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번즈가 베트남 전쟁 이야기에서 생략한 것
가레스 포터(Gareth Porter, 미국 역사학자)
https://www.fff.org/explore-freedom/article/ken-burns-left-vietnam-story/
번역: 김남기(학생)
차받침용 책으로 좋은 켄 번즈(Ken Burns)의 PBS(Public Broadcasting Service, 미국공영 방송서비스) 10부작짜리 시리즈인 베트남 전쟁(역자 주: 2017년에 방영된 다큐멘터리로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EBS에서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생략해서 방영했다.)은 켄 번즈가 공동 저자인지 아닌지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이 시리즈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번즈는 속표지가 아니라 책 표지에 제2 저자로 명시되어 있다.
책과 시리즈는 전쟁사에 대한 대중의식을 지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거의 600쪽이라는 그럴싸한 쪽수를 고려해봤을 때, 책은 방대하게도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 지배부터 시작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프랑스에 맞서는 항전과 전쟁의 각각의 국면을 독자들에게 전달해준다. 티브이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책은 특히나 전쟁 당시 주요 전투들에 대한 세부사항이 풍부하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인들을 난처하게 하는 질문 – 첫 번째로 어떻게, 왜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하게 되었나- 에 대한 답변에서 책은 시리즈의 결점을 보여주고 있다. 근본적인 주제에 대해 냉정하게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기록을 인용하는 대신에 저자 제프리 씨 와드(Geoffrey C. Ward)는 일반적인 신화들로 변명을 한다.
와드에 따르면, 이 전쟁은 “품위 있는 사람들이 선의를 가지고 시작한 것이었지만, 치명적인 오해와 미국의 지나친 과신과 냉전의 오판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와드는 “문제는 공산권의 위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었다”는 미국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의 다음의 후일 해명에 의존한다.
“나는 공산주의를 단일체로 보았다.”
맥나마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도 한다. “나는 소련과 중국이 헤게모니를 확장하기 위해 협력한다고 믿었다.” 게다가 전 국방장관은 그가 믿었던 것을 주장한다. “베트남의 공산주의 운동은 버마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그리고 필리핀에서의 게릴라 작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결한 공산주의자들이 아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징조다.”
그러나 맥나마라 자신과 케네디 존슨 행정부 시기 다른 정부 고위층들이 확신했던 것은 현재 확인 가능한 미국 내부 문건들과는 모순된다. 이 문건들은 1962년 초 당시 -베트남에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기 몇 년 전에- 맥나마라와 정부 고위층들이 공산주의가 전부다 단일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몹시 잘 알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은 중국과 소련의 분열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역자 주: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중국과 소련 두 사회주의 진영 사이에서 벌어졌던 갈등을 파악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과 미국이 동남아시아를 학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도미노 이론
와드는 이것이 미국을 전쟁으로 나아가게 한 “도미노 이론”(역자 주: 도미노 이론은 한 나라가 공산화되면 다른 나라도 연달아 공산화가 된다는 의미로 냉전시기 미국이 내세웠던 논리다. 1946년 프랑스의 침략으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을 당시, 미국은 프랑스에게 막대한 전쟁물자를 지원했는데, 이는 도미노 이론에 근거한 행위였고,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남베트남에 친미 꼭두각시 정권을 세운 것도 마찬가지였다.) -한 도미노가 무너지면 다른 도미노들을 무너지게 만드는 이미지처럼 베트남이 공산화 될 경우 동남아시아 국가 전체가 공산화 된다는 걸로 표현된다.-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공식문서와 회고록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1953년 시점부터 그 사태를 중단하려 했다는 것을 폭로한다. 아이젠하워는 1954년 미국이 베트민에 맞서고 있는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을 러시아와 중국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만 무너지는 도미노 이미지를 제시했다. 따라서 도미노 이론의 기원은 무의식적인 오해보다는 의도적인 기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CIA는 몇 년 동안 도미노 이론을 분명히 거부했으며, 그리고 1961년 3월 정보 추정치를 통해 결론을 반복했다. 1964년 6월 린든 존슨의 요청에 따라 CIA는 남베트남에서의 공산주의 반란 진압 실패가 동남아시아를 도미노로 무너뜨릴 것이라는 발상을 더 단호하게 거부했다. CIA는 미국이 특히 미공군기지가 중국을 위협하던 태국과 같은 곳에서 중립주의가 부상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맥나마라와 다른 수석 보좌관들은 1964년 말과 1965년 중반에 직면한 중립주의의 위협이 남베트남에서의 협상을 통한 철수안을 거부한 주요한 이유로 짚었다. 협상 거부는 군사동맹을 통한 중국의 포위와 위협을 동반한 정책을 반영한 것으로써, 태국과 필리핀이 중립이 될 경우 방어할 수 없는 지역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 입각했다.(역자 주: 당시 태국과 필리핀에는 친미정권이 들어서 있었는데, 1960년대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면서 이 나라를 전쟁에 끌어들였다. 즉 이 나라들이 중립국이 되었을 경우 미국이 동남아시아 반공주의 라인이 무너진다는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에서 냉전을 지속해야 한다는 주장은 미국을 베트남 전쟁의 수렁으로 몰아넣기 위한 생각에서 비롯된 정치적인 군사정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 다른 고려사항은 남베트남의 병력투입이 그들의 군사예산을 실질적으로 증가하여 강화시킬 것이라는 합동참모본부의 믿음이었다. 1960년대 후반 박사학위 논문을 위해 인터뷰했던 로렌스 코브(Lawrence Korb, 나중에 레이건 행정부 당시 미국 국방부 관계자가 되었던 인물)에게 알려주었듯이 말이다.
