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계급4] 맑스주의와 조선(북)의 사상2)

법칙과 의지의 관계 문제

 

주체사상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객관세계를 무시하고 언제 어느 때나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가? 자연세계와 인간사회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또한 주체사상에 대한 비판 중에 객관적 조건을 무시한 의지주의, 주관주의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자주 제기된다. 북에서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뭐라고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사회력사적운동은 자연의 운동과 구별되는 자체의 고유한 합법칙성을 가집니다. 물론 사회적 운동도 물질적운동이라는 점에서는 자연의 운동과 공통성을 가집니다. 사회적운동에도 물질세계의 일반적법칙이 작용합니다. 그러나 자연의 운동에는 주체가 없지만 사회적운동에는 주체가 있습니다. 자연의 운동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들의 호상작용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사회적운동은 주체의 주동적인 작용과 역할에 의하여 발생발전합니다.일부 사람들은 주체사상이 사람중심의 세계관이라고 하면 마치도 그것이 객관세계를 무시하고 인간의 주관적욕망이나 념원을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것 같이 생각하는데 이렇게 보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를 보아야 한다고 하였지 사람만을 보라고 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물질세계에서 주인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물질세계에서 인간은 유일한 자주적존재입니다….인간은 자연의 변화발전법칙에 복종되여 자연과 운명을 같이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에 고유한 사회적운동법칙에 따라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해나가는 사회적존재입니다. 자연을 개조하는 인간의 창조적역할이 커질수록 세계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의 지위는 더욱 높아지게 되며 인간밖에 있는 물질세계는 더욱더 인간에게 복무하는 세계로 개변되여 가는 것입니다.(김정일, 〈주체사상교양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1986년,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맑스주의에서는 인간의 의지로부터 독립한 내적 법칙이 존재하고 심지어 그것은 “자연사적 과정”(맑스, 《자본론》 1권 서문)임을 강조하면서도 자연과 인간사회의 발전사는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사회발전의 역사는 한 가지 점에 있어서는 자연발전의 역사와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자연에서는(우리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을 도외시하는 한) 다만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인 힘이 상호 작용하며 일반적인 법칙은 이러한 힘의 상호 작용 가운데 발현한다.… 그와는 반대로 사회의 역사에서는 의식을 가지고 신중하게 또는 열정적으로 행동하는 인간들이 일정한 목적을 추구하면서 활동한다.(엥겔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돌베개)

이처럼 무의식적이고 맹목적인 자연과 다르게 인간사는 “의식을 가지고 신중하게 또는 열정적으로 행동하는 인간들이” 사회발전과 변화의 목표와 전망을 가지고 활동하게 된다.

맑스주의에서는 법칙을 필연이라고 하고 자유는 그 법칙을 통찰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객관법칙과 인간의 의지, 노력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자유라는 것은, 흔히 몽상하는 바와 같이 자연법칙에서 독립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법칙을 일정한 목적에 계획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지는 곳에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자유라는 것은 자연필연성(Naturnotwendigkeit)에 대한 인식에 근거하여 우리 자신과 외적 자연을 지배하는 데 있다. 따라서 자유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역사발전의 산물이다.(엥겔스, 《반듀링론》, 새길)

《자연변증법》에서도 엥겔스는 마찬가지로 “자연을 개조하는 인간의 반작용, 즉 생산”을 이야기 하며, “인간은 의식을 갖고 자신의 역사를 더욱더 스스로 만들며, 예견하지 못한 작용들과 통제되지 않는 힘들이 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더 적어지며, 역사적 결과는 이전에 확정된 목적에 더욱더 정확하게 일치하게 된다”(《자연의 변증법》, 박종철 출판사)고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객관법칙과 인간의 의지와 노력, 실천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법칙을 인식하지 못하면 인간은 자연의 노예가 되어 지배당하고 자연에 대한 물신숭배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법칙을 제대로 인식하고 법칙에 의거하여 사업을 한다면 애초에 계획한 목표에 최대한 부합해서 사업이 성공할 수 있다. 자연개조뿐만 아니라 변혁사업도 마찬가지다.

