고 무역수지 적자가 급증하면서 자본주의 시장 조치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고 지도부는 이러한 문제를 더 확고한 시장조치를 실시하지 않은 결과로 생각하고 더욱 더 시장조치를 강화해 나갔다. 이에 대해 유고 공산주의 동맹 내부에서는 랑코비치 부서기장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계획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이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65년에 유고는 각종 법령을 공포하여 시장 사회주의 조치를 강화해 나갔다. 이것은 국가의 보호 아래 있던 중공업 등 산업에 대한 보조금을 삭감하여 기업 스스로의 책임으로 돌리고, 기업 자체의 재정확충과 기업단위에 이윤의 상당 부분을 귀속시키는 조치 등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장 사회주의 조치의 강화로 인해 유고 사회주의는 한편으로는 높은 성장을 이룩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모순들이 더 극심하게 나타났다.
첫 번째는, 지역격차의 확대와 민족대립의 재현이다 … 두 번째는, 사회적 투자의 약체화이다. 자금이 정치조직의 수중에서 기업으로 대폭 이전된 결과, 원료개발, 농업개발 등 채산성이 나쁜 산업부문과 교통, 수리, 교육, 보건 등의 사회적으로 필요한 부문의 자금확보가 쉽지 않게 되어 신문 등에서도 그 폐해가 빈번히 취급되어졌다. 세 번째는, 생산의 무정부성이라 불리우는 제 현상의 심각화이다. 디노미네이션이 인플레를 가속화시켜 데이날의 가치저하가 한층 빈번하게 매스컴에 실리는 만화의 소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64년에 총노동인구의 2.5%였던 실업자는 67년에는 6.8%로 증가한 약 30만 명에 달했다 …. 기업은 자주적 결정권을 얻었지만, 동시에 경쟁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경제에 정통한 경영전문가층의 역할이 높아지고 노동자에 의한 자주관리는 오히려 형해화하는 경향이 눈에 띠게 되었다. 경제 전반에 있어서도 은행 등의 금융기관의 힘이 강화되어 기업은 이에 종속되는 것으로 되었다.(같은 책, 254쪽-255쪽)
유고 사회주의에서는 기업 간, 지역 간, 노동자 간 빈부격차의 확대와 민족 간 대립이 증가하게 되었다. 특히 알바니아인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코소보 메트비아 자치구와 크로아티아 공화국 등에서 민족대립이 더 극심하게 나타났다. 이로 인해 68년에는 코소보 내 자치구에서의 시위로 사망자가 발생하고 71년 크로아티아에서는 ‘크로아티아의 UN가입을!, 크로아티아 군 창설을!’(같은 책, 256쪽)과 같은 민족주의적 구호를 내건 시위가 격렬하게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모순은 1980년대를 전후로 더욱 극심해지면서 이때에는 수많은 기업의 파산과 130대 기업이 매상고의 70.1와 48.3%의 고용을 차지하는 독점의 심화 현상이 나타나고, 2%대의 낮은 성장과 13%-14%의 실업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사기와 뇌물 등 경제범죄도 증가했다. 또한 유고 시장 사회주의는 외채도 증가하기 시작하여 제국주의 국가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1981년 외채규모는 201억 달러에 달해 이자 지불액만 해도 20억불에 달했다. 이러한 외채문제는 비단 유고뿐만 아니라 시장주의 개혁을 강화하고 있는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도 일반적으로 나타났다. 시장주의 개혁을 강화하고 있었던 쏘련, 중국도 마찬가지로 기업 파산의 증대 등 자본주의적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사회주의 경제에 시장법칙을 받아들임으로써 경제에 활성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 개혁을 시도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주된 논리이다. 이러한 계획적 상품경제가 만병통치약이 아닌 사실은 1987년 소련 기업소간 상호결제 미납금이 190억 루블이나 되었고, 중국에서도 1986년 손실을 본 기업소들의 수는 1985년 대비 40%나 증가하였다. 즉 확대된 상품시장에서 투자와 가격경쟁이 치열하게 되어 파산하는 기업이 증가하고 있다.(같은 책, 67쪽)
유고 시장사회주의 내에서 자본주의 모순이 첨예하게 나타나자 유고 내부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시정하기 위한 조치를 강화하게 되었다. 1982년 6월 유고공산당은 제12차 당 대회를 소집하고, 1984년에는 217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세워졌는데, 이 위원회는 1985년 7월에 중요한 문건인 <사회주의 자치정치체제 운행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하 약칭<분석>)을 완성하였다.
