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자 조지 블레이크, 98세 일기로 모스크바에서 잠들다

러시아에서 평화롭게 여생을 보냈던 영국의 가장 열성적인 냉전 전사 중 한 명

 

하르팔 브라르(Harpal Brar)

영국맑스레닌주의공산당(CPGB-ML)

2021년 2월 15일(월)

번역: 맑스주의 고전읽기 참가 학생

 

<조지 블레이크(George Blake)는 영국의 가장 유명한 이중스파이 중 한 명이다. 그는 사회주의 대의를 위해 일생을 바친 열성적인 반파시즘 전사로, 웜우드 스크럽스(Wormwood Scrubs) 감옥에서 대담하게 탈출한 아래 냉전의 전설이 되었다.>

러시아 정보국에서 생전에 존경을 받았던 조지 블레이크는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했고, 맑스주의 가르침의 정당성을 확신했으며 그것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한 대의를 위해 일하는 것은 피착취자들의 이해에 복무하는 것이자, 역사의 정의(노동자계급의 편)에 서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나치 점령지의 잔학행위와 미제국주의의 조선 공습을 목격한 블레이크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

 

초기 생애

 

조지 블레이크는 네덜란드-이집트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3년 가족이 영국에 도착했을 때 성 베하르(Behar)가 블레이크로 바뀌었다. 베하르 가족은 네덜란드와 나치 점령지에서 탈출해야 했고, 조지는 아직 어린 나이였음에도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조지는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영국 해군에 입대했고, 후에 MI6(영국비밀정보국)에 들어갔다. 《데일리 메일》은 독설로 가득 찬 사망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일정 기간 네덜란드 망명 정부의 직원으로 일한 후, 블레이크는 영국 해군에 입대했고 일 년도 되지 않아 MI6에 고용되었다. 그는 1948년 서울에 부임하기 전에 러시아어를 배우러 케임브리지로 보내졌다.”

“한국 전쟁 당시 공산군 포로로 잡혔을 때 조지는 전향했다. 그는 나중에 미국 플라잉 포트리스(Flying Fortress: 직역하면 ‘하늘의 요새’로, 미군의 대형 폭격기 B-17의 별칭 – 옮긴이)들이 지방 마을들을 무차별 폭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그가 소련과 생사를 같이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손에 피를 묻힌 이 반역자를 절대 화려하게 치장하지 말라 – 에드워드 루카스(Edward Lucas), 2020년 12월 27일)

조지 갤러웨이(George Galloway, 옮긴이: 영국정치인)는 알티(RT, Russia Today)에 실린 그의 부고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영국에서 그는 영국 해군에 자원해 장교 훈련을 받았고, – 네덜란드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기 때문에 – 특수 부대에 들어가고 싶은지 질문을 받았다. 영국 정보기관의 일원으로서, 블레이크는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나는 네덜란드 요원들의 훈련에 동행해야 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는 또한 네덜란드 저항 세력이 영국으로 보낸 암호문을 해독하고 있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시대에는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영국 정보기관은 그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그렇게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았다.”

“만일 정보기관이 조사를 했다면, 그들은 그의 친척들이 이집트 공산당의 고위 성원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인 동시에 또한 아랍인이었다. 조지 블레이크는 영국을 위해 싸웠지만, 모스크바에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그의 마음은 그곳에 있었다.”

“블레이크가 영국 첩보기관으로 간 것은 모스크바가 지시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KGB 소속이 아니었지만, MI6 내 위계가 엄격한 제국 충성파들 사이에서는 철저하게 이방인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미 냉전의 거짓말에 의문을 품고 마음이 돌아서 있었다.”

“모든 사람은 붉은 군대가 전쟁에서 정말로 승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배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이번에도 처칠을 제외하고는) 그것을 인정하는 자들이 드물었다. 블레이크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가슴속에만 담아두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을 향해서는 파시즘이 기세등등했다. 히틀러 파시즘, 일본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그리고 각 점령국 내부의 적(敵)이라는 파시즘.”

“조지 블레이크가 영국 첩보기관에 의해 근무할 수 있었던 전 지역 중 한국에 파견되었는데, 그곳은 제국주의 침략으로 빠르게 파괴되었지만 초기에는 동서 간의 최후의 대리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블레이크는 한국전쟁에서의 대량 살육 관련 소문을 퍼트리는 영국 ‘외교관’으로 그가 지냈다는 거짓말을 알고 있었다. 진실은 그와 정반대로 서울에서 인민군에게 붙잡힌 그는 … 조선포로수용소에서 전향했고 나머지는 역사에 남아 있다.”

“역사에 정통한 사람들만이 베를린이 3차 세계대전의 화약고가 될 뻔한 과정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영국인들이 케지비(KGB 소련첩보기관) 장교 조지 블레이크를 베를린 옆에 보낸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 수 있다.”

“미국과 영국은 엄청난 위험과 막대한 비용을 들여 동베를린의 소련 지역 깊숙이 비밀 터널을 파고 있었다. 그 목적은 붉은 군대와 동독 당국의 전화선을 도청하는 것이었다. 블레이크가 이미 러시아에 불법 도청 사실을 경고했기 때문에, 모스크바는 거대한 허위 정보 캠페인을 펼쳤는데, 거기에 미중앙정보국(CIA)은 놀아났다.”

