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문제와 문재인 정권의 제반 노동정책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태도, 임무에 대하여

그림: Ben Shahn

1. 실업문제와 두 가지 유의점

지난 6월 8일 민주노총 중집에서의 일자리위원회 참여 결정과 그 참여를 정당화 하는 민주노총 한석호 사회연대위원장 같은 협조주의 세력들의 인식은 심각하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한석호 부류는 일자리 문제는 노사정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대타협 기구를 통해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 노동자, 특히 정규직 노동자의 양보를 설파한다.

그런데 일자리 문제를 살펴볼 때 우리는 두 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일자리 문제는 실은 실업문제라는 것이다. 현재 제기되는 일자리 문제는 이것이 자본주의라는 특정 생산양식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 일반의 문제로 바라본다. 따라서 일자리 문제를 자본주의 실업문제라고 할 때 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의 근본 원인과 해결방안이 좀 더 분명해진다.

둘째, 일자리 문제는 일자리를 둘러싸고 자본과 권력, 그리고 그 선전기관인 자본가 언론의 임금삭감, 노동유연화, 복지 축소 공세와 관련이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일자리 문제만으로 분리해서 봐서는 안 된다. 결국 일자리 문제는 단순하게 참여와 협상으로 정책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싸워서 쟁취해야할 계급투쟁의 문제다.

실업문제의 근본원인은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자본주의에서 실업은 필연적이다. 흔히들 말하는 “고용 없는 성장”처럼 자본이 성장하고 생산규모가 점점 더 커질수록 일자리는 점점 더 절대적으로 혹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자본주의에서 기업은 점차로 기계화, 자동화되면서 무인공장화, 무인기업화 되고 있다. 우리가 이용하는 지하철을 보더라도 무인 발권기 등으로 역무노동자들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자본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노동자의 노동강도가 심각하게 강화되고 시민안전이 위협받는데도 1인 승무 체제로 변화시키고 있다. 정규직 일자리를 대폭 외주화, 하청화하면서 지난 구의역 참사도 벌어졌다. 심지어 신분당선처럼 이미 무인체제로 작동되는 경우도 있고, 점차로 이는 확산 추세에 있다.

거대 장치산업인 화섬공장을 가보면 넓은 공장에 사람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자동차 공장은 프레스를 중심으로 로봇화되는 추세이며 조립라인에도 로봇이 늘어나고 있다. 최첨단 삼성의 생산 공장을 한 번 찾아가보자!

정밀금형 개발센터의 금형 생산라인과 프레스 공장은 한 수 위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에어컨 생산라인의 기계보다 훨씬 크고 육중한 기계들이 눈에 들어왔다. 공장 안을 둘러봐도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현장의 직원은 “축구장 2개 만한 사이즈의 생산라인에서 보통 90명 정도가 근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금형 생산라인은 설계부터 완성품 사출, 가공까지 거의 모든 과정이 자동화됐다. 금형 설계에서 자체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통해 수작업의 비율을 낮췄다. 55인치 TV 커버를 기준으로 어떤 모델이라도 3일 안에 설계를 마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제품을 가공하는 기계는 가공작업을 자동으로 수행할 뿐 아니라 내부 공구의 마모도를 스스로 측정하고 교환한다. 작업에 적합한 환경 유지도 자동으로 이뤄진다. 항온항습 시스템을 통해 작업장의 온도는 섭씨 23도(±2도)로, 습도는 50%(±10%포인트)로 유지된다.

이곳에서 사람이 하는 일은 시스템의 관리나 기계의 오류 해결 정도다. 삼성전자는 2019년까지 금형 생산 현장에서 아예 인력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잡고 있다.

프레스 라인도 사람이 필요 없기는 마찬가지다. 웬만한 방 크기만한 기계 하나에 원재료를 넣는 쪽에 한명, 완성품이 나오는 쪽에 한명이 배치된 정도다. 현장의 한 관계자는 “인간은 실수를 하지만 기계는 실수가 없다”고 말했다(이헌일 기자, [르포]삼성 프리미엄 가전 ‘심장’ 광주사업장 가보니…무인공장 눈앞 무풍에어컨 생산라인, 금형 생산라인 등 자동화↑… 생산성도↑, 뉴스1, 2017-04-19).

이처럼 “축구장 2개 만한 사이즈의 생산라인에서 보통 90명 정도가 근무”할 정도로 거대한 자본규모에 비해 노동자들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있다. 금형 생산라인은 모든 과정이 자동화 되어 있고 “시스템의 관리나 기계의 오류를 해결”하는 노동자만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것도 모자라 “삼성전자는 2019년까지 금형 생산 현장에서 아예 인력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잡고 있”을 정도로 점점 더 무인공장화로 치닫고 있다. 자본을 대행하는 현장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실수를 하지만 기계는 실수가 없다.”

자본은 또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인간은 저항하지만 기계는 저항이 없다.”

생산성이 올라간다는 것은 점점 더 적은 노동력으로 점점 더 많은 생산물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다. 이에 따라 자동화, 기계화로 노동력이 대량으로 축출되는 반면에 축출되지 않은 노동자들은 과도노동에 시달린다. 자본주의는 한 쪽에서의 실업과 다른 한 쪽에서의 과도노동이 공존하는 기묘한 체제다. 자본은 점차적으로 정규직 고용을 줄여가면서도 외주화, 하청화로 일터를 비정규직 공장, 비정규직 사업장으로 변모시켜나가고 있다. 그런데 불안정노동자 층인 비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반(半)실업자들이다.

특히 자본주의 주기적 공황의 시기에 자본은 대량 정리해고로 노동자를 쫓아낸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당한 정리해고의 고통과 그 고통으로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자살했다. 그 자살은 자본과 권력의 공모에 의한 사회적 살인이었다.

조선업종에서도 지금까지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방적으로 축출 당했다. 현대의 유랑민이라 할 수 있는 물량팀부터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축출당하고, 정규직의 가장 약한 고리라 할 수 있는 여사원, 생산직 기장(과장급), 기원(대리급)들이 정리해고의 위장된 형태인 – 자발성으로 위장됐기 때문에 저항을 줄일 수 있고 그리하여 가장 상습적으로 자행되는 – 희망퇴직으로 포장당한 채 잘려나갔다. 이제 남은 공격 대상은 생산직 중심 대오다. 그리고 다시 생산이 회복되면 자본은 그 자리를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대체해 나간다. 노조가 강력한 사업장에서는 정규직에 대한 한순간의 대량 정리해고 대신에 퇴직으로 자연 감원된 자리를 점차적으로 비정규직으로 채우면서 정규직 없는 사업장으로 점차적으로 변모시켜 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경쟁력을 가진 거대 자본은 이 과정에서 파산한 자본을 인수해서 집중을 강화한다. 이처럼 공황과 공황으로부터 회복의 과정은 노동자의 대량 축출과 비정규직화, 임금과 복지의 축소, 일부 자본의 파산과 소수 자본의 거대화로 살아남은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렇게 재편된 자본은 새로운 위기에 대비하자며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배가한다.

