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파주의 양비론은 제국주의와 권력의 이해에 봉사한다

1년의 사업전망을 마련하는 노사과연 정기 총회 인사말에서 채만수 전 소장은 상당 부분 우리를 비난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우리의 위상을 그렇게까지 높여 주는 것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비판’의 내용이 수준 이하고 터무니 없어 자기자신을 깎아 내리고 덩달아 우리까지 동귀어진으로 깎아내리지 않을까 우려가 든다.

참으로 기가 막힌 저 ‘민주주의’가, 그 학문ㆍ사상ㆍ이론ㆍ언론의 자유가 노동자ㆍ인민대중에게 강제해 온 장기간의 사상ㆍ이론의 암흑 탓에 최선진 노동자들조차 대부분 그러한 과학적 사상ㆍ이론으로 무장하지 못한 채, 자본가계급의 사상ㆍ이론에 깊이 침윤되어, 많은 경우 그들처럼 사고하고, 그들처럼 떠들어 대는 것이 유감이지만 현실입니다.

비근하게 대통령 윤석열 파면ㆍ처단 요구 투쟁을 보면, 민주노총 지도부는 물론, 사회주의자 나아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를 자임하는 자들조차, 민주당 등과 한목소리로, “내란수괴 파면!”, “내란수괴 처단!”을 외쳐 대지 않습니까?

“내란수괴 파면!”, “내란수괴 처단!” ― 그게 뭐가 문제냐고요?

“내란”, “내란수괴”란 규정은 누구의 시각, 누구의 언어입니까? 분명 지배계급의 그것, 지배자의 그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피착취ㆍ피억압계급이, 그것도 그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도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 장군의 동상 앞에서까지, 저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한 분파와 입을 맞추어 “내란수괴”이니, “내란범”이니 처벌하라? ― 과연 자기 정체성에 합당한 외침인가요?

노동자ㆍ인민의 처지에서 윤석열 일당이 시도한 12ㆍ3 비상계엄은, 분명, 반노동ㆍ반인민ㆍ반동 폭거, 그것도 몇 사람일지 모를 수많은 노동자ㆍ인민을 ‘수거’ㆍ학살ㆍ수장(水葬)까지 하려던 폭거 아니었나요? 따라서 노동자ㆍ인민의 요구는 그러한 폭거를 벌인 수괴와 그 일당의 파면ㆍ처단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제21차 정기 총회 인사말] 창립 20주년을 맞아 더욱 분발을!, 채만수 )

참으로 고약하게 종파주의적 인식에 사로잡혀 있다. 과거 “우리민족끼리 반미자주”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미군철수 한미동맹 국가보안법 철폐하자는 주장에 대해 우리민족에는 광화문의 우익도, 조선일보도 포함되어 있으니 이러한 주장은 국가주의 계급협조고 심지어 범죄라고까지 주장했던 악의적 모략과 하나도 다를바 없다.

게다가 이러한 태도는 내란청산 투쟁에 적극 결합한 인민대중에 대한 모욕이고 과거 박근혜 퇴진투쟁을 재벌이 기획ㆍ연출한 투쟁으로 규정하고 기권하고 방관한 엘리트주의의 재림이라 할 수 있겠다.

내란 수괴, 내란범 처벌하라고 외친 수백만 명의 인민들이 “윤석열 일당이 시도한 12ㆍ3 비상계엄은, 분명, 반노동ㆍ반인민ㆍ반동 폭거, 그것도 몇 사람일지 모를 수많은 노동자ㆍ인민을 ‘수거’ㆍ학살ㆍ수장(水葬)까지 하려던 폭거”라고 인식하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런 파쇼권력의 내란이 노동자와 인민대중의 민주적 권리를 박살내고 심지어 국회까지 장악하여 파괴 처단하여 민주주의를 송두리채 파괴하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투쟁에 계엄군의 탱크를 막고 국회진입을 막고 수백만 명이 투쟁에 나서기라도 했을까?

