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학생행진은 어쩌다가 정치적 파멸의 행진을 하게 되었는가? 1

‘진보’와 ‘좌파’를 자임하던 전국학생행진(이하 학생행진)이 정권교체를 내세우며 국민의힘 윤석렬을 지지(물론 그렇다고 진보진영임을 자처하면서 정권연장을 내세우며 민주당 이재명을 지지하는 것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정치적 타락이기는 마찬가지다.)하게 되었는가?

사회과학은 우연적 계기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인과관계를 분석하고 필연성을 통찰하는 것이다. 학생행진은 어쩌다가 반공극우적 관점으로 타락하게 됐는가? 그리고 학생행진을 비난하는 사람들, 진보단체들은 모두 그들의 정치적 오류와 타락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가?

학생행진의 극우적 타락을 가십거리로만 삼거나 분노하고 만다면 그로부터 제대로 된 정치적 교훈을 이끌어내 우리운동의 전진 기회로 삼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정치적 일탈의 근원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그들이 범하고 있는 정치적 과오가 전체 진보진영에서 유사하게 되풀이 된다면 더욱 큰일이다.

비록 학생행진 내부의 내밀한 논란이나, 사건들, 우연한 계기들에 대해서까지 알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알려진 입장만으로도 학생행진의 정치적 파멸의 근본 원인들을 분석해봐야 한다.

도식적이라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분명한 인식을 위해 이 사태를 정리해보면, 학생행진의 극단적 우경화 뒤에는 사회진보연대가 있으며, 그 뒤에는 윤소영 교수와 프랑스 ‘맑스주의자’ 알튀세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밀교화”된 서구 ‘신좌파’의 대표자 알튀세르

한국에서 알튀세르는 동유럽과 쏘련 사회주의 해체 과정에서 소개됐다. 알튀세르는 사회변혁과 계급투쟁의 무기로 소개되기 보다는 사변적이고 엘리트주의적으로 소개됐다. 알튀세르는 사회주의권의 해체 전후로 한국에서도 “맑스주의의 위기”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인식됐는데, 맑스주의의 혁명적 원칙을 부정하면서 실제로는 그 위기를 더 깊게 했다. 이는 알튀세르의 이론을 한국에 잘못 소개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이론 자체의 문제로부터 나타난 것이었다.

알튀세르주의는 ‘서구 맑스주의’ 이론의 특성에서 고스란히 나타나는 모습처럼 비대중적이고 지극히 사변적이다. 대개가 강단사회주의로 대중의 혁명적 실천과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페리 앤더슨은 《서구 마르크스주의 읽기》에서 이러한 서구 ‘맑스주의자’들의 이론의 사변적 난해함에 대해 “밀교화(密敎化)”라고까지 표현했다. 알튀세를 포함한 서구 맑스주의자들의 글은 마치 밀교집단들이 자신들만의 은밀한 세계에서 알 수 없는 괴이한 언어를 읊조리듯이 폐쇄적이었다. 그 밀교집단에는 노동자대중은 출입할 수 없었으며 극소수 지식인들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이는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1차 대전 이후 유럽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혁명이 패배하면서 태동”하고 “사회주의 이론과 노동자계급 실천 간의 분리[이론과 실천의 분리] 속에서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구 맑스주의의 이러한 특징은 현실과 괴리됨으로써 언어만 난해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과학적으로 반영하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더욱이 이는 비단 패배주의를 넘어 맑스주의를 전면부정하고 관념론과 공생관계를 맺으면서 지배계급에 투항하는 것이었다.

노동자계급의 실천투쟁과 맺었던 역동적인 관계를 상실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당대의 비마르크스주의와 관념론의 사유체계에 점차 자리를 내주었고, 더불어 이런 사유체계들과 모순적인 공생관계를 발전시켜 나갔다.(페리 앤더슨, 같은 책)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맑스주의 변증법적 유물론 체계를 처음부터 부정하는 것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그 자체가 관념론적 사고체계였다.