물론 자본주의는 이윤추구가 생산의 목표이고 상품생산이 지배적인 사회인데,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치법칙이 생산의 조절자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가치법칙이 생산의 조절자의 역할을 한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균형적이고 합리적인 체제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치법칙은 자본주의에서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과잉생산 공황처럼, 생산과 인민의 삶에 파괴적이고 파멸적으로 작동하면서 그 속에서 법칙으로 작동된다. 자본주의에서는 무정부성과 무계획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와 계획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그 의지와 계획도 사회 전체의 발전과 진보에 있기 보다는 특수한 계급들, 즉 자본가 계급과 그 일파의 이익에 봉사하게 된다. 그렇다면 무정부성과 무계획성을 폐기하고 계획생산 체제인 사회주의에서 법칙은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계획으로 법칙을 창안할 수 있는가?

정치경제학의 특성의 하나는 그 법칙이 자연과학의 법칙과 달라서 장구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적어도 그 대다수는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작용하다가 그 후에는 새로운 법칙에 자리를 내어 준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이 법칙은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제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효력을 상실하고 무대에서 물러나 새로운 법칙에 의하여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제적 조건의 토대 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어떤 사람들은 경제법칙이 맹목적 성격을 띠고 있다느니, 이 법칙의 작용은 피할 수 없다느니, 사회는 그것에 대해 무능력하다느니 하고 말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법칙에 대한 물신숭배이며 자신을 법칙의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사회가 경제법칙을 인식하고 그것에 의거하여 그 작용범위를 제한하여 사회를 위하여 그것을 이용하며 그것에다 ‘굴레를 씌울’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 인민경제의 계획적(균형적) 발전의 필연성이 소비에트 정권으로 하여금 현존 경제법칙을 폐지하고 새로운 법칙을 창조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전혀 옳지 않다.(스탈린, 〈소련에서 사회주의의 경제적 제 문제〉)

스탈린은 자연법칙과 달리 새로운 사회에는 새로운 사회법칙이 지배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회주의에서도 역시 법칙을 인위적으로 창조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법칙을 제어, 제한하고 사회 전체의 발전에 맞춰 능숙하게 활용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스탈린은 생산력 발전이 인민대중 절대 다수를 실업과 빈곤으로 몰아가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달리, 사회주의에서는 생산력발전이 나날이 성장하는 인민대중의 문화적, 물질적 수요를 충족시키도록 함으로써 사회주의 생산관계와 맞아 떨어지는 사회법칙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스탈린은 사회주의에서도 사회주의 국유화와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강화하고 인민대중의 사회주의 의식을 높이고, 도시와 농촌의 대립,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을 없애가는 것으로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강화하지 않으면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적대적으로 되며 이것이 자본주의 복귀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처럼 맑스레닌주의는 객관적 법칙을 강조하면서도 아주 풍부하게, 법칙에 의거하는 인간의 의지, 노력, 투쟁을 마찬가지로 강조하고 있다.

여기까지 보면 사람의 본질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한 고유한 특징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주체사상’ 또한 맑스-레닌주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박문석 연구위원의 주장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쟁점부터는 첨예하게 논란이 되고 있다.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해

철학의 근본문제를 새롭게 제기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북에서는 주체사상이 맑스주의에 비해 새로운 발전 단계에 있으며 그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전제하면서도 철학의 근본문제를 새롭게 제기한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날 세계관의 발전력사는 상반되는 두 철학조류인 유물론과 관념론, 변증법과 형이상학의 투쟁력사였습니다. 맑스주의는 이 투쟁에서 유물론과 변증법의 승리를 확정하였습니다. 맑스주의 유물변증법적세계관의 출현은 당대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였습니다. 일찌기 로동계급이 력사무대에 등장함으로써 인류력사에는 새시대가 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본을 반대하는 혁명의 서막이 오른 새로운 력사적조건은 투쟁에 일떠선 로동계급에게 자본주의의 멸망과 사회 주의의 승리의 필연성을 깨우쳐주는 혁명사상을 절박하게 요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전면에 나선 문제는 반동적인 자본의 지배를 신성화하고 그 영원성을 설교하는데 복무하여온 관념론과 형이상학을 타파하고 로동계급의 과학적인 세계관을 밝혀주는 것이였습니다. 유물변증법적 세계관은 바로 이 시대적요구를 반영하여 나왔습니다.시대의 발전은 세계관의 발전을 동반합니다…종래에는 물질과 의식, 존재와 사유의 관계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삼아왔습니다. 물질의 일차성, 존재의 일차성에 관한 맑스주의 유물론적원리는 이 문제에 과학적해명을 주었습니다.주체사상은 세계의 시원문제가 유물론적으로 밝혀진 조건에서 세계에서의 사람의 지위와 역할 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새롭게 제기하고 세계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해답을 주었습니다…주체사상은 사회력사에 작용하는 물질세계발전의 일반적합법칙성을 시인하면서 사회력사에 고유한 합법칙성을 밝혔습니다. 여기에 로동계급의 사회력사관을 완성하는데서 이룩한 주체사상의 중요한 공적이 있습니다.(《김일성 사상 비판 – 유물론과 주체사상》 , 하수도, 백두, 1988, 부록, 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1982년)

