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6) 회피하고 호도할수록 더 분명해지는 반공 제국주의 맹우(盟友) <노동자연대>

저열한 흑백논리의 최정점

“‘비운의 북한 황태자김정남이 이복동생의 치명적 경계심으로 마침내 비명에 갔다

필자는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벌어진 사건을 두고 “‘비운의 북한 황태자’ 김정남이 이복동생의 치명적 경계심으로 마침내 비명에 갔다.”(최일붕, “스탈린주의란 무엇인가?”, <노동자연대> 198호, 2017-02-24)는 등 <노동자연대>의 반공주의 기사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조선일보인>가? <노동자연대>인가? 당시 조선일보 기사를 찾아보라.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조선일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똑같은 수준의 저열한 인식이다. 다만 여기에서도 ‘스탈린주의’ 운운하는 극렬한 종파주의가 조선일보와 변별력을 가지게 할 뿐이다.

그런데 국내외적 언론이 야단법석을 떨었던 이 어설픈 ‘테러사건’은 어떻게 종료되었는가? ‘김정남’ 살해혐의를 받아온 인도네시아 국적 여성은 지난 3월 11일 말레이시아 검찰의 살인 혐의 기소 취하로 전격 석방됐다. 샤알람 고등법원의 별도 무죄 선고도 없이 석방됐다. 베트남 여성도 조만간 석방될 예정이다.(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3)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제국주의의 벗”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 <노동자연대>의 경우, 민플러스, 2019년 3월 14일)

이에 대해 <노동자연대> 김인식은 민플러스에 기고한 글에서 “흑백논리” 운운하며 필자를 다음과 같이 비난하고 있다.

백철현의 진영 논리는 남한 내 좌파로도 향하고 있는데, 그는 북한 체제를 비판하면 싸잡아 우파로 매도한다.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은이 이복형 김정남을 살해한 사건에 대한 <노동자 연대>의 비판적 논평들을 두고, 백철현은 <조선일보>와 다를 바 없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흑백논리는 백철현의 사고방식이 매우 편중돼 있음을 보여 줄 뿐이다. 백철현은 <조선일보>가 진리 판단의 (반사적) 기준이라도 되는 양 생각한다. 그런 식이라면 <조선일보>가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면 사회주의자들은 이 정부를 비판하지 말아야 하나? <조선일보>는 사실 지난해 중반 문재인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노동자 공격으로 돌아서자 칭찬과 변호를 했다.(김인식, “백철현의 조잡한 진영논리와 흑백논리를 비판한다”, 민플러스, 2019.03.28 )

“조만간 석방될 예정”이라던 베트남 여성 도안 티 흐엉 역시 공소가 취소되면서 최근 석방되었다. 말레이시아 경찰이 입장을 발표하기도 전에 곧바로 익명의 “대북 소식통”으로부터 “독살설”로 명명되면서 국제적 사건으로 떠올랐던 이 사건은 이처럼 그 누구도 기소되지 않은 황당한 사건으로 끝나버렸다.

김정남 암살과 관련해 부정확한 정보가 쏟아지고 있다. 생산 주체는 언론이다. 각 언론사는 추측대로 이번 사건을 해석해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실체를 알 수 없는 ‘대북 소식통’을 인용한 기사도 넘친다. 중구난방인 해석 탓에 기사를 읽어도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기 어렵다.(이하늬 기자, “‘김정남 암살’ 먹잇감 받아안은 언론 보도 ‘널뛰기’ 넘치는 ‘고위 탈북자’ 인용보도에 ‘한국 여권’ 오보까지…하다못해 여기서도 ‘외모평가’ 까지…기사 읽어도 사건 실체에 다가가기 어려워”, 미디어오늘, 2017년 02월 16일)

이 사건은 박근혜가 탄핵되기 한 달 여 전에 발생했다. 박근혜 정권은 이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으로 종북몰이에 나서면서 탄핵을 모면하는 기회로 활용하려 했다. 당시 대다수 언론들이 ‘국정원’으로 추정되는 “대북소식통”의 입을 빌어 연신 종북몰이 소동에 나서고 있을 때 이처럼 독립적인 언론에서는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이 사건에 대해 합리적으로 의혹을 제기했다. 그런데 맑스주의를 자처하는 <노동자연대>는 ‘국정원’으로 추정되는 “대북소식통”이 던진 “‘김정남 암살’ 먹잇감”을 덜컥 받아 안아 종북몰이에 동조하고 나섰다.

필자는 “북한 체제를 비판하면 싸잡아 우파로 매도”한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를 자처하는 조직과 그 지도급 인사들이 부르주아 언론들이 독침, 신경가스 테러 운운하며 황당한 근거로 떠들어대는 사건에 대해 비판적으로 인식하기는커녕 부화뇌동하여 반공주의를 유포하는 것을 비판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발생한지 2년이 지났고, 그 동안에 조금이라도 합리적으로 사고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이 사건에 대해 의심할 수 있었고, 맹목적으로 종북몰이에 가담해온 자신들의 행위를 반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인식은 자신들이 무분별하게 조선일보급으로 반북주의 거짓 프로파간다에 동조했던 이 사건에 대해 아무런 해명 없이 여전히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은이 이복형 김정남을 살해한 사건”이라는 규정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김인식은 필자의 “사고방식이 매우 편중”된 ‘흑백논리’에 빠져 있다고 적반하장으로 비난한다.

제국주의 진영의 프로파간다가 극심한 상황에서 부르주아 언론이 중심이 되어 반북 모략 소재로 활용했던 사건을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은이 이복형 김정남을 살해한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반공주의 ‘흑백논리’가 아니면 무엇인가?

“‘비운의 북한 황태자’ 김정남이 이복동생의 치명적 경계심으로 마침내 비명에 갔다”는 <노동자연대>의 반공주의 기사는 ‘진보운동’의 역사에 웃음거리로 남을 저열한 “흑백논리”의 최정점이다. <노동자연대>의 최고 지도급 인사가 벌였던 이러한 종북몰이 광대놀음에 대해 김인식은 아직도 수준 낮은 이 반공 모략극의 대변인을 자처하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김인식은 필자가 “<조선일보>가 진리 판단의 (반사적) 기준이라도 되는 양 생각한다. 그런 식이라면 <조선일보>가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면 사회주의자들은 이 정부를 비판하지 말아야 하나?”고 주장한다.

조선일보가 행하는 문재인 정부 비판이 과연 사회주의자들의 정부 비판과 그 목표, 내용, 방식에서 단 한번이라도 일치한 적이 있었는가? 특히 ‘북한’과 관련된 문제나 민주주의의 문제에서 조선일보의 문재인 정부 비판은 항상 파쇼적이고 노골적인 반공주의적 입장에서 이뤄졌을 뿐이다.

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3일 광주에서 옛 통합진보당 후신 단체 관계자들로부터 물세례를 맞는 봉변을 당했다 … 이들은 ‘이석기 내란 음모는 조작’ ‘통진당 해산 황교안은 감옥으로’ 등의 피켓을 들고 와 황 대표 연설을 방해하고 물을 뿌렸다. 황 대표는 통진당 해산 당시 법무부장관이었다 … 통진당 해산을 반대하던 문재인 대통령 당선 이후의 변화다. 통진당 세력은 민중당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이석기 사건 재심(再審) 청구를 추진하면서 이씨 석방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도 벌였다. 대법원 앞에서 통진당 깃발을 들고 이씨 석방을 요구하기도 했다. 요즘엔 아예 양심수 행세를 하는 이씨는 구치소에서 “드디어 우리가 이기지 않았느냐. 한번 들었다 놔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협하던 세력이 이제는 백주에 야당 대표에게 봉변을 가할 정도로 활개를 치고 있다. 조만간 이들이 민노총처럼 폭력 면허를 받은 듯이 폭력을 휘두를지도 모른다.