2. 산업예비군과 노동자 분열에 기초한 자본의 통합된 사회

실업자, 즉 산업예비군은 자본으로 하여금 취업 노동자를 경쟁시키고 길들이고 임금을 삭감시키고 심지어 노조를 약화, 파괴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 줄 섰어”

흔하게 듣는 얘기 아닌가? 이 말 자체는 욕설도 아니고 물리적 폭력은 아니지만 이 말이 현실적인 위협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자본주의 현실이다. 자본주의 냉혹한 경제법칙이 어떠한 물리적 폭력보다도 더 심각한 폭력이 되고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존심과 인격 따위는 다 버리고 기꺼이 노예화를 감수한다.

실업자는 상대적 과잉인구라고도 하고 산업예비군이라고도 한다. 실업자를 상대적 과잉인구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노동력이 남아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본의 성장과 규모의 확대에 비해 노동력 고용을 계속 줄이기 때문에 취업하지 못하는 과잉인구가 형성된다는 의미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인간 노동력이 시장에서 사고 팔린다. 이 때문에 “노동력 시장”이라고 한다. 인력시장, 노동력 시장에서 노동자들은 ‘노예’처럼 상품으로 매매되는데 자본가들은 이 점에서 현대의 노예 소유주와 같은 처지에 있다.

자본에게 산업예비군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산업예비군은 말 그대로 산업의 예비부대로서 대다수는 실업 상태에 처해 있지만 그 중 일부는 자본의 필요에 의해 언제든지 노동력 시장에 불려나올 수 있다. 산업예비군은 자본에게 노동력 수급조절의 마르지 않는 저수지와도 같다. 자본은 산업이 축소하거나 경기가 위축될 때는 저수지로 물을 흘려보내는 것처럼 노동자들을 예비부대로 내보내고 산업이 확장되거나 경기가 상승할 때는 예비부대에서 값싼 노동력을 공급받는다. 자본주의에서 산업예비군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며 이러한 과잉인구의 존재는 자본가들의 이윤추구에 필수적이기도 하다.

국가는 자본을 위해 노동력 공급정책을 취한다. 교육정책도 이 노동력 정책의 일환이다. 국가는 한편에서는 청년 실업 같은 과잉인구가 대량으로 존재하는 데도 노동력이 부족하다면서 출산 장려 운동을 펼친다. 해외에서는 값싼 이주노동자들을 수입해 온다. 한쪽에서 실업 노동자들이 대거 형성돼 있기 때문에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국가가 자본을 위해 이러한 노동력 정책을 쓰는 것은 언제든지 착취 가능한 실존재료인 산업예비군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산업예비군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필연적인 결과이면서 자본축적의 지렛대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왜 일자리 문제를 제일의 국정과제로 여기며 실업극복 운동을 펼치고 있는가? 대량 실업은 자본주의 체제의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6월 12일 일자리 관련 추가경정예산을 요청하기 위한 국회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실업문제의 심각성을 표현했다.

이미 통계청에서 발표하여 보도된 내용이지만, 우리의 고용상황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실업률은 2000년 이후 최고치, 실업자수는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청년 실업은 고용절벽이란 말이 사용될 정도로 매우 심각합니다. 연간 청년실업률은 2013년 이후 4년간 급격하게 높아졌고, 지난 4월 기준 청년실업률은 통계작성 이후 최고치인 11.2%를 기록했습니다. 체감 실업률은 최근 3개월간 24% 안팎, 청년 4명 가운데 1명이 실업자입니다(파이낸셜뉴스, 문재인 대통령 추가경정예산안 국회 시정연설, 2017.06.12.).

그런데 이런 심각한 실업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런 흐름을 바로잡지 않으면 대다수 국민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지속적인 성장도 어렵습니다. 통합된 사회로 갈 수도 없습니다. 민주주의도 실질이나 내용과는 거리가 먼 형식에 그치게 됩니다. 시민들이 투표에 참여하는 대의민주주의에 만족하지 못하고 거리로 나서게 되는 근본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국회 시정연설).

“대다수 국민”의 “행복”과 실질적인 “민주주의” 같은 불평등의 문제를 제기하지만, “시민들이 참여하는 대의민주주의에 만족하지 못하고 거리에 나서게 되는 근본이유”가 실업 문제에 있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는 저항이 일어나면서 “통합된 사회”가 아니라, 계급 간 갈등과 대립, 투쟁이 극렬하게 일어나는 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자본과 권력은 최대한으로 이윤을 보장받으면서 “통합된 사회”, 즉 자본의 착취와 지배에 대한 저항이 가로막힌 사회를 막기 위해 분투해 왔다. 이 자본에 의해 “통합된 사회”는 역설적으로 “분열하여 통치하라!”는 지배계급의 모토에 맞춰 노동자 계급의 분열에 기초해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자본의 집적과 집중에 따라 노동자들이 하나의 사업장으로 집중하면 단결이 강화되고 자본에 대한 집중적 투쟁이 강화된다고 했다.

그러나 산업이 발전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숫자가 증가할 뿐 아니라 보다 큰 무리로 집중되어 힘이 성장하며, 그 힘을 자각하게 된다. … 타의적이기는 하지만 부르조아지가 촉진시키는 산업의 진보는 경쟁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고립 대신 결사(結社)로 인한 혁명적 결합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현대산업의 발전은 부르조아지가 생산물을 생산하고 전유하는 바로 그 토대를 그 발 밑에서 무너뜨리는 셈이다. 결국 부르조아지가 생산하는 것은 자기자신의 무덤을 파는 자일 뿐이다. 부르조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양자 모두 불가피한 것이다(공산당선언, 백산서당, 남상일 옮김).

그런데 현대 자본은 비용을 절감하여 이윤을 늘리고 노동자의 단결과 투쟁을 회피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외주, 하청, 도급, 자회사 설립, 파견, 용역, 아웃 소싱 등이 그것이다. 이로써 실제 원 자본은 하나로 집중되어 거대해지는데도 불구하고 형식상 여러 자본으로 쪼개서 노동자를 효과적으로 분열, 통제, 지배하고 있다. 오늘날 노동자들은 보통 자신의 진짜 적인 자본가들과 싸우기 보다는 그 적의 하수인들과 흩어져서 싸우고 있다.

건설산업 역시 5중, 6중으로 촘촘하게 중층 하도급 제도를 운영하는데 이는 시행사, 시공사들에게 최대 이윤을 보장해준다. 노동자들의 집결과 저항도 무마할 수 있다. 건설산업에서 노동자들 일자리 부족도 점점 더 심각해지는데 이주노동자들을 초저임금으로 대량 고용함으로써 국내노동자들을 점차로 축출해나가고 이 때문에 국내외 노동자들끼리 심각한 분열과 대립이 조장된다.

문재인 정부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핵심 과제로 선정하고 강하게 추진하고 있다. 공공 부문부터 전환 작업을 시작해 민간 부문까지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민간 부문에는 비정규직을 일정 비율 이상 고용한 기업에 부담금을 부과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하지만 비정규직의 일괄 정규직 전환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먼저 비정규직의 범위를 어디까지 볼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

정부가 비정규직 범위를 선정해도 현장에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비정규직을 모두 ▲사용자 직접 고용 ▲전일제 근무 ▲고용 보장 등 세 가지가 충족되는 정규직 고용 형태로 전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을 일괄 전환하기에는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이 너무 크다. 아울러 업무 형태에 따라 현장에서 필요한 근로자의 유형도 다르다.

