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계급3] 맑스주의와 조선(북)의 사상1)
* 애초에 이 글을 세 번 나누어 실을 예정이었는데, 계획이 변경되었다. 맑스주의와 조선(북)의 사상을 각각 1)과 2)로 나눠서 싣고 마지막으로 북의 사회성격, 한국사회 운동의 단결 과제와 변혁의 특수성에 대해 다룰 것이다.
내재적 인식은 참된 인식의 출발점
우리는 조선(북)에 대해 학문적으로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 ‘내재적 관점’을 취하려 한다. 내재적 관점에 대해서 송두율 교수는 “우리가 대상을 어떻게 잘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의 문제로서, ”타자를 자기 스스로가 그린 추상적인 대상으로 대하지 말고 직접 경험하라는 것이다. 그럴 때만 타자가 지니는 긍정성과 부정성이 함께 드러나고 타자에 대한 비판적 지평도 보이게 된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우선 상대방을 이해하는 경험은 결국 자기가 가졌던 기존의 편견을 넘을 수 있는 자기비판의 계기도 마련해 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내재적 관점은 대상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가졌던 편견을 극복하여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내재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한다는 것과 그 인식을 모두 우리 운동의 원칙으로 삼는 다거나 우리의 지향으로 삼는 문제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라는 점이다.
내재적 인식을 위해서는 상대방의 처지와 조건을 고려하여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하고, 무엇보다 “직접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북에 대한 편견과 왜곡, 적대감이 판치는 반공주의 사회에서 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상대방의 처지와 입장을 고려해서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북과 교류와 소통의 장은 국가보안법에 의해 철저하게 막혀 있다.
고 리영희 선생은 북을 ‘북괴’라고 부르던 군사독재 시절에도 냉전적 인식에 맞서 진실과 진리를 추구하며 싸웠다. 우리는 “사상의 은사”가 추구했던 진리탐구의 정신대로 우리 사회 지배적 사상인 반공주의와 싸워야 하며 북에 대한 편견과 왜곡에 맞서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사실 그대로 본다는 것은 주어진, 눈앞에 펼쳐진 현상만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북의 사상과 체제를 인식하는 기준으로서 맑스레닌주의 사상에 입각해 있다. 다만 그럼에도 우리는 국가보안법이라는 희대의 정치적 억압이 존재한다는 점, 북의 사상과 체제에 관한 자료를 접하는 것이 자유롭지 않다는 점, 북을 제대로 인식하기에는 턱없이 노력이 부족하고, 여전히 무지하다는 점 등 때문에 가치판단은 최소화하면서 북의 핵심 사상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는 것에 그치려 한다. 따라서 우리의 평가는 고정불변의 것이라기보다는 인식변화와 발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하는 잠정적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은 반공주의법이며 반공주의는 곧 반북주의이다. 지배계급은 반공법이자 반북법인 국가보안법을 앞세워 북과 그 지도자들을 악마화하고 적대시해왔다. 지배계급이 조장하는 반공반북은 이남의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고 통제하여 자본주의의 착취와 수탈을 공고히 하면서도 피억압계급이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정치적 전망을 가지는 시도를 철저하게 차단해 왔다.
‘자본주의가 아무리 문제가 많더라도 자유가 억압된 폐쇄사회이자 독재사회이고 굶주리는 북한 보다는 훨씬 낫다.’
이것이 저들 지배계급이 노동자 민중에게 심어놓은 숙명주의이자 정치적 패배주의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공반북 이데올로기가 지배적 인식이 된 것은 반공반북 교육, 선전 때문만은 아니다.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는 물리적 탄압, 수백만 인민을 학살하고 야만적 탄압을 자행한 백색테러 체제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남과 북의 분단은 물리적 분단인 동시에 체제의 분단이다. 분단으로 북에서는 사회주의 체제가, 남에서는 자본주의 체제가 성립됐다. 남의 자본주의 체제는 분단체제에 기초해 인민에 대한 백색테러체제를 구축해 왔다. 이 자명한 사실을 모르거나 부정하기 때문에 한국사회 대다수 이른바 ‘좌파’들은 국가보안법 철폐에 동의하면서도 정작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이유에 맞춰 반북 적대감에 사로잡혀 국가보안법의 노예가 되어 왔다.