<분석>은 유고공산당 12차 당 대회 관점을 다시 한 번 천명하면서, 일부세력들이 연방국가주의를 지향하는 중앙집권주의를 반대하였기 때문에 공화국과 자치성의 국가주의‧지방주의‧본위주의가 창궐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잘못된 경향에 기댄 국부적 이익의 옹호자들이 출현하고 <분석>은 신지도부의 그간 사회주의 자치이론의 실천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에 대한 총체적 자체반성의 산물이다. <분석>은 초보적으로 자치제도 자체의 결함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국가체계의 법제건설‧유고공산당의 ‘연방화’경향‧’대표단제’ 등 방면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한편, 자치이론 자체에 국가역할을 부정하는 사상이 존재함을 초보적으로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하였다.(김정호 북경 인민대, “연합노동의 좌절, 연방의 해체”, 레디앙 연재기사)
1986년 6월에 개최된 유고 공산주의 동맹 제13차 대회에서도 시장 사회주의 조치의 실시로 인해 나타난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1987년 1월, 연방 주석단은 연방의회에 <유고사회주의연방공화국헌법의 수정에 착수할 것에 관한 건의>를 제출하고, 1988년 11월 연방의회에서 이 초안이 통과되었다.(같은 글)
그러나 유고 내에서 중앙 집중성을 강화하는 이러한 조치들은 이미 각 공화국과 기업 단위에 분산화가 강화되어 있었고, 당의 주도적 역할을 상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유고 사회주의 내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다. 또한 이러한 조치는 때가 늦었을 뿐만 아니라 유고 공산주의 동맹과 국가와의 당정 분리 원칙을 계속 유지하는 불철저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이후 부르주아적 다당제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고 공산주의 동맹은 해체하기 시작했고 1989년 하반기부터 1990년 2월에 걸쳐 유고에는 약 250여 개의 각종 부르주아적 정당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한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 심화됨으로써 파업과 시위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민족분규가 더욱 더 심각하게 발생했다. 결국 1990년에는 보스니아와 마케도니아에서 반대당이 집권하면서 유고를 ‘느슨한 연방’ 혹은 ‘주권국가연방’으로 바꿀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주장이 세르비아 공화국의 반대에 부딪치자 보스니아와 마케도니아 두 공화국에서는 국민투표를 통해 주권국가임을 선포하고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포하였다.(같은 글)
뿐만 아니라 91년 6월에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역시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면서 유고 연방은 해체되었다.
3. 유고 시장 사회주의의 교훈
유고 시장 사회주의의 경험은 사회주의 붕괴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런데도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조차 유고 시장 사회주의의 경험에서 사회주의 붕괴의 교훈을 찾으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유고 시장사회주의는 당과 국가의 분리, 당의 전위성과 지도성의 상실, 중앙집중 계획의 약화와 자본주의 시장의 강화 등으로 인해 붕괴했다. 쏘련의 경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현실 사회주의를 ‘국가 사회주의’로 보는 세력들은 유고의 경험을 무시하고 당과 국가의 일체화 운운하며 당의 지도를 부정하며 이로부터 사회주의 붕괴의 원인을 찾고 있다.
쏘련 등 사회주의의 붕괴 원인을 ‘스탈린주의 중앙집중 계획’으로 보고, 분산화 된 계획, 민주적 계획을 주장하는 국가자본주의 진영을 비롯한 많은 사회주의자 진영 역시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적 계획, 노동자의 자주관리, 자치, 분권화 등을 사회주의 계획의 원리로 포장하고 원칙으로 격상시키려 하는 세력들은 사실상 반사회주의적이며 무정부주의와 수정주의를 은폐하는 기회주의에 불과하다. 이는 혼란스러운 사고를 넘어 전도된 사고다. 전도된 사고는 쏘련과 현실 사회주의로부터 버릴 것은 취하고 취할 것은 버리는 사실상 무정부주의로 발전했다.
지금까지 무정부주의의 정치적 본질로부터 나오는 대표적인 정치적 특성을 살펴보았는데, 이를 다시 정리하면, 무정부주의자들은 첫 번째, 권위 일반과 정치적 중앙 집중과 지도자들을 반대한다. 두 번째, 경제적 중앙 집중을 반대한다. 세 번째, 현실성이 결여되었고 공상적이다. 네 번째,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반대한다.
