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좌파 다원주의 노선 무엇이 문제인가?

1. 신좌파 출현의 역사적 배경

현대사상연구소 홍승용 선생은 작금에 유행하는 신좌파 노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용문을 통해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다.

1. 사전적 의미에서 신좌파는 1960년대 서유럽과 북미에서 비판이론⋅구조주의⋅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좌파 조류다. 신좌파는“계급투쟁과 노동운동에 집중하는 전통적인 좌파와 달리 다문화주의, 동물권, 여성주의, 성소수자 운동, 환경 운동, 기타 소외 계층에 대한 인권 신장 운동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전통적 맑스주의의 계급투쟁이론 및 혁명 노선을 포기하고, “구좌파에서 중시하던 자본주의, 제국주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에서 벗어나 미시적 불평등과 일상의 권위주의, 인간 소외 등에 주로 관심을” 둔다. (주1. 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C%A2%8C%ED%8C%8C, 홍승용, “신좌파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서 재인용)

도대체 신좌파는 과거의 좌파에 비해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위 인용문은 사전적 의미에서 기존 좌파노선에 대비해 신좌파 노선이 어떠한 입장들을 견지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적 정의로는 도대체 왜 신좌파 노선이 1960년대 서유럽과 북미에서 유행하게 됐는지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못한다. 신좌파 노선이 대두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자신들의 노선에 대해 새롭다는 표현을 쓰고 과거의 노선이 낡았다는 의미에서 구좌파라는 설정을 하지만 실제 이 노선은 새로운 노선이 아니다.

​이들 신좌파 노선의 주창자들이 낡은 과거의 노선으로 주장하는 노선은 실은 정통적인 혁명노선을 의미한다. 신좌파는 새로운 노선이라고 하지만 과거 맑스주의를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보았던 베른슈타인 같은 노선이 견지했던 수정주의 개량주의 노선이다.

​베른슈타인은 맑스주의의 계급투쟁 노선과 혁명 노선이 노동조합ㆍ협동조합 발전 등으로 인한 소득 향상으로 중산층이 늘어나서 계급대립이 상당부분 완화되고 신용제도 발전 등으로 자본주의에서 공황 같은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혁명 없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몇 가지 개량적 조치를 취하여 사회주의로 점진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자본주의 내에서 베른슈타인의 후계자들은 착한 자본주의,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이른바 수정자본주의론이다. 수정자본주의론을 내건 사민당, 노동당, 사회당 등 공산주의 혁명 운동을 포기하고 의회장악을 통해 자본주의 내에서의 점진적인 사회주의 조치 도입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가진 정당들은 오늘날 사회주의 명목은 완전히 내던지고 기존 자본주의 양당지배체제의 버팀목이 되어 반노동자적 정당으로 타락해버렸다. 이들 정당들은 개량적이지만 복지국가 노선 같은 사회주의 조치를 취하는 대신 사유화 대폭 도입, 임금삭감, 단협과 복지후퇴, 노동시간 증대, 긴추정책 등 신자유주의 조치로 후퇴해 버렸다.

신좌파의 새로움

신좌파 역시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 수정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적 맑스주의의 계급투쟁이론 및 혁명 노선을 포기하고”, “구좌파에서 중시하던 자본주의, 제국주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을 거대담론이라고 포기했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베른슈타인 수정주의 노선은 맑스주의 위기 운운하면서 맑스 사후와 1917년 러시아혁명 이전에 팽배하다가 이후 혁명 세력을 국제적 성장으로 급격하게 쇠퇴한데 반해 신좌파 노선은 중소분쟁 같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분열과 스페인 내전에서의 패배, 반스탈린 운동과 그 이후 유로꼬뮤니즘 같은 공산주의 운동의 우경화 등을 배경으로 1960년대부터 생겨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유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의 혁명은 계급투쟁 노선이 끝장났다는 이들의 수정주의 노선과 다른 혁명노선이 승리했고 독일에서 수정주의 노선으로 권력을 잡은 사회민주당의 바이마르 권력이 독일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은 후진적 봉건 짜르체제에서나 가능했지 발전하고 중산층이 두터운 안정적인 독일사회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은 있을 수 없을 것이라 했는데 독일자본주의의 전후 위기는 독일혁명을 낳았다.