통진당은 유사시 국가 기간 시설 공격을 논의한 반(反)대한민국 활동 단체였다.([사설] 反대한민국 세력이 백주에 야당 대표에 물벼락, 조선일보, 2019.05.04.)

황교안이 광주에서 물세례를 받은 사건에 대해 조선일보가 어떠한 방식으로 문재인을 비판하며, 사악한 종북몰이 마녀사냥으로 통합진보당을 공격하고 결국 “폭력 면허”라는 신조어로 민주노총까지 싸잡아 비난하는지 보라!

악랄하고 사악한 조선일보가 앞장서서 반북 소동을 벌였던 사건에 대해 <노동자연대>는 그 인식이나 표현방식에서 조선일보의 종북몰이와 저열함과 천박함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반공주의와 민주주의의 문제에서 조선일보가 유포하는 반동적 기사가 “진리 판단의 (반사적) 기준”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어떻게 맑스주의를 자처하는 단체에서 이러한 광적인 반공주의 인식이 버젓이 기사로 실리고 이에 대해 아무런 반성 없이 도리어 종북몰이를 비판하는 상대를 막무가내로 비난할 수 있을까? 이번 사건에서도 어김없이 표출된 <노동자연대>의 반공주의 소동 역시 우연이 아니다.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조선과 쿠바 같은 사회주의를 “국가자본주의”로 인식하는 맹목적인 반공주의와 적개심이 편견과 독단을 낳아 이성과 합리적 사고 일체를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노동자연대>가 범했던 정치적 과오

필자는 “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3)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제국주의의 벗”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 <노동자연대>의 경우”에서 “<노동자연대>의 반공주의 소(小)역사”의 사례로 4가지 예를 들었다.

‘한국전쟁’과 조선에 대한 반공주의적 입장, 이 입장의 구체적 연장으로 나타났던 ‘북핵’에 대한 중립적이고 양비론적 태도, 이른바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종북몰이 마녀사냥에 동조했던 사례,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벌어졌던 사건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대부분의 사안에 대해 제대로 된 반론을 회피하면서도 김인식이 유독 열을 올려 비난하는 사안이 있다. 이른바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해 필자가 <노동자연대>가 종북몰이에 동조했다는 비판에 대한 답변이다.

이른바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직접적인 피해자들인 현재의 민중당은 말할 것도 없고, 자유한국당이든 민주당이든 정의당이든, 조선일보든 한겨레든, 노동자연대든 노정협이든 그 누구든 당시, 또는 지금에도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행보를 했는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거대한 정치적 문제다. 역사적으로 분단과 분단을 이용한 지배계급의 탄압이 폭력적으로 자행돼 왔고, 이것이 대중들에게 막대한 정치적 영향을 미치고 있고, 심지어는 ‘진보적’이라고 하는 정치세력들에게까지 심각하게 정치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당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백철현이 당시 박근혜 정부의 ‘종북 몰이’를 자신들은 비판했다고 인용하는 글(‘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이라는 것도 전문(全文)을 읽어 보면 통합진보당 비판이 그 글의 주된 논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통합진보당의 “추악한 의회주의 3자 야합”이 “파산”했고,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는 것 등등이었다. 이쯤 되면 단순한 기회주의가 아니라 부정직한 기회주의라고 할 수 있다.(김인식, 같은 글)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과학적 논쟁을 할 자리에서 누구누구의 “환심을 사고자 애써 끄집어 낸 추가적 비방 소재인 듯하다”는 식의 주관적 관심법을 들이대는 것은 극히 유치한 사고의 발로이다.

맑스·엥겔스의 위대한 《공산당 선언》에서의 명제처럼,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견해와 의도를 숨기는 것을 경멸한다. 공산주의자는 종래의 사회 질서 전체를 강력한 힘에 의해 전복하지 않고는 그들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공공연히 언명한다.” 부르주아적 야합이나 술수에 익숙한 자들은 맑스레닌주의 정치사상을 내세우는 것에 있어서 공산주의자들의 명예가 얼마나 드높은지 모를 것이다. 우리는 <민플러스>든 <레프트 대구>든 어디에서든 “종래의 사회 질서 전체를 강력한 힘에 의해 전복하지 않고는 그들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숨겨보거나 그 누구의 눈치 때문에 굴절시켜 본적이 없다.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은 “매카시즘 광풍과 변혁적 정치세력화의 새로운 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당시 <다함께>는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에서의 폭력 사건에 대해 2012년 5월 14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 파행을 보며”라는 제목의 성명서에서 ‘폭력’ 사태라는 현상에 사로잡혀 거대한 매카시즘 공세를 외면하고 “막장 양아치”, “개무시” 같은 막장의 언어를 동원하여 극렬 비난하고 심지어 “스탈린주의의 특징”, “스탈린주의의 실용주의적 도덕관” 운운하며 극단적인 종파주의적 태도를 과시했다.

반면 우리는 당시 우리 사회를 집어 삼키고 있는 “한국판 매카시즘 광기와 저주”에 맞서 전면적으로 투쟁했다. 또한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 폭력사태 이후에 그 근본원인은 외면한 채 “폭력 반대”라는 사회적 명분까지 들어가면서 한층 더 격렬해진 매카시즘 광기에 대해 “특정인, 특정 세력에게 가해지는 가공할 파쇼적 정치적 폭력은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 내에서 돌발적으로 벌어진 물리적 폭력 보다 수백 배, 수천 배로 위험천만하다”며 이 사태의 본질이 무엇인지 간파하고 그 광기와 그 광기를 통해 예고되던 국가보안에 맞서 투쟁했다.

과연 누가 동시대적 사건에 대해 부르주아 반공주의 언론과 반동적인 권력이 자행하는 본질을 과학적으로 파악하고 정면으로 부딪쳐 싸워 왔는가? 그러나 우리는 매카시즘 공세와 국가보안법에 맞서 싸우는 동시에 이 사태의 또 다른 측면인 의회주의에 대한 내적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우리는 이 사건의 본질이 ‘선거부정’이 아니라 ‘선거부정’논란을 현상으로 하는 의회주의적 3자 야합과 신(新) 3자 야합에 있다고 본다. 원래 야합은 공통의 목표 속에서 각자 계파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종북주의’를 내세워 국가보안법 구속자를 종파주의적으로 매도하고 분당에 앞장서 진보신당 창당을 주도했다가 다시 진보신당을 탈당해서 3자 야합의 한 축이 된 심상정, 노회찬 등 진보신당 탈당파, 과거 지배계급 정당이었던 열린우리당 일부가 만든 국민참여당 계파, ‘당권파’와 ‘비당권파’로 분열된 민주노동당 계파 같이 이질적인 세력들이 총선을 앞두고 급조한 정당이 통합진보당이다. 이 3계파는 철저하게 지분 나눠 먹기 식으로 당권을 차지하고, 비례대표 후보 조정 등 총선에서의 승리라는 의회주의적 공통의 목표 아래 움직였다.(“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한 또 다른 시각”, 노동자정치신문 85호, 2012년 5월호-증보판)

김인식은 당시 사태에서 “과연 누가 그 당시에 올바른 정치적 태도를 취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통합진보당의 의회주의 3자 야합”을 같이 비판했으면서도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며 우리를 “부정적한 기회주의”라고 비난을 하고 있다. 이는 종북몰이에 동조한 자신들의 정치적 과오를 지적한 것에 대한 답변을 회피하면서 상대방을 터무니없이 비난하는 부정직하고 비겁한 태도에 불과하다.