1980년대 혁명적이었던 한국의 진보운동은 1990년대 전후 동유럽 사회주의와 쏘련 사회주의의 해체, 그리고 남아 있는 현실 사회주의에 가중되는 난관 속에서, 맑스주의 위기 운운하며 청산주의가 지배적 조류가 되었다. 혁명적 사상의 청산은 혁명적 운동의 청산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우익청산주의의 대물결이 휩쓸고 간 뒤에는 트로츠키주의라는 좌익청산주의의 소물결로 밀려왔다.
트로츠키주의는 쏘련과 조선, 쿠바 같은 현실사회주의를 타도해야 하는 “국가자본주의”니, “타락한 노동자국가”니 하며 전면 부정했다. 이는 진정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제기됐으나, 실제로는 아래와 위, 부분과 전체를 대립시키고 사회주의에서 지도자와 대중의 일체적 단결이 가능하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타락한 관료”에 대한 타도, “국가자본가” 집단을 타도하자는 주장으로 나타나며 제국주의의 레짐 체인지(정권교체)에 동조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범무정부주의의 일종이며 인류의 거대한 진보에 기여했던 현실 사회주의를 부정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사회주의는 이상에 불과하며 현실에서는 이뤄질 수 없으며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패배주의 인식을 심어놓는다. 좌익청산주의인 것이다.
노사과연은 쏘련 해체 이후 점점 더 대세가 된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부정과 이른바 ‘스탈린주의’를 배격한다는 명목으로 쏘련과 현실 사회주의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운동에 대해 비판하고 쏘련 사회주의 해체 원인을 과학적으로 밝히려고 노력했다. 이것이 채만수 소장을 필두로 노사과연이 한국 진보운동에 기여한 것이다.노사과연은 그 동안 북을 일방적으로 적대하는 한국사회 이른바 ‘좌파’들을 일정하게 비판해 왔다. 그러나 노사과연은 유독 북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식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철저하게 외면, 침묵하고 있다. 북의 사회주의 건설의 경험, 북의 사상에 대해 무지하면서 남에서 변혁전망을 찾을 수는 없다. 결국 이로써 노사과연은 러시아 혁명을 강조하면서 변혁의 일반원칙에 대해서만 강조할 뿐 남에서 변혁의 구체적 조건과 경로, 방식에 대해서는 외면하게 되었다.
러시아 혁명은 맑스주의의 혁명적 원칙의 일반적 원칙에 충실했으면서도 짜리즘이 존재하고 자본주의 발전과 봉건적 압제가 동시에 존재하며, 농민이 인구의 압도적 비율을 차지하는 러시아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일어났다. 러시아 혁명 전에 발생한 제1차 제국주의 전쟁도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나중에 사회주의 국가기구가 된 쏘비에트라는 대중적, 혁명적 기구의 창설도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 탄생했다.
중국 혁명도 마찬가지로 러시아 혁명의 일반원칙과 함께 반(半)봉건, 반(半)식민지라는 중국의 특수한 상황을 적용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중국의 해방은 도시 쏘비에트혁명 노선이 아니라 대장정을 하면서 유격구를 건설하면서 이루어졌다. 마오쩌둥은 맑스레닌주의를 중국의 구체적 조건에 창조적으로 적용했기 때문에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조선은 식민지라는 상황에서 반일무장항쟁을 펼치며 사상과 체제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한국전쟁(조선에서는 이를 미제국주의에 맞선 민족해방전쟁이라고 규정한다.)과 이후 미제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 체제의 고립말살책에 맞서 투쟁을 전개해 왔다. 사회주의권과의 관계에서도 자주성을 강조하면서 자신들만의 특수한 사상과 사회를 만들어 왔다.
