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조미 관계의 급변속에 드러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좌익”적 빈말과 우익적 일탈
이 땅에 펼쳐진 현실에 대한 초보적인 감각도, 마주한 상대에 대한 구체적인 표상도, 흐르는 대세에 대한 현실적인 판별력도 없는 무지무능한 집단이 다름 아닌 현 남조선당국이라는 것을 이번 기회에 명백히 판단하게 되었다.
“남과 북은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하였다.”는 판문점 선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맥스 선더’ 한미연합 공군 훈련이 실시되자, 지난 5월 17일 북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리선권 위원장이 ‘조선중앙통신’에 조성된 사태와 관련해 기자의 질문에 대해 답변한 내용 중 일부다.
그런데 리선권 위원장의 답변은 “남조선당국”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진보와 변혁을 내걸고 활동하고 있는 정치세력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들은 이 땅에 펼쳐진 현실에 대한 초보적인 감각도, ‘조선’이라는 실체에 대한 고차원적인 이성적 사고는커녕 구체적인 표상(表象)도, 남북미 관계의 급격한 변화라는 흐르는 대세에 대한 현실적인 판별력도 없는 집단이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하게 무지무능한 집단에 그치는 것이라면 차라리 존재감 없는 세력으로 끝나고 말 것이지만, 이들 세력들이 쏘련 해체 이후 한국의 노동자 민중에게 오랫동안 일정한 정치적 영향을 미쳐왔고, 당분간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이들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필요하다.
“남조선당국”이 판문점 선언에도 불구하고 미제국주의가 주도하는 한미동맹의 통제 하에 움직여야 하고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조성된 정세에 대해 짐짓 모른 체한다면, 한국의 이들 정치세력들은 극단적 분파주의와 몰역사성,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 대신에 반북 적대감이라는 맹목적 교의에 사로잡혀 분별력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선권의 말미의 답변처럼, “구름이 걷히면 하늘은 맑고 푸르게 되는 법이다.” 조성된 정세가 급변하게 되어 국가보안법으로 가려진 맹목적인 반공 물신주의가 사라지게 되면 참된 현실이 투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법이다. 앞으로 훨씬 더 놀랄 정도로 급변하게 되겠지만 이미 지금까지 조성된 정세만으로도 구름 사이로 맑고 푸른 하늘이 모습을 내비치고 있다.
그 동안 우리는 ‘북핵 문제’가 제국주의자들과 자본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모략, 술책을 은폐, 전가하기 위한 순전한 조어(造語)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미제의 핵독점 전략이며 북에 대한 적대시 정책이 본질이라고 주장하고 이러한 인식 하에 투쟁해 왔다. ‘북핵 문제’의 역사적 본질이 그렇다면, ‘비핵화’ 역시도 남북,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는 새로운 국면에서 제국주의자들과 자본주의자들의 모략, 술책에 맞춘 조어(造語)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침략적, 전쟁광적 본성을 가지고 있는 제국주의자들과 자본주의자들이야 의당 자신의 본질에 맞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진보를 자처하고 심지어는 급진파를 자처하면서도 실제로는 제국주의자들과 자본주의자들의 이해관계에 부화뇌동하는 정치세력들인데 이들의 사고, 행태는 준열하게 비판받아야 한다.
이들 다종의 ‘진보급진파’들을 일단의 정치세력으로 묶어세울 수 있는 공통의 지점은 반북, 반공주의다. 이들은 제국주의자들의 압력과 포위 공세 속에서 전인미답의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가면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숱한 시행착오와 오류와 한계를 범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자본주의에 맞서 인류가 도달한 최상의 진보인 쏘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를 비방하는데 앞장서 왔다. 그리고 사회주의 진영의 해체 이후에도 제국주의 포위 말살 공세에 맞서 분투하고 있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해 이들 중 일부는 노골적으로 “국제사회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북한의 무모하고 야비한 미사일 도발을 강력하게 규탄” 운운하며 제국주의자들의 편을 들기도 했다. 또 다른 일부는 “북핵시험”과 “미국 핵”을 동시에 비난하는 중립론과 양비론을 취함으로써 실제로는 미제국주의의 북에 대한 공세에 간접적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북이 미국 본토까지 위협하는 핵무력을 완성하고 제국주의의 악랄한 경제봉쇄에도 굴복하지 않게 되자,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6월 12일 미국 트럼프 정권은 사상 최초로 조미 정상회담에 응하여 “공동성명”을 합의했다(물론 전략적 인내 정책이 근본적 한계에 달한 시점에서 조미정상회담이 열리고 북미관계 정상화로 가는 국면에서도 민주당과 군산복합체를 비롯한 미제국주의 독점자본 일각과 자본가 언론에서는 이 합의를 여차하면 파기하거나 자신들한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 한반도(조선반도)와 동북아, 중동 등을 비롯한 세계 전역에서 긴장이 고조될수록 군수산업은 유망한 시장으로서의 가치가 늘어나고 이를 통해 미제국주의의 군사적 패권을 강화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조미정상 회담 결과에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고 북의 인권문제 운운하는 미국 내 소동은 이러한 이해관계의 소산이다. 그러나 반면, ‘낭비의 제도화’라고 하는 말처럼, 베트남 전쟁 같은 군사개입이 재정위기, 인플레이션 위기, 달러위기를 가속화시키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트럼프 정부는 끊임없이 미군 주둔비용을 주둔국가에 전가하고, 미군감축 등 군사비 지출 감소를 시도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미국 내에도 북의 핵무력 완성에 위협을 느껴 조미관계 정상화를 환영하는 입장과 함께 조미관계 정상화에 부정적인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하는 것이다. 미제국주의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상황이지만 여기서는 이를 중심적으로 다룰 주제는 아니기에 이 정도로 하겠다).