이에 따라 일자리위원회는 정규직 전환 방법으로 내부 정규직화, 무기계약직화, 자회사의 정규직화 등을 검토하고 있다. 정부가 용인하는 정규직 범위를 과거 개념(▲사용자 직접 고용 ▲전일제 근무 ▲고용 보장) 보다 조금 더 넓힌 것이다. 노동계가 ‘중규직’이라고 반발하고 있는 무기계약직도 정규직 전환으로 인정한다. 또 자회사를 만들어 비정규직을 자회사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방안도 정규직 전환 방법 중 하나로 언급된다. 이렇게 되면 사용자가 근로자를 직접 고용하지 않아도 정규직 전환으로 인정 받을 수 있다(전슬기 기자,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가능한 걸까…전환 범위가 중요, 조선비즈, 2017.06.05.).

문재인 정권 들어 자회사 직고용 사례가 점차적으로 생겨나고 있는데 이는 고용이 상대적으로 안정화 된 측면도 있지만 자본의 자회사 분할정책의 일환이기도 하며 저임금의 영구적 비정규직화의 길이기도 하다. 상시고용이 된다고 해서 정규직인 것이 아니다. 모회사로부터의 인사, 경영, 사업, 노무관리의 독립성이 없는 자본 하에서 상대적으로 저임금, 낮은 복지 체계 속에서 일하는 자회사 노동자들 역시 비정규직이다. 자본은 내용적으로는 자회사의 인사, 경영, 사업, 노무 관리 전반을 촘촘화된 위계 구조로 사실상 지배하면서도 형식적 분할을 통해 노동자들을 분할하여 관리, 통제한다. 이로써 노동자의 요구에 대한 책임도 회피하고 단일 노조 건설도 막고 개별 노조를 언제든지 쉽게 분쇄할 수 있다.

경총은 비정규직의 범위를 최소화하고, “아웃소싱은 기업 경쟁력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내용 등을 담은 ‘비정규직 오해와 진실’이라는 책자를 만들어 놓았다가 이에 문재인 대통령이 26일 “경총도 비정규직으로 인한 사회적 양극화를 만든 주요 당사자 중의 한 축으로서 반성해야 한다”고 질책을 하자 배포를 일시 중지했다. 그러나 정부 역시도 이미 알려진 것처럼 직고용 자회사 같은 저임금 무기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선언함으로써 자본과 한편이 되어 비정규직 범위를 최소화 하고 있다. 비정규직 범위를 최소화 한다는 것은 자본의 이윤 범위를 최대화 하는 것이다. 비정규직 철폐 투쟁이 노동자 계급에 의한 계급투쟁이라면 ‘비정규직 오해와 진실’은 자본에 의한 계급투쟁이다.

이처럼 자본에 의해 “통합된 사회”는 노동자 내부의 분열에 기초하여 자본이 지배, 관리하는 억압된 착취사회다. 이 자본에 의해 “통합된 사회”를 분쇄하고 노동자 단결로 진정으로 “통합된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3. 일자리 위원회,

실업문제 원인 은폐, 책임 전가 노사정 대타협 모델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일자리 문제는 실은 실업문제이다. 그것은 외형적으로는 단순하게 일자리가 부족하거나 인구가 절대적으로 남아돌아서 생긴 문제인 것 같다. 그러나 가령 공황처럼 자본주의 산업순환의 결과 자본의 생산이 급격하게 위축되면서 생기거나, 최소한의 고용으로 최대한의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적 생산성 향상의 결과로 생기는 등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본주의의 특수한 문제다. 따라서 실업문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극복하면 해결가능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노사정이 실업문제에 대해 공동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본과 자본주의가 책임이다.

그런데 민주노총에서 정부가 만든 일자리위원회 참여 문제를 논할 때는 실업문제의 근본원인을 과학적으로 통찰하여 실업문제와 싸우고, 실업문제를 낳는 자본주의와 싸우기 위한 방편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대신 정부가 만든 위원회에 참여하여 “노정, 노사(산별교섭 등), 노사정 등 가능한 모든 차원에서 다층적·중층적 교섭(협의) 구조 마련”을 통해 일자리를 확충한다는 몰계급적인 관점으로 이 문제에 접근했다.

그렇기 때문에 중집 내부에서도 일부 중집위원들은 민주노총의 일자리 참여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던 것이다. 당시에 제기된 우려는 두 가지였다.

일자리위 참여를 반대하는 의견은 크게 두 지점이었다. 하나는 비정규직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흘렀던 노사정위원회처럼 될 것이라는 우려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즉시 일자리위를 탈퇴하고 투쟁하면 되는 문제라서 다수 동의를 얻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의 책임 있는 인사들의 입을 통해 일자리위를 노사정위처럼 운영할 뜻이 없다는 점을 확인한 상태였다.

다른 하나는 일자리위가 정규직 양보론으로 흐를 거라는 우려였다. 어떤 방식으로 정규직을 압박할 것이라는 내용은 제시하지 않았다. 별다른 논의는 없었다. 일자리위 참여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누구는 정규직 양보라 표현하고, 누구는 비정규직과의 연대라 표현하는 것이 이번 결정에서는 영향을 끼치지 못했지만, 노동운동과 민주노총이 머리 맞대고 고민해야 할 지점인 것은 분명하다. 현실의 양극화 문제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다(한석호 노동운동가, 민주노총이 일자리위원회에 참여한다, 매일노동뉴스, 2017.06.12.).

일자리위원회가 “비정규직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흘렀던 노사정위원회”처럼 된다면, “그 즉시 일자리위를 탈퇴하고 투쟁하면 되는 문제”라고 쉽게 생각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노사 간, 노정 간, 노사정 간 “대타협 기구” 참여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몰계급적이고 노자 타협주의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일자리 문제를 자본주의 체제의 실업문제로 보지 않고 단순하게 양적으로 일자리가 부족한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인식처럼 노사정이 이 문제에 대해 공동의 책임이 있는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에 따라 노골적으로 “노사정 대타협”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서유럽 국가들도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거치면서 지혜를 모아 나온 것이 노사정 대타협”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초 노사갈등이 격화되고 실업률이 치솟는 상황에서 기업은 일자리를 보장하고 노조는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하는 내용을 담은 ‘바세나르 협약’을 노사정이 체결하면서 경제 위기를 극복한 네덜란드 사례나 2000년대 초 일자리 창출과 동시에 노동유연화를 추진하는 사회적 협약을 배경으로 한 독일의 ‘하르츠 개혁’을 염두에 둔 것이다.(김경락 박태우 기자, 김진표 국정기획위원장 “재벌 먼저 반성해야 노·사·정 대타협 가능”, 한겨레, 2017-05-28)

‘바세나르 협약’이나 독일의 ‘하르츠 개혁’은 대표적인 “노사정 대타협” 모델이다. “일자리 창출과 동시에 노동유연화를 추진하는 사회적 협약”은 일자리 창출을 명분으로 노동유연화 즉, 정규직을 줄이고 비정규직을 늘리는 정책과 맞교환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비정규직 확대다. 저임금 비정규직 확대가 일자리 정책으로 포장되어 사회적 정당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정책에 노동운동 진영이 “노사정 대타협”이라는 이름으로 들러리를 서게 되는 것이다. 청와대 일자리 전광판에 일자리 수치는 올라가게 될 것이나 노동자들의 상태는 심각하게 후퇴하게 될 것이다.