이러한 종파주의 인식에 의하면, 국회에 계엄군 진입을 막기 위한 투쟁은 노동자ㆍ인민의 자각한 정체성이 아니라 민주당 등을 비호하는 몰계급적인 투쟁이다.

이에 의하면, 헌법수호 요구는 지배계급의 법률을 수호하는 반민중적 요구다.

이에 의하면, 민주주의 수호는 부르주아의 계급지배의 수단을 지키자는 투쟁에 불과하다.

그러한 주장 뒤에 “2004년 봄 ‘대통령 노무현 탄핵’과 그 반대 투쟁”의 사례를 들고 노사과연 창립 계기가 되었다는 사례를 드는 것을 볼 때도 윤석열 퇴진 투쟁을 지배계급 한 분파의 투쟁이라고 보고 이 투쟁에 사실 방관ㆍ기권한 것이라 여겨진다.

윤석열이 파시스트에 맞서 헌법수호, 민주주의 수호를 주장하고 내란 수괴와 동조자들, 국민의힘 해산을 요구한 투쟁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었다. 이 투쟁의 한계는 다른데서 누차 언급했으므로 여기서 깊게 다루지는 않겠다.

다만 몇가지 지적할 것은 민주주의 요구를 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란척결과 사회개혁을 분리한 것, 내란과 외환을 분리한 것, 종북몰이 국가보안법 철폐 요구와 내란ㆍ외환 배후인 미국에 대한 투쟁이 제기되지 않은 것 등이 한계다.

민주당과 같이 해서가 아니라 이 투쟁의 주도성을 철처하게 관철하지 못하고 진보진영의 분열된 것 등이 문제다.

비판지점은 전혀 다른데 있는 것이다.

윤석열 파시스트는 광주의 영령들, 80년대의 열사와 투쟁 등 노동자 민중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 민주주의를 타도하고 헌법과 국회조차 무력화 해 전두환 비상입법회의 같은 초법적 기구를 만들려 했다.

이는 명백한 내란이고 이 내란은 포고령에 나와 있듯 노조파괴, 언론장악, 국회장악, 백색테러 같은 민주주의의 처단과 압살을 목표로 했다.

노동자계급은 아직도 그 선진 분자들의 대부분조차도 저들 지배계급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 채, 지배계급의 한 분파와 입을 맞추고 있습니다.(같은 글)

윤석열 파시스트 내란자들에 맞서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을 포함해 윤석열 내란에 맞서는 모든 정당ㆍ세력이 연합해 싸우는 게 잘못됐는가? 아니면 민주당이나 조국혁신당은 부르주아 정당이니 그들을 제외하고 우리끼리 싸우자고 했어야 했는가?

이 투쟁의 주도성, 요구, 정치적 대안 세력 구성, 민중항쟁과 혁명적 전망의 문제는 이러한 종파주의적 제기와 다른 방식으로 논의될 문제다.

내란ㆍ외환세력 완전 청산을 끝까지 몰고가지 못한 한계가 문제지 내란수괴 퇴진, 내란척결을 내걸고 싸운 거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더욱이 “노동자계급은 아직도 그 선진 분자들의 대부분조차도 저들 지배계급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 채, 지배계급의 한 분파와 입을 맞추고 있”는 사례로, “역시 비근하게 우크라이나 전쟁의 성격이나, 그것과도 얽혀 있는 현대 제국주의의 문제 등과 관련한, 일부 자칭 사회주의자들, 자칭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관점ㆍ주장들이란 것들도, 일견 지배계급의 그것들과 정반대인 것 같지만, 사실은 지배계급의 관점ㆍ주장을 조건 반사적으로 거부하는 것일 뿐이어서, 객관성ㆍ과학성을 결하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인식이 초래하는 종파성과 비과학성의 문제다.

러우전에서 미제를 위시 서방 제국주의와 여기에 돌격대로 나서 지원을 하고 군대까지 파병하려 했으며 내란ㆍ외환계기로 삼으려 했던 윤석열에 맞서 투쟁한 것이 과연 “지배계급의 관점ㆍ주장”인 것인가?