이후 한반도(조선반도)와 동북아에서 해마다 사상최대 규모를 경신해가며 전쟁위기를 조장해왔던 한미연합 훈련 중단 선언이 나오는 중대한 진전도 있었다. 앞으로 남북 정상회담과 조미정상회담이 추가로 열릴 예정이며 종전선언과 평화협정까지 체결하면서 변화무쌍한 상황이 만들어질 것이다.
“연속혁명”인가? 연속모략인가?
한국의 대표적인 트로츠키주의 정치조직인 노동자연대가 북(조선)에 대해 얼마나 일관되고 악랄하게 반북 적대감을 표출해 왔는지 살펴보자.
북이 경제적 포위 상태라는 극단적 고통 속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할 때, 노동자연대는 “인민을 체계적이면서도 혹독하게 착취하고 억압하는 국가자본주의”, “악랄한 독재 체제”(최일붕, “옛 소련은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용어만 이어받은 체제다”(노동자연대, 207호 2017-05-10)라고 비난하였다.
노동자연대는 북이 제국주의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핵무력을 완성해갈 때는 “핵과 미사일은 결코 제국주의에 맞서거나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북한 지배자들의 행태는 북한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또 다른 착취·억압 체제임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다.”(김영익, 북한 지배자들의 호전적 대응이 보여 주는 것 북한 국가자본주의의 본질과 모순, 레프트21, 102호, 2013-04-13)라며 북을 비방해 왔다.
노동자연대는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자위권의 일환으로 만든 “핵과 미사일”을 근거로 “북한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또 다른 착취·억압 체제임”을 발견해내는 신묘한 탐구정신을 선보여 왔다. 노동자연대는 “국제적 연대”라는 정신적 승리법으로 제국주의 핵전략 자산에 대응할 수 있다며 북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국제주의” 신세계를 펼쳐왔다.
노동자연대는 북의 “경제건설과 핵무력 병진노선”에 대해서는 “북한 지배자들은 핵무기 개발의 진전과 경제 건설을 동시에 이루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실현 불가능한 ‘두 마리 토끼 잡기’다.”(같은 글)라며 악담을 했다.
북은 지난 4월 2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 병진노선의 승리 선언과 사회주의 인민 경제 건설에 총력 집중하는 새로운 전략노선을 발표했다. 이 발표 이후에 4월 27일 북미 정상회담이 개최됐고 6월 12일 조미정상회담이 개최됐다. 미국은 조미 정상회담 이후 북의 핵동결 조치에 상응하여 한미연합 훈련 중단 발표를 할 수밖에 없었다. 북의 “경제건설과 핵무력 병진노선”에 악담을 퍼붓고 실패를 예측하고 또 소망했던 노동자연대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부터 반도 이남을 공산주의에 맞서는 보루로 간주하며 북에 대한 적대 정책을 펼쳐왔던 미제국주의의 수장 트럼프가 북의 핵무력 완성 이후에 최초로 정상회담을 가지고 북의 체제보장을 약속하는 조미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 자체가 역사적 사건이다. 이후 종전선언과 불가침 협정, 북미 수교와 경제봉쇄 해제라는 상황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런데 노동자연대는 그러한 역사적 국면 앞에서 이제는 새로운 비방 재료들을 들고 나오고 있다.
북한이 미래에 어찌어찌 시장 ‘개혁·개방’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것은 북한 노동계급에 전혀 진보가 아니다. 전면적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 자본주의로의 옆걸음일 뿐일 것이다. 남한과 미국 등 세계의 우파는 환호하겠지만 말이다.(김영익,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엉터리 사회주의 사상, 싱가포르의 ‘성공’을 배우겠다?”, 노동자연대, 251호, 2018-06-15)
노동자연대는 북이 미제국주의의 적대시 정책을 철회시켜 내는 상황이 펼쳐질 것을 예상하면서 그것에 대해 “시장 ‘개혁·개방’에 성공”하는 경우라고 선험적으로 단언하고 있다. 자본가 신문도 북의 적대시 정책 철회가 “시장 자본주의화”로 연결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독재’와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싱가포르가 김정은 위원장에겐 이상적 모델로 보일 법하다. 앞으로 북한이 개방에 나서면 외국 문물의 유입될 터이고 사회적 분위기도 느슨해질 게 분명하다. 싱가포르처럼 강력한 법과 제도를 내세워 통제하는 방식은 그러한 염려를 줄일 수 있다.(독재·경제성장 다 이룬 싱가포르…김정은 “싱가포르 배우겠다”, 서울신문, 2018-06-12, 서울신문)
그 동안 북을 적대시 하며 말살공세를 펼쳐 왔던 자본가 진영에서 이제는 중국식 개혁개방이니 베트남식 개혁개방이니 하며 자신들의 주관적 바람을 피력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노동자연대는 반북 모략 책동에 동참하는 것이다.