서유럽 맑스주의는 스탈린 사후 1956년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시작된 후르시초프의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격하운동과 쏘련의 ‘헝가리 침공’, 후르시초프의 스탈린 탄핵에 반대하는 중국 공산당의 반발로 시작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분열 등 역사적 격동을 계기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후르시초프의 스탈린 탄핵은 비단 개인에 대한 탄핵에 그치지 않고 전 인민의 국가론, 제국주의와의 평화공존론, 사회주의 이행의 평화적 길 등 맑스주의의 혁명적 원칙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후르시초프는 ‘개인숭배’와 ‘중공업 우선 정책’을 척결할 것을 요구하면서 조선(북한) 공산주의 운동의 자주성도 심각하게 침해했는데, 이를 계기로 조선(북한)에서는 1956년 8월 ‘종파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스탈린 시절 사회주의 건설의 성과와 독일 파시즘과의 투쟁 승리로 승승장구하던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해방 운동은 이때부터 심각하게 분열, 동요하게 되고 끝내는 동유럽과 쏘련 해체라는 비극을 맞게 되었다. 후르시초프 수정주의는 제국주의와의 ‘해빙’ 운운하며 “신고전파 경제학자들과 동맹”(《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 냉전시대 경제학 교류의 숨겨진 역사》(조하나 보크만, 홍기빈 옮김, 글항아리)을 맺고 ‘신자유주의’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또한 ‘반스탈린’을 내세운 반공문학이 횡행했는데, 1962년 출간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때부터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던 스탈린과 쏘련사회주의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권위와 위신이 크게 떨어지고 ‘반스탈린주의’를 내세워 쏘비에트에 부정적인 인식을 하고 맑스주의 원칙을 부정하는 흐름이 대세가 되었다. 모든 것을 ‘스탈린주의’의 문제로 돌려서 사물과 사건의 역사적 본질을 회피하고 왜곡하는 비유물론적 태도가 만연하게 되었다.

알튀세르와 서구 지식인들 일부가 물론 중소분쟁 당시에 쏘련 사회주의 대신 중국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일본 공산주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 공산당은 중소 분쟁 당시에 처음에는 중국 공산당의 편을 들었지만 나중에는 천황제를 인정하고 조선(북한) 같은 현실 사회주의를 적대시하는 반공주의 정당으로 전락해 버렸다.

쏘련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무지, 맑스레닌주의 사상에 대한 확고한 인식의 결여, 패배주의 등이 서구 맑스주의자들과 공산당들의 변절의 원인이 되었다. 후르시초프 때 시작되어 고르바초프 때 정점에 달한 반사회주의 책동에 맞섰던 니나 안드레예바는 ‘개인숭배’ 비판이 ‘자유주의 좌파 사회주의’의 반쏘비에트 책동이라며 다음과 같이 문제제기를 했다.

그들은 과거와 현재의 위대한 성취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조국의 과거 역사에는 실수와 범죄들만이 실제였다는 주장을 우리에게 침투시킨다. 역사적 진실의 완전성을 자처하면서, 그들은 사회발전의 사회정치적 특징을 윤리적 범주의 스콜라 철학으로 대체한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의 당 중앙위원회와 쏘비에트 정부의 모든 지도자가 열악한 역사적 도정에서 가장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저질렀던 그의 실제적인 실수와 실수라고 불리는 것들 그리고 오류와 관련해 타협으로 해결하고 손상했던 것을 누가, 무엇을 위해서 필요로 한 것인지 나는 궁금하다. 세계 첫 번째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자라는 권위와 긍지를 무너뜨리려는 열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니나 안드레예바, “나는 원칙을 포기할 수 없다”,  쏘비에트 러시아, 1988년 3월 13일, <노동자의 사상> 2호 [보론1],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1년 4월)

서유럽 맑스주의는 ‘신맑스주의’로 불리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행했는데, 이는 “반공주의의 일종”(T.I. 오이저만, 《맑스주의 철학성립사》 서론, 아침, 1988년)”이었다는 규정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었다.

서구 맑스주의자들은 대개 초기 맑스(청년 맑스)와 후기 맑스(성숙한 맑스)를 대비시키며, 초기 맑스는 경제학 철학 수고를 저술했던 인본주의(휴머니즘)로서의 맑스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창한 후기 맑스를 부정했다. 이와는 반대로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단절”을 주장하며 초기 맑스주의를 전면 부정했다. 그런데 알튀세르는 초기와 후기가 비약적 발전이면서도 동시에 초기 맑스주의와 연속해 있다는 것을 변증법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알튀세르는 경제적 토대를 바탕으로 상부구조가 들어선다는 맑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을 ‘경제환원론’이라면서 비판하면서 “모순의 중층결정(또는 과잉결정)”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자본노동의 모순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이 모순이 그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구체적인 역사적 정황들과 형태들에 의해 항상 고유화되어 있다는 근본적 생각이 도출된다. 상부구조의 형태들(국가, 지배이데올로기, 종교, 조직화된 정치운동)에 의해 고유화되어 있고, 한편으로는 민족적 과거 그 자체(완수되거나 ‘억제된’ 부르주아 혁명,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제거된 또한 전혀 제거되지 않은 봉건적 착취, 지역적 ‘풍속’, 고유한 민족적 전통들, 정치적 투쟁과 행위의 ‘고유한 스타일’ 등…)에 따른 규정성을 행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존의 세계적 맥락(자본주의적 민족들의 경쟁 또는 ‘제국주의적 국제주의’ 또는 제국주의 내부에서의 경합이 지배적안)에 따른 규정성을 행사하는 내적, 외적인 상황에 의해 고유화되었다는 것이다. 이 현상들의 다수는 레닌적 의미의 ‘불균등발전의 법칙’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모순은 겉으로는 단순하게 보이지만 항상 중층결정되어 있다는 식으로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루이 알뛰세르, 《맑스를 위하여》, 이종영 옮김, 백의)