박문석 연구위원은 “‘주체사상’ 또한 맑스-레닌주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주체사상이 맑스레닌주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주장은 혁신적인 주장이다. 그런데 맑스레닌주의에 기초했다는 주체사상이 그 기초를 바탕으로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 사상은 북의 사회주의 건설에 어떻게 작용했고 어떠한 체제의 원리로 자리 잡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그러한 문제에 더해 이 주장은 일면적이기 때문에 주체사상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되지 못한다. 그런데 노사과연의 북에 대한 인식의 부재와 무관심은 그렇기 때문에 왜곡을 낳기조차 한다.
채만수 소장은 “역사적 그리고 국제정치적 악조건과 특수한 필요 때문에 굴절되어 버린 이북의 주체사상”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북의 사상이 사회주의의 일반적 원칙에 비춰볼 때 변질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채만수 소장의 “굴절되어 버린 이북의 주체사상”은 단순하게 사상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사상에 기초한 이북 사회주의 전체에 대한 평가일진데, 이때의 “굴절”(屈折)은 트로츠키가 쏘련과 사회주의에 대해 “타락한 노동자국가”라고 규정했을 때의 “타락”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트로츠키 역시 쏘련 사회주의의 “타락”이 국제혁명, 특히 유럽혁명의 실패와 고립으로 인해 나타나는 관료들의 사상이라고 했는데, 채만수 소장 역시 “역사적 그리고 국제정치적 악조건과 특수한 필요 때문에” 굴절되어 버렸다고 하지 않는가?
이북의 주체사상과 그 사상에 기초해 성립한 이북 사회주의가 “굴절”되어 버렸다면, 그것은 ‘선군사상’을 말하는 것인가, ‘수령론’을 말하는 것인가, 이른바 ‘3대 세습’을 말하는 것인가? 물론 노사과연은 트로츠키주의처럼 “타락한 노동자국가”의 지배체제를 정치혁명으로 타도하자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노사과연은 “굴절”을 말하되 여기서도 무엇이 그렇다는 것인지 북에 대한 더 이상의 구체적인 분석은 멈춰 버린다. 채만수 소장의 주장은 비교적 오래된 2003년의 글에서 박문석 연구위원이 인용한 것인데, 문제는 그때 이후로 북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언급을 삼가기 때문에 더 나아간 학문적, 정치적 입장은 없다. 그런데 박문석 연구위원은 이 입장을 아직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의 입장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맑스주의와 주체사상
박문석 연구위원은 자주파들이 주체사상을 “몰주체적으로 재단하고 있기에 이러한 인식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주파 인식의 한계가 있다면 그 인식의 한계를 넘어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박문석 연구위원 자신은 주체사상에 대해 과연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주체사상은 과도하게 상부구조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토대가 상부구조를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인류 발전사를 규명한 위대한 발견이었으며, 과학적 사실이다”(김해인, “조미 관계 정세와 노동자계급의 대응 방향”, 정세와 노동, 제149호, 2019년 3월 11일)는 노사과연의 주장은 “‘주체사상’ 또한 맑스-레닌주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주장과 배치되는 것이다. 또한 이는 주체사상이 “인류 발전사를 규명한 위대한 발견”과 “과학적 사실”을 외면하고 “과도하게 상부구조의 역할을 강조하”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지 북에서 맑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에 관한 가장 권위 있고 원칙적인 주장을 살펴보자.