이렇게 무정부주의의 대표적인 특성을 정리해보니 이는 ‘사회주의’를 내걸고 활동하고 있는 대다수 한국 정치 세력의 특성과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오늘날 창궐하는 무정부주의는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공식적으로는 무정부주의를 반대하고 있는 한국 ‘사회주의’ 정치 세력들조차도 실제적으로는 무정부주의의 정치적 영향을 받고 있다. 이들을 유사 무정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전국노동자정치협회, 《맑스주의와 무정부주의》, [맑스레닌주의 총서]2)
이들 범무정부주의자들의 사회주의 생산과 역사에 대한 무지와 편견, 독선은 사회주의에 대한 중상모략을 낳으면서 급기야는 반쏘반북반공주의로까지 발전했다.
사회주의 경제는 합리적, 과학적 계획 아래 기업 간, 지역 간 불균형을 극복하고 생산력을 고도로 발전시켜 인민의 물질적, 정신적, 문화적 풍요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을 근본법칙으로 한다. 그런데 유고 시장 사회주의는 중앙계획을 분산화 시키고, 생산과 분배 등에 있어서 기업에 광범위한 자치를 부여하여 자본주의 기업과 마찬가지로 이윤 중심으로 기업이 작동되었다. 이윤 중심의 노동자 자주관리는 생산과 분배의 불균형으로 침체를 낳고, 기업 간, 지역 간, 민족 간 이기주의와 분열주의를 낳았다. 또한 노동자들의 자기결정권은 구호와 다르게 노동의 소외와 참여의 배제를 낳았을 뿐이다.
영국 노동당처럼 전통적인 사민주의가 자본주의 내에서 시장과 계획을 조화롭게 하려는 수정주의를 추구한다면, 시장 사회주의는 사회주의 내에서 시장과 계획의 조화를 추구하는 사회주의 내의 수정주의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수정주의와 사회주의 수정주의는 모두 수정주의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사회주의로 가는 ‘제3의 길’도 없지만, 사회주의 발전의 ‘제3의 길’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생산의 조직화는 각 나라의 문화적, 경제적, 역사적 발전수준에 따라 특수성을 갖지만 이 특수성은 사회주의 혁명과 법칙의 보편성과 원칙을 확고하게 부여잡을 때만이 그 의미를 잃지 않는다.
“하나의 나라, 두 개의 알파벳, 세 개의 종교, 네 개의 언어, 다섯 개의 공화국”로 표현되는 유고 사회주의는 시장 사회주의의 내적 모순에 의해 산산조각 나 버렸다. 이러한 유고 시장 사회주의의 붕괴는 맑스주의의 혁명적 원칙에 충실한 사회주의 원리와 원칙의 강화에 의해서만 민족 내부 모순을 해결하고 통합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유고 사회주의의 붕괴에서 우리는 전위당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사회주의 생산을 조직하는데 있어서도 여전히 전위당의 역할은 무엇 보다 중요하다. 전위당은 당과 국가, 당과 대중조직과의 결합방식을 제대로 찾아야 한다. 당은 국가와 대중조직과 강력하게 결합하되 여전히 전위적 생명력을 잃지 말아야 한다. 전위당은 각종의 국가기구와 대중조직 속에서 지도력을 형성하고 전체 인민의 계급의식을 강화하고 지도력을 발휘하는 기관차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당과 국가, 당과 대중조직과의 결합이 확고하지 못하고, 분리된다면 당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고립되어 관료화 되거나 대중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국가는 대중국가이다. 당은 국가기구와 노동조합, 당내의 관료주의와의 투쟁을 가차 없이 전개해야 한다. 관료주의와의 투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맑스와 레닌이 강조한 것처럼, 사상투쟁, 사회주의 문화혁명과 더불어 관료주의가 비집고 들어설 수 있는 물질적 근거를 없애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중들의 계급의식의 상승과 기술적, 행정적 수준이 고양되어 국가 기구에서 인민들의 참여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아져서 명실상부한 대중국가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와 함께 사회주의 생산의 균형적 발전을 통해 도시와 농촌의 대립을 극복하여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물질적 근거를 없애야 한다.