한 사회의 모순이 “결코 순수한 상태에 있을 수 없다”(같은 책)는 점은 분명하다. 알튀세르의 주장대로 한국사회 모순만 보더라도 자본과 노동의 모순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모순, 분단모순, 민주주의 모순, 노동자계급과 소상공인과의 모순, 각 부문영역에서의 모순 등이 결합되어 중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분명하다. 이 중에는 적대적 모순도 있고 비적대적 모순도 있다. 레닌이 말한 것처럼, 이러한 모순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사회 전체의 문제, 심지어는 다른 계급의 문제까지 유물론적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진정한 맑스주의자가 아니다. 조합주의적이고 편협한 인식에 사로잡혀 그야말로 ‘노동자주의’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알튀세르가 맑스주의를 ‘경제환원론’으로 만든 주된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는 스탈린은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는가?

스탈린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 관하여》에서 “사회적 존재와 사회의 물질적 생활조건이 어떠한가에 의하여, 그 사회의 사상, 이론, 정치적 견해, 정치적 기구가 달라진다”라고 역사적 유물론의 기본원리에 대해 밝혔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렇다고 하여 맑스의 말에서 사회의 사상, 이론, 정치적 견해, 정치적 기구가 사회생활에서 의의를 가지지 않으며 그것들이 사회적 존재와 사회의 물질생활 조건들의 발전에 반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스탈린은 “사회사상, 이론, 견해, 정치적 기구의 의의, 역사에서 그것들이 수행하는 역할에 관하여 말한다면 역사적 유물론은 그것들을 부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회생활과 사회역사에서의 그것들의 중요한 역할과 의의를 강조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사회사상과 이론은 인민대중과 결합하면 “죽어가는 사회세력의 전복을 쉽게 해 준다”며 사회 개조자의 역할까지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다.([민족과 계급3] 맑스주의와 조선(북)의 사상1), 전국노동자정치협회)

스탈린의 이러한 인식을 보면 알튀세르가 말한 ‘경제환원론’이라는 비난이 전적으로 부당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스탈린의 인식을 ‘경제환원론’이라고 하여 부정한다면 알튀세르는 역으로 사회적 존재와 물질적 생활조건이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맑스주의 역사적 유물론의 기본원리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 유물론의 기본적 토대를 부정하고 모순이 중층적으로 결정된다고 하면 역사를 변화시키는 근원적인 동력인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인식할 수 없게 된다. 물론 알튀세르는 마오쩌둥의 《모순론》을 인용하면서 주요모순과 부차적 모순의 관계를 언급하고 “전위에 의해 생산된 이 주요모순은 응축에 의해서만(‘융합’에 의해서만) ‘결정적’, ‘폭발적’이 된다고 하지만, 추상적인 수준에서의 분석에만 그치고, 한 사회의 모순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모순을 해결할지, 이 주요모순이 어떻게 응축되어 결정적 계기에 폭발하는지,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전략 주체는 누구이고 동맹의 대상은 누구이고, 이행의 특수성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분석을 하지 않는다.

알튀세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최종심급’이라는 고독한 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고 하여 모순이 중층적으로 결정된다고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지배적 모순들, 결정적 모순들에 대한 이해는 포기하고 있다. 결국 중층적 모순들 가운데, 사물의 본질적 성격을 규정하는 지배적 모순은 무엇인지, 그 모순이 각 단계마다 특수한 주요모순을 형성하고, 이것은 어떠한 계기로 변화하게 되는지, 그 중층화된 모순이 집중되고 그 모순들을 해결하는 중심에 있는 노동자 계급을 어떻게 조직화 하고, 중심에 선 노동자 계급이 누구와 손잡고 누구를 배제하고 누구를 중립화 시켜 다른 여타의 모순을 해결할지, 지배계급의 약한 고리는 무엇인지 등을 고려하지 않고 한 사회 모순이 순수한 상태에 있을 수 없고 모순이 다양한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는 주장은 하나마나한 공허한 주장에 불과하다. 결국 그렇게 되면 애초 의도와 달리 각각의 모순을 분리해서 보거나 병렬적으로 나열해보게 된다. 주요모순을 해결함으로써 전체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을 무시하게 된다. 모순인식과 해결의 순서를 외면하고 힘의 집중을 부정하게 된다.