우리 당 안에는 주체사상밖의 다른 사상이 있을 수 없으며 또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체사상을 우리 당의 유일사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그런데 아직도 우리의 일부 일군들은 주체사상이 우리 당의 유일사상이라는 것을 옳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데로부터 어떤 사람들은 우리 당의 주체사상을 맑스-레닌주의와 대치시키는가 하면 또 계급교양이나 혁명전통교양은 주체사상교양과 별개의 교양인 것처럼 리해하고 있습니다.내가 이미 여러 번 강조한 바와 같이 주체사상은 맑스-레닌주의의 모든 혁명적 원칙을 다 계승하고 있습니다. 맑스-레닌주의는 근로인민대중이 간고한 혁명투쟁과정에서 쟁취한 고귀한 혁명적 재부입니다. 인간의 자주성을 완전히 실현하며 혁명을 끝까지 할 것을 요구하는 주체사상이무엇 때문에 맑스-레닌주의의 혁명적 원칙을 버리겠습니까. 주체사상은 맑스-레닌주의의 사상리론적 재부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력사 발전의 요구에 맞게 그것을 더욱 발전 풍부화시키고 있습니다. 원래 사물의 발전은 계승과 혁신의 두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승과 혁신의 어느 한 면만을 보는 것은 형이상학적 관점입니다. 혁명사상이 발전하는 경우에도 계승과 혁신의 두 면을 가지게 됩니다….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맑스-레닌주의 창시자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비하여 혁명의 주체인 인민대중의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이 훨씬 높아졌으며 사회 발전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이로부터 새로운 력사적 환경에 맞게 혁명의 리론과 방법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제기됩니다.(김정일, 〈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1987년,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이에 따르면 주체사상은 맑스레닌주의의 혁명적 원칙을 다 계승하면서도 “역사 발전의 요구에 맞게 그것을 더욱 발전 풍부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혁신의 측면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 글을 보면 북 내에서도 주체사상과 맑스레닌주의와의 관계에 대해서 두 가지 편향이 존재한다고 했는데, 하나는 이 둘을 대치시키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이 둘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경향이라는 것이다.
북에서는 “새로운 력사적 환경에 맞게” 주체사상을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켰다고 주장한다. 그 새로운 역사적 환경은 바로 맑스-레닌주의 창시자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비해, 더욱 풍부한 사회주의 건설 경험과 함께 국제적으로 사회주의 체제가 강성해지고 민족해방투쟁이 성장하면서 인민대중의 인식과 지위와 역할이 훨씬 더 높아진 시기라는 것이다. 물론 북에서는 주체사상이 항일무장항쟁 시기에 좌우익 기회주의와 투쟁하면서 민족해방 통일전선노선으로 그 기반을 마련했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
북에서는 주체사상이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 원리에 기초한다”고 하며 인간의 운명개척을 추구하는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인간중심 사상은 부르주아 철학에서도 강조하는데, 과연 그렇다면 주체사상에서는 맑스주의 유물론을 부정하는가?
사람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이다.(《김일성 사상 비판 – 유물론과 주체사상》 , 하수도, 백두, 1988, 부록, 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1982년)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고,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이 “사회적 존재”라고 하는 것은 맑스, 엥겔스가 《독일이데올로기》에서 강조한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의식은 의식된 존재에 다름 아니다”라는 유물론적 인식과 대립하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도 아니고 물질의 반영으로서 나타나는 인간 의식에 한정되는 좁은 개념도 아니다.
자주성 자체는 관념이나 의식, 정신이 아닌 것이다. 다만 뇌수 속에 자주적인 사상의식을 가지고 그에 따라 자주적인 활동을 하는 인간을 가리켜 자주성을 가진 존재라 한다.(이정길, 《철학의 새로운 단계》, 녹두, 1989)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외부 환경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능동적 존재라는 주장은 일찍이 맑스가《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1845년)에서 다음과 같이 표명된 바가 있다.