우리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길을 찾아서》라는 소책자에서도 통합진보당의 의회주의 경도를 비판한 적이 있는데,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 건설을 주도했던 자주세력이 의회주의에 대한 자기비판을 한 것을 인용한 적이 있다. 바로 필자가 기고했던 민플러스에 실렸던 글이다.

의회만능의 경향은 시간이 흐를수록 당을 우경화, 개량화의 길로 이끌었고 급기야 당내 출세주의 만연을 불러왔다. 오로지 의원의수, 선거에서의 득표 정도를 진보운동역량 확대강화 기준으로 사고하면 대중추수주의에 빠져 드는 것이 어쩌면 필연적이다 … 많은 활동가들 사이에 개인주의, 출세주의가 침습해 들어오고 운동성, 전투성이 약화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도 의회주의, 합법주의에 경도된 진보정당운동이 가져온 폐해 중 하나라고 하겠다.(김창연 진보대통합연대회의 부대표, “합법적 대중정당답게 자리잡지 못했다”, [‘진보 정치 성찰’ 기고3]의회주의, 합법주의, 당원의 조직생활, 민플러스, 2016.08.25.)

매카시즘 공세에 맞서 통합진보당을 옹호하고 국가보안법에 맞서 싸우는 것과 의회주의 야합에 대한 운동 내적인 비판을 하는 것을 김인식과 <노동자연대>는 같은 층위에 놓고 사태의 본질을 호도한다. 그리고는 뚱딴지같은 논점을 들이대며 자신들의 오류를 은폐한다.

백철현과 노정협은 통합진보당에 지지를 제공하기를 거부했었다. “노동자 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열망을 배신”한 정당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2012년 4∙11 총선 직전에 발표한 ‘임박한 4.11 총선과 노동자의 전략 전술’이라는 글에는 통합진보당의 ‘통’자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 놓고 노동자연대의 통합진보당 탈당을 비난하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인 의도가 엿보인다.(김인식, 같은 글)

<노동자연대> 김인식은 “노동자 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열망을 배신”했다고 당시 통합진보당을 비판한 것에 대해 적반하장으로 우리를 비난하면서도 정작 종북몰이 매카시즘에 동조한 자신들의 정치적 과오는 은폐하고 있다. <노동자연대>가 이후 통합진보당을 탈당하면서 발표했던 입장들을 보자.

7월 26일 통합진보당 의원 총회에서 이석기·김재연 제명안이 부결됐다 … 우리가 구당권파의 행태에 분노하는 이유는 그들이 진보의 원칙과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마저 종파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내 경선 과정에서 대부분의 정파가 연루된 ‘총체적 부정·부실’이 있었던 것이 이 사태의 시작이었다. 당 지도부와 경쟁 비례대표 후보들이 총사퇴하는 것은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책임지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그런데 구당권파는 이것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중앙위원회까지 폭력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 우리는 이런 대안 건설을 위한 모색과 논의를 촉구하며 통합진보당을 탈당한다. 그동안의 상황이 오죽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으면, 이 결정은 노동자연대다함께의 긴급 대의원협의회에서 전례없는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노동자연대다함께 운영위원회

(노동자연대다함께 대의원협의회를 대변하여)

“최소한의 혁신마저 불가능해진 통합진보당에서 탈당한다”, 레프트21 86호, 2012년 7월 29일)

<노동자연대>에게는 “이석기·김재연 제명안”이 “진보의 원칙과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이며, “당의 정화를 위한 최소한의 조처”이다. 권력의 국가보안법과 파쇼 언론의 종북몰이를 등에 업고 분열적 행태를 일삼고 정치적 이해를 마음껏 관철시키려 했던 추악한 기회주의 세력들과 손잡고 추진했던 두 의원에 대한 제명안의 부결이 <노동자연대에게는 “오죽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이 “최소한의 혁신”이 부결된 불편함을 참을 수 없어 통합진보당 탈당을 “전례없는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던 것이다.

동시대적 사안에 대해 과학적 통찰 능력이 없어서 오류를 범했다면, 이후 7년여의 세월이 지나면서 내란 공작, 이석기 의원 국회제명과 구속, 통합진보당 해체라는 사태까지 겪고 이 파쇼 탄압의 주범 박근혜가 탄핵당하고 구속까지 되고 청와대와 국정원의 명령으로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키기 위해 헌법재판소와 법원이 재판거래를 하고, 통합진보당 해산 관련 내통을 한 것이 백일하에 드러난 상황에서 <노동자연대>는 이제라도 자신들이 범했던 심각한 정치적 과오에 대해 되돌아 볼 줄 알아야 한다.

김인식이든 최일붕이든, <노동자연대> 내부의 누구든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지 말고 종북몰이에 동조했던 자신들의 정치적 과오에 대해 책임 있게 답변해보라. 위대한 혁명적 스승들이 우리들에게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견해와 의도를 숨기는 것을 경멸한다”고 하지 않던가?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는 “특수한 원리를 내세우고 프롤레타리아운동을 이 원리에 뜯어맞추려고 하지 않는다”(공산당 선언)고 했다. 그런데 노동자연대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쏘련과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분석을 하는 대신에, “국가자본주의”니 “타락한 노동자 국가”니 하는 “특수한 원리를 내세우”면서 진보적 인류의 피눈물 나는 투쟁과 발자취를 비난하는데 골몰하고 있다. 이는 역사에 대한 극단적 종파주의이며 이들이 제국주의의 동반자가 되게끔 하는 근본 이유이다.

상호 논쟁은 <노동자연대>가 제국주의 벗임을 자백하는 과정

<노동자연대>는 제국주의 벗임을 입증하는 4가지 사례 대부분에 대해 완강하게 침묵하거나 의도적으로 논점을 이탈하는 것으로 답변을 회피해 왔다는 점은 앞에서 제기했다. 그런데 <노동자연대> 김인식은 답변 과정에서 이와 관련 없는 시리아, 우크라이나 사태를 언급함으로써 자신들이 제국주의 벗이라는 근거를 두 가지 더 추가했을 뿐이다.

김인식은 또한 자신들이 제국주의 벗이라는 비판에 대한 답변을 회피하면서도 대신에 쏘련 사회주의의 역사적 과정에서 제기됐던 수많은 쟁점들을 반공주의적으로 제기했다. 이 쟁점들에 대해서는 지면의 한계상 모두 여기에서 답변할 수 없다. 그러나 집산화를 둘러싼 문제들, 고려인 강제이주와 민족문제 등 몇 가지 쟁점들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쏘련의 반파시즘 전쟁과 쏘독 간 체결된 불가침협정의 문제 등은 향후 연재를 지속하면서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노동자연대> 김인식은 트로츠키가 “스탈린 체제와 파시즘 체제는 사회적 기초는 판이하지만 동일한 현상이다. 이 두 체제의 특징은 지독히도 비슷하다”(《배반당한 혁명》)며 ‘적색 파시즘’론을 주장했다는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백철현은 트로츠키가 스탈린 체제를 “적색 파시즘”으로 봤다고 주장했다. 순전히 지어 낸 얘기이다. 트로츠키는 그런 개념 규정을 한 적이 없을뿐더러 스탈린 체제와 히틀러의 나치 체제를 동일시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국제 노동계급 혁명이 패배한 결과로 소련에서는 스탈린 체제가, 독일에서는 파시즘 체제가 등장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두 체제의 사회적 토대가 판이하다고도 지적했다(≪배반당한 혁명≫).