철학의 근본문제는 최고문제라고도 하는데, 과연 이것은 새롭게 제기될 수 있는 문제인가? 또한 맑스주의 유물변증법에서 철학의 근본문제는 “당대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시대적 한계가 있고 제한적인 문제인가? 이러한 것은 첨예한 쟁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맑스주의에서 철학의 근본문제는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철학 전체, 특히 근대 철학에서 중요한 기본문제는 존재와 사유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이와 같이 철학 전체의 최고 문제인 존재에 대한 사유의 관계, 자연에 대한 정신의 관계 문제는 온갖 종교와 마찬가지로 야만시대 인간의 제한되고 무지한 사고에 그 근원이 있다….존재에 대한 사유의 관계, 다시 말해서 무엇이 제1차적인가, 정신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연인가 하는 문제―중세기의 스콜라 철학에서도 역시 큰 역할을 담당했던 이 문제는 교회의 의사와는 반대로 세계는 신이 창조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보다 첨예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철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서 양대 진영으로 나눠졌다. 정신이 자연보다 먼저 존재하였다고 주장한 사람들, 따라서 결국 어떤 종류이든지 우주의 창조를 승인한 사람들―은 관념론의 진영을 형성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자연을 근원적인 것으로 본 사람들은 유물론의 각종 학파에 속하였다.(엥겔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돌베개)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엥겔스의 철학의 근본문제를 바탕으로 하면서 물질이란, “인간의 감각에 의해 주어지고 우리의 감각에 의해 복사되고 활용되고 모사되지만 그것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표현하기 위한 철학적 범주이다”(아침)라고 정의하고 있다. 스탈린은 관념론과 대비하여 유물론의 핵심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정의했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의식뿐이며 물질세계, 존재, 자연은 다만 우리의 의식, 우리의 감각, 표상, 개념 가운데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관념론과 반대로 맑스주의 철학적 유물론은 물질, 자연, 존재는 의식 밖에 또 그와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이며, 물질은 감각, 표상, 의식의 원천이기 때문에 1차적이고 의식은 물질, 존재의 반영이기 때문에 2차적이며 파생적이라는 것, 사유는 그 발전 단계로 보아서 고도로 완성된 물질의 산물, 즉 뇌수의 산물이며, 뇌수의 사유기관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엄중한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유를 물질에서 분리해서 안 된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스탈린,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 관하여》