일자리 감소는 필연적인 자본주의 법칙이므로 벼락처럼 내리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진행되는데 반해, 일자리 확충은 자본의 의지, 약속에 따라 지극히 산술급수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정부에 의한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은 최대한이라야 수만 개다. 정부는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이 민간부문으로 확대되는 “마중물”이라지만 자본은 일자리 충원 의무가 없다.

일자리 확충을 위한 노사정 대타협의 노력은 파업자제와 투쟁 자제, 노사협조, 노정, 노사정 협조 체제의 구축 및 이를 위한 선행조치로 무쟁의 및 무파업 선언을 하고 임금동결 내지 임금인상 자제, 정규직의 양보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문제다. 노조가 이 조건을 이행하면 자본은 일부 생색내기로 고용을 확충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때에 자본의 조치는 노동자의 투쟁으로 강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추가 비용을 써서 고용을 창출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규직 임금 양보분으로 부분적인 추가 고용을 단행하게 될 것이다. 그것조차도 온전한 정규직 고용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이처럼 노사정 대타협이 순조롭게 이행되는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은 심각한 후퇴를 겪어야 하는데 급격한 공황이 닥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자본은 파산을 면키 위해 노동자들을 우선적으로 대거 정리해고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지난 날 현대자동차, 한라중공업, 대우자동차,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과정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본과 정권은 비정규직 우선 정리해고에 이어, 임금삭감 공세, 퇴직금 양보, 단협 후퇴에 이어 희망퇴직, 나아가 정규직 정리해고로 거침없는 공세를 취하게 될 것이다. “일자리 창출과 동시에 노동유연화”의 교환, 이것이 박근혜 정권 하에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한다면서 정규직 과보호론 운운하며 정규직 임금삭감, 비정규직 확대 정책을 폈던 것과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위기가 찾아왔을 때 대처하는 방식은 나라마다 달랐습니다. 네덜란드는 1982년 노·사·정이 함께 참여하는 ‘바세나르 협약’으로 위기를 탈출했습니다. 근로자의 임금인상 억제와 노동시장 유연성 확대, 공무원의 봉급 삭감, 국민들의 복지혜택 축소 등 경제주체 간에 철저한 고통분담으로 국가경쟁력을 다시 높였습니다. 노동계는 임금동결을 감내했고, 기업은 추가수익을 직업훈련에 투입하고 고용을 늘리는 데 활용하는 선순환을 이뤄냈습니다. 네덜란드는 그 과정에서 ‘어려울 땐 힘을 합치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산 교훈을 얻었습니다([전문]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교섭단체대표연설… “고통분담 통한 사회적 대타협 운동 벌여야”, 국민일보, 2014-10-30).

박근혜 정권은 이 같은 논리의 연장선 속에서 청장년 상생고용이라는 명목 하에 임금피크제를 도입하여 장년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하였다. 2015년 6월 새누리당과 김무성은 “SK하이닉스 노조가 공생하는 노사관계, 상생하는 노사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이 시대 최고의 애국이라 높이 평가하고 싶다”며 어용노조의 정규직 임금삭감을 모범사례라며 극찬했다.

박근혜 정권 하의 노동자에 대한 공세가 일방적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노조의 저항을 낳았다. 그것을 학습한 문재인 정권은 이번에는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동계 상층의 전반적인 참여와 포섭을 통해 훨씬 더 정교한 논리와 “대타협” 분위기 속에서 전국적으로 진행하려고 한다. 결국 이는 반노동자적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그 추진이 강압적인 방식 대신에 은근하게 노사정 대타협이라는 방식으로 동의와 설득을 통해 저항을 줄이고 자본의 이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만 조금 다른 것이다. 노사정 타협이라는 명목으로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끌어들여 포섭하고 이들을 통해 반노동자적인 합의를 이끌어 냈던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노사정위원회와도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결국 일자리위원회 참여를 반대하면서 일부 중집위원들이 심각하게 우려했던 “비정규직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흘렀던 노사정위원회”와 “정규직 양보론으로 흐를 거라는 우려”는 단지 기우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렇게 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자!

민주노총 중집에서 합의한 “노정, 노사(산별교섭 등), 노사정 등 가능한 모든 차원에서 다층적·중층적 교섭(협의) 구조 마련”은 바로 바세나르 협약, 스웨덴 모델이다. 그런데 이는 지난 대선이 본격화되기 전에 사회연대노동포럼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문재인 지지 선언을 했던 민주노총 내 변절자들이 내세웠던 주장이다.(이와 관련해서는 2017년 1월 19일 울산노동포럼 출범식 동영상을 참고) 이들은 당시 새 정권에 자신들이 적극 참여할 때 이러한 교섭구조가 충실하게 확립될 수 있다는 논리로 투항을 정당화 했다. 민주노총은 지난 2월 7일 이에 대해 공식 성명서를 통해 규탄했다.

민주노총과 민중진보진영이 촛불과 함께 제대로 투쟁하지 않는다면 보수야당으로 정권교체를 해도 변하는 것은 대통령의 얼굴이고 집권여당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럼에도 더민주당 유력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당신들의 자유이다.

그러나 더 이상 민주노조운동과 민주노총을 입에 담지 마라.

‘새로운 대한민국’을 열망하는 천만 촛불민심을 ‘묻지마 정권교체’로 폄훼하지 마라.

민주노조와 민주노총을 버리고 양지를 찾고 싶으면 부끄러운 마음안고 홀로 가라.

그런데 “보수야당으로 정권교체를 해도 변하는 것은 대통령의 얼굴이고 집권여당일 뿐이다.”라고 신랄하게 문재인 지지 선언을 비판했던 민주노총은 정작 정권이 교체되자 일자리위원회 참여를 통해 노사정 대타협을 모색하고 있다. 전직 간부와 활동가들이 대거 문재인 지지 선언을 했다면, 이제는 정권 교체 이후에 민주노총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노사정 대타협 노선을 걷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지지 선언 투항자들이 정권 내부로 깊이 편입되어 노사정 대타협 노선을 확고하게 걷고자 했다면, 민주노총은 정권 바깥에서 노사정 대타협 노선을 걷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지지 선언자들이 이 광경을 보면서 “뭐 묻은 *이 뭐 묻은 * 나무란다”고 할 것인가? 이제 변절자들이 오늘날 민주노총의 행보를 보면서 자신들의 투항 행보가 정당했노라고 하지는 않을까 자못 궁금하다.

4. 양극화 대신 소득 불평등은 자본의 책임 은폐

한석호는 “현실의 양극화 문제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일자리위원회 참여와 정규직 양보론이 필요하다며 ‘소득 불평등’ 사례를 인용하고 있다.

노동연구원 홍민기의 ‘소득불평등 현황과 대책’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전체 개인소득자 2천664만명 가운데 연평균 소득 1천만원 미만이 38.4%인 1천22만명이나 된다. 1천만원 이상 2천만원 미만은 21.1%였다. 59.5%가 1년에 2천만원을 벌지 못했다. 6천만원 이상이면 10% 안에 들었고, 8천만원 이상이면 5% 안에 들었다(같은 글).