김인식은 이처럼 교묘하게 트로츠키주의자들 특유의 문필조작을 감행하고 있다. 트로츠키가 실제 무엇이라고 주장했는가 보자.

소련의 보나파르트 체제는 노동계급의 세계혁명이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등장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똑같은 이유로 파시즘이 등장했다. 소련에서는 무제한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관료집단이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있으며 서방에서는 파시즘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있다. 이 두 현상은 동일한 원인의 산물이다. 즉 역사가 제기한 문제들을 세계 노동계급이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이 결론은 처음에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불가피할 뿐이다. 스딸린 체제와 파시즘 체제는 사회적 기초는 판이하지만 동일한 현상이다. 이 두 체제의 특징은 지독히 비슷하다.(≪배반당한 혁명≫)

러시아 혁명 이후에 유럽혁명, 특히 고대하던 독일혁명이 실패하면서 제국주의로부터 고립된 채 사회주의 건설을 지속하며 분투했던 쏘련과 독점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막다른 길에 내몰린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뒤엎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본주의 위기를 가장 야만적이고 배외주의적 방식으로 구출하기 위해 등장한 파시즘을 “동일한 원인의 산물”이라고 분석할 정도로 트로츠키의 정치적 인식은 분별력을 상실했다. 실업과 공황을 일소하고 계획경제의 우월함을 과시하던 쏘련과 미증유의 대공황으로 대량실업과 파산에 시달리며 반동적 공세로 근로인민 전체를 참극에 빠뜨리던 자본주의를 “두 체제의 특징은 지독히 비슷하다”는 트로츠키는 “배반당한 혁명”이라는 착란적 인식으로 혁명과 인민을 배반했던 것이다.

“두 체제의 사회적 토대가 판이하다고도 지적했다”고 하는 김인식의 주장에 비해 트로츠키는 실제로는 “이 두 현상은 동일한 원인의 산물”이며 “스딸린 체제와 파시즘 체제는 사회적 기초는 판이하지만 동일한 현상이다. 이 두 체제의 특징은 지독히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판이하다”와 “판이하지만 동일한 현상이다”, 그것도 “지독히 비슷하다”는 완전히 다른 얘기다. 김인식은 이처럼 트로츠키를 인용하면서 부정직하게 문필조작을 자행함으로써 트로츠키의 ‘적색파시즘론’을 옹호하고 있다.

김인식은 “스탈린의 야만주의” 운운하면서 “스탈린의 노동수용소는 대서양 노예 무역에, 소수민족에 대한 스탈린의 억압은 미국 자본주의의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인식은 미국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면서 아메리카에서 원주민 대량학살과 스탈린 시대의 ‘적색테러’를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라고 하는데, 이는 그 규모의 극단적 과장에서도 지난번에 인용했던 극우파쇼들의 《공산주의 흑서》에 “비견할 만한 것”일뿐만 아니라 그 역사적 배경과 계급적 성격을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김인식과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을 썼던 토니 클리프 같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역사상 최초로 이루어진 농촌에서의 집산화, 즉 사회주의 생산관계로의 전환 과정에서 벌어졌던 계급투쟁과 미국 자본주의의 반동적인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을 동일하게 볼 정도로 몰계급적이고 몰역사적이다.

쏘련에서의 농촌 집산화는 “누가 누구를”이라는 구호에서도 알 수 있듯, 누가 누구를 지배하느냐 하는 ‘계급독재’의 문제였다. 쏘련에서의 농촌 집산화는 높은 공업생산품 가격과 낮은 농업생산물 가격 차이로 가위위기(협상 가격차 위기)가 발생했을 때, 신경제적 정책의 성과 이면에서 쿨락(부농)과 신흥 자본가(네프맨)들의 사보타주로 도시에 곡물을 제공하지 않거나 매점매석으로 투기화하자 빈농이 중심이 되어 중농을 끌어들이면서 시작된 농촌에서의 거대한 집단적 생산으로의 전환이었다. 쿨락과 네프맨뿐만 아니라 과거 대토지 소유자들이었던 고위 성직자, 반혁명 분자들이 총궐기하여 빈농이 중심이 된 농업 집산화에 격렬하게 맞섰다.(이에 대해서는 ‘위대한 러시아 혁명의 산물: 쏘련 사회주의 그 깃발을 짓밟는 소부르주아 반동 ‘맑스주의자들’‘, “러시아 혁명과 인류의 희망 우리는 왜 여전히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가?”, 노동자의 사상 7호 러시아 혁명 100주년 특별호 1에서 그 배경과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김인식과 <노동자연대>는 쏘련 사회주의의 건설 과정에서 나타났던 거대한 계급투쟁에 대해 그 역사적 배경과 계급적 성격, 구체적인 진행 양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대신에 일방적인 비방만 일삼을 뿐이다. 토니 클리프는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에서 “집단화의 대물결 이후 연간 도살된 가축의 수는 이전에 도살된 가축 수에 결코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며 집산화가 극단적으로 추진되면서 마치 집산화를 추진하는 주체들에 의해 가축 대량 도살이 이뤄진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이를 비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실상은 어떠했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꿀락들이 농촌에서 필수적인 생산력인 말과 소를 죽여서 집단 농장이 시작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는 점이다. 농지에 대해 그들이 한 일은 바로 사역용 가축에 대한 것이었다. 꿀락들은 그 가축들 중 반을 죽였다. 그들은 그 가축을 집단농장으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도살하였고, 똑같은 짓들을 하도록 중농들을 자극했다.

1928년 농촌의 3,400만 마리의 말 중에서, 1932년에는 단지 1,500만 마리의 말만 남아 있었다 … 7,050만 두의 소 중에서 1932년에는 단지 4,070만 두만 남아 있었다. 2,600만 마리의 돼지 중에서 겨우 1,160만 마리만이 집산화 기간 동안 살아남았다.

물론 이러한 생산력의 파괴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1932년에 대기근이 들었는데, 이는 쿨락들이 저지른 사보타지와 파괴가 부분적인 원인이었다. 그러나 반쏘주의자들은, 꿀락들의 범죄 행위로 야기된 죽음에 대해서, 스탈린과 ‘강요된’ 집산화를 비난한다.(루도 마르텐스(Ludo Martens), 《스딸린 다시 보기》, 정세와 노동, 노사과연)

김인식 역시 “굴락(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의 숫자는 1933년 250만 명에서 1953년 550만 명으로 늘어났다. 수용소 내 사망률은 자유민들에 비해 5~9배나 높았다. 25년 동안 혹사와 방치로 인해 약 200만 명이 죽었음을 시사한다. 마지막으로,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의 강제 집산화에서 비롯한 기근으로 500만 명 이상이 숨졌다”며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자료들을 가지고 집산화를 반공주의적으로 비난한다.

그런데 《진실이 밝혀지다》(마리오 소사(Mario Sosa), 노사과연) 같은 책에서는 콘퀘스트, 솔제니친, 메드베제프 같은 반공주의자들의 쏘련에 대한 극단적인 거짓말에 대해 소상하게 폭로하고 있으며, 고르바초프 당시 개방된 국가문서고를 연구한 학자들의 자료들, <미국역사평론> 등에 실린 쏘련의 형벌체계와 수용자 수 등 방대한 자료를 인용해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 책은 프랑스 극우 진영의 《공산주의 흑서(Black Book of Communism)》나 반공주의자들의 주장과 비교할 때 <노동자연대> 김인식의 주장 역시 그에 버금가는 터무니없는 과장과 거짓임을 속속 입증하고 있다.