러우전에서 제국주의의 위선적 이중잣대와 프로파간다, 이 전쟁의 진짜 도발자가 누군지, 그저 평화의 소망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를 위해 도발자인 미제와 나토 제국주의와 그 추종자들에 맞서 싸운 것이 과연 “지배계급의 관점ㆍ주장”인가?

오히려 “지배계급의 관점ㆍ주장”은 “현 러시아나 중국의 사회성격이 국가독점자본주의 곧 제국주의”라 규정하고 미제를 위시로 한 서방제국주의와의 투쟁을 양비론으로 회피하고 이 땅에서 반미투쟁의 고양을 가로막고 중ㆍ러 제국주의론에 몰두하고 “반미만 해서는 안 된다”며 노동자 민중이 집중해야 할 정치적 과제를 혼돈ㆍ혼란ㆍ회피하게 하는데 일조한 당신들이 아닌가?

양비론은 정치적 독자성을 빙자한 종파ㆍ기회주의다

이 양비론에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게 러시아 침략자, 푸틴 독재자 운운하는 사회진보연대나 박노자 같은 지식인들, 노동자연대 유의 트로츠키주의자들, 좌익공산주의자들, 신좌파 다원주의자들 등이 포함된다.

채만수 전 소장은 “‘양비론’이 그 자체로서 절대적 오류인, ‘마르크스-레닌주의자(mlkorea)’의 저 화려한 언술에 의하면, 예컨대, 나와바리[繩張] 싸움을 벌이는 조직폭력배들을 가리켜 “너도 못됐고, 너도 못됐다”고 지적한다면, 이는 분명 ‘양비론’인바, 절~대적으로 잘못된 지적이겠지요?”라고 양비론 비판에 대해 변명한다.

양비론은 모든 사안에 대해 절대적으로 둘 다 잘못 됐다고 비판하는 게 아니다. 양비론이 정치적 독자성의 명분을 내걸고 당파적으로 판단하고 실천해야 하는 상황에서 첨예한 정치적 과제를 회피하게 하고 혼란ㆍ혼돈으로 몰아가게 하면서 결국 적들의 이해에 복무하기 때문에 그 종파성과 기회주의성을 비판하는 것이다.

가령 미제의 핵독점ㆍ핵패권에 맞서 자위권의 일환으로 만든 북핵을 두고 “모든 핵반대”라는 명제를 내세워 양비론을 구사하는 중립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는 제국주의와 부르주아의 이해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러우전을 제국주의 간 투쟁, 조폭들의 나와바리 쟁탈전으로 보고, 북반구 서방 제국주의 질서에 맞서는 남반구의 다극화 질서를 제국주의 다극화로 보는 양비론의 기회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최근 시리아에서 미제가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을 내세워 러시아의 지원을 받던 아사드 정권을 붕괴시키고 레짐체인지(정권교체)를 성공시켰다. 아사드 정권이 무너진 뒤 지난 3월 6일부터 며칠 간 시리아 정부군이 친 아사드 민병대의 공격을 막는 과정에서 알라위트 소수민족 공동체의 해안 중심부에서 살인과 즉결 처형 등으로 여성과 노아, 아이들이 포함된 민간인 973명을 살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과연 시리아에서 러시아는 미국과 제국주의 쟁탈전을 벌였나? 미국의 정권교체를 막는 역할을 수행했는가?

일본을 포함한 서방 언론은 이 정권 붕괴를 “50년에 걸친 독재 체제의 타도”와 “민주주의의 승리”로 환영하며, 연일 아사드 정권을 비난하는 부정적인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완전히 다르다. 이 사태는 명백한 반혁명의 승리이며, 중동에서의 반제국주의 투쟁의 가장 중요한 거점 중 하나를 제국주의 세력에게 빼앗긴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타도하는 것은 제국주의의 오랜 숙원이었다. 석유를 비롯한 풍부한 지하자원을 보유한 중동 지역에서 시리아는 이스라엘, 팔레스타나, 레바논, 이라크, 터키와 국경을 접하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해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1948년 독립 이래로 줄곧 제국주의의 중동 지배의 핵심인 이스라엘과 대립해왔다(네 차례의 중동 전쟁을 거쳐 현재까지).