3. 환경과 교육의 변화에 대한 유물론적인 학설은 환경이 인간에 의해 변화되고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따라서 이 학설은 사회를 두 부문―그 중 한 부분은 다른 한 부분보다 더 우월하게 된다―으로 나눌 수밖에 없다. 환경의 변혁과 인간 활동 혹은 자기변혁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또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맑스는 포이어바흐를 비롯한 기존 유물론의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 외부 환경적 조건을 도외시하고 인간이 무엇이든 변화시킬 수 있다는 관점도 주관적 몽상에 불과한 것이고 반대로 인간은 오로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태도 역시 수동적인 노예의식에 불과한 것이다. 맑스는 계몽사상이나 헤겔 좌파들이 영웅사관에 빠져 자신들이 진리의 담지자들이며 대중들을 일방적으로 교육하는 초월적 존재라고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것도 비판하고 있다.
주체사상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고유한 특성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자주성은 세계와 자기운명의 주인으로서 자주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
창조성은 목적의식적으로 세계를 개조하고 자기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
의식성은 세계와 자기 자신을 파악하고 개변하기 위한 모든 활동을 규제하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김일성 사상 비판 – 유물론과 주체사상》 , 하수도, 백두, 1988, 부록, 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1982년)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생명을 가진 다른 모든 물질은 객관세계에 종속되고 순응함으로써 자기의 생존을 유지하”는데 반해, “사람은 세계를 인식하고 변혁하여 자기에게 복무하게 만듦으로써 생존하며 발전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명을 가진 물질적 존재 중에서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이며 물질세계 발전의 특출한 산물”(같은 글)이라는 것이다.
북에서는 인간의 자주성, 의식성, 창조성은 각 개인의 생물학적 특성, 개별적 조건을 넘어“사회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발전되는 사람의 사회적 속성”으로, 그 조건이 갖춰질 때 전면적으로 발휘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늘어남에 따라 맹목적인 물신숭배에서 벗어나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자연에 대한 능동적 개입과 개조를 확대할 수 있다. 또한 무질서해 보이는 사회법칙에 대한 인식이 성장하고 생산수단을 인간이 집단적으로 소유하고 인간의 필요에 따라 사회를 사전 계획에 따라 조직할 때 사회는 전면적으로 발전될 수 있다. 따라서 착취사회에서, 민족적 억압을 받는 사회에서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억압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된 사회에서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 전면적으로 발휘할 조건이 갖춰진다. 이때 인간은 사회적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역으로 사회를 전면 개조하는 개조자로서의 역량을 최대한 능동적으로 발휘할 수 있다.
자연과 사회법칙에 대한 인식의 증대, 집단적, 협력적 노동의 성장, 억압과 착취를 철폐하기 위한 계급투쟁, 계급투쟁의 한 형태로써 민족적 억압에서 해방되기 위한 투쟁, 사회의 전면적 개조가 “사회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발전되는 사람의 사회적 속성”의 전면적 발전 조건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삶이 의식을 결정한다”는 (역사적) 유물론의 기본 명제를 떠난 인간의 속성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동시에 인간은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이며 물질세계 발전의 특출한 산물”이기 때문에 스스로 인간의 고유한, 잠재된 속성을 발휘하고 창조할 수 있는 능동적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해방의 물질적 조건 없이 해방은 있을 수 없고, 해방의 물질적 조건을 창출하는 것은 인간, 선진적 인간들인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그 선진적 인간들을 대표하는 계급이다.
사적 유물론과 정치사상의 문제
앞에서 노사과연은 “주체사상은 과도하게 상부구조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는데, 먼저 상부구조에는 무엇이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맑스와 엥겔스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 혹은 경제적 토대, 생산관계 위에 상부구조가 만들어진다, 상부구조가 규정된다고 했는데, 상부구조에는 정치, 법률, 제도, 국가, 종교, 이데올로기, 예술 등이 포함된다. 그렇다면 주체사상이 이러한 상부구조의 역할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주로 정치와 사상에 대한 강조를 두고 하는 비판일 것이다.