그런데 한석호는 이 통계로부터 임금양보를 끌어낸다.

개인소득은 노동자 근로소득자뿐 아니라 사업소득자와 재산소득자를 합한 통계였다. 한데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한 임금격차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터넷에서 조금만 검색해도 얼마나 끔찍한 통계가 쏟아지는지를.

도대체 노동운동과 민주노총은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사회의 10% 안에 드는 노동자의 임금인상분 일부를 비정규직기금으로 내놓거나 정규직 임금인상률보다 비정규직 임금인상률을 더 높이는 것은 자본에 대한 ‘정규직의 양보’인가, 아니면 비정규직에 대한 ‘정규직의 연대’인가. 이것도 규명해야 할 점이다. 물론 나는 정규직이 비정규직의 손을 잡는 연대라고 보는 입장이다(한석호, 같은 글).

한석호는 일자리위가 “정규직 양보론으로 흐를 거라는 우려였다. 어떤 방식으로 정규직을 압박할 것이라는 내용은 제시하지 않았다. 별다른 논의는 없었다.”면서 정규직 양보론이 기우에 불과하다고 하더니 결론에 와서는 “정규직 양보론”을 노골적으로 표명한다. 정규직 양보론을 “정규직의 연대”로 “규명해야 할 점”이라고 물타기 하면서 노동자 양보론을 설파한다.

자본의 언론은 이미 문재인 집권 이전에 한석호의 “사회적 대타협” 주장을 환영하며 노동운동이 이러한 방식으로 재편되기를 종용하고 나섰다.

민주노총 내부에서 변화의 목소리를 내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한석호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이다.

한 위원장은 이날 “갈수록 확대되는 사회적 격차는 노사정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면서 “노조가 임금을 동결하고 임금인상분을 기금으로 만들어 비정규직 중소·영세 하청 및 청년 노인 등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 전체가 참여하는 대타협 기구를 통해 상대적으로 소득이 높은 기존 노조원의 임금을 동결하고 그 상승분을 비정규직 청년 등에게 나누자는 의견이다. …

조성재 노동연구원 노사관계 연구본부장은 “민주노총이 점점 자신들이 고립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면서 “명분에 집착해 중앙단위에서 정치투쟁을 할 것이 아니라 지역별 산별노조를 중심으로 사회적 대화를 해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광주광역시에 연소득 4000만원짜리 ‘적정임금’ 일자리를 만들어 현대자동차의 투자를 유치하고 이를 통해 일자리를 늘리자는 이른바 ‘광주형 일자리’를 기획한 사람도 민주노총 출신 박병규 광주사회통합추진단장이다.

민주노총의 변화 움직임이 차기 정부에서 노사정을 넘은 사회적 대타협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될지 주목된다.

지난 박근혜 정부 당시에도 2015년 노사정 대타협 안을 만든 바 있지만 파견법 기간제법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합의가 어그러진 바 있다. 하지만 사회적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새로운 노동형태와 규율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노사 모두 형성되고 있어 대화와 타협의 장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다(나현준 기자, 민주노총에 부는 변화의 바람 “비정규직에게 좀 나누자”, 매일경제, 2017.04.21.).

민주노총 내에 변화의 목소리는 “사회적 대타협” 노선에 입각한 노사협조주의를 가진 일련의 흐름들이다. 과거에는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둘러싼 사회적 합의주의자들이었다. 이 흐름은 이명박, 박근혜 정권 들어서서 사회적 합의주의 보다는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형태의 노동자 탄압을 자행하자 대세를 형성하지 못하고 운신의 폭이 좁았다. 그러나 박근혜가 탄핵당하고 차기 정권에서 일련의 타협주의적 행보가 예상되자 물 만난 물고기마냥 설쳐대고 있다.

민주노총 한석호 사회연대위원장은 “민주노총 내부에서 변화의 목소리를 내는 대표적인 인물”인 것이다. 민주노총 상근자 내부와 각 산별, 연맹, 지역본부 등 노동운동 내에도 상당수의 사회적 합의주의 세력들이 포진해 있다. 이들 흐름은 “사회적 대타협” 노선을 바탕으로 “명분에 집착해 중앙단위에서 정치투쟁을 할 것이 아니라 지역별 산별노조를 중심으로 사회적 대화를 해나가야 한다”는 타협주의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과거 영남노동운동연구소를 거점으로 영남의 상당수 전 현직 간부, 이를 기점으로 “사회연대노동포럼”처럼 문재인 지지선언을 하고 노동운동을 재편하려는 일련의 흐름들, 강신준 같은 교수들도 “다층적·중층적 교섭” 구조 확립을 요구하며 사회적 타협 노선을 부추기고 있다. 이 흐름은 스웨덴 “연대임금제”를 모델로 선제적인 “정규직 임금양보”를 마치 노동운동 신노선인냥 내걸고 있다.

조선업종 구조조정 당시에도 이 흐름은 “조선업종 살리기”라는 협조주의 노선으로 양보교섭을 바탕으로 회사 살리기, 자본 살리기 노선을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 노선은 현실주의 노선을 취하고 있지만 자본의 급격한 위기 시에는 노동자의 일방적인 후퇴와 양보로 점철하면서 비현실적인 노선이라는 것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총고용 보장”을 내걸고 있지만, 비정규직 우선 정리해고를 수수방관하고 임금삭감, 퇴직금 양보, 단협 양보와 희망퇴직 수용 등 “총생존 양보” 노선을 걷고 있다.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박병규 역시 ‘광주형 일자리’를 내세워 “광주사회통합추진단장”으로 이 사회적 타협 노선을 걷고 있다. “광주형 일자리”는 “사회적 대타협”을 위해 노동자 또는 노조가 선결적으로 “임금인상 자제”로 “적정임금”을 준수하고 그 대신 투자 보장을 통해 일자리 1만개를 창출하겠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 62만대 수준인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에 추가적으로 38만 대의 친환경 자동차 생산설비를 조성해 자동차 100만대 생산기지를 만들고 광주시는 규제완화 등으로 이를 지원하겠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한겨레, 고용절벽 시대, 연봉 4천만원 ‘광주형 일자리’ 재조명, 2016-05-22 기사 참고)

노동자의 임금인상 자제도 문제지만 자동차 산업에 공황이 닥치면 이 사회적 타협의 조건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기아차 위기, 현대차 정리해고,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쌍용차 정리해고처럼 자본은 한 방에 타협의 조건을 무너뜨리고 노동자를 정리해고 했다. “사회적 대타협” 같은 협조주의 노선으로 일관하여 무장력을 상실한 노조가 이럴 때 어떻게 노동자의 생존과 고용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당장 광주형 일자리는 “노사관계 안정 및 공정 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을 전제로 하는데, “노사관계 안정”이라는 노조의 무쟁의, 노사화합 기조도 문제지만, “공정혁신”과 “생산성 향상”이 자본을 고도화, 합리화하고 노동력을 줄이는 것인데, “일자리 확충” 정책과 이것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결과인 실업을 노동자 내부의 문제로 전가하려는 자본의 의도에 동조해서 노동자 내부의 임금 격차를 부각시키며 정규직의 임금 양보를 주장하는데, 실업문제 해결의 전제조건으로 “정규직의 임금 양보”가 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한석호의 주장처럼, 실업문제와 “갈수록 확대되는 사회적 격차”가 “노사정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극화는 무엇인가?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 자본주의는 이미 20대 80의 사회, 90대 10의 사회도 모자라 1%대 99%의 사회가 되었다. 2011년에도 미국에서 “1%에 맞선 99%의 저항”을 구호로 내걸고 월가 점령운동이 전개됐다. 1%는 재벌 같은 독점자본가들을 말한다. 1% 독점자본이 이 사회를 지배하면서 부의 불평등과, 압도적 다수 민중의 빈곤과 차별이 심화됐다.