그런데 레닌은 “물질과 정신이라는 인식론의 두 개의 궁극적인 개념에 대해 그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라는 정의 이외에는 어떠한 정의도 본질상 불가능하다”(레닌, 같은 책)고 하고 있다. 레닌은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본질적으로 한 개념을 그보다 더 포괄적인 다른 개념 속에 포섭시”키는 것인데, “그렇다면 존재와 사유, 물질과 감각, 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이라는 두 가지 개념 이외에, 인식론이 취급할 수 있는 한층 더 포괄적인 다른 개념이 있겠는가가 문제로 된다. 그러나 그 이상의 개념은 없다. 인식론은 본질상 지금까지 이보다 더 궁극적으로 포괄적인 개념에 도달하지 못했다”(레닌, 같은 책)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에서는 기존 철학의 근본문제를 시인하고 전제하는 속에서 이를 “새롭게 제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맑스주의는 이 투쟁에서 유물론과 변증법의 승리를 확정하였습니다. 맑스주의 유물변증법적세계관의 출현은 당대의 요구를 반영”, “세계의 시원문제가 유물론적으로 밝혀진 조건”이라는 주장에서 보듯, 마치 철학의 근본문제가 유물변증법이 승리를 거둔 “승패”의 문제, “당대의 요구를 반영한” 시대적 제한성 속에서 제기된 문제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에 의하면, 물질과 정신이라는 개념 중 어느 것이 1차적이고 어느 것이 2차적인지 하는 문제 외에 다른 포괄적인 정의나 궁극적인 개념은 있을 수 없다. 철학의 근본문제는 전환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새롭게 제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철학의 근본문제는 유물론이 관념론과의 투쟁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지속되는 문제다. 심지어 철학상의 사조를 둘러싼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유물론이 패배한다고 해도 그렇다. 또한 철학의 근본문제는 자본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사회의 성격과 상관없이 지속되는 문제다. 설령 사회주의가 된다고 해도, 인간의 자주성이 고도로 발현되는 시대가 온다고 할지라도 물질이 1차적이고 정신이 그 물질의 반영으로서 2차적이고 파생되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근본문제는 지속된다.

“종래의 철학적세계관에서는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져있다는 유물론의 원리와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발전한다는 변증법의 원리가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철학적원리만으로써는 물질세계의 일반적 특징은 밝힐 수 있어도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지위와 역할은 해명할 수 없습니다”(김정일, 〈주체사상교양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1986년, 통일부 북한자료센터)는 주장도 전투적 당파성과 세계변혁과 실천을 목표로 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물질세계의 일반적 특징”을 해명할 수 있는 문제 정도로 폄하하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물질인 인간이 주인의 지위를 차지하고 세계발전에서 결정적역할을 한다는”(김정일, 같은 글)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면, 맑스와 엥겔스의 비교적 초기 저작인《독일이데올로기》에서도 “완전한 혁명의 물질적 요소”를 주장하면서도 “반항하는 혁명적 대중의 형성이 없다면”, “공산주의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이러한 혁명의 이념(IDEE)이 수백번 표방된다 하더라도 실제로 혁명의 발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공산주의 의식의 대량의 산출과 목적 자체의 관철을 위해서도 인간의 대폭적인 개조가 필요하며 이것은 오직 실천적인 운동 속에서만, 즉 하나의 혁명 속에서만 수행될 수 있는 것이다”에서, “인간의 대폭적인 개조”라는 표현에 주목해보라. “혁명적 계급 그 자체가 최대의 생산력”이고 “혁명은 역사발전의 기관차이다”라는 언명도 맑스주의의 근본 원칙이다. 이 때문에 맑스주의는 혁명의 중심 주체에 대해 강조하고 계급의식의 강조와 전위적 활동, 전위당의 건설을 끊임없이 강조했던 것이다.

철학 사조상으로 보면, 이 철학의 근본문제와 근본문제의 전환문제를 둘러싼 입장 차이가 우리 사회 운동진영이 대립하고 분열하는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북에서 기존 철학의 근본문제를 폐기하고 새롭게 전환했다고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인정한 상태에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정도 논의 이상으로 확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심각하게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만약 북에서 철학의 근본문제를 새롭게 제기한다고 하지 않고, 변증법적 유물론의 토대 위에서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지위 문제를 더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라고 했다면 그렇게 첨예하게 논란이 되지도 않았을 문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논쟁을 북에서 철학의 근본문제를 새롭게 제기한 정치적 상황,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문구만의 해석논쟁으로 사변적으로 이끈다든지, 이 철학적 논쟁으로부터 반북반공주의로 나아간다든지 한다면 맑스주의 철학의 실천적 사명에 비춰볼 때 오히려 변증법적 유물론의 정신에서 한참을 퇴보한 것이다.