북이 핵무력을 완성하여 제국주의의 군사적 침략 책동과 경제봉쇄를 뚫고 사회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 “북한 노동계급에 전혀 진보가 아니”라면, 북은 제국주의에 포위되어 경제적 봉쇄를 당하면서 사회주의 건설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레닌 당시부터 쏘련의 볼셰비키 권력도 대외무역에 대한 국가독점을 유지하면서 제국주의의 경제적 포위를 뚫으려고 투쟁했다.
전 세계가 공산주의 체제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다른 나라의 자본주의 국가와 무역 관계를 맺는 문제에 대해 노동자연대는 부정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시도가 반드시 “시장 ‘개혁·개방’”이 될 수밖에 없는가? 물론 노동자연대는 그것을 “전면적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 자본주의로의 옆걸음”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이 사태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이 쏘련 사회 성격의 변화를 특징짓는 중심에는 외국 자본주의와의 대외관계의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연대는 외국 자본주의와의 관계, 즉 무기‘경쟁’을 가지고 쏘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있고, 전면적인 대외 무역관계로의 전환을 사적 자본주의로의 “옆걸음”으로의 이행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북이 제국주의 체제로부터 고립되어 있을 때는 “핵무기” 같은 군사 무기‘경쟁’을 가지고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근거가 되고, 이제 핵무력을 완성하여 제국주의 경제봉쇄를 뚫게 될 상황에서는 “시장 ‘개혁·개방’”으로 시장 자본주의로 전면 이행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쏘련 당시에도 1926년 볼셰비키당 내 “반대파”라는 분파를 만들어 당내 투쟁을 전개했던 트로츠키는 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의 경제적 기초를 건설하는 문제에 대해 반대하였다. 스탈린은 이를 둘러싼 첨예한 당내 논쟁에서 트로츠키의 연설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트로츠키는 자기의 연설에서 우리나라의 인민경제가 세계 자본주의 경제에 의존된 데 대하여 말하면서 “우리는 고립된 전시 공산주의로부터 점점 세계 경제와 유착하는 데로 접근하고 있다”고 단언하였다.
그리고 보면 결국 자본주의적 요소와 사회주의적 요소가 투쟁하고 있는 우리나라 인민경제는 세계자본주의 경제와 유착하고 있는 셈이 된다 …
동지들, 이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황당한 것이다. 이것은 트로츠키가 분파 행위에 열중한 나머지 하는 소리다.
우리의 인민경제가 세계 자본주의 경제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마치 어떤 나라나 어떤 나라의 국민경제가 다(미국의 국민경제도 예외로는 되지 않는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에 의존한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았으며 또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의존은 상호적인 것이다 …
이것은 우리의 인민경제가 자본주의 국가들에 의존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할 가능성이 배제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사회주의 경제를 절대적으로 고립한 것, 주위에 있는 여러 국민 경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주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주의 경제는 절대로 아무런 수출입도 하지 않는다고 즉 국내에 없는 생산물을 수입하지도 않으며 또 이와 관련해서 자국의 생산물을 수출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
이것은 절대로 다른 나라에 의존하지 않는 나라가 없으니 결국 매개 나라 국민경제의 자립성이 배제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들이 우리의 인민경제에 의존하고 있듯이 다른 나라들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의존하는 것과 이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과는 구별해야 한다 … 그는 이 의존성을 우리나라 경제가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에 유착하는 것으로 전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인민경제가 세계 자본주의의 부속물로 변해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트로츠키는 자기의 연설에서 “사실상 우리는 언제나 세계경제의 통제 하에 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 자본주의적 통제-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금융적 통제를 의미한다. 그러면 과연 우리의 은행들이 국유화되어 있지 않으며 구라파의 자본주의적 은행의 지도 밑에서 일하고 있단 말인가? … 자본주의적 통제- 이것은 우리의 공업에 대한 통제, 우리 사회주의 공업의 국유화의 폐지, 우리 운수의 국유화의 폐지를 의미한다 … 자본주의적 통제-이것은 우리의 시장에 대한 지배권을 의미하며 대외 무역독점의 청산을 의미한다 … 끝으로 자본주의적 통제란 정치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나라의 정치적 자립성을 말살하는 것을 의미하며 나라의 법률을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이익과 구미에 알맞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스탈린, “우리 당내의 사회민주주의적 편향을 다시 한 번 논함”, ‘결론’, 조선로동당출판사)
트로츠키는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문제를 “일국사회주의”라고 왜곡하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를 고립적 “민족경제” 정도로 왜곡했다. 그런데 트로츠키는 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경제가 다른 자본주의 나라와 상호관계를 맺는 것을 마치 자본주의로의 투항으로 간주하면서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근거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트로츠키는 이제 “일국의 국가적 범위 내에서의 고립된 사회주의 건설이 불가능하다.”며 사회주의 건설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패배주의에 빠졌다. 그러면서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경제의 진정한 앙양은 구라파의 주요 나라들에서 노동계급이 승리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이다.”라며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과 유럽혁명(또는 세계혁명)을 대립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이는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부정하는 논리인 동시에 유럽이나 세계혁명의 성사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성공했을 때, 유럽이나 세계혁명의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의 “세계혁명”이라는 화려한 수사는 이처럼 비현실적이며 실제로는 패배주의적인 것이다. 수차례의 반당행위로 쏘련에서 추방된 뒤 트로츠키의 정치활동이 스탈린과 쏘련을 더 맹렬하게 비난하고 심지어는 타도를 외치며 반쏘비에트 활동을 했던 것처럼, 트로츠키의 후예들도 악랄한 반쏘 반북 선전에 매진하고 있다. 위에서 인용했던 것처럼, 노동자연대의 북에 대한 적개심과 모략적 악선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적이다.