사상의식은 혁명과 건설에서 노는 사람들의 역할을 규제하는 결정적 요인입니다.사상의식은 혁명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행동의 계급적 성격을 규제합니다. 계급사회에서 초계급적인 사상이란 있을 수 없으며 사람들의 사상의식에서 기본은 계급의식입니다. 계급투쟁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립장은 계급의식에 의하여 규제됩니다. 물론 사람들의 활동은 사회계급적 처지에 기초를 두며 그에 의하여 제약됩니다. 그러나 사회계급적 처지는 어디까지나 사상의식을 거쳐서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계급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느 계급의 리익을 옹호하여 투쟁하는가 하는 것은 그가 어느 계급의 사상을 가졌는가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입니다. 선진계급의 사상, 자주적인 사상의식을 가질 때에만 옳은 계급적 립장을 가질 수 있으며 혁명 승리를 위하여 투쟁할 수 있습니다.(《김일성 사상 비판 – 유물론과 주체사상》, 하수도, 백두, 1988, 부록, 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1982년)
유물론적 관점에 의하면 사회계급적 처지가 사상을 제약한다. 계급적 처지에 따라 다른 입장과 사고를 가지게 된다. 흔히들 말하는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는 말도 여기에 해당한다. 착취 받고 억압당하는 노동자계급은 노동자계급의식을 가지게 되고, 자본가들은 착취자로서의 계급의식을 가지게 된다. 이렇듯 사회계급적 처지가 곧 사회적 의식, 사상을 주요하게 규정하지만 그것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계급은 착취 받고 억압당하면서 초보적 계급의식을 형성하지만, 그 계급의식의 성장은 투쟁하면서 발전하고 학습하면서 더 발전하게 된다.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강조한 것처럼, 진정한 계급의식은 자신의 문제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유물론적 사고를 할 때 형성될 수 있다. 반면 착취계급의 성원 중에서 사상과 세계관에 따라 혁명가들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과 달리 자본가계급 출신 혁명가는 자기 계급의 이해를 배반해야만 한다.
맑스주의에서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것이 사적 유물론의 기본원리지만 이를 속류적으로, 경제결정론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엥겔스는 “[…]유물론의 역사 파악에 따르면, 역사에서 종국적인 결정적 계기는 현실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입니다. 맑스도 나도 결코 이 이상의 것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명제를 경제적 계기가 유일한 결정적 계기라고 왜곡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명제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추상적이고 허무맹랑한 공문구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엥겔스가 쾨니히스베르크의 요제프 블로흐에게〉, 1890년 9월 21일, 박종철 출판사)”라며 속류적 해석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엥겔스는 “상부구조의 다양한 계기들―계급투쟁의 정치적 형태와 계급투쟁의 결과들 ―전투가 끝난 후 승리한 계급이 확립한 헌법 등등―법 형태, 그리고 또 이 모든 현실적 투쟁이 거기에 참가한 사람들의 머리에 반영된 것으로서의 정치적, 법률적, 철학적 이론, 종교적 견해와 이 견해의 교의 체계로의 가일층의 발전 등도 역사적 투쟁의 진행 과정에 영향을 주며 많은 경우에 주로 이 투쟁의 형태를 결정합니다”(같은 글)라고 주장했다.