맑스는 양극화(궁핍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한 쪽 끝의 부(富)의 축적은 동시에 반대 편 끝[즉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 생산하는 노동자계급의 측]의 빈궁 · 노동의 고통 · 노예상태 · 무지 · 야만화 · 도덕적 타락의 축적이다(칼 마르크스, 자본론, 1권 하, 제25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881쪽).

맑스는 이를 “자본주의적 축적의 적대적 성격”이라고 하고 있다. 맑스는 “소득 불평등”이라는 객관적 현상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한 쪽 끝에서의 부의 축적이 다른 반대쪽에서의 노동자 계급의 빈궁과 노동의 고통, 노예상태 등을 낳는다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 무지와 야만화와 도덕적 타락 역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의 지배의 결과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엥겔스 역시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범죄와 개인들의 도덕적 타락조차도 빈곤과 무지를 강요하고 노동의 고통을 강요하는 자본주의의 산물임을 폭로하고 있다.

1% 재벌 족속들, 그리고 그 재벌의 이해에 복무하는 지배계급 내의 관료집단, 정치인, 자본의 이데올로기적 대변인인 일부 학자, 교수, 언론인, 고위 군인, 고위 경찰 등을 합하면 5% 남짓한 자들이 누리는 거대한 부와 풍요와 압도적 다수 노동자 민중의 빈곤과 고통은 따로 따로 존재하는 사회적 현상이 아니다. 한 줌도 안 되는 지배계급과 그 일파들이 누리는 막대한 부와 권력 뒤에는 압도적 노동자 민중의 실업, 장시간 노동, 산재와 직업병 등 고통과 노예적 굴종이 있다. 부자들, 자본가들의 착취와 약탈 때문에 민중 다수가 빈곤으로 고통 받고 있는 것이다. 대중의 참상 위에 저들 지배계급의 행복과 풍요가 있는 것이고, 2대, 3대 영구적인 부와 권력과 행복과 쾌락의 세습과 2대, 3대를 잇는 영구적인 가난과 불행과 고통의 세습이 있는 것이다. 저들은 자본과 부를 독점할 뿐만 아니라 풍요와 행복도 독점한다. 지배계급의 역사가 왕들, 양반들의 주지육림 뒤에서 배를 주리며 그 향락을 채워주던 생산하는 절대 다수 민중을 삭제했듯이, 그 보다, 수십 배 더 부와 향락을 누리는 현대 자본가들의 배후에서 노동하는 노동자 민중을 없애버렸다.

자본가들은 이 엄연한 현실을 철저하게 감춰서 저항이 없는 “통합된 사회”를 만들려고 한다.

양극화라는 용어는 소득계층이 양극의 두 계층으로 분화되고 두 계층의 갈등이 심화됨에 따라 사회통합과 궁극적으로 성장의 저해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등장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20년이 지난 현재 OECD 가입국 중에서 중산층이 몰락되어 소득계층이 이분화되는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한 나라는 없다. 다만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소득불평등이 심화되었으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소득양극화 해소를 위하여>(유경준 선임연구위원, KDI FOCUS, 2012년 4월 23일(통권 제15호), [노동자정치신문 85호] 계급적대 현실의 은폐와 조작1 – 한국개발연구원(KDI) 양극화 보고서 실체, 2012-05-21).

흔히 사용되는 지니계수로 측정되는 소득불평등도와 양극화 지수로 측정되는 소득양극화 간에는 학문적인 개념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양극화의 의미가 계층 간의 갈등을 야기시키려는 의도로 사용되는 점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여기에서는 이후 소득양극화라는 용어 대신 소득불평등을 사용하고자 한다(같은 보고서).

이처럼 자본가 이데올로그들은 양극화라는 용어를 한사코 회피하고 소득불평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고 한다. 그런데 노동운동을 한다는 자들이 자본의 이러한 의도에 부합하여 자본가들한테는 찍소리도 않으면서 오직 노동운동 내부의 양보를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 때는 종북몰이에 앞장서서 진보정당을 분열시키는데 앞장서던 한석호가 이제는 노동계급 내부의 분열과 계급타협 노선을 설파하여 자본에 투항하고 있는 것이다.

한석호는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한 임금격차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터넷에서 조금만 검색해도 얼마나 끔찍한 통계가 쏟아지는지를”이라고 개탄한다. 그런데 한석호는 자본이 조장한 노동자 내부의 격차를 끔찍하게 생각하면서도 그보다 수십, 수백 배 더 한 자본의 이윤, 그 이윤으로부터 나오는 재산과 자산소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수천 배, 수만 배 끔찍한 통계가 쏟아질 것이다. 그것은 단순 통계가 아니라 끔찍한 범죄다. 자본이 자행하는 살인이다. 제국주의 체제로 가면 더욱 더 심각하다. 미국만 보더라도 대내적으로는 경찰에 의한 수천 명의 자국민의 연쇄 살인과 대중의 빈곤과 인권과 민주주의의 유린과 함께 대외적으로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동유럽, 남유럽 세계 전역에서 전쟁과 파괴를 일삼으며 빈곤과 내란을 조장하고 수없는 난민을 만들어내고 있다. 미제국주의 옆에는 나토 제국주의가 있다.

노동자 내부의 “소득 불평등”을 말하며 노동자의 양보를 말하기 전에 자본이 만들어낸 “끔찍한 통계”를 보라!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수치상의 통계가 아니라 전 세계 수억, 수십억 노동자 민중에 대한 잔혹한 공격이라는 것을 보라!

5. “사회적 대타협” 노선이 아닌 노동자대투쟁 노선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 전개됐다. 민주주의 투쟁의 기초 위에서 억눌리고 착취당하던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다. 이로써 민주주의 문제는 곧 자본과 노동의 계급적대의 한 표현임을 노동자들은 투쟁으로 보여줬다.

2016년 말 2017년 초 박근혜 퇴진 이후에 아직 노동자 대투쟁은 전개되지 않고 있다. 조기 대선 이후에 계급 적대가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대타협” 노선이 지배적이다. 아직 2017년 노동자대투쟁은 오직 않았다.

지금까지 살펴봤듯, 실업문제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적대적 성격”에서 비롯됐다. 자본과 권력에게 일자리 문제는 노동자의 저항의 폭발을 막고 자본이 안정적으로 지배하는 “사회 통합”을 위한 것이고, 자본의 이윤이 안정적으로 보장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자리 문제는 노동자에 대한 포섭과 통제, 투쟁의 무마, 계급의식의 마비, 수치상의 일자리 확대와 비정규직의 증대, 수치상의 일자리 확대의 조건으로 노동자의 임금양보 등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본과 권력에게 실업문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근본적 문제임을 은폐하여 노동자들이 착취가 종식되고 실업이 없는 세상을 향해 정치적으로 나아가려는 것을 분쇄하는데 목표가 있다.