이들은 트로츠키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적이고 구체적 경험, 혁명의 현실성을 부정하고 과대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앞에서 말했듯 노동자연대는 북이 경제봉쇄를 돌파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매진하려는 시도에 대해 “시장 ‘개혁·개방’”으로 자본주의로 투항한다며 악담을 퍼붓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근거를 가지려면 스탈린이 말했던 것처럼, 북이 경제봉쇄 해제 이후에 은행 국유화를 포기하고 사적 은행으로 전환하면서 자본주의에 “금융적 통제”를 당하거나, 공업과 운수 국유화를 폐지하고 사유화를 통해 자본주의 기업에 통제나 시장 지배를 당하거나, 국가의 대외 무역독점을 포기하거나 정치적 통제를 당하며 자립성을 말살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도 경제봉쇄는 계속되고 있는 시점에서, “시장 ‘개혁·개방’”이라는 사태는 오지도 않았다. 도대체 노동자연대는 무엇을 근거로 북이 “시장 ‘개혁·개방’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단언하는가? 노동자연대는 북이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자주성을 생명으로 여기고 있는 체제라는 초보적 인식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봤듯이 우리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쏘련 사회주의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끝없는 적대감이 이들의 정치사상의 확고한 기초임을 알 수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연속혁명 구호의 실체는 쏘련과 북, 쿠바 같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연속모략인 것이다. 이는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연속아첨이기도 하다.
조성되는 정세에 대한 기권과 “좌익”적 허풍
연속모략자들의 사례를 더 들어 보겠다.
우리가 이미 몇 차례 살펴봤듯이, 평화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지배자들의 계획에는 다른 계산법이 감춰져 있다. “북한 노동력은 노조 없는 대한민국 노동력”이라는 이종석 전 장관의 발언이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처럼, 저들은 남북경협이란 이름 아래 북한을 일종의 내부 식민지로 조성해가려 한다. 이는 동시에 한국 노동자들의 노동조건도 옥죌 것이다. 한반도 전체의 착취강화 프로그램이다 …
노동자들이 남북한 정권의 박수부대로 전락해 버린다면, 저들이 요란하게 포장하는 ‘평화의 새 시대’란 단지 평화의 탈을 쓴 착취의 새 시대가 될 것이다. 남북한 정권의 2중대로 전락하지 않으면서, 자본가들의 한반도 착취강화 프로그램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으면서 ‘평화의 새 시대’를 실현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있다.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정치적 독립성을 세워내는 것이다.(오연홍, ‘평화의 새 시대’는 오지 않는다 – 노동자운동의 독립성이 없다면!, 노동해방투쟁연대, 노동해방, 2018-06-22)
노동자연대와 마찬가지로 북을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규정하고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남북 정상회담과 조미정상 회담 개최의 거대한 역사적 의미를 부정한다. 조성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구체적 이해도 없다.
무엇보다 북측은 개성공단을 단순한 남북경제협력의 장소로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개성공단은 ‘분단 60년을 극복하고 새로운 남북평화 시대를 열어가는 역사적 상징’이다. ‘민족통일의 미래를 그려가는 살아 있는 실질적 상징, 최고의 상징’으로서 매우 특별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개성공단을 경제협력의 상징으로 치부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통일’과 ‘평화’의 가치를 가장 앞에 둔다. 기존의 반공·반북 이념으로 보면 북측 사람들이 이런 평가를 하는 것 자체가 매우 낯설고, 신기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다.(기획 총괄 김진향/취재 강승환 이용구 김세라, “개성공단 사람들”, 내일을 여는 책)
“남북경협”을 “북한을 일종의 내부 식민지로 조성해”가는 프로그램이라고 이해할 정도로 이들의 현실감각은 초현실적이다. 북을 자본주의로, 북의 지도자들을 자본가들로 인식할 정도로 망상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기본적 감각기능조차도 전면 작동하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국가보안법에 사로잡혀 이성과 감각을 상실한 철저한 ‘북맹’들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급진적 활동가들로 자처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악랄한 “기존의 반공·반북 이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개성공단”을 “단순한 남북경제협력의 장소”를 넘어서 “내부 식민지”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한국 자본주의의 힘을 숭배하고 어디까지 북의 실상이나 저력을 깡그리 무시해야 “내부 식민지” 운운하는 발언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인가?
