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을 한없이 생각한 혁명가 로베스피에르
김남기(학생)
2018년 11월 자유한국당(현재는 미래통합당) 대표인 홍준표가 대통령인 문재인에 빗대어 “한국판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가 폭주하는 세상을 언제까지 계속 방관해야 하는지 자문해 본다”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다. 홍준표는 민주노총과 전교조를 들먹이며 “경제정책도 로베스피에르가 취했던 방식 그대로 시장의 기능을 무시하고 국가 갑질 경제, 국가 간섭 경제 정책으로 일관함으로써 프랑스 혁명 정부가 폭망한 그 길을 그대로 가고 있다”라는 망발에 가까운 주장을 했었다. 더 나아가 그는 “프랑스 혁명의 귀결이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온건 보수파가 완성했듯이, 한국판 로베스피에르가 폭주하는 세상을 언제까지 계속 방관해야 하는지 자문해 본다”라는 막말로 입장을 마무리했다.
안 좋은 의미로 사용된 사례지만 수구세력의 연합체인 자유한국당 그것도 그 당의 대표를 맡는 사람 입에서 아주 부정적인 의미로써 로베스피에르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이처럼 프랑스 혁명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인 로베스피에르는 매우 안 좋은 의미로써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혁명가 로베스피에르가 이처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이유가 있다. 그는 1789년 7월 14일 민중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됐을 때부터,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기요틴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오로지 민중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출판된 세계사 교과서를 보면 로베스피에르에 관한 서술은 그리 자세하지 않고, 긍정적이지도 않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민중이 봉기했다는 사실에는 강조하지만, 로베스피에르와 그가 이끌던 자코뱅에 대해선 독재나 처형이라는 수식어로 일괄하는 것이 한국에 나온 대다수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이다. 이것은 소위 자유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은 봉건 귀족에 반감을 품고 있던 부르주아 세력들이 주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봉건 귀족에 반대한 이유에는 본인들의 부르주아적 이익을 확장하기 위함이라는 주목적이 있었다. 이런 부르주아의 열망에 찬물을 제대로 끼얹은 사람이 바로 로베스피에르였다.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지금 기준으로 봐도 매우 진보적인 가치들을 지향했다. 그는 1776년 미국의 독립혁명이 절대적으로 금기시했던 흑인 노예제 해방과 식민지화에 대한 구제국주의적 움직임에 분명히 반발했고, 소위 소수민족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의 인권과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유럽 전역에 국가 없이 떠돌며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권리를 주장했고, 옹호했다. 1792년 9월 의회에서 식민지 문제에 대한 새로운 논쟁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식민지 탄압에 대해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1752년 로베스피에르가 했던 연설은 그가 노예제와 식민지에 반대했다는 사실을 아주 잘 보여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의 법령 중 하나에서 여러분이 노예라는 단어를 말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스스로 명예를 훼손하게 될 것입니다. 국민과 식민지들의 최상의 이익은 여러분이 자유로운 상태로 남아 있는 것, 그리고 자유의 토대를 여러분 자신의 손으로 뒤엎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복, 여러분의 영광, 여러분의 자유를 대가로 치르며 분투한다 해도 식민지는 사라질 것입니다! 되풀이하여 말하지만, 식민자들이 우리를 위협하여 강제로 자신들의 이익에 가장 적합한 것을 법령화하게 한다 해도 식민지는 사라질 것입니다. 나는 의회의 이름으로 헌법의 전복을 원하지 않는 의원들의 이름으로, 자유롭기를 원하는 국민 전체의 이름으로, 우리가 식민지 대표들을 위해 국민도, 식민지들도, 인류 전체도 희생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선언합니다.”(장 마생 지음,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p.152~153, 양희영 옮김, 교양인)