1956년에 베트남을 통일하기 위한 선거조항을 담고 있는 1954년 제네바 협정의 운명은 와드의 역사서에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 저자는 프랑스 식민주의를 조국에서 몰아내었던 베트남 공산주의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이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을 것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선거를 치르지 못한 유일한 설명은 남베트남 응오딘지엠(Ngo Dinh Diem) 정권이 1955년에 선거를 거부할 만큼 강력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제안된 선거’만을 언급하는 에드워드 밀러(Edward Miller)가 마치 그들이 프랑스 식민통치권으로부터 합법적으로 넘겨받은 남베트남 정부의 법적 구속력이 없었던 것처럼, 6쪽 분량의 내용을 담고 있다.(역자 주: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로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물러나며 미국은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의 분단을 결정했다. 단 2년 이내에 남북 베트남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내세운다는 조건을 달았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베트남 민중 80%가 호치민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에 따라 정통성이 하나도 없던 친미 반공주의자인 응오딘지엠을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으로 내세우며, 총선을 거부했다. 쉽게 말해 프랑스가 만들어 놓은 토대 위에 응오딘지엠이라는 친미 반공주의 인사를 내세우며,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는 얘기다.)
그러나 실제로 발생한 일은 미국 그 자체가 선거를 좌지우지했다는 사실이다. 1955년 중반 디엠은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고, 미국의 승인 없이는 정책을 채택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1955년 6월 중순에 이르러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통일 베트남을 위한 자유선거를 약속하고 있었는데, 냉전국가인 분단된 독일과 한국의 정책과 일관되게 하기 위해 자유선거를 유지했던 것이었다.(역자 주: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선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 문제와 독일 문제 그리고 베트남 문제를 논의했다.)
디엠 정부는 여전히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자유선거를 배제하지 않았었다. 그러던 1955년 6월 14일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는 제네바 선거에 전적으로 반하는 다른 정책을 조용히 승인하는 새로운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자 디엠은 즉각적으로 노선을 바꾸고 북베트남과의 선거 협의와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베트남 분단의 폭력이 낭자했던 해결책을 피할 수 있었던 최선의 기회를 날린 장본인은 응오딘지엠이 아니라 덜레스(Dulles) 국무장관이었다. 호치민 정부가 베트남을 통일시켰다면 베트남 전쟁은 없었을 것이었다. 호치민의 사회주의 정부는 미국을 중국의 지배에 대한 균형추로서 인식했을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에 대미(對美) 경제관계에 있어 개방적으로 나섰을 것이다. 1945년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복귀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미국과 교섭을 희망했고, 냉전 종결 이후 가장 최근 행보에서 살펴보듯이 말이다.(역자 주: 호치민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CIA의 전신인 미국 OSS와 협력관계를 구축했었는데, 이를 토대로 베트남 전쟁이 없었다면 호치민 정부가 미국 정부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민간인과의 전쟁
와드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 민간인들 생명에 별 관심이 없었던 사실에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다. 그가 언급하지 않는 사실은 무차별적인 민간인 살상은 미국의 일관된 전쟁 전략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일치했다는 대목에 있다.