이들은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의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 착취개념을 적용하여, 이들 노동자들로 인해 “한국 노동자들의 노동조건”도 악화되고, 이로써 “한반도 전체의 착취강화 프로그램이다”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실제는 어떠할까?
일에 대한 ‘속도’를 말할 때 꼭 나오는 얘기인데, 북측 근로자들이 노동강도가 많이 약한가요? 남측 근로자들이 일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여주자 북측 근로자들이 “영상을 빨리 돌리는 것 아닙네까” 하면서 안 믿었다던데요?
그렇습니다. 남측의 기업문화가 근로자들끼리 경쟁을 하게 함으로써 최고의 생산성을 뽑아내는 방식인데 반해, 북측 근로자들은 고도의 경쟁을 크게 해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해고의 위험도 없습니다.(같은 책, 81쪽)
노동강도가 남쪽에 비해 현저하게 약하고,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동자들 간 경쟁 유도가 없고(이들에게 생산성 향상의 인센티브는 “정치·도덕적 자극과 물질적 자극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해고의 위험도 없는 북쪽의 노동자들과 이 책의 뒷부분에 나오지만, 탁아소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것이 개성공단을 통해 본 북쪽 노동자들의 모습이다.
국정원이 가공해서 자료를 보급하고 자본가 언론이 방영하는 북의 영상에 익숙한 한국의 반북 “사회주의자들”은 개성공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북쪽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현실을 알 리가 없다. 모르면서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진실을 알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들이 가진 트로츠키적 반북 반공주의 인식은 송두리째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개성공단 업주들 중에도 ‘내 돈 주고 내가 일 시키는데, 뺨도 못 때리냐’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어요”(같은 책, 82쪽)라고 할 정도로 노동자들을 노예로 취급하는 자본가들의 폭압적 “갑질”인식과 개성공단 경험을 통해 “자본우위의 우리 노사문화가 보편적인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같은 책, 83쪽)한다는 개성공단 입주 “업주”들의 태도변화를 비교해 보더라도 북쪽 노동자들의 현실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다.
개성공단 북측 노동자들의 “임금”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본인들이 일을 함으로써 임금(북측에서는 ‘생활비’라고 한다)을 받아 생활한다는 기본관념은 거의 없다. 그들은 국가적 조치에 의해서 직장에 파견, 소임(그들은 ‘분공’이라 한다)을 받아 일하러 온 것이다.
즉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맡긴 사회적 소임을 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생활비를 국가가 책임져둔다고 생각한다.(같은 책, 40쪽)
북측 근로자들의 임금은 자신들이 근로한 만큼 정확히 산정되어 달러 가치로 계산되며 매월 전체 근로시간에 대한 확인을 근로자들이 스스로 서명(북측 용어로 ‘수표’), 확인한다 … 노동보수의 30%는 사회문화시책비(무상교육-무상의료 등의 소위 사회주의 국가시책 운영기금)로 공제하고 나머지 70%의 금액은 대부분 상품공급권으로 지급된다 … 매달 기업이 총국에 전체 임금을 달러로 지급하면 총국은 이를 북한 화폐로 환전하여 경영국에 인계한다. 총국의 경영국은 내각 산하기관인 총국과 개성시 인민위원회와의 업무연계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이해하면 된다. 경영국은 사회문화시책비(노동보수의 30%)를 공제한 개인별 생활비와 물자(사전에 근로자들이 생활비 한도 내에서 구매하기로 한 각종 생필품)를 산출하여 할당한다. 이후 생활비는 회사별 북측 통계원이 경영국에서 인수하여 근로자들에게 지급한다.(같은 책, 58, 59쪽)
맑스는 “고타 강령 초안 비판”에서, 사회주의에서 노동의 결과에 대한 분배 원리를 다음과 묘사했다.
생산 수단을 공유 재산으로 하는 것에 기초를 둔 조합적 사회 내부에서는 … 자본주의 사회와는 반대로 개인적 노동이 더 이상 우회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총노동의 구성 부분으로서 존재하”고, 개별 생산자들의 개인적 노동 시간은 사회적 노동일 가운데 자신이 제공한 부분, 즉 사회적 노동일에 대한 자신의 몫이다. 그는 자신이 (사회 기금을 위해 자신의 노동을 공제한 후에) 이러이러한 만큼의 노동을 제공하였다는 증서를 사회로부터 받고, 이 증서를 가지고 소비 수단의 사회적 저장품에서 동일한 양의 노동이 비용을 들인 만큼을 빼내간다. 그는 어떤 형태로 사회에 준 것과 동일한 양의 노동을 다른 형태로 되받는다.