국가 기구 내에서 관료들은 대중국가의 근간인 노동자와 농민 대중들의 직접적인 투표에 의해 선출되어야 하며, 대중들 다수의 요구에 의해 언제든지 소환이 가능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의 대중기구에 대한 지도성의 발휘는 단지 당에 의해 위로부터 임명되는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이 국가 기구나 노동조합 같은 대중기구 내에서 당은 전위적, 지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국가기구와 대중기구 내에서 활동하는 전위당의 세포들은 오로지 생산을 조직하는 능력과 헌신성, 앞선 계급의식으로 지도력을 행사해야 한다. 이러한 지도력을 직책이나 당원증으로 대체하려 한다면 전위당은 관료주의 세력의 집결지로 타락하게 될 것이다. 전위당의 세포들은 노동자 계급 내에서 지도성을 인정받는 인물들로 구성되어 당의 계급성을 끊임없이 강화해야 할 것이다.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하지 않은 사회주의에서도 생산성을 높이고 노동에 대한 자발적 참여를 높이기 위해서는 임금 차등과 보상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 사업장, 장시간 노동, 기술이 높은 노동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보다 높은 임금이 지급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생산의 조직화에 있어서 탁월한 행정적, 생산적 능력을 발휘하는 경영자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제공해야 한다. 물론 이 격차는 점차로 좁혀져야 한다. 다만 높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나 기술, 경영자들이 당원인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야 한다. 전위당의 세포들이 특권화 되고 보수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위, 기술적 능력과 상관없이 노동자의 평균임금 이상에 대해서는 당에 반납하고 평균적인 삶의 수준 이상을 살아서는 안 된다. 당원은 노동자 계급과 인민들로부터의 사회적 존경이 아닌 다른 물질적 특권을 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노동조합은 국가의 경제적 조직화에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국가기구 자체는 아니다. 노동조합은 사회주의에서도 여전히 노동조합 내부의 조합원들의 물질적, 사회적 위치를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회주의에서 노동조합은 전체 사회의 발전을 위해 투쟁해야 하지만 불가피하게 개별적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협소한 이해에 사로잡힐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당은 노동조합 내에서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여 노동조합이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수행하되 이것이 전체 사회의 이해와 대립되지 않도록 지도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현실 사회주의의 경험을 분석하면서도 조선(북)의 경험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국가보안법의 존재를 이유로 북의 사회주의 체제와 그 건설경험을 외면하는 것은 지적으로 게으르거나 최악의 경우 국가보안법에 굴복하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철폐되어야 하지만 철폐 이전에도 무력화 시켜야 한다. 사상과 학문의 자유는 스스로도 각고의 노력으로 쟁취해야 한다. 더욱이 북의 사회주의 건설 경험에 무지하고 분단문제, 민족문제 해결을 외면하면서 사회주의 전망을 운운하는 것은 공상적이거나 반공주의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쏘련의 리베르만 방식, 코시킨 개혁에 대해 수정주의라고 비판했는데, 북에서는 일찍이 이러한 수정주의 노선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북에서는 이러한 노선이 자본주의식 사업이라고 비판하면서 사상혁명, 기술혁명, 문화혁명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사상사업과 정치사업을 통해 정치도덕적 자극을 우선하면서 물질적 자극을 결합시키도록 했다. 또한 당의 지도일군들이 정치지도 대신에 행정과 생산사업을 대신하면서 나타날 수 있는 ‘관료주의’와 ‘형식주의’를 경계했다. 이것은 ‘혁명적 군중노선’으로 표현되고 있는 ‘천리마 운동’, ‘대안의 사업체계’와 ‘청산리 방법’이다.(이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보고 싶으면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민족과 계급 1-5>과 박후건, 《DPRK에서의 경제건설과 경제관리체제의 진화》, 도서출판 선인을 참고하기 바란다.)
지금까지 살펴본 유고 시장사회주의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수정주의 ‘전위’가 실은 맑스주의의 ‘후위’이며 이는 맑스주의의 혁명적 원칙의 배신이자 부정으로부터 출발하여 유고연방의 해체와 민족살상극으로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되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유고의 실패한 경험을 도리어 정치적 전망으로 사고하는 사회주의를 내건 ‘자치주의자’, ’‘분권주의자’, ‘아래로부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무정부주의적 사고를 일신하고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사회주의 전망을 삼아야 한다.
다른 산의 나쁜 돌이라도 자기 산의 옥돌을 가는 데에 쓸 수 있다. 유고의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유고의 경험으로부터 다시금 우리가 뼈저리게 배운 교훈은 맑스레닌주의 원칙에 충실하며 그것을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에 뿌리내리려는 노력들, 제국주의 프로파간다와 반공주의를 철저하게 척결하려는 노력, 역사적 관점과 엄정한 과학적 자세와 실사구시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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