토니 클리프는 농촌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로의 전환 과정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에 대해 “본원적 축적기 동안 훨씬 더 많은 피가 소련에서 흘렀다”라고 반공주의적 비난을 하며 마치 집산화 과정에서 쏘련 당국이 부농을 대량학살한 것으로 왜곡하는데, 소사의 책에서는 실제 노동수용소에서 죽은 부농들은 의약품의 부족, 특히 항생제의 부족이 원인이었고 2차 대전 이후 항생제가 발명되어 보급된 이후, 수감자 중 사망자 수가 “1934년 5.2%에서 1953년 0.3%로 큰 폭의 변화를 보였다”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게티(Getty)의 《대숙청의 기원들》을 인용하여 “숙청”의 정치적 배경과 그 진실에 대해서도 상세하고 다루고 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자료와 근거를 가지고 각자의 주장을 할 때는 우선적으로 그 자료들이 제국주의자들과 반공주의자들의 프로파간다용으로 만들어지고 활용되고 있는지, 1차 자료를 주로 사용하고 있는지, 자료와 통계의 신빙성이 있는지 등을 비교하면서 누구의 주장이 진실에 가까운지 살펴보아야 한다. 쏘련 해체 이후에 방대한 자료를 이용하고 실증적인 탐구로 스탈린 시대와 쏘련 역사를 독립적으로 연구하려는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의 저서들도 참고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쏘련이나 인류의 역사를 다루는 역사적 및 계급적 관점의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시베리아에서 1930년 처음 여섯 달 동안, 꿀락들에 의한 100 건의 테러행위가 기록되었다. 2월 1일부터 3월 10일까지 4000명 이상의 꿀락들이 연루된, 19개의 ‘반란을 모의하는 반혁명 조직들’과 465개의 ‘쿨락의 반쏘비에뜨 단체들’이 적발되었다. 쏘비에뜨 역사가들에 따르면, ‘1930년 1월부터 3월 15일까지의 기간 동안 꿀락들은, 전 연방에서(우끄라이나는 제외하고) 당과 쏘비에트 관리들 및 꼴호즈 활동가들에 대한 살인과, 꼴호즈와 집단 농장 농부들에 대한 파괴를 수반하는, 1,678건의 무장 시위를 자행했다.(루도 마르텐스, 같은 책)

이처럼 집산화는 거대한 계급투쟁이었다. 그것도 인류역사상 최초로, 최대규모로 농촌에서 펼쳐진 계급투쟁이었다. 러시아 사회의 야만적 착취와 억압, 수탈을 종식시키느냐, 반혁명으로 회귀할 것인가를 둘러싼 격변적 투쟁이었다.

꿀라끄들은 빈농들 사이에 계속된 기아를 일으켜 그들의 권좌를 보증해 줄 수 있도록 지속해서 기아가 펴져나가길 바랐다.

하지만 사태는 살인자들과 살인방화자들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빈농들은 혁명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당시 꿀라끄들보다 훨씬 강력했다. 꿀라끄들은 이 싸움에서 패했고, 체포되어 추방되거나 노동수용소에 처해졌다. 1천만 명의 꿀라크 중에 180만 명이 추방되었다.

쏘비에트의 농촌에서 벌어진, 1억 2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 이 같은 거대한 계급투쟁에서, 부당한 조치들이 취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답게 살아보기 위해, 자기 자식들을 더 이상 굶주린 무지렁이로 살게 하지 않게 위해 싸웠던 가난하고 굶주리고 착취당하던 사람들을 비인도적이라든가 그들의 심판이 무자비했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수백 년 동안 모든 문명화 과정에서 배제되어왔던 사람들을 야만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수백 년 동안 가혹하게 착취를 하며, 지배계급으로 있었던 꿀라끄가 언제 가난한 농민들을 문명적으로 관대하게 대한 적이 있었는가?(마리오 소사, 같은 책)

쏘련에서의 집산화는 평생을 가난과 모욕에 시달려온 가난한 빈농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다. 거대한 계급투쟁에서 때로는 집산화에 대한 혁명적 열정이 지나쳐 조급하고 과도한 행위나 관료주의적 행위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하여 스탈린은 이를 시급하게 경계하여 바로잡는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뚜르께스탄의 일련의 지방들에서는 아직 콜호즈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 농민들을 무력으로 위협하거나 관개 용수와 공업 제품을 주지 않겠다고 위협하는 방법으로 쏘련의 선진 지방들을 “따라 잡고 앞서려고”하는 시도가 이미 있었던 것이다 … 이러한 왜곡, 꼴호즈 운동에 대한 이러한 관료적 명령, 농민들에 대한 이러한 당치 않는 협박이 그래 누구에게 필요할 것인가? 우리의 적들을 내놓고는 그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다!(스탈린, “성공에 취하여”)

김인식은 위와 같은 쏘련에서의 집산화를 두고 “스탈린 체제는 러시아 혁명을 분쇄한 반(反)혁명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한다. 농촌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로의 전환을 반혁명이라고 주장하는 김인식과 《노동자연대》와 일련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전도된 인식을 넘어 혁명을 반혁명이라 하고, 사회주의 생산관계로의 비약적 전환을 자본주의로의 전환이라며 마침내 반혁명 분자들의 입장과 관점으로 넘어가버렸다.

냉전 시기에 서방 제국주의자들이 레닌을 악마화하며 스탈린 체제를 비난하는 것은 서방의 좌파를 싸잡아 공격할 수 있는 유용한 채찍이었다. 반면, 옛 소련에서는 그 거울 이미지로 레닌을 우상화해 스탈린 체제의 지령 경제와 일당국가 독재를 정당화했다.(김인식, 같은 글)

레닌의 혁명적 사상과 원칙을 계승하는 것을 “우상화”라고 김인식은 매도한다. 그리고 사회주의 경제를 “지령경제”라 비난하는데, 이는 중앙계획기구(고스플란)와 지방계획기구, 여기에 참여하는 공장이나 직장단위 기구에서의 계획과 참여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결여하고 있다. 또한 쏘련 시기 내내 거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계획과 시장의 활용을 둘러싼 논쟁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트로츠키주의자들 특유의 일방적인 비방을 답습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러한 비방은 실제로는 제국주의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중앙집중 계획경제의 “민주성”과 효율성, 우월성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된다. 실제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민주적 계획경제”(알렉스 캘리니코스)를 주장하는데, 이는 중앙집중 계획을 분산적 계획으로 대체하고 이를 통해 집중 보다는 자치를 옹호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유고의 시장사회주의, 급기야는 시장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반혁명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해체를 연구해보면 국유화와 중앙집중계획의 실패가 아니라 자치 같은 분산적 계획, 이윤체제의 점차적 도입, 2차 경제의 발전 등 사회주의 원칙을 포기하고 궁극적으로 절멸시켜야할 시장에 굴복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회주의 건설의 구체적인 역사를 맑스레닌주의 관점에 입각하고 실사구시하여 연구하는 대신 진공 속에서 원리적 사회주의를 그려 놓고 이를 근거로 현실 사회주의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데 골몰하는 모략가들은 과학적 인식능력이 부재할뿐더러 종파주의적 태도 때문에 오로지 현실을 왜곡할 뿐이다.