주체사상에는 분명히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측면이 있으며, 우리가 당면한 실천의 문제를 푸는 데 매우 유익한 내용들도 담겨 있다. 이것은 주체사상이 민족해방 투쟁과 독자적인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실천을 토대로 성립된 것인 한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주체사상을 일면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또다른 오류에 빠질 것이다. 주체사상이 근본문제의 전환을 선언한 것은 분명한 오류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부터 주체사상이 관념론으로 흐를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지며, 또 많은 비판자들이 지적했듯이 그 가능성 중의 일부는 현실화되기도 했다.(해설 〈철학, 철학사, 그리고 철학의 근본문제〉, 김재기 부산 경성대 철학과 교수, 《철학의 근본문제》, T.I.오이저만, 세계)

“주체사상에 분명히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측면이 있으며, 우리가 당면한 실천의 문제를 푸는 데 매우 유익한 내용들도 담겨 있”고, “민족해방 투쟁과 독자적인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실천을 토대로 성립”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관념론으로 흐를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지며”, “일부는 현실화되기도 했다”는 주장의 간극은 메울 수 없을 정도로 클 뿐만 아니라 자기모순적이다.

물질세계 발전에서 인간의 능동적, 창조적, 개조자적 역할을 강조한 것이 관념론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위 주장처럼 주체사상이 “관념론으로 흐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그 “일부는 현실화” 되었다면,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측면”마저도 잠식할 수밖에 없으며 “당면한 실천의 문제를 푸는 데 매우 유익”할 수는 없다. 더욱이 “민족해방 투쟁과 독자적인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실천을 토대로 성립”될 수 없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주체사상에서 강조한 ‘자주성’이라는 개념은 세계 사회주의 국가 간의 문제나 제국주의와의 관계의 문제,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 등에서 실질적으로 지극히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따라서 위 글 필자의 주장처럼 주체사상이 “민족해방 투쟁과 독자적인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실천을 토대로 성립” 되었다면 그 실천적 토대에 대한 이해가 없이 펼치는 사상논쟁이야말로 관념론적으로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와는 반대로 주체사상이 북의 “민족해방 투쟁과 독자적인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실천을 토대로 성립” 되었는데, 그 조건과 배경을 인식하고 우리의 교훈으로 삼는 것을 넘어 맹신하거나 무조건적인 절대원칙으로 삼고자 한다면 그것은 비“주체적”인 태도이며 때로는 심각하게 문제가 될 수 있다.

맑스주의유물변증법에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이 중요시된 것은 당시 자본주의사회의 사회경제적모순과 계급투쟁의 법칙을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중요한 력사적과제로 나섰던 사정과 관련되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맑스주의철학이 밝힌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원리가 오늘에 와서 사회주의사회발전의 합법칙성을 해명하는 데서는 불합리한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체철학리론을 전개하면서 이 원리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 하지 않았습니다.(김정일, 〈주체철학에 대한 옳바른 관점과 리해를 가질데 대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1990년,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오늘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주의를 건설하며 조국을 통일하는 것이 중요한 혁명과업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원리를 중요한 철학적문제로 강조하는 것이 리론적으로 어떤 의의가 있으며 혁명과 건설에 어떤 작용을 미치겠는가 하는데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 문제를 잘못 전개하면 사람들에게 현실에 맞지 않는 철학문제를 가지고 쓸데없는 말공부질을 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며 조국통일을 위하여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혁명과 건설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공리공담을 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에게 맞지 않는 기성원리나 남의 리론을 본따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같은 자료)

마오쩌둥은 《인민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1957년 2월 27일)에서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모순은 적대적 모순이지만, 사회주의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은 비적대적 모순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앞의 모순이 적대적이라면 계급투쟁을 통해서 모순을 해결하고, 뒤의 모순은 인민 내부의 교육, 설득, 조정, 올바른 정책 등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 내에서도 비적대적 모순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적대적 모순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 이는 쏘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의 해체를 통해서도 잘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이다.