​더욱이 계급타협을 중시하던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인 독일 사민당은 혁명의 위기 앞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참살하고 노동자들을 학살하기조차 했다. 더욱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파산 이후에 독일에서 가장 극렬한 반동세력인 히틀러 파시즘이 권력을 잡고는 노동운동을 분쇄하고 또다시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합법적인 방식으로 의회를 통해 사회주의의 진보적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파시즘에 의해 합법적 의회활동이 분쇄됐다.

​독일의 경제위기와 함께 1929년에는 미증유의 전 세계 공황이 터졌는데, 자본주의의 안정적 발전이니 계급타협 노선이니 하는 수정주의자들의 노선은 현실 앞에 파탄났다.

​파시즘의 일반적 정의는 독점자본주의의 위기 시에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나타나는 정치적 조류로 가장 배외주의ㆍ인종주의적으로 전쟁을 통해서 다른 나라를 점령하고 지배하려 하며 민주주의와 노동조합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이를 분쇄하려 한다. 나라마다 그 특성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의회에서 다른 반대세력들을 제압하고 무소불위의 일당독재 체제를 꾸리려 한다.

​파시즘은 독점자본가들의 권력이기에 파시즘이 무너지면 자본주의 체제가 무너지게 된다. 히틀러가 동유럽을 점령하고 소련을 분쇄하려 침공했다가 패전을 하게 되자 동유럽 전반에 공산주의가 들어섰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히틀러 파시즘이 노동자 민중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동독에서는 공산주의 권력이 들어섰다. 서독은 연합국의 일원인 미국의 개입으로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파시즘 추축국에 맞서 소련과 같이 연합군을 형성했던 당시 가장 강성한 신생 제국주의 미국은 소련 인민들의 막대한 희생과 영웅적 투쟁으로 분쇄된 이후에는 반쏘비에트 반공산주의 냉전을 개시했다. 유럽과 일본과 냉전의 최결점인 한국에서는 반공을 국시로 하는 메카시즘을 전면화 했다.

​한때 소련과 스탈린을 우호적으로 묘사했던 미국제국주의는 정보기관, 거대언론과 티브이 교육기관, 문화ㆍ예술ㆍ체육계ㆍ종교계 등 사회전반을 총동원 하여 반스탈린 반쏘비에트 정치선전(프로파간다)을 실시했다. 반공주의를 내세운 권력을 내세워 자국 국민들에 대한 인권탄압과 암살과 학살, 고문과 구속을 마다하지 않는 권력을 지원했다.

​한국에서도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에 민중의 자치권력과 해방열망을 분쇄하고 이승만 권력을 내세워 반북, 반쏘비에트 전초기지를 만들고 중국혁명을 미연에 차단하려 했다.

​지금이야 소련 지도자 스탈린이 악마화 되고 소련이 사람을 도살하는 전제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 서방 지식인들은 러시아혁명 이후 들어선 소비에트 체제를 동경하고 앞다퉈 방문하여 직접 현실을 목격하려 하였다.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먼 시드니 웹과 비어트리스 웹 같은 당시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소련을 방문하고 연구한 뒤에는 《쏘비에트 공산주의: 새로운 문명》이라는 두 권 짜리 방대한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극작가로 유명한 버나드 쇼는 이 저작을 발췌한 《쏘비에트 러시아의 진실》이라는 소책자에 서문을 남기기도 했다.

​미국의 진보적 교육자인 리오 휴버먼은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리오 휴버먼의 자본론》 )》에서 서방 자본주의를 휩쓰는 공황의 거대한 파고가 소련의 사회주의 계획체제 앞에서 멈춰 버리고 실업을 청산한 반면에 자본주의는 이윤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파멸할 것이라고 불길한 예언을 하기도 했다.

​베른슈타인 노선의 대두는 1900년대 초였다. 그런데 신좌파 노선의 대두는 러시아혁명으로 들어선 소비에트 권력, 특히 스탈린이 지도자로 있던 소련에 대한 격렬한 반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스탈린에 대한 폭로는 제국주의 진영에서 먼저 시작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과 중공업 우선주의 정책이라는 미명 하에 20차 소련공산당 당대회에서 후르시초프로부터 시작되어 기묘하게도 서방 정보기관에서 이를 접수하고 언론에서 폭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를 두고 국제공산주의 운동도 당시까지는 사회주의 모국으로 알려져 있던 소련공산당의 입장을 따르는 다수의 흐름과 스탈린은 공은 7이요 과는 3인데 국제공산주의 지도자와 운동에 대한 평가 문제를 무책임하게 일방적으로 처리하는 것에 반발한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 같은 세력으로 나눠지면서 중소분쟁을 야기하고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분열시켰다.