“일당 독재 국가”라는 김인식의 비난에 대해서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김인식은 ‘계급독재’를 부정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다당제의 옹호자가 된 것이다. 스탈린은 반공주의자들의 “일당 독재” 비난에 대해 이렇게 답변하고 있다.

각종 정당들의 자유에 대하여 말한다면 우리는 이 문제에서 다소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당은 계급의 일부분이며 그 선진적 부분이다. 여러 개의 당, 따라서 정당의 자유는 오직 적대적이며 화해할 수 없는 이해관계를 가진 적대 계급들이 존재하는 그런 사회, 예컨대 자본가와 노동자, 지주와 농민, 부농과 빈농 등등이 있는 그런 사회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쏘련에는 자본가, 지주, 부농 등과 같은 그러한 계급들이 이미 없어졌다. 쏘련에는 오직 두 개의 계급, 즉 노동자와 농민만이 있는데 이 두 계급의 이해관계는 적대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우호적이다. 따라서 쏘련에는 여러 정당이 존재하기 위한 기반이 없으며 그러한 정당들의 자유를 위한 기반도 없다. 쏘련에는 오직 하나의 당, 공산당만이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 쏘련에는 오직 하나의 당, 즉 노동자와 농민의 이익을 용감하게 끝까지 옹호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당만이 있을 수 있다.(스탈린, “쏘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연맹 헌법 초안에 대하여”)

인민노련 황광우는 “민주주의와 함께 가는 사회주의” 운운하며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달성한 민주주의 수준을 따라잡”아야 한다면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그 숱한 왜곡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류 사회의 역사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달성하였음을 우리는 확인한다”(황광우, 《다시 생각하는 사회주의》, 기획출판, 거름, 1993년)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그 체제에 경도되고 마침내 청산주의자가 되었다.

김인식 역시 “백철현이 말하는 ‘[쏘련의] 무상체제 기반’이라는 것도 제2차세계대전 후 서구, 특히 북유럽의 복지 제도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며 쏘련 사회주의의 거대한 성취를 폄하하고 부르주아 체제를 더 높이 산다. 그런데 짜리즘이 남긴 중세적 유산과 대중들 사이에서 여전히 문맹과 무지와 농민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후진적 러시아로부터 출발한 쏘련과 러시아 혁명 당시에 이미 거대한 독점자본주의로 발전해 있었던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과 자국 인민들과 제3세계를 제국주의로 수탈, 착취하며 발전한 서구와 북유럽 자본주의 국가와 “다른 나라에서 착취한 부 없이 이러한 것들을 이룩해야 했(Murphy, 2000)”(스티븐 가우언스(Stephen Gowans)공적소유, 계획경제는 유효한가?(2), 2012년 12월 21일, 노동자정치신문)고, 심지어 무역관계에서 손해를 보기조차 하면서 다른 공산권과 거래를 하고, 제3세계에 기술적, 자금적, 군사적 원조를 해야 했던 쏘련을 일률적으로 비교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쏘련은 제국주의 포위 속에서 인민복지에 들어갈 비용을 군사비에 상당부분 쏟아 부어야 했다. 실제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쏘련은 국내총생산의 12-14%를 군대에 소비했다.(Szymanski, 1984; Allen, 2003)”(같은 글)

이처럼 제국주의에 맞서 쏘련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군사적 경쟁을 근거로 <노동자연대>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쏘련을 경쟁이 지배하는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며 터무니없는 종파주의적 태도를 과시하며 비과학적 무지를 자랑한다. 이들은 제국주의에 대해 무장해제를 종용하고 그 빈자리를 공허한 “정신승리”로 메우라고 채근한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야말로 ‘맑스주의’를 참칭하는 21세기 아Q(阿Q)가 아닌가!

우리는 무엇보다도 “북유럽의 복지 제도” 역시 진공 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쏘련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취에 자극받은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물인 동시에 쏘련 사회주의를 전망으로 해서 혁명을 할 것이 두려워 자본이 양보한 결과라는 점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미국과 서구 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공황과 대량 실업과 극단적 부의 불평등에 사로잡혀 있을 때 쏘련 인민들은 공황과 실업 없이 교육, 의료, 보육, 주택 등 무상체제의 성과를 누렸다.

쏘비에트 경제의 가장 중요한 성취 중에는 실업의 철폐가 있었다. 쏘련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은 헌법에서 소중히 여겨지는 너무나도 중요한 사회적 의무로 간주되었다 … 지대, 이윤, 투기나 암시장-사회의 기생충들-으로부터 나오는 수입을 얻는 것은 불법이었다.(Szymanski, 1984)

… 1977년 헌법 41조에서는 주 41시간 노동으로 상한을 정하고 있었다. 야간 교대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은 7시간 일을 했지만 완전한 변환 보수(8시간)를 받았다. 위험한 일을 하거나(예, 광부들) 계속 긴장해야하는 노동자들(예, 의사들)은 6시간 혹은 7시간 일했지만 풀타임 보수를 받았다. 초과 근무는 특별한 상황을 빼고는 금지되었다(Szymanski, 1984).

1960년대부터 노동자들은 원조를 받은 휴양지에서 보낼 수 있는(Kotz, 2003), 평균 한 달짜리 휴가를 받았다(Keeran and Kenny, 2004; Szymanski, 1984).

쏘비에트의 모든 60살이 된 남성들과 55살이 된 여성들에게는 퇴직 연금이 제공되었다(Lerouge, 2010). 연금에 대한 권리(장애인 혜택뿐만 아니라)는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정치인들의 순간적인 변덕에 따라 변하거나 폐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쏘비에트 헌법에 의해 보장되었다(Article 43, 1977).

1936년 초 여성들은 완전한 보수를 받는 임신 휴가를 보장받았고, 다른 많은 혜택들과 마찬가지로 쏘비에트 헌법에서 보장받았다(Article 122, 1936). 또한 1936년 헌법으로 임신한 가정, 육아와 유치원의 폭넓은 연결망을 제공했다. 반면 1977년 개정된 헌법은 “광범위한 탁아 시스템을 발전시키고 제공하여, 자녀 출산에 보조금을 지불하는 방법으로, 대가족을 위한 육아 수당과 혜택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가족”을 돕는 것을 국가의 의무로 했다.(Article 53). 쏘련은 공공 탁아를 발전시킨 첫 번째 국가였다(Szymanski, 1984).

… 도시 거주민들은 대체적으로 그들이 일하는 기업이나 지역 정부 소유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임대료는 대략 가족 예산의 2~3% 정도로 법에 의해 무료나 다름이 없없다(Szymanski, 1984; Keeran and Kenny, 2004). 이는 임대료가 평균 가족 예산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던 미국과는 너무나도 달랐고(Szymanski, 1984),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식품들과 다른 필수품들은 보조를 받았다. 반면에 사치품들은 제 가격 이상으로 팔렸다.