점점 더 만성적이고 대량화 되어 가는 실업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자본주의는 존재할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그 자본주의의 파국의 가능성은 노동자 민중이 조직되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때 해결될 수 있다. 그렇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파국의 객관적 가능성은 노동자 민중의 생존의 파국이 될 뿐이다. 따라서 실업 문제는 단순하게 양적으로 일자리를 확보하는 문제가 아니라 착취와 수탈을 종식시키고 해방으로 나아가는 문제다. “사회적 대타협”으로 노동자가 실업문제의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실업 문제에 맞서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의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실업 문제의 해결은 노동자 계급의 사상의 문제이고 노동운동의 전략적 목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이며 노동운동을 어떻게 재편성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당장 당면한 목표로 실업 문제는 노동자 계급이 생활임금을 쟁취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획득하는 문제다. 왜냐하면 자본의 이 사회 지배에 의해 생겨나는 실업문제를 저들은 항상 노동자에게 책임을 분담하고 임금을 삭감하는 계기로 삼았기 때문에 실업의 문제는 임금의 문제, 즉 생활임금을 쟁취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서 “소득주도성장론”을 내걸고 있는데, 이는 김상조가 지난 4월 대선 기간 동안 “문재인 후보의 경제철학은 케인즈주의”라는 말을 했듯이, 케인즈주의의 일종이다. 소득주도 성장론의 취업자의 증가->가계소득의 상승->소비증대=>경제활성화라는 기조는 분명 케인즈주의의 일종이다. 일본에서 아베 정권이 최저임금 상승 운운하자, 미국, 독일, 심지어 박근혜 정권조차도 너나없이 최저임금 상승을 운운했다. 그러나 실제 최저임금 인상을 비롯해 노동자들의 실질임금 인상은 자본에 의해 사사건건 가로막혔다.

맑스는 이에 대해 “사회의 소비능력은 절대적인 소비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인 분배관계-이것은 사회의 대다수 민중의 소비를 최저수준으로 인하하여 다소 좁은 범위 안에서만 변동할 수 있게 한다-에 근거한 소비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사회의 소비능력은 축적충동(drive for accumulation)-자본을 확대하여 더욱 큰 규모로 잉여가치를 생산하려는 욕구-에 의해 더욱 제한되고 있다.”(자본론, Ⅲ상, 제15장 법칙의 내적 모순들의 전개, 293쪽)고 하고 있다. 맑스는 “이 축적충동은 자본주의적 생산을 규제하는 법칙”이라고 하고 있다.

자본 간의 “전반적인 경쟁전”, 이것에서 패배하면 “몰락의 위협”에 처해지기 때문에 자본은 한사코 “생산을 개량”하고, “자본을 확대하여 더욱 큰 규모로 잉여가치를 생산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자본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리려는 시도가 자기의 이윤을 줄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적대적이다. 이리하여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의 이윤을 추구하려는 욕구와 임금을 인상하려는 노동자들의 욕구가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자본주의에서 “소득주도성장”은 계급투쟁의 힘으로 강제하지 않는다면 “적대적인 분배관계” 때문에 필연적으로 실패로 돌아간다.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말한 것처럼, “놀라운 기술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나 여전히 반기아상태의 빈곤에 허덕이는 대중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 그것은 이미 자본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대중의 반기아적인 생활수준은 모두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근본적이고 불가결한 조건이며, 그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황은 자본으로서는 노동자에 대한 공세를 통해 이윤을 확대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자리 확보의 조건으로 임금을 인하한 뒤에 공황에서 회복된 이후에도 임금은 오르지 않고 있다.

미국의 5월 실업률은 4.3%로 거의 완전고용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시간당 명목임금 상승률은 1년 전에 비해 2.5%였고, 물가상승을 고려한 실질임금 상승률은 4월 0.1%를 기록했다. 2015년 이후 명목임금 상승률이 높아지고는 있지만 매우 느리다. 이러한 ‘임금 없는 성장’은 이제 경제의 새로운 수수께끼가 되고 있다. …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손부족과 경기회복을 배경으로 일본의 실업률은 지난 4월 2.8%로 1994년 이후 최저를 기록했다. 그러나 현금급여 총액은 1년 전에 비해 0.5% 증가했고 실질임금 상승률은 제로였다. 임금상승의 둔화가 인플레와 경기회복의 발목을 붙잡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다른 선진국도 사정은 비슷해서 전세계가 비슷한 몸살을 겪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국가의 임금상승은 왜 이렇게 더딘 것일까. 미국은 위기 이후 급락한 고용률이 최근에야 높아지고 있어서 아직 노동시장이 느슨하다는 관측이 제시된다. 또한 오래전 거시경제학자들이 지적했듯 노동자들이 침체에 익숙해져 갈망하는 임금 수준이 낮아졌는지도 모른다. … 다른 이들은 노동자들의 협상력이 약화된 것이 중요한 요인이라 지적한다. 노조 조직률 하락과 기술변화 그리고 세계화 등을 배경으로 임금인상 압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임금상승이 정체되고 있는 직접적인 이유는 좋은 일자리가 많이 생겨나지 않는 현실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5월 미국의 노동시장은 13만8천개의 일자리를 새로 만들어냈지만 주로 생겨난 일자리는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은 식당종업원이나 교육과 의료 서비스 등의 일자리였다.

그러나 이와 함께 노동시장의 구조적인 변화에도 주목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소위 ‘긱 이코노미’의 발전과 함께 임시직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최근의 한 연구는 2005년 이후 10년 동안 이러한 일자리의 비중이 약 10%에서 16%로 높아졌고, 그 증가가 같은 기간 동안 순수히 늘어난 일자리 수와 같다고 보고한다. 일본도 아베노믹스 이후 현재까지 정규직의 수는 거의 변동이 없지만 비정규직은 약 200만명이 늘어나 그 비중이 더욱 높아졌다(이강국 리스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 왜 임금이 오르지 않는 것일까?, 한겨레, 2017-06-12).

일자리가 없는 마당에 언감생심 무슨 임금이냐며 임금인상을 자제하고, 노조 협상력과 조직률이 약화되는 것 등이 경기회복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오르지 않는 이유다. 경기는 회복됐지만 노동자의 투쟁력은 곧바로 회복되지는 않는 것이다. 이 점을 볼 때도 “사회적 대타협” 운운하며 임금을 삭감하고 노조의 투쟁력을 약화시키면 설사 경기회복 이후에도 노동자의 삶의 조건은 나아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고용 없는 성장”으로 한 방 맞고, “임금 없는 성장”으로 또 한 방 맞아 노동자의 삶은 만신창이가 되어 휘청거리게 되는 상황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임시직 비정규직의 증대 같은 “노동시장의 구조적인 변화”도 심각해지는 것이다. 결국 실업의 문제는 일자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생활임금과 비정규직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만성적인 대량 실업과 “저임금 자본주의”, “불안정한 노동”으로 점철되는 자본주의가 되고 있는 것이다. “정규직의 임금양보”, “사회적 대타협” 운운하여 노동자의 투쟁 대오를 무너뜨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 강력하게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 계급 내부의 단결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열,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의 분열, 국내외 노동자 간의 분열, 청년 노동자와 중장년 노동자의 분열, 노동자의 지역별 분열을 깨야 한다.