“개성공단”이라는 특수성이 있지만, 개성공단은 무계획적인 “사적 노동”의 분업 체제 속에서가 아니라, 전체 사회의 사전 계획 속에서 만들어졌다. 여기서 “북측 근로자들의 생활비”는 전체 사회 노동일의 일부인데, 우선 그 중 사회기금(사회문화시책비)을 공제하고 나서, 얼마만큼의 노동을 제공하였다는 증서(상품공급권)를 받고 그것으로 “개인별 생활비와 물자”를 지급받는다.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사회에서 노동의 성과 배분을 가지고 터무니없게도 “한반도 착취강화 프로그램”이라고 비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북맹”에 빠져 북이 “국가자본주의” 착취체제 또는 “관료 체제”라는 편견과 독단적, 관념적 사고와 달리 여전히 북의 실제 현실의 일단은 이렇다.
북측 근로자들은 기업-근로자 관계를 ‘고용-피고용 관계로 설명하는 것에 당혹해한다. 사회주의 체제에는 돈으로 사람의 노동력을 산다는 고용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북측에서 개인 근로자들은 지역단위 인민위원회나 당이 지역 실정에 맞게, 개별 인민의 역량과 소질에 따라 기업소나 각종 기관, 사업소에 행정적·공적 차원에서 배치하는 것이다. 개인은 인민위원회나 당의 조치를 받들어 기업소에서 일할 뿐이다.
‘임금을 주고 노동을 산다’는 자본주의 개념은 북측에서는 ‘돈으로 사람을 산다’는 불쾌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개성공단 사람들”, 40-41쪽)
이들은 “노동자 운동의 독립성”을 운운한다. 그런데 이 독립성은 조성되고 있는 정세를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하면서 기권하도록 한다.
종전협정, 아니 상호불가침협정, 심지어는 군사동맹조약 같은 것들은 단지 종잇조각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언제든지 간단히 무시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배후에 있는 계급적 이해관계이며,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관계다.(최영익, 남북 정상회담과 사드 배치 강행의 이중 플레이 – 문재인과 김정은이 아니라 세계 노동자계급의 단결!, 노동해방, 노동자투쟁연대, 2018-04-27)
이들은 판문점 선언에서 합의된 여러 가지 내용들을 노동자 민중이 철저하게 관철한다면 한반도(조선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의 기초를 다지고, 그것이 국가보안법 철폐와 국정원 해체, 사드 철거, 주한미군철수, 유엔사 해체, 한미동맹 해체까지 나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역사인식과 구체적 정세인식이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나서 65년 동안 이어져 온 정전체제가 종결되고 불가침협정이 체결되는 역사적 상황에 대해 이들은 “단지 종잇조각에 불과하다.”고 가볍게 치부하는 것이다. 평화협정 체결이 정전협정 체결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외국 군대의 철수” 같이 중대한 정치적 문제를 대두시키는데도 이들은 “단지 종잇조각”으로 취급하며 정세로부터 “노동자 운동”을 “독립”시킨다.
북미 불가침협정의 체결 이후에 그것들이 “언제든지 간단히 무시할 수 있다.”는 인식은 북의 핵무력 완성이라는 전략적 힘에 의해 적대국 미국이 처음으로 조미회담에 응하고 그 협정이 강제되고 있다는 현실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설령, 이란핵협정처럼 미제국주의가 이 불가침협정을 “간단히 무시”하고 전쟁책동에 나선다면 그것을 규탄하고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불가침협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 배후에 있는 계급적 이해관계이며,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관계다.”라고 했는데,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 북의 핵무력에 의해 평화협정이 체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한사코 미군철수를 거부하고 침략동맹인 한미동맹, 한미일동맹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제국주의 국가들의 반동적인 이해관계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북한 노동자계급의 단결투쟁을 통해 한반도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세계 노동자계급 총단결의 깃발을 들고 사회주의로 전진할 소중한 기회를 쟁취할 수 있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 노동자계급은 한반도 비핵화, 종전협정, 평화협정에 어떠한 환상도 없이 조건부 찬성한다. 거기서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 노동자 국제주의, 사회주의로 한반도를 전진시키기 위해서!