공공 운송은 효율적이며, 광범위했고, 실질적인 무료였다. 지하철 요금은 1970년대에 대략 8센트였는데, 1930년대 이후 그대로였다(Szymanski,1984). 이는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존재했던 어떤 것들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쏘련은 자본주의 경쟁국들보다 더 의료를 강조했다. 쏘련보다 일인당 의사나 일인당 병실이 더 많은 국가는 없었다. 1977년 미국에는 10,000명당 18명의 의사와 63개의 병실이 있었던 것에 비해 쏘련에는 10,000명당 35명의 의사와 212개의 병실이 존재했다(Szymanski, 1984).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료가 무료였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의료비에 지불해야하는 것이 쏘련인들에게는 매우 야만적인 것으로 생각되었고 쏘비에트 시민들은 “이 점을 매우 의아해하며 미국 관광객들에게 종종 질문을 하곤 했다.”(Sherman, 1969)

대학교육 역시 무료였고 장학금은 중등이상의 학생들에게 충분했으며, 교과서, 식사와 방, 다른 비용들을 지불하는데 충분했다.(Sherman, 1969; Szymanski, 1984)(스티븐 가우언스, 같은 글)

물론 “주택에 대한 권리는 1977년 헌법 조항에서 보장되었다(44조). 그러나 도시 주택 공간은 오스트리아나 서독의 일인당 도시의 주택 공간의 약 절반으로 비좁고 갑갑했다. 그것은 짜르 시대의 부적당한 건물, 2차 세계대전 동안의 대량 주택 파괴, 중공업에 대한 쏘비에트의 강조 때문이었다”(같은 글)에서 보듯 역사적, 현실적 제한성이 있었다.

사심 없이 인류의 진보적 역사를 살펴보면 쏘련의 성취가 계획경제라는 인민경제의 우월성과 인민들의 헌신과 희생 속에 만들어진 성과임을 알 수 있다. 과연 ‘[쏘련의] 무상체제 기반’이라는 것도 제2차세계대전 후 서구, 특히 북유럽의 복지 제도보다 나을 것도 없었는가?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조선과 쿠바 같은 인류의 진보적 역사들을 극단적으로 “국가자본주의”라고 왜곡하고 중상에 골몰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볼 때 이들이 제국주의자들의 정치적 동반자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과 중상을 하는 이들의 정치적 모략극은 이뿐만이 아니다. 김인식은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 또는 100 년이 뒤처져 있다. 우리는 이 차이를 10년 안에 극복해야 한다. 우리가 해내든지 도태하든지 둘 중 하나다”라는 스탈린의 주장을 인용(사실은 트로츠키주의 역사가 아이작 도이처의 글을 재인용)하며 중공업 우선 정책을 비난하고 이를 근거로 쏘련 경제의 폭력성을 강조, 쏘련이 국가자본주의로 되었다며 스탈린과 쏘련 사회주의를 비방하는 단골 메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은 자본주의가 1929년 미증유의 경제공황에 빠져서 노동자, 농민, 근로인민들을 희생시키면서 공황에서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치는 상황을 언급하면서 자본주의 경제에 비해 인민대중경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세계혁명의 과제를 강조하는 글이다.(스탈린, “경제일꾼들의 과업에 대하여”, 1931년 2월 4일)

지면의 제한상 이 글을 전면에 인용하지는 않을 것인데, 여기서는 이 글이 쓰인 시점이 1931년이라는 것을 주목해보라.

쏘련이 공업화와 집산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1928년에는 파시즘의 위협이 현실적인 위협이 됐고, 1933년에는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했다. 1939년에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했다. 1931년에 스탈린이 이 연설을 했는데 정확히 “10년 안”인 1941년에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다.(‘위대한 러시아 혁명의 산물: 쏘련 사회주의 그 깃발을 짓밟는 소부르주아 반동 ‘맑스주의자들’’, “러시아 혁명과 인류의 희망 우리는 왜 여전히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가?”, 노동자의 사상 7호 러시아 혁명 100주년 특별호 1)

과연 스탈린의 정치적 혜안과 지도력이 없었으면 2차 대전에서 히틀러와 나찌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공업화가 없었다면, 월등한 군사력으로 유럽 강국들을 굴복시켰던 히틀러 파시즘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

2차 대전에서 쏘련의 승리는 히틀러의 압제에 시달리는 동유럽 전반을 해방시키고, 추축국이 패망하면서 제국주의 압제에 시달리는 식민지 국가들이 해방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쏘련 인민 2800만 여명의 희생 속에서 성취한 가장 위대한 역사적 성과에서도 스탈린을 비난할 정도로 초종파적이다.

2차 대전에서의 빛나는 승리에서도 비난꺼리를 찾는 이들은 “스탈린이 전쟁 직전에 주요 군사 지도자들을 대거 숙청하는 바람에 소련의 전투 수행 능력이 크게 저하됐다. 군 최고 지도자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의 처형이 대표적인 사례다”라며 상투적인 얘기를 끄집어낸다. 그러나 김인식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는 침묵하거나 인식이 없거나 한다.

1937년 5월 26일에 뚜하체프스끼(Tukhachevsky) 원수와 지휘관인 야끼르(Yakir), 그리고 우보레비치(Uborevich), 아이데만(Eideman), 꼬르끄(Kork), 뿌뜨나(Putna), 펠트만(Feldman), 뿌리마꼬프(Primakov)가 체포되어 군사 법정에 회부되었다. 그들의 사형 집행은 7월 12일에 공표되었다 …

리까체프(V. Likachev)는 1937-1938년 동안 쏘비에뜨 극동 지역 적군의 장교였다. 그의 저서, ≪극동에서의 음모 (Dal’nevostochnyi zagovor)≫에는 군대 내부에 실제로 거대한 음모가 있었음을 보여준다.7)(루도 마르텐스, 같은 책)

심지어 루도 마르텐스는 자신의 책에서, “장군들은 실제로 쿠데타를 계획했다…. 쿠데타의 주요한 방법은 끄렘린궁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었고 스딸린 암살로 정점을 찍을 예정이었다. 크렘린 밖에서 결정적인 군사적 작업인, 국가정치보안부 본부에 대한 습격 또한 준비되었다. 뚜하체프스끼는 음모를 꾸미는 핵심이었다.”(Deutscher, Stalin: A Political Biography, second edition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7), p. 379.)라고 트로츠키주의 역사가 아이작 도이처의 책을 인용하고 있다. 아이작 도이처도 반역자들의 쿠데타 획책을 두둔할 목적이기는 했으나 군사반란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김인식은 그밖에도 “스탈린이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 사이에 독일공산당에 지령한 ‘사회파시즘’론은 최악의 재앙이었다. 사회민주주의가 파시즘의 일종(또는 2중대)라는 것이었다. 이 초좌파적 종파주의 정책은 독일 공산당원들이 독일 사회민주당원들과 반(反)나치 공동전선을 구축하기를 거부하게 했다. 독일 노동자 운동의 치명적 분열 덕분에 1933년 1월 히틀러는 손쉽게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라면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상투적인 역사왜곡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김인식은 ‘사회 파시즘론’이 레닌의 카우츠키와 사민당에 대한 성격 규정을 이어받아 제국주의의 최후의 보루가 된 사민당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당시 히틀러의 부상에 맞서 가장 영웅적으로 싸운 세력들이 독일 공산당이었으며, 독일 공산당 지도자 에른스트 텔만(Ernst Thälmann)이 1933년 권력을 잡은 나치당과 투쟁하다가 체포되어 11년간 독방에 감금되고 1944년에 강제수용소에서 총살된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뿐만 아니라 독일 공산당이 사민당에게 4번에 걸쳐 반파쇼 공동전선을 제안하고 이를 사민당이 거부한 사실에 대해서도 무지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여기서도 히틀러와 파시즘의 권력장악에 대해 배신적인 사민당을 비난하는 것보다 거기에 영웅적으로 맞서 싸웠던 공산당을 비난하는 악랄한 종파주의 모략극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김인식이 비난하고 있는 “독·소불가침조약” 역시 상투적인 비난일 뿐인데, 쏘련의 반파시즘 인민전쟁의 승리로 파시즘을 격퇴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쏘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진영과 미제를 중심으로 하는 “냉전 질서”가 생겨났기 때문에 이 문제를 따로 다루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벌인 논전은 인류의 진보적 역사 전부를 ‘스탈린주의’라는 간단한 정의로 종파주의적으로 중상하고 제국주의 프로파간다에 버금가는 역사왜곡을 자행하는 이들이 제국주의의 친근한 벗임을 자백하게끔 하는 과정이었다.