​자주적 입장을 중시하던 조선은 이 분열상을 우려하며 수정주의에 대한 공식적인 비난을 자제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사회주의 수령으로 보았던 스탈린에 대한 중상에 대해 엄중하게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특히 후르시초프의 개인숭배 사상과 중공업 우선주의 노선을 가지고 1956년 8월 30일 열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3기 제2차 전원회의에서 최창익, 박창옥, 서휘, 윤공흠, 리필규 등 친소파들이 반당그룹을 형성하고 권력교체에 나서자 이를 ‘8월 종파사건’으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대응하여 이들 세력들을 축출하였다.

​북에서는 인민대중에 복무하는 수령에 대한 인민대중의 존경을 개인숭배 비판으로 둔갑시킬 수 없으며 “쌀은 기계에서 나온다”며 중공업 우선주의 비판은 중공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농업과 경공업을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사회주의 발전전략에도 맞지 않는다는 근거를 들었다. 더욱이 중공업 중시는 공업에 대한 중시인데 사회주의 경제 통합을 근거로 분업구조를 만든다는 것은 후진국의 공업발전을 늦추고 발전된 사회주의 공업국에 종속시킴으로써 자주성을 훼손시킨다는 것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후르시초프가 밀어부친 코메콘(경제상호원조회의) 가입을 반대하고 자립적 경제발전 노선, 즉 자력갱생 노선을 추구했다. 그러자 후르시초프는 조선에 대한 경제지원을 반으로 삭감하는 대국주의 횡포를 부렸고 이는 조선의 자력갱생 노선이 정치적 자주성과도 긴밀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음을 확인시켰다.

​소련 사회주의의 비중이 큰 상황에서 서방 제국주의의 악선전에, 공산주의 운동 내부에서 사회주의 지도자를 학살자로 비방하는 것은 그 체제를 음험하고 반민주적이고 고립된 전체주의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반스탈린주의 반관료주의를 내건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스탈린 시절의 피의 강물이 흘렀다드니, 스탈린을 도살자라고 묘사하는 흐름도 소련사회주의의 영상을 흐리는데 일조했다.

​전대미문의 농촌에서의 계급투쟁을 거쳐 평생을 가난에 시달리고 모욕과 박해를 당했던 빈농과 중농의 이해에 맞춰 건설된 국영농장(소포즈)ㆍ집단농장(콜호즈) 같은 사회주의에서의 생산수단 사회화를 “동물농장”(조지오웰)에 비유하고 국제 파시즘 대두의 계기가 됐던 스페인 내전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수행했던 국제연대를 스탈린 관료주의가 스페인 내전을 패배로 몰아갔다는 중상으로 인류의 착취를 종식시킨다는 사회주의의 국제주의 대의를 무너뜨렸다.

​신좌파와 트로츠키파가 반공주의ㆍ반쏘주의라는 미명 하에 오늘날 기묘하게 의기투합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제 더 이상 사회주의는 인류가 희생을 무릅쓰면서도 쟁취해야 할 세계가 아니었다.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중상비방으로 인해 사회주의는 현실에서 구현될 수 없는 공상이며 새로운 착취체제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만연하여 체념과 패배주의를 심어 놓았다.

​사회주의를 외치더라도 그것은 현실에서 실현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이념상의 사회주의, 진보적 가치로서의 자본주의 반대에 머물게 만들었다. 이것이 “운동의 근본목표는 아무 것도 아니고 운동 그 자체가 전부이다”는 베른슈타인 개량주의 노선과 무엇이 다른가?

​이로부터 남는 것은 무정부주의 사상이었다. 사회주의가 아니라 대안 없는 잡다한 반자본 이론이었다. 이러한 무정부주의는 현 체제를 관념상으로는 반대하되 실제로는 이를 극복할 전망이 없는 체제 내의 이론이었다. 이는 사회주의의 포기이자 자본주의에 투항하는 배반 노선이다.

​이것이 바로 신좌파 노선이 출현하게 되는 역사적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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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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