이에 기초하여 사드 반대 투쟁, 농민 쌀값 인상 투쟁 등 전체 인민의 평화와 생존의 문제를 가지고 폭넓은 투쟁전선을 구축해야 한다. 노동자 계급 내부의 단결은 이주노동자와의 국제주의적 단결과 함께, 특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이 중요하다. 이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본의 집중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단결을 가로막는 외주화, 하청화 등 자본의 자본분할 정책, 노동자 분열정책을 효과적으로 분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정규직 임금 양보론”은 “비정규직에 대한 ‘정규직의 연대’”로 포장되어 있지만, 노사, 노정, 노사정 “대타협 노선”을 바탕으로 하는 조합주의자들의 전략이다. 조합주의는 자본주의 철폐의 전망을 상실하고 있으며, 노자 간의 계급투쟁 보다는 노동자 내부에서 정규직의 선제적 양보를 주장한다. 이들은 비정규직 차별을 개선한다는 명분으로 이를 합리화하는데 정작 실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비정규직 투쟁에 대해서는 연대를 외면한다.

기아차 노조 김성락 집행부에서 벌어진 1사 1조직 분리 같은 노동자 분열 책동은 바로 그 조합주의 노선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기아차 자본은 배후에서 이 분리책동을 사주한 바, 노사일체의 타협 노선이 이런 식으로 구현됐던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계급적 단결은 자본에 맞서는 공동의 투쟁이어야 한다. 노동계급이 투쟁으로 쟁취한 삶의 수준의 하향평준화가 아니라 상향평준화를 지향해야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자본의 착취질서를 철폐하는 공동의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운운할 정도로 자본주의 생산력의 발전이 여전히 가속화 되고 있다. 구글 알파고와 같은 인공 지능이 확산되고 있다.

인간 노동력이 점점 더 줄어든다는 것은 지겹고 위험한 노동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될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런데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실업 문제를 낳는다. 현재의 생산력 발전 수준에서는 4시간으로 평균 노동시간을 단축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노동자들이 그 시간만큼 추가로 고용되어 일하게 된다면 현재 수준의 생산물과 서비스를 사회에 공급할 수 있다. 이로써 실업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미 자본주의 사회는 언제나 과잉생산이 문제일 정도로 생산물과 서비스 공급이 충분하다. 다만 대다수 노동자들이 빈곤하고 자본은 점점 더 임금을 깎으려 하기 때문에 그 생산과 서비스를 소비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자동화, 기계화가 노동자의 지겨운 노동, 장시간 노동, 위험한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향유하는 계기가 아니라 노동자를 축출하게 하는 사회를 숙명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버스 고정 좌석처럼 일자리 수가 절대적으로 제한돼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UPH(Unit Per Hour, 시간당 표준 생산량, 즉 1시간에 만들어내는 자동차 대수로 작업속도를 나타낸다), M/H(Man/Hour, 시간당 투입 인원으로 작업 공수라고도 한다.)를 둘러싼 작업장 투쟁처럼 “노동강도 저하”, “인력 충원” 투쟁이 일상적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투쟁의 결과에 따라 노동강도가 정해지고(노동강도 강화는 인력 감소와도 같다.) 작업인원(일자리수)이 정해진다.

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도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 강화 없는, 노동강도 강화 없는 실질 노동시간 단축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야간노동의 폐지로 나아가야 한다. 버스, 화섬 등 현재로서는 불가피한 심야 노동의 경우에 4시간 노동 이하로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노동시간이 단축된 자리에 추가 노동력을 고용하도록 함으로써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당장은 “일자리 창출” 운운하기 전에 대량으로 정리해고된 조선업종 노동자들이 복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동양시멘트, 쌍용자동차, 아사히글라스, 전국자동차판매노동자연대, 콜트콜텍, 동진오토텍 등 정리해고 사업장 노동자들이 전원 복직되어야 한다.

대량 정리해고로 노동자에게 “사회적 살인”을 자행하도록 자본에게 합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정리해고제를 철폐해야 한다. 맑스가 정체적 과잉인구라고 했던 “취업이 매우 불규칙적인 현역 노동자집단의 일부”인 비정규직은 실업의 일종이다. 불안정 노동자층이 사라져야 한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기간제법과 파견법을 철폐하는 것이 실업을 없애고 인간다운 노동과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이것이 현 정부의 “일자리 정책”의 첫 번째 시험대이다.

무엇보다도 이 글 전체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실업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필연적 결과이고, 그것이 노동자의 임금삭감과 삶 전반에 대한 악랄한 공세로 나타나기 때문에 착취체제 자체를 철폐해야 한다. 착취체제의 철폐는 계획생산을 가능하게 하여 실업을 종식시키는 근본적인 길이다. 2017년은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다. 다시금 착취와 억압이 없는 해방을 향한 새로운 대장정에 나서자. 이 사회의 무위도식자들인 기생충들을 박멸하자.

한국노동자들에게 드리는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궁지에 내몰린 자본주의(Capitalism at a Dead End)》에서 제시하고 있는 주제는 공황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 노동자들의 안녕과 존엄, 그리고 계급해방을 쟁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노동자들을 경쟁하고 하고, 남쪽의 노동자들과 사회주의 북쪽을 겨루게 하는 자본가 계급의 분열적이고 지배적인 술책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이윤체제를 끝장내야 한다. 오직 자본가 계급만이 이러한 분열로부터 이익을 보고 있다.

진정한 무상의 사회안전망을 세우고, 적정한 보건의료, 모두에게 제공되는 무상교육, 대중들을 위한 저렴한 비용의 주택을 세워 나가고, 생산성 증가의 압력을 끝장내고, 실업과 빈곤을 끝장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본가 계급과 자본가 국가 그리고 자본가 정당들로부터 벗어나서 사회를 통제하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노동 착취 체제를 운영하고 있고, 청년들과 학생들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에게 모든 고통을 가하는 이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경찰과 군대, 법원 체계를 조직하고 있다.

우리는 사회를 움직이는데 자본가 계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모든 부를 창조한다. 우리는 사회를 운영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우리는 사회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모든 전문인력들을 소집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제학자들, 우리 자신의 계획 입안자들, 우리 자신의 기술 고문들을 가질 수 있다.

자본가 계급은 완전한 기생충들과 같다. 그들은 오직 우리가 이윤의 형태로 창조한 부로부터 훔친 수 조원을 모으는 일만 할 뿐이다. 반면 우리는 매일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골드스타인(Fred Goldstein), 궁지에 내몰린 자본주의 첨단기술 시대의 일자리 파괴, 과잉생산과 공황, 노동자의 사상 제6호, 2014년 1월, 한국어판 서문, 2013년 12월)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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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일자리 문제와 문재인 정권의 제반 노동정책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태도, 임무에 대하여”의 1개의 생각

  • 2017년 6월 29일 10: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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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다시 과학 변혁의 사상, 사조, 조류, 주의, 이념을 절대적으로 요하는 시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히려 타협을 운운할 시기가 아닌 노동자(& 무산자)들의 역량강화를 외칠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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