자코뱅 독재 시기 로베스피에르는 생쥐스트가 주장하던 방토즈 법 즉 유죄를 선고받은 반혁명 혐의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빈민들에게 나눠주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는 방토즈 법을 통해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려는 반혁명 분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자 했다. 아쉽게도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역사적인 의의가 매우 큰 업적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우선 당대로서는 보기 드물 만틈 아주 대담하게 모든 사람의 노동권을 주장했다. 그는 권리의 평등을 원했고, 지나친 재산 축적이 타락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노동권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는 권리의 평등을 원한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는 자유도, 사회적 행복도 없기 때문이다. 재산에 대해서는, 일단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노동을 통해 생필품과 식량을 확보할수만 있게 해준다면 자유의 벗들은 재산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티테스는 크라수스의 보물들을 시샘하지 않았을 것이다. 순수하고 성숙한 사람들에게 아리스티데스는 크라수스의 보물들보다 훨씬 더 소중한 재산이다. 재산은 흔히 타락으로 이어지므로 그것을 잃은 사람들보다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해로운 것이다.”(같은 책, p.278)
노동권에 대한 그의 발언은 그가 부르주아나 봉건 왕조로부터 착취 받던 민중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부분의 사설이나 교과서들은 프랑스 혁명이 결과적으로 봉건세력의 잔재인 루이 16세와 그 일당들을 숙청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 루이 16세를 처형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 자코뱅의 로베스피에르라는 점을 크게 강조하지는 않는다. 로베스피에르는 철저히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괴롭히는 루이 16세를 처형하고자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연설로 루이 16세와 그 일당들이 처형당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몸소 증언한다.
“인류의 눈으로 볼 때 그보다 더 파렴치한 자도 없습니다. 그는 오직 그보다 더 비겁한 자들에게만 경외심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과의 유용성입니까? 그것은 더 서둘러 그를 처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마지막 왕이라는 이 비루한 개인이 민중에게 왜 중요합니까? 의원 여러분, 민중에게 중요한 것, 여러분 자신에게 중요한 것, 그것은 민중의 신뢰가 여러분에게 부과한 임무를 여러분이 수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우리에게 그것을 주었습니까? 공화국, 그리고 루이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나는 이 치명적인 진실을 마지못해 선언하지만, 조국이 살아야 하므로 루이는 죽어야 합니다.”(같은 책p.368~369)
1793년 4월 21일 그는 자코뱅 클럽에서 자신이 작성한 인권 선언 초안을 낭독했는데, 그가 낭독한 36개 조항에는 19세기 초 사회주의자들의 헌장이 되는 것들이 많이 존재하고, 그가 얼마나 진보적인 가치들을 추구했는지 알 수 있다. 그 36개 조항을 다 옮기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중요한 몇 가지들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제1조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인간이 지닌 자연적이고 시효에 의해 소멸되지 않는 자연권의 유지와 인간의 모든 능력의 발전이다.
제2조 인간의 중요한 권리들이란 그의 생존과 자유를 보존할 수 있게 해주는 권리들이다.
제5조 자유는 인간이 자신의 모든 능력을 자신의 뜻대로 행사하는 힘이다. 자유는 정의를 모범으로, 타인의 권리를 한계로, 자연을 원칙으로, 그리고 법을 보호자로 삼는다.
제10조 소유권은 다른 모든 권리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권리를 존중할 의무에 의해 제한된다.
제11조 소유권은 우리 동포들의 안전, 자유, 생존, 재산을 해칠 수 없다.
제13조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든가, 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생존 수단을 확보해줌으로써,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생계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제18조 민중은 원한다면 자신의 정부를 바꾸고, 자신의 수임자들을 해임할 수 있다.
제35조 자유와 진보를 방해하고 인간의 권리를 소멸시키기 위해 한민족에게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은 예사로운 적이 아니라 살인자이자 반도로 기소되어야 한다.