북에서의 주요모순과 남에서의 주요 모순은 사회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상반될 수밖에 없다. 사회혁명으로 제도개조가 이뤄졌기 때문에,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원리가 오늘에 와서 사회주의사회발전의 합법칙성을 해명하는 데서는 불합리한 점이 많다”면, 반대로 제국주의 지배와 자본주의 착취가 중첩된 사회에서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원리는 절대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북에서 남과의 조국통일의 문제를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을 바탕으로 하는 적대적 모순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해서, 계급모순과 계급적대가 존재하는 남의 내부에서 계급투쟁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하지 못하고 노동계급 투쟁의 당파성을 약화시킨다면 자칫 계급협조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또한 앞서 제기했듯, 반제투쟁과 이와 결탁한 국내 통치권력과의 투쟁을 분리하여 진행할 수 있다. 자주파 일각의 우경화가 이 점을 망각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 아닌지 깊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절대로 혁명과 건설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공리공담을 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에게 맞지 않는 기성원리나 남의 리론을 본따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는 맑스레닌주의를 우리의 역사적 풍토와 정치적 조건 위에서 창조적으로 적용하여 남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조언이다.

관념론과의 투쟁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과학성을 인정받고 승리했다고 해서 관념론이 제거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지배계급은 관념론으로 무장한 채, 노동계급과 인민대중의 정치적 사고와 계급의식을 마비시키고 있고,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은폐하며, 진보적 사회운동들을 탄압, 통제하고 있다. 맑스주의 유물변증법적 세계관은 맑스와 엥겔스 생전의 당대의 요구를 반영한 것을 넘어 착취사회 철폐와 더 나아가 사회주의 제도건설과 문화, 의식혁명을 위한 철학적 무기이기도 하다.

레닌은 전투적 유물론의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맑스주의자가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오류이자 가장 나쁜 오류일 수 있는 것은, 현대사회 전체에 의해 어둠과 우매함과 편견으로 운명 지워진 수백만의 인민대중들(특히 농민과 직공들)이 단지 순수한 맑스주의적 계몽의 직선에 따라서만 이 암흑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대중들에게는 가장 다양한 무신론 선전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들로 하여금 여러 서로 다른 삶의 영역들에서 나온 사실들을 알게 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런저런 식으로 그들에게 다가서며, 종교적 꿈으로부터 그들을 일깨울 필요가 있으며, 갖가지 측면에서, 가장 다양한 방법 기타 등등으로 이 대중들을 뒤흔들 필요가 있는 것이다.(레닌, 〈전투적 유물론의 의의에 대하여〉, 노동자정치신문, 57호, 2009년, 러시아어 번역 임채희)

레닌은 전투적 유물론을 가지고 사회주의 혁명 초기에 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절대 다수 인민들의 문맹과 봉건 짜르체제가 조장한 농촌의 낙후성과 낡은 관습과 후진적 문화, 문맹과 종교적 편견과 맹신 등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명 초기 러시아 사회에 비해 고등교육이 보편화 되고 지식의 양적수준이 대폭 올라가고 수많은 정보를 접하고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민대중은 새로운 방식으로 무지와 편견과 맹목에 빠져 있다.

제국주의와 부르주아 체제는 교육뿐만 아니라 방송과 언론을 통해 지배계급의 착취 이데올로기를 더욱 광범위하고 교묘하게, 공고하게 유포하고 있다. 종교적 편견과 우상숭배는 현대사회에 와서도 더 집요하게 만연하고 있으며, 발전한 문화적 형식에 비해 그 내용은 점점 더 저열, 저질로 빠져들고 있다. 부르주아 양당체제는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고 새로운 정치적 전망을 포기하고 후진적인 정치적 틀로 영구적으로 대중들을 가두고 있다. 특히 우리사회는 반공주의로 북에 대한 극단적 편견과 맹목적 적개심을 조장하고 있다. 80년대 진보적 노동자들, 청년들, 지식인들을 사로잡던 맑스주의는 이제 철지난 이념으로 취급받고 있다. 우리는 다시 진보적 청년들, 지식인들, 노동자들, 농민들 사이에 맑스주의 사상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지배계급의 관념론에 맞서 전투적 유물론을 옹호해야 한다. 만연한 소부르주아 사조, 무정부주의적 사조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맑스주의에 대한 속류적 해석

 

주체사상에서는 맑스주의에 대해 일부 속류적 해석으로 왜곡하고 있다.