세계 노동자혁명 없이는 한반도의 지속적인 평화를 결코 기대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점은, 다양한 평화협정들이 남북한 지배계급과 미, 중, 일, 러 등 제국주의 지배자들 사이의 추악한 거래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이 거래는 모든 제국주의 열강 자본가계급의 가증스런 탐욕과 함께 남북한 자본가계급의 체제안정과 이윤확대라는 착취자들의 이해와 요구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 …
이종석의 발언대로 북한 노동자계급은 한국 자본가들에게 좋은 먹잇감으로 여겨진다. 언어의 동질성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이 수십 년간 계급투쟁의 경험이 없다는 점, 노동조합이라 할 만한 정도의 자주적 노동자조직조차 없는 완전한 무권리 상태 등은 한국 자본가계급이 군침을 흘릴 만하다.(최영익, 한반도에서 드러날 선명한 대치선 –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최영익, 2018-05-06)
이들은 “평화협정에 어떠한 환상도 없이 조건부 찬성”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지배자들 사이의 추악한 거래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지배자들 사이의 추악한 거래의 산물”이며, “열강 자본가계급의 가증스런 탐욕”, “착취자들의 이해와 요구”의 결과물인 평화협정에 “조건부 찬성”을 하는가? 논리적으로라면 “조건부 찬성”이 아니라 결사 저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회주의의 노동조합은 레닌이 말한 대로, “국가적인 조직이 아니”나 “정부 구성권을 갖는 계급의 조직, 독재를 실현하는 그 계급, 국가적 강제를 실현하는 그 계급의 조직”이며 “이것은 교육적인 조직이고 참가시키고 배워주는 조직이며, 이것은 통치의 학교이며 바로 경영의 학교이고 공산주의의 학교”로서 “완전히 특수한 유형의 학교”(레닌, “직업동맹, 현 시기 그리고 뜨로츠끼 동지의 오류에 대하여”, 임채희 번역, 노동자정치신문, 2008-10-02)이다.
레닌은 “사상적 혼란”, “근본적 오류”라며 트로츠키를 신랄하게 비난하는데, 트로츠키의 후예들 역시 혼란과 오류에 빠져 자본주의에서의 노조 인식으로 “계급투쟁의 경험”, “자주적 노동자조직” 운운하며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세계 노동자 혁명”이라는 “좌익적” 빈말이다. 거대한 당면 정세변화의 의미를 과학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기권하고, 일국혁명의 조건과 실현을 간과하면서 “세계 노동자 혁명”이 가능한가?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통합하고 그렇기 때문에 쏘련과 북에 대해서 반북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변혁당 역시 기본 인식은 유사하다. 이들의 반북적 비방 역시 이제 달라진 국면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는데 이들 사이에는 서로 입을 맞춘 듯이 일정한 패턴이 있다.
남북한 당국에 통제되지 않는 자주교류를 전면화해야 한다. 그런데 남북 교류 중 경협은 한반도 평화에 일정하게 기여하더라도 노동의 관점에서 보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크다. 지금의 정세 변화를 가장 환영할 세력은 남한의 자본가들이다. 이미 김대중 정부 시절 남북공동선언을 했을 때도 IMF 직후 남한자본의 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6.15 선언이 이뤄졌다. 변화된 정세는 남한 자본에게 현재 축적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기회이다 … 현재 이주노동자와 정주노동자 간에 갈등이 심각하듯 남북 간 노동자 간에 연대가 파괴되고 경쟁하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남북 노동자가 생존경쟁에 몰리는 문제에 대해 민중진영의 대안이 필요하다 … 북 체제를 사회주의로 보든 아니든 사회주의권이 패배한 상황에서 북한 체제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것이다. 남북한에서 다양한 교류가 활성화된다고 가정한다면, 북뿐 아니라 남한 노동자에게도 북한의 변화 문제는 현실적 문제로 제기된다.(정은희 기자, “한반도, 더 무거워진 평화운동의 어깨 [워커스 이슈] 한반도 정세 집담회”, 변혁당 장혜경 발언 중, 2018.05.31.)
남쪽 당국뿐만 아니라 북쪽 당국에도 통제되지 않는 “자주교류”의 상을 제시하지 않아 무엇인지 잘 모르겠는데, 이를 통해 이들도 북이 자본주의나 관료체제라는 트로츠키주의적 인식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그 연장선상에서 사태를 왜곡해서 바라보는데 남북 관계의 변화가 “북한 체제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발생했다고 본다. 이는 미제국주의와 인식을 같이 하는 것이다. 미제국주의의 “전략적 인내” 정책에도 불구하고 북이 핵무력을 완성하고 극도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균열은커녕 체제의 단결이 더 공고화되었다. 그러자 미제국주의는 자신들의 패배를 “정신 승리”로 만회하기 위해 만들어낸 명분이 바로 “제재의 성과로 북이 비핵화 협상에 나오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제재가 성공하고 있었다면 미제국주의는 제재를 극단적으로 유지, 강화하면서 북을 말살시키려 하지 왜 조미정상회담과 조미관계 정상화에 나서겠는가?