이처럼 로베스피에르가 작성한 인권 선언은 진보적인 가치들을 담고 있다. 처음에 상술한 홍준표와 같이 일각에서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비판하며 그의 시기를 폄하한다. 그러나 1793년 그와 자코뱅 세력들이 소위 혁명재판소를 창설하여 민중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들과 부패한 이들을 단두대로 보내 처형한 행위는 순수히 민중의 염원을 따르고자 했던 로베스피에르의 열망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민중과 하층민 가진 것 없는 이들 추방당한 이들, 유대인과 노예를 위해 싸웠다. 책에서 나온 그의 연설들 대다수가 민중을 생각고자 하는 바람에서 나온 발언들이었다.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숙청되고 목숨을 잃은 건 사실이다. 소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시기 수천 명이 단두대로 보내져 목이 잘렸다. 그러나 그의 공포정치 시기 로베스피에르는 자신과 지지 세력들이 설정했던 목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다.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동료들은 상퀼로트들의 지지를 얻어 소위 반혁명적 사상을 가진 반대파들에게 단두대라는 형벌을 끊임없이 내리기도 했다. 그는 부정부패가 심했던 당통을 처형했고, 왕당파 및 왕당파 비호자들을 단두대로 보냈다. 쉽게 말해 적폐청산을 감행했다. 물론 이와 같은 그의 행동에 분노한 이들은 결국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생쥐스트, 쿠통과 더불어 그를 단두대로 보내 처형했지만 말이다.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은 민중을 위해 헌신한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의 열정과 혁명정신이 아주 많이 느껴지게 한다. 그가 했던 연설 곳곳에 민중에 대한 그의 휴머니즘적 사랑이 담겨있다. 자유주의자들이 독재자 혹은 악인으로 왜곡해온 로베스피에르의 진실을 역사적으로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명저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 혁명과정에서 민중을 위해 고군분투할 때, 혁명을 두려워했던 유럽의 봉건 국가들이 혁명의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소위 ‘대프랑스 동맹’을 형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영국 등은 프랑스를 대상으로 전쟁을 벌였다. 여기서 프랑스는 이 반동의 무리들이 저지르는 침략을 격퇴시키기도 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정복전쟁을 하기 전부터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전시 상태에 있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휴머니스트 로베스피에르의 진심어린 혁명정신과 민중애를 감동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마지막으로 로베스피에르가 했던 한 연설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여러분의 주권자는 민중입니다. 끊임없이 그들을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는, 야만적이며 타락한 존재로 부름으로써 그들을 중상하고 모독하는 일을 그만둡시다. 정의롭지 않고 부패한 자들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은 민중의 권력을 부유한 특권계급에게 넘겨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선량하고, 인내심 강하고, 관대한 것은 민중입니다. 우리의 혁명이, 그리고 적들의 범죄가 그것을 입증합니다. 민중에게는 자연스러울 뿐인, 최근의 수천가지 영웅적인 행동들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민중은 단지 평화, 정의, 그리고 생존권을 요구할 뿐입니다. 권력자들, 부자들은 차별, 부, 쾌락만을 갈망합니다. 민중의 이익과 소망은 천부의 것이며 인류의 것입니다. 그것은 보편적 이익입니다. 부자들의 이익과 소망은 야심, 탐욕, 기괴한 망상, 그리고 사회의 행복에 가장 치명적인 열망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민중을 비탄에 빠뜨린 폐해는 언제나 부자들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민중에게는 재난이었습니다. 보십시오. 누가 우리의 영광스러운 혁명을 수행했습니까? 부자들입니까? 권력자들입니까? 민중만이 혁명을 열망할 수 있었고 혁명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민중만이 한결같은 이성에 의해 혁명을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감히 민중이 다시 쟁취한 권리를 민중으로부터 강탈할 것을 우리에게 제안한단 말입니까?
사람들은 국민을 두 계급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그중 한 계급은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는 다른 한 계급을, 오직 그 계급을 제압할 목적으로만 무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첫 번째 계급은 모든 독재자들, 모든 압제자들, 모든 공공의 흡혈귀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계급은 민중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민중이 자유에 위협이 된다고 말합니다. 아! 여러분이 만약 민중에게 자유를 맡긴다면 민중은 자유의 가장 튼튼한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부당한 힘으로, 말하자면 민중을 절망에 빠뜨려 그들이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대의를 배신하도록 만들려는 자들은, 잔인하고 야심에 찬 궤변가들인,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니 인류의 신성한 권리에 대한 요구를 결코 중단하지 않을 민중을 더는 비난하지 마십시오!”(같은 책, p.135~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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