부록

스탈린과 쏘련의 민족문제

김인식은 어김없이 쏘련 당시에 ‘고려인 강제이주’ 문제 등 민족문제에 대해서도 반공주의적 모략극을 자행하고 있는데 스탈린 시대 쏘련에서 민족문제는 과연 어떠했는가? ‘고려인 강제이주’ 문제 역시 반공주의적 목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관점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고려인이 강제이주를 당한 사건이 있었지요. 아이러니한 건데, 이는 오히려 소련 당국에서 민족의 가치를 고양했던 배경에서 벌어진 일이지 인종적 차별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스탈린은 1920년대에 다른 나라보다 소수 민족의 언어, 문화 등을 더 강력히 보호해주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신문을 낸다던가, 고려인 학교를 연다던가 하면 다 지원을 해줍니다. 그래서 소련시대에 소수 민족들이 다른 민족과 섞이지 않고, 자기들만의 테두리를 지어서 살게 되지요. 그런데 1930년대 후반 들어 전쟁이 임박해지니 이게 오히려 문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고려인들이 연해주 쪽에 강력한 집단을 이루고 있는데, 소련 지도부 입장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어떤 편을 설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폴란드나 독일인들은 소련의 서쪽 국경선에 있으니 더욱 위험하게 느껴졌겠죠. 그래서 강제이주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전쟁 위기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정책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정책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는 또 민족 가치를 보호하는 입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지금도 러시아 고려인들은 한국말을 잘합니다. 일반적으로 미국 교포들 보다 수준이 높지요.(노경덕 국민대학교 유라시아연구소 연구원, “스탈린과 스탈린주의: 그 진실과 왜곡”, 2013/05/30)

처음엔 고려인의 비극적 삶과 애환을 모독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함경도에서 연해주로, 그리고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를 거친 150년의 `디아스포라’의 삶은 고려인의 DNA를 바꿀 정도였다고 했다. 그런데 타슈켄트 시내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고려인 작가 김 블라디미르(68·한국명 김용택)씨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강제이주가 과하게 덧칠됐다”고 잘라 말했다.

소련이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힘이 약해지던 1980년대 말과 소련 몰락이후인 1990년대 초에 일부 작가나 화가, 기자들이 자신들의 작품이나 글에서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려고 역사적 사실을 실제보다 부풀렸다는 것이다 … 수 만명이 병으로 죽거나 피살됐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20만명 가까운 사람들을 집단이주시키면서 당시의 철도 수준등을 감안할 때 어느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한 소련 학자가 집계한 사망자는 열차 사고등을 포함해 524명으로 나와있다. 물론, 이후에 정착을 하면서 어린아이들이 많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물 설고 낯선 새 정착지에 도착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었겠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국에서 공산당 싫어하니까 소련 공산당의 악행을 비난하기 위해 그런 작가들의 말과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부각시킨 것도 고려인들의 비극적인 삶이 부풀려지게 된 한 원인일 것”이라고도 했다.(김현재 논설위원, <고려인> ④ “강제이주 과하게 덧칠됐다”, 연합뉴스, 2014-06-10)

우즈베크와 카자흐 고려인의 공통점이 있다면 과거 소련 연방시대를 그리워 한다는 것이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한 이후 민족주의적 흐름이 강화되면서 고려인들이 상대적으로 소외를 받는 것도 그 한 이유다. 특히 50대 이상 노년층에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알마티에서 만난 민족주의 혁명운동가 이동휘 선생의 손녀 류드밀라(82)씨는 “소비에트 연방시대에는 굶으면 다 굶었고, 일하면 다 일하고, 동지 정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게 없어. 모두 다 저 먹고 살기만 바쁘지”라며 “나는 아직도 당원증을 갖고 다녀. 그때는 애국심이 모두 강했는데”라고 당시를 그리워 했다.

독립운동가 최봉설 선생의 손녀 마야 이르세노브나(60)씨도 “교육, 의료 이런 것들이 그 때는 모두 무료로 제공됐지. 인생에 자신감이 있었어. 기술 하나만 있으면 일거리 얻고 주택도 얻고 했지. 범죄의 유혹도 없었고, 실업문제 같은 것도 심각하지 않았다”며 소비에트 시대가 지금보다 훨씬 낫다고 주장했다.

우즈베크 타슈켄트 인근의 고려인 마을 시온촌의 `아리랑 요양원’에서 이주 1세대(1937년 강제이주 이전 출생자들) 40명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강안나 할머니(90)도 예외는 아니다.

극동 하바로프스크에 살다가 타슈켄트 인근 부하라 라는 곳으로 강제이주된 뒤 소비에트 시절 집단농장에서 일하며 청춘을 모두 받쳤다는 강 할머니는 “여기 사람들은 모두 소련 연방시대를 그리워 한다”고 말했다.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아프면 공짜로 치료받고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없어서 못사는 사람들은 없었지. 무엇을 하든 모두 먹고 살수 있는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이들이 소비에트 시대를 그리워 하는 것은 냉전시대 미국과 쌍벽을 이루던 소련의 경제적 여유, `새로운 조국’으로 평생을 여기고 충성을 다해왔던 소련에 대한 아련한 향수, 경쟁의 승자만이 살아남고 돈이 모든 것을 판가름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생래적 반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여겨졌다.(김현재 논설위원, <고려인> ③ `코리안 드림’과 蘇연방 시대의 향수, 연합뉴스, 2014-06-10)

제국주의와 싸우면서 전인미답의 사회주의의 길을 찾아야 했던 사회주의자들이 오류를 범하지 않고 시행착오 없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념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런 태도로는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 더군다나 현실 사회주의 역사를 반공주의적 목적으로 매사를 비방하려고 골몰하는 자들은 제국주의와 지배계급의 반공주의적 이해에 복무할 따름이다.

‘고려인 강제이주’는 역사적 비극이고, 고려인들의 입장에서는 당시 쏘련의 대국주의적 횡포와 억압으로도 느껴질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독일과 일본제국주의 파시즘과의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정책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정책”이었다. 또한 “인종적 차별 때문”이 아니라 “소련 당국에서 민족의 가치를 고양했던 배경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게다가 반공주의적으로 과장되고 왜곡되기도 했다.

일제로부터 식민지 해방을 위해 투쟁하던 조선인들에게 쏘련은 ‘해방조국’의 전망이었다. 백남운의 《쏘련 인상》이나 이태준의 《소련기행》을 보면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선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있는 혁명적 지식인들에게 파시즘과의 전쟁의 폐허를 딛고 쏘련이 얼마나 문화적, 물질적으로 거대한 성취를 달성했으며 민족어와 민족문화를 보전하고 배려하고 발전시켰는지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스탈린 시대와 쏘련 및 동유럽에서는 일반적으로 민족문제를 사회주의적으로 해결했다.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해체 이후 민족분쟁과 대량학살이 벌어지고 제국주의에 의해 신자유주의가 도입되어 민족 구성원들과 인민들의 권리가 심각하게 후퇴한 것을 보아야 알 수 있다. 제국주의의 벗들인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는 이러한 인류의 거대한 진보가 “반혁명”이다. 종파주의적 모략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에게 노동자 계급적인 역사인식은 고사하고 합리적인 사고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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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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