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고전읽기 마오쩌둥의 《실천론》을 학습하자!
교재: 《실천론》(범우사, 두레, 프레시안북, 학고방 등)
일시: 2020년 6월 8일(월요일, 격주 월요일) 19시 30분
장소: 노정협 사무실(남영역 근처)
문의: 010-3398-0248
마오쩌둥(모택동)의 《실천론》(1937년 7월), 《모순론》(1937년 8월)은 맑스주의 철학의 고전적 저작입니다. 먼저 공부하게 될 《실천론》은 맑스주의 인식론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실천론》의 최고 미덕은 맑스주의(레닌주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철저하게 입각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동양적(중국식)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로써 우리에게 아주 친근하고 쉽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가령 저자는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문장 “양미간을 찌프리면 꾀가 나온다”를 소개하며 이를 인식의 좀 더 높은 단계, 즉 2단계인 판단과 추리에 대해 설명합니다. 또한 “수재는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세상만사를 다 안다”는 얘기를 실천없는 인식이 가지는 허위나 교만이라고 비판하고는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의 새끼를 잡는다”는 속담을 인용하며 인식의 발전에 있어서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마오쩌둥은 인간의 인식이 낮은 단계인 감성적 인식과 보다 높은 단계인 이성적 인식으로 나눠져 있고 이것은 또한 서로 통일돼 있다고 주장합니다. 감성적 인식은 사물의 일면, 현상, 외부적 연계에 대한 인식에 속하고, 논리적 인식은 여기서 크게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물의 전체, 본질, 내부적 연계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여 주위세계의 일체 방면의 내부적 연계를 통해 주위세계의 발전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감성적 인식은 낮은 단계의 인식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이것을 거치지 않고도 이성적 인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관념론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는 경험의 실재성을 부인하고 이성의 실재성만을 인정하는 철학사조인 ‘이성론파’에 해당한다고 비판합니다. 이들의 인식은 수원이 없는 강, 뿌리가 없는 나무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로 이 주장의 오류가 무엇인지 간명하게 설명합니다.
반면 마오는 감성적 인식만 믿으면서 이성적 인식을 부정하는 ‘경험론’을 비판합니다. 이들은 경험을 중시하되 이론을 경시하고 객관적 과정 전체를 통찰하지 못하고 명확한 방침이 없으며 원대한 전망도 없이 자그마한 성공이나 바늘구멍만한 소견을 가지고 아주 만족해 하기 때문이라고 호되게 비판합니다. 한국사회에서도 대다수가 무정부주의적인 강단파들과 경험주의자들의 해악이 큽니다.
그런데 마오는 인식의 통일성을 주장하면서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객관세계의 합법칙성을 가지고 세계를 인식하는데 그치지 않고 능동적으로 세계를 개조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포이어바흐에 대한 맑스의 테제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널리 알려진 마지막 11번째 테제,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마오는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강조하면서 “이론이 혁명적 실천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용이 없는 것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실천이 혁명적 이론으로써 자기의 길을 밝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맹목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라는 스탈린의 말을 인용합니다. 혁명적 이론과 혁명적 실천의 결합, 이는 “혁명적 이론이 없으면 혁명적 운동도 있을 수 없다”는 레닌이 제시한 명제이기도 합니다.
한국사회 진보적 운동에서 가장 결여된 것은 바로 혁명적 이론이며 혁명적 실천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의 운동은 내용이 없거나 맹목적인 것이 됨으로써 정치적 전망을 상실해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는 인민대중의 삶의 고통과 질곡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오는 인식과 실천의 통일을 지행일치라고 표현하는데, 문제는 이 양자가 어떻게 올바르게 결합하고 이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어떻게 검증하고 또 새롭게 발전해 나가느냐 입니다. 마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실천을 통하여 진리를 발견하고 또 실천을 통하여 진리를 실증하고 진리를 발전시킨다. 감성적 인식으로부터 이성적 인식으로 능동적으로 발전시키고 또 이성적 인식으로부터 혁명의 실천을 능동적으로 지도하여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를 개조한다. 실천, 인식, 재실천, 재인식-이러한 형식이 무한히 순환, 반복되면서 모든 순환과정에서의 실천과 인식의 내용은 매번 이전 보다는 한 급 높은 정도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과 인식론의 전체이며, 이것이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지행통일관이다.”
마오의 이 유려한 저작은 1936년 12월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이 항일 통일전선을 외치며 국민당 총통 장제스를 산시성 시안에 감금한 시안(서안)사건과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이 진행되고 있던 격동의 시기에 저술되었습니다.
마오는 여기서 좌우익 편향을 비판합니다. 우경기회주의자들은 완고파들로 사상이 현실에 뒤떨어짐으로써 사회의 수레바퀴 앞에 서서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수레의 뒤를 따라가면서 수레가 너무 빨리 간다고 원망할 줄밖에 모르며, 수레를 뒤로 끌어당겨 오히려 뒷걸음치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합니다.
반대로 좌익기회주의자들은 대개 사상이 객관적 과정의 일정한 발전단계를 초월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따라서 이들 좌경분자들은 환상을 진리로 보며, 미래에 가서야 겨우 현실적 가능성을 가지게 될 이상을 억지로 현실에 적용시키며 실시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마오는 이들 좌경분자들이 대다수의 실천과 떨어져 있고 현실과도 동떨어져 행동상의 모험주의로 된다고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진보파들 중에도 이런 좌우익 기회주의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우경기회주의자들은 통일전선을 강조하되 자기중심이 없고 정치적 자주성과 정치적 근본목표가 없습니다. 대중을 강조하되 대개 대중을 선도하지 못하고 추수합니다. 이들은 쓸개도 없이 남의 당, 그것도 이제 지배계급이 된 당을 통일전선의 미명 하에 무조건으로 지지합니다. 자기 깃발을 내리거나 자기 깃발을 선명하게 내거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남의 깃발을 제 깃발인줄 착각합니다. 요즘 와서는 아예 자기깃발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들기도 합니다.
좌경기회주의자들은 통일전선을 계급협조라고 아예 부정하거나 소극적입니다. 이들은 대개 민족문제, 즉 분단과 통일의 문제, 반제의 문제에 기권하거나 소극적이거나 일면적입니다. 이들 좌경분자들은 사물 발전의 긴 과정에서 나타나는 단계성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단계성에 주목하지 않으니 급진적이되 실사구시적이지 않고 현실성과 구체성이 없습니다. 화려하되 실속이 없습니다.
이들은 자기깃발을 허공 내걸되 발이 땅에 붙어 있지 않습니다. 이들 좌경분자들은 심지어 수십억 진보적 인류의 투쟁 전체를 관념적인 원리상으로 부정하기도 하면서 제국주의와 부르주아 진영의 프로파간다에 유, 무의식적으로 동조합니다. 이들 역시도 이 점에서는 남의 깃발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폐일언하고 마오쩌둥의 고전적 저작인 《실천론》으로 맑스주의 인식론의 풍부한 세계를 접하고 한국사회에서 무엇을 인식하고. 무엇을 어떻게 행할지를 같이 논의해 봅시다.
고전은 낡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입지점입니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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