엥겔스는 경제투쟁, 정치투쟁과 더불어 이데올로기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레닌은 이를 바탕으로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운동도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레닌은 또한 “정치는 경제의 집중적 표현”이라고 주장하면서 정치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 관하여》에서 “사회적 존재와 사회의 물질적 생활조건이 어떠한가에 의하여, 그 사회의 사상, 이론, 정치적 견해, 정치적 기구가 달라진다”라고 역사적 유물론의 기본원리에 대해 밝혔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렇다고 하여 맑스의 말에서 사회의 사상, 이론, 정치적 견해, 정치적 기구가 사회생활에서 의의를 가지지 않으며 그것들이 사회적 존재와 사회의 물질생활 조건들의 발전에 반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스탈린은 “사회사상, 이론, 견해, 정치적 기구의 의의, 역사에서 그것들이 수행하는 역할에 관하여 말한다면 역사적 유물론은 그것들을 부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회생활과 사회역사에서의 그것들의 중요한 역할과 의의를 강조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사회사상과 이론은 인민대중과 결합하면 “죽어가는 사회세력의 전복을 쉽게 해 준다”며 사회 개조자의 역할까지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오쩌둥 역시 “물론 생산력, 실천, 경제적 토대가 일반적으로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유물론자가 아니다. 그러나 또 생산관계, 이론, 상부구조 등의 일정한 조건하에서는 반대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도 역시 인정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생산관계를 변경하지 않고서는 생산력이 발전할 수 없을 때에는 생산관계의 변경이 주요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레닌이 말한 바와 같이 ‘혁명적 이론이 없이는 혁명적 운동도 있을 수 없다.’ 그런 때에는 혁명적 이론의 창시와 제창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모순론》)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예로 든 문장들은 속류 유물론, 기계적 유물론이 아니라 맑스레닌주의 사상의 정수이고, 풍부한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사상의식은 혁명과 건설에서 노는 사람들의 역할을 규제하는 결정적 요인입니다”, “선진계급의 사상, 자주적인 사상의식을 가질 때에만 옳은 계급적 립장을 가질 수 있으며 혁명 승리를 위하여 투쟁할 수 있습니다”는 주장을 가지고 “과도하게 상부구조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사상 자체가 올바른 것인지, 혁명 승리를 위한 것인지는 또 다른 검토가 필요한 것이지만, 여기서는 상부구조에 대한 “과도”한 강조 여부가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에 두고 판별할 수밖에 없다.
사상성의 강조, 정치에 대한 강조는 착취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에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착취사회를 극복한 뒤에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사람들의 사상의식은 사회경제적 처지와 물질생활조건들에 의하여 제약되지만 사회경제적 처지와 사회생활의 물질적 조건이 변한다고 하여 저절로 개변되는 것이 아닙니다. 낡은 사상잔재는 매우 보수적이고 집요합니다. 사상개조는 복잡하고 장기성을 띠는 사업이며 정력적으로 투쟁하여야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김일성 사상 비판 – 유물론과 주체사상》 부록, 하수도, 백두, 1988, 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1982년)
자본주의의 낡은 사상 잔재, 자본주의의 상품과 시장적 요소, 자본주의의 포위는 사회주의 내에서 수정주의를 낳았다. 사회주의에서 수정주의, 그것도 당과 지도자들 내의 수정주의는 당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권력 전체를 동요시키고 마침내 자본주의 복귀를 낳았다. 이는 실제 쏘련 및 동유럽 등지에서 현실 사회주의의 해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사상개조는 복잡하고 장기성을 띠는 사업이며 정력적으로 투쟁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과도하게 상부구조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가장 필수적인 요소를 언급한 것이다. 사회주의 생산의 조직화에 있어서도 사상성의 강조는 “과도”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요소와 투쟁하고 사회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원칙이다.
그런데 주체사상이 밝힌 “사람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라는 철학적 규명이 “세계관에서 새로운 변혁을 가져오게 한 철학적 발견”인지에 대해서는 필자가 불비 (不備)해서인지 여전히 온전하게 인식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맑스주의에서는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서 사회역사적으로 규정된 인간임을 강조하면서도 자연과 사회법칙에 대한 인식, 즉 필연에 대한 통찰로 자유를 향해 나아가고, 자연과 사회의 개조를 위해 인간의 목적의식을 강조하고, 계급의식과 전위성, 혁명성을 늘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북에서는 맑스레닌주의의 시대적 제한성을 말하지만, 우리는 이와 다르게 맑스레닌주의를 맑스와 레닌이 살았던 당시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맑스, 엥겔스, 레닌의 혁명적 사상과 원칙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던 인류의 진보적 역사와 투쟁, 민족해방투쟁과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와 경험 속에서 형성된 총체적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이론적 분석만으로는 한 사회를 지배하는 사상에 대해 온전하게 인식할 수 없다. 그 사상이 어떠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고 북의 사회체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아야 그것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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