저자는 미라이(My Lai) 학살(역자 주: 1968년 3월 16일에 일어난 학살로 미군 30명이 504명의 민간인을 4시간 동안 무차별 학살했던 사건이다. 학살당한 사망자 대부분이 여성, 노인, 어린이 그리고 유아였다.)에 대해 상당한 내용을 할애하는데, 여기에는 단거리에서 총에 맞은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영유아의 컬러사진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와드는 잔혹행위가 병사 개개인의 일탈이요, 베트남 전쟁 당시 공식적인 정책에서는 민간인 사살을 허용하지 않았다며 상투적인 관점을 되풀이한다. 와드는 그 잔학 행위들이 지휘 정책에 위배된다는 명백한 증거로 윌리엄 피어스(William R. Peers)와 “피어스위원회”의 장교 30명의 기소와 조사를 인용한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증거물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주월미군 총사령관인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William Westmoreland)는 베트콩(공산주의자 베트남인 전투원을 칭했듯이)이 장기적으로 통제하는 곳에 살고 있는 민간인을 무장한 전투원으로 간주하는 정책을 진지하게 채택했다. 이러한 정책은 전쟁 당시 흔히 사용되던 “자유사격지대”(역자 주: 자유사격지대는 베트남 전쟁 당시 비정규전을 치렀던 미군이 베트콩이 출몰하는 지역을 바탕으로 만들었던 작전지역이다. 문제는 여기서 사살된 사람들은 군인 민간인 할 거 없이 적군 사살로 간주됐다.)라는 용어가 만들어지면서 구체화됐고 전쟁관련 문헌에서는 두드러지게 논의되고 있지만, 베트남 전쟁에선 이상하리만큼 찾아볼 수 없다. 이후에 “특수사격지대”로 명칭이 변경되는 자유사격지대는 잔존하는 인구가 적이라는 공식적인 가정 하에 미군과 남베트남 정부 상급자의 허가를 받지 않고 폭격과 포격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광범위한 농촌지역이 된다.
피어스위원회는 웨스트모어랜드에게 미라이 학살의 책임을 밝히려고 했으며, 미군에게 “비전투원 희생자와 민간인 재산피해를 최소화 하라”를 요구하는 베트남 군사원조사령부(MAC-V)의 지시 보고서를 언급했다. 그러나 피어스 장군은 자신의 상관(웨스트모어랜드)을 보호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대중을 기만했다. 1965년 9월 MAC-V의 지침 전문인 525-3은 공산주의 세력이 일시적으로 지배를 하든 전혀 지배를 하지 못하든 간에 그러한 민간인 보호는 인구 밀집 지역에만 적용되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정규군의 대규모 투입이 개시되기 이전에 베트콩의 장기적인 지배하에 있던 지역은 맥나마라의 추산에 따르면 베트남 농촌지역 인구의 최소 40%에 해당됐다.(역자 주: 통계에 따라선 다르지만 1960년에 창설된 베트콩의 경우 농민들의 대대적인 지원과 지지를 받았는데, 1963년 응오딘지엠이 암살당하는 시점에서 남베트남 농촌지역의 75%를 장악했다는 자료도 있다. 실제로 미군의 대대적인 개입 이전인 1965년 당시 베트콩은 여러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을 궤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실제로 웨스트모어랜드는 회고록에서 아주 노골적으로 본인의 정책에 대해 말했다. 자유사격지대가 설립된 시점에서 그는 “남아있는 누구도 적 전투원으로 간주해라!”, 그 지역에서의 작전은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두려움 없이 행해질 것이다!”라고 썼다. 이것이 바로 미라이 지역에 보내졌던 병력이 받았던 명령이었다.
1968년 저널리스트 조너선 쉘(Jonathan Schell)은 미라이가 위치한 꽝응아이(Quang Ngai) 성의 대부분 지역을 미군 전투기와 폭격기가 합동으로 공격해 체계적으로 파괴했었다는 내용의 상세한 기사를 실은 적이 있었다. 파괴된 마을은 베트콩 기지가 있던 지역이었는데, 이곳은 베트콩을 숨기거나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주민들에게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전단지를 투하한 후 자유사격지대로 선포된 곳이었다. 쉘의 설명은 와드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다.
민간인 지역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과 전투원을 지원하거나 지지했다는 이유로 민간인에게 자행했던 “집단처벌”은 명명백백한 전쟁법 위반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와드는 지상전에서 가까운 공중 지원 외에 남베트남에서 미 공군의 사용에 초점을 두지 않으며, 미군이 전쟁범죄의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은 곧잘 말하지 않는다.
베트남전에 대해 최종적인 결론을 회피하려는 저자의 의도는 베트남 전쟁 이후 찢어질 대로 찢어져 양극단에 있는 세대들의 불화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미국이 벌이는 끝없는 전쟁에 대해 와드의 저서와 캔 번스의 다큐멘터리 시리즈물은 미국인들에게 이러한 전쟁들이 미국 현대사에서 왜 되풀이되는지 납득시킬 기회를 제때에 마련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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