더욱이 알튀세르가 ‘경제환원론’이라고 비난하는 스탈린은 새로운 사회사상과 이론은 인민대중과 결합하면 “죽어가는 사회세력의 전복을 쉽게 해 준다”는 것을 강조하고 혁명적 실천에 나섰는데 반해, 알튀세르는 “역사는 주체 없는 과정”으로 인간이 역사의 주체나 역사 발전의 주동자가 아니라며 사변적인 철학적 담론들만 늘어놓았다. 알튀세르는 프랑스 자본주의를 어떻게 변혁할지, 프랑스 공산당을 어떻게 혁명적으로 개조할지, 혁명적 사상을 어떻게 대중투쟁과 결합시킬지 같은 실천적 전망에 대해서는 제대로 고민하지 않았다. 말년에 가서 알튀세르의 현학성과 비혁명성은 훨씬 더 심해졌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중요한 지적기원 중 하나를 정신분석학에 둠으로써 맑스주의를 부정하기도 했다. 또한 알튀세르는 “‘지식은 그 실재 대상과 상응하기 때문에 진리’라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을 배격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으로 규정하고자 했다. 지식과 실재 대상의 상응은 ‘경험주의’”(강동훈, “윤소영 교수의 알튀세르주의”, 마르크스 21, 1호, 2009년 봄) 라고 비판했다. 알튀세르는 이론이 실재하는 대상의 반영이라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핵심인 ‘반영론’을 부정한 것이다. 이로써 “이론적 실천”이라는 명목으로 이론을 우위에 두고 이론과 실천의 통일, 인식과 실천의 통일을 경시하고 지식인의 상대적 자율성이라는 명목으로 당과 조직성을 경시하고 자유주의 지식인의 면모를 닮아갔다.

알튀세르는 1976년 프랑스 공산당 22차 당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을 폐기한 것에 저항했으나 출발부터 맑스주의의 혁명적 원칙에 확고하지 못하고 비실천적인 알튀세르가 이러한 흐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세계사적 운동의 퇴보적 흐름을 막고 맑스주의를 위기에서 구출하겠다던 알튀세르는 자신이 위기에 빠져버렸다. 이후 알튀세르 추종자들은 훨씬 더 우경화되면서 사회주의 국유화를 부정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로 전화되어버렸다면서 결국 프롤레타리아 독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었다. 알튀세르주의는 전위당 노선이 이러한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를 낳았고 당형태의 역사적 유효성이 사라졌다며 당과 사회주의 국유화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버렸다.

알튀세르주의가 부정되고, ‘포스트 담론’, 곧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식민주의 등과 같이 소부르주아 잡사상이 밀려들어온 것이 아니다. 혁명적 전망을 상실하고 패배주의에 빠진 채로 대중의 혁명적 실천과 분리되어 맑스주의를 전화, 개조하겠다는 알튀세르주의가 소부르주아 잡사상과 ‘융합’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맑스주의의 전화가 실패한 자리에 남는 것은 부문운동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유행하는 신좌파 운동이다. 신좌파 운동은 각각의 부문적 모순 해결을 국가권력, 자본주의 체제, 분단체제와 싸우는 투쟁과 분리해버렸다. 혁명성을 상실하고 고립주의, 분리주의, 일면주의, 표면주의에 빠져버렸다. 신좌파는 노자적대성, 노동자중심성을 인식하지 않음으로써 적녹보라론이라고 노동, 생태, 여성, 인권, 장애 등의 문제를 체제와 권력과의 투쟁으로부터 분리해버렸다.

애초 레닌주의자임을 선언했던 알튀세르 제자 발리바르는 대표적 알튀세르주의자로서 신좌파 청산주의의 주요 이론가가 되었다. 알튀세르주의는 맑스주의의 청산주의이자 반맑스주의 다원주의의 대표 사상이 되어 버렸다. 알튀세르가 자기모순, 자기분열에 빠지고 극단적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부인을 살해하고 정치적으로도 완전 파멸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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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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