국가정권을 계급적지배를 실현하기 위한 독재의 무기로 규정한 선행리론에서는 착취계급의 정권과 사회주의정권의 본질적차이를 주로 계급적성격에서의 차이로 보고 무계급사회가 실현되여 계급적지배가 필요 없게 되면 사회주의국가가 조락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건설의 실천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계급적지배수단으로서의 낡은 국가는 사회주의혁명에 의하여 파괴되며 새로 수립된 사회주의정권은 사회의 주인으로 된 인민대중의자주적이며 창조적인 활동과 사회의 모든 분야를 통일적으로 관리할 사명을 지닌 새로운 국가정치조직입니다. 사회주의국가의 통일적 지휘기능은 사회주의, 공산주의건설이 심화될수록 더욱 강화되여야 하며 이러한 기능은 공산주의사회에 가서도 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정권은 결코 조락될 수 없으며 정권문제는 사회주의혁명단계에서 뿐아니라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전력사적기간에 의연히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나서게 됩니다.(김정일, 〈사회주의건설의 역사적교훈과 우리 당의 총로선〉, 1992년,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이는 맑스레닌주의 국가소멸론에 대한 왜곡이다.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에서 국가소멸의 제1의 조건은 낮은 수준의 공산주의, 즉 사회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강화이다. 맑스레닌주의에서 국가소멸론은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에서 제국주의가 사라지고, 전 세계 차원에서 계급적대가 사라진 상황에서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통치와 지배, 억압을 본질로 하는 국가의 계급지배적 성격이 사라진다는 것이지 행정적 기능, 생산지휘적 기능이 사라진다고 본 것이 아니었다.

엥겔스는 《반듀링론》(새길)에서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에서 국가소멸론을 제기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지배에 대신하여 사물에 대한 관리 및 생산과정에 대한 지도가 나타난다”고 하고 있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인민자신이 이전에 자신을 억압했던 억압자들을 억압하기 때문에 억압을 위한 ‘특수한 권력’은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는 사멸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억압자들에 대한 “억압을 위한 ‘특수한 권력”이 남아 있다면 그때는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라고 할 수 없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또한 “공화국의 기능은 자신의 정치적인 성격을 잃게 될 것이며, 사회적 이익을 감시하는 단순한 행정적 기능만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는 엥겔스의 〈권위에 대하여〉를 인용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소련에서의 사회주의의 경제적 제문제〉에서 “국가는 소멸하나 사회는 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전 인민적 소유의 상속자로 나서게 될 것은 이미 소멸한 국가가 아니라 중앙의 지도적 경제기관을 자기의 대리자로 하는 사회 자체일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맑스주의는 사회력사를 객관적인 물질경제적조건을 위주로 하여 고찰하였던 관계로 사회의 발전을 생산력성격에의 생산관계의 적응의 법칙에 의하여 일어나는 생산방식의 교체의 력사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사회주의적생산방식을 확립하면 혁명이 기본적으로 수행된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사회주의적 생산방식을 공고발전시키기 위한 사업만 하면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맑스-레닌주의 고전가들이 부르죠아민주주의혁명으로부터 사회주의혁명에로의 계속 혁명에 대하여서는 많이 강조하였으나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한 다음 공산주의를 건설할 때까지의 계속혁명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제기하지 못한 리유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맑스주의유물사관의 원리로써는 사회주의제도가 선 다음의 혁명문제에 대하여 옳바른 해답을 줄 수 없습니다. 사회주의건설의 실천은 사회주의제도가 선 다음 사상, 문화분야에서 혁명을 계속하지 않으면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옳게 발양시킬 수 없고 인민대중의 자주위업을 끝까지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김정일, 〈사회주의의 사상적 기초에 관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1990년 5월 30일,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사회주의제도가 선 다음 사상, 문화분야에서 혁명을 계속하지 않으면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옳게 발양시킬 수 없고 인민대중의 자주위업을 끝까지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옳다.

“맑스-레닌주의 고전가들이 부르죠아민주주의혁명으로부터 사회주의혁명에로의 계속 혁명에 대하여서는 많이 강조하였으나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한 다음 공산주의를 건설할 때까지의 계속혁명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제기하지 못한 리유”는 유물사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활동했던 시대적 여건 때문이다. 레닌 역시도 사회주의 혁명 이후 몇 년 동안만 생존했을 뿐인데도 ‘계속혁명’을 주장했다. 맑스레닌주의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구체적 경험은 스탈린 시대와 마오쩌둥의 시대에 와서 더 풍부해졌다.