“케지비(KGB)의 이 엄청난 성공이 발각되었을 때, 블레이크가 의심을 샀다.”(조지 블레이크의 명복을 빌며, 당신이 배신자였다고들 하지만, 과연 당신은 누구를, 무엇을 배신했단 말인까? 당신은 파시즘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것을 도왔다, 2020년 12월 28일)

 

체포

 

“‘필비(Philby)(옮긴이: 킴 빌비(Kim Philby)는 소련 KGB를 위해 일한 일명 ‘케임브리지 스파이 일당(Cambridge Spy Ring)’ 5명 중 한 명으로 영국 비밀정보국SIS 대(對)소련 방첩작전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영국은 물론 미국 정보까지 소련으로 빼돌렸다.) 보다 훨씬 더 심했소.’ 당시 영국첩보기관(SIS) 수장이었던 딕 화이트(Dick White) 경이 블레이크에 대한 사건을 접하고 침울하게 말했다.”

“이 스파이 용의자는 소련 요원 두 명이 영국에서, 한 명은 영국 해군연구소에서, 다른 한 명은 SIS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CIA에 말한 폴란드 정보원의 제보로 정체가 드러났다.”

“코드명은 람다(Lambda)-1과 람다-2였다. 람다-1은 곧 해리 호튼(Harry Houghton)으로 밝혀졌지만, 당시 아랍어를 배우기 위해 레바논에서 임시 임무를 맡았던 블레이크가 람다-2의 주요 용의자가 되기 몇 달 전이었다.” (조지 블레이크: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끝까지 간직한 영국의 ‘이념적’ 이중스파이의 최후 – 루퍼트 콘웰(Rupert Cornwell), 《인디펜던트Independent》, 2020년 12월 27일)

“영국인들이 그에게 접근하던 징후에도 불구하고 블레이크는 위험을 무릅쓰고 영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체포되었다. 결국, 그는 맑스주의 신념에서 소련을 위해 자발적으로 스파이 활동을 하겠다고 제안했음을 인정했다.”

 

재판과 투옥

 

블레이크를 기소하는 것은 영국당국에 몇 가지 문제를 야기했다. 다른 이중스파이들의 자수를 막을 수 있기에 중형 선고를 MI6이 불편해했다는 것이었다.

“블레이크는 기소되어야 했지만, 공개재판은 필시 피해를 줄 것이다. 당국이 안심하도록, 그는 유죄를 인정하기로 했고, 1961년 5월 3일 짧은 변론에서 파커 대법관(Parker)으로부터 42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가 배반했던 영국 요원들 각각에게는 일 년이라고 했다.)”

“영국 법원이 간첩죄로 선고한 사례 중 가장 긴 중형은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에서 블레이크는 5년 간만 웜우드 스크럽스에서 지냈을 뿐이었다.”

“1966년 10월 22일 블레이크는 세 명의 동료 수감자(이른바 아일랜드 난동꾼인 숀 버크(Sean Bourke), 그리고 둘 다 시민 불복종으로 수감된 팻 포틀(Pat Pottle)과 마이클 랜들(Michael Randle))의 도움으로 최고보안감옥에서 탈출하며 SIS에 결정적인 굴욕감을 안겼다.” (같은 기사)

이 세 명은 블레이크를 감옥에서 만났는데, 그들은 영국에 있는 미 공군기지에 불법 점거농성 등 평화활동으로 수감되어 있었다. 석방 뒤 그들이 블레이크에게 무전기를 밀반입하여 그가 감옥을 탈출하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밧줄을 엮어 사다리를 직접 만들어 담은 넘은 뒤, 블레이크는 폭스바겐 캠핑용 밴을 타고 해외로 몰래 출국할 수 있을 때까지 동조자들에 의해 런던에 숨겨졌고, 동독 검문소에 내려졌다. 그는 러시아에서 여생을 보낼 작정이었다.

 

러시아에서의 삶

 

《인디펜던트》의 루퍼트 콘웰(Rupert Cornwell)에 의하면, 블레이크는 첫 결혼에서 세 자녀와 좋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블레이크는 유창하게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KGB에서 스파이 지망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수년 동안 모스크바의 세계경제 및 국제문제연구소에서 일주일에 2~3일을 보내었고, 도널드 매클린(Donald Maclean, 옮긴이: 이른바 ‘케임브리지 스파이 일당(Cambridge Spy Ring)’ 5명 중 한 명으로 소련 스파이로 활동한 영국 외교관)도 그곳에서 가르쳤다.

“첩보활동으로 블레이크는 레닌 훈장과 적기 훈장을 수훈했다. 그는 영국 신문을 통하지 않고 비비씨(BBC) 월드 서비스를 통해 국제문제에 대해 소통을 했다. 그의 약간 사투리가 섞인 영어로 영미 언론에 특이한 인터뷰를 했다.”

“그와 아이다(블레이크의 두 번째 아내)는 킴 필비(Kim Philby)와 그의 러시아 아내 루피나(Rufina)와 관계가 좋았다. 하지만 그는 실망을 하기도 했지만, 공산주의에 헌신하며,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매클린(Maclean)과 특히 사이가 좋았다. 매클린이 1983년에 사망했을 때, 그는 블레이크에게 도서관을 물려주었다.”

 

공산주의 전사

 

한때 강대국이었던 소련 붕괴에 대해 언급하면서, 조지 블레이크는 그것이 불가피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민족 국가인 소련을 더 작은 민족들이 좋아하지 않았다는 견해를 거부했다.

블레이크는 특히 경제분야에서, 맑스주의를 배반하고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문화적·물질적 복리를 지속 성장시키지 못했던 수정주의의 파산을 지적했다.

그는 말했다.

“만일 소비에트 사회가 애초 의도대로 정의롭고 평등이 있으며, 풍부한 물품들이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면 … 폴란드인, 조지아인, 우크라이나인 및 어느 기타 국가도 그곳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잘 나가는 사업체를 떠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조지 블레이크: 공산주의에 대한 영-소 이중스파이의 생각, 《스카이 뉴스Sky News 》 영상, 2020년 12월 26일)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시장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수정주의 때문이었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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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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