또한 팔레스타나 해방 운동이나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같은 세력의 후원자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미국이 적대시하는 이란과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또한 러시아와는 소련 시대부터 군사적 협력을 포함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2011년 전후의 “아랍의 봄” 정치적 혼란을 이용해, 제국주의 세력은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을 비롯해 서아시아에서 북아프리카 지역에 걸쳐 그들의 지배에 저항해온 정권을 차례로 전복시켰다.

시리아에 대해서도 이슬람국가(ISIL)이나 누스라 전선을 비롯한 다양한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 조직을 양성하고 지원하며 “내전” 상태를 강요했고, 영토는 분할되었다.

이 전투로 시리아에서는 5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600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이제 서방 언론은 이 비극을 모두 아사드 정권의 탓으로 돌리고 있지만, 이를 초래한 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의 간섭 정책이다.

서방 언론이 “아사드의 전쟁 범죄”에 대해 떠들어대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 국제법을 위반한 것은 미국과 이스라엘, 터키이며, 그들은 주권 평등이나 내정 불간섭 등 유엔(UN) 헌장의 원칙을 무시하고, 뉘른베르크 재판이나 도쿄 재판에서 “최악의 국제 범죄”라고 불린 침략 전쟁을 수행했다.

한편, 이 기간 동안 시리아에 대해서는 가혹한 경제 제재가 계속되었다. 또한 미군이 시리아 영토 내의 유전 지대를 장악하면서 원유의 80% 이상이 계속해서 약탈당해 석유 수입의 길이 막히게 되었고, 오랜 군사 지출 부담이 더해져 시리아 경제는 2010년부터 10년 동안 GDP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러시아와 이란의 군사적 지원 덕분에 최근 몇 년간 군사적 긴장은 완화되었다고 하지만, 국내 경제는 파탄 상태에 이르렀고, 식량 부족과 국민의 생활 파괴·궁핍화가 진행되면서 민심은 정권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경제 파탄은 군대 유지도 어렵게 만들어 정부군의 사기는 떨어져 있었다. 한편,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응하고, 이란과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응하며, 궁지에 몰린 시리아를 구원할 여유를 잃고 있었다.(이나가키 히로시, “아사드 정권 전복은 제국주의의 반혁명 책동”, 일본 활동가집단 ‘사상운동’ 1108호(2025년 1월 1일호)

참고로 위 인용문서는 노사과연과 우호적으로 교류하는 일본 맑스레닌주의자들의 글이다.

시리아에서 제국주의의 레짐 체인지 책동만 보더라도 양비론이 어떻게 인식상의 혼란을 가져다주고 누구의 이해에 복무하는지 잘 알 수 있다. 과연 팔레스타인을 비롯해 중동전역에서 제국주의와 결전을 치르는 나라들, 세력들에게 시리아에서의 첨예한 쟁투가 제국주의 간의 대립ㆍ대결, 즉 조직폭력배들 간의 나와바리[繩張] 싸움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직 기회주의 종파주의 세력들만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양비론은 미제를 위시한 서방제국주의, 즉 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한다. 미일한 동맹과 조중러 동맹이 격돌하는 한국에서도 양비론은 진보세력이 수행해야 할 당면 과제를 가로막고 반동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한다.

아프리카 사헬지역, 중동의 팔레스타인, 예멘, 레바논, 제국주의 침략을 받아 붕괴됐지만 시리아, 남미의 베네수엘라, 미일한 동맹에 맞서는 조중러 동맹, 여기에 조러포괄적 조약을 체결하고 쿠르스크전투에 직접 참전까지한 조선과 러시아 등과 우호적으로 교류하며 다극질서에 적극 결합하는 쿠바까지 현존 사회주의 나라들의 직접적 이해가 걸려 있는 문제를 양비론으로 간주하고 제국주의 다극화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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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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