맑스주의 유물사관이 “사회력사를 객관적인 물질경제적조건을 위주로 하여 고찰하였던 관계로 사회의 발전을 생산력성격에의 생산관계의 적응의 법칙에 의하여 일어나는 생산방식의 교체의 력사로 보”고 혁명적 실천을 강조하지 않았다면 기계론적이며 진화론적인 역사관이 된다. 그러나 맑스주의 사적유물론은 객관적인 물질경제적 조건을 고찰하면서도 무엇보다 혁명을 강조한다.

혁명이 필요한 것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지배계급은 타도되지 않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타도하는(Stürzende) 계급이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모든 낡은 오물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새로운 사회의 기초를 세울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독일이데올로기》)

물론 맑스와 엥겔스 시대에는 사회주의 혁명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주의 건설에 대해서는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유물사관 자체로부터 “사회주의적 생산방식을 확립하면 혁명이 기본적으로 수행된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사회주의적 생산방식을 공고발전시키기 위한 사업만 하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맑스주의 유물사관이 사회주의 혁명 때까지만 적용되고 사회주의 건설에서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혁명적 방법론이 아니게 된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 사상혁명과 문화혁명을 수행하는 것은 맑스레닌주의의 기본 원칙이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 수정주의의 발흥은 맑스주의의 혁명적 원칙을 버렸기 때문에 발생한 기회주의적 이탈 때문이다.

주체철학은 모든 사물의 발전을 자연사적과정으로 보는 맑스주의철학의 제한성과 대비할 때 그 우월성이 뚜렷이 밝혀질 수 있습니다 … 사물발전을 객관적인 자연사적과정으로 보는 선행리론의 제한성을 극복하는것은 오늘 혁명실천에서 매우 절실한 요구로 나섭니다. 지금 부르죠아사상가들과 수정주의, 개량주의자들은 모든 사물현상을 생물학적인 진화론적관점과 속류유물론적관점에서 고찰하면서 사람들속에 자연 생장성과 물질지상주의를 고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체철학을 해설선전하는데서 마땅히 이러한 생물학주의적이며 속류유물론적인 세계관에 비판의 예봉을 돌려야 합니다.”(김정일, 〈주체철학에 대한 옳바른 관점과 리해를 가질데 대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1990년 10월, 통일부북한 자료센터)

“부르죠아사상가들과 수정주의, 개량주의자들은 모든 사물현상을 생물학적인 진화론적관점과 속류유물론적관점에서 고찰하면서 사람들속에 자연 생장성과 물질지상주의를 고취하고 있”다면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맑스주의 유물론을 왜곡으로부터 구하고 혁명적 원칙을 분명하게 내세우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맑스주의 변증법적 유물론 자체가 “모든 사물의 발전을 자연사적과정으로” 본다고 속류적으로 해석한다면 맑스주의를 “부르죠아사상가들과 수정주의, 개량주의자들” 왜곡자들에게 밀어 넣는 것과 진배없다.

이러한 속류적 해석은 맑스레닌주의의 권위를 심각하게 손상시킨다. 북에서 주체사상을 내세우기 위해 맑스레닌주의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은 남의 자주파들 사이에서 맑스레닌주의를 시대적으로 제한적인 사상정도로 폄하하여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사상학습을 멀리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는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일부 교조주의에도 반대해야 하지만 주되게는 광범위한 수정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이미 스탈린 사후 1950년대 중반부터 다시 심각하게 제기되었고, 우리 사회에서는 쏘련 사회주의와 동유럽 사회주의의 해체 이후 유행이 된 각종 반맑스주의, (범)무정부주의 같은 수정주의 사상에 맞서 맑스레닌주의의 혁명적 원칙을 다시 세워야 한다. 맑스레닌주의를 우리의 풍토와 시대에 맞게 적용하여 불패의 사상적, 조직적 무기로 삼아야 한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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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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