변혁당은 이 정세변화가 “남북 간 노동자 간에 연대가 파괴되고 경쟁하는 문제”와 “남북 노동자가 생존경쟁에 몰리는 문제”를 낳는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정세인식은 남북, 조미관계의 변화에 대해 지극히 협소하고 왜곡된 사고에 빠져 있고, 자본주의에 대한 패배주의와 굴종주의가 체질화 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인식 역시 위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인식과 동일한데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판도 동일할 수밖에 없다. 만약 남북, 조미관계의 변화가 “노동의 관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크”다면 판문점 선언과 북미 합의를 반대하고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들에게 “노동의 관점”이란 과연 무엇인가? 노동의 관점은 한반도와 동북아에 전쟁 위협이 사라지고, 이 정세변화 속에서 해방 이후부터 점령군으로 들어와 한국에 진주하고 있는 미군철수 문제를 현실 과제로 제기하게 하고, 국가보안법 철폐를 통해 계급의식을 높이고 근본적 해방의 전망을 가지게 하는 엄청난 정치적 변화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이들에게 노동의 관점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해방의 기초를 다지는 웅대한 문제가 아니라 협소한 경제적 문제들에만 국한되는 것이다. 전형적인 경제주의이다.
이들에게 정세변화는 “북한의 변화”이고 이는 곧 “개혁개방”으로 연결되고 종국에는 자본주의 “흡수통일”로 귀결되는 것이다. 자본에 대한 노예적 굴종과 심각한 패배주의와, 정세에 대한 일면적이고 왜곡된 인식이 체질화 되어 있는 것이다. 트로츠키주의(적) 특유의 반북, 반공주의와 과학적, 역사적 인식의 결여가 낳은 결과다.
“좌익”적 빈말과 허풍으로 가득한 “정통” 트로츠키주의
자칭 “볼셰비키” 그룹이 있다. 이들은 “볼셰비키”를 자칭하지만, 트로츠키주의로 인해 실제로는 맑스레닌주의를 부정하고 그리하여 참칭 “볼셰비키”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다른 트로츠키 정치세력들을 가짜 트로츠키주의 세력이라고 비난하며 자신들은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들이라고 선전한다.
“북은 오래전부터 자본주의적 요소의 도입 즉, ‘시장 개방’을 추구해 왔다. 특히 동유럽과 소련 붕괴 이후 경제상황이 더욱 심각해지자, 베트남이나 중국 같은 ‘시장 개방’이 그 타개책으로 제기되었다.”라는 인식이나 “평화협정”에 대한 몰역사적이고 부정적인 인식은 위에서 살펴본 다른 트로츠키주의 정치세력들과 매 일반이다.
그러나 “정통” 트로츠키주의이기 때문에 트로츠키나 트로츠키주의 특유의 정치적 특성들, 즉 “좌익”적 공담과 허풍, 과장된 문체, 허세, 문필조작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레닌은 좌익 기회주의는 우익 기회주의와 상통한다고 했는데 이들 역시 거기에 해당된다. 남북, 조미 관계의 변화 국면에 대한 이들의 혁명적 언사 뒤에는 반드시 반북주의와 함께 우익적 일탈이 뒤따라온다.
이들은 “평화협정이 평화를 보장하는가?”라면서, “박정희 정권의 1972년 7.4공동성명, 김대중 정권의 2000년 6.15 공동선언, 노무현 정권의 2007년 10.4공동선언”과 1993년 “오슬로협정”,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리비아 카다피와 미국의 합의(리비아 모델), 2015년 미국과 이란 핵협정과 파기 선언 등 사례를 들고 있다.
그런데 당연히 평화협정만으로 평화를 보장받지 못한다. 제국주의 체제가 존재하는 한 언제든지 협정은 깨질 수 있고,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전쟁이 촉발될 수 있다. 이번에 북미 협정을 체결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 단언하지 못한다. 그래서 뭐란 말인가?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말라는 말인가? 그들은 이런 식으로 제기한다.
지금의 물길에서 흐름을 바꿀 유력한 주체는 미국이다. 미국은 앞으로 어떤 변덕을 부릴지 모른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며 국면을 급랭시킬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만약 ‘평화협정’까지 순조로이 가게 되면 한반도와 동아시아엔 ‘평화’가 오는 것일까?(“한반도 갈등의 본질과 노동계급의 대응 호전광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지배집단에 대한 환상을 경계하자!”, 볼셰비키 그룹, 6월 16일 정세토론회 발제문 편집)
이처럼 이들은 북미 평화협정의 거대한 정치적 의미를 폄하하고 있다. 평화협정만으로 평화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말은 일반론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구체적 정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개입에 있어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말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에 맞서 싸워 왔던 피어린 투쟁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고 지금 조성되고 있는 정세변화의 근본적 동인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한 것이다. 위에서 예를 든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평화협정 체결에 부정적 인식을 조성함으로써 이 국면에서 노동자 민중의 적극적 개입을 가로막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지금 조성되고 있는 정세는 과거 국내외의 공동선언이나 합의, 협정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리비아 모델은 카다피의 참살과 리비아의 파괴로 결론이 났는데, 미국은 북의 선 핵포기를 강요하는 리비아 모델을 제시했다가 북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자, 북의 주장이었던 “동시적, 단계적” 방식을 수용하였다. 이들은 미국의 이란 핵협정 파기 사례도 드는데, 핵무기 개발을 성공하지 못한 상태인데다가 탄도미사일 사거리와 최장 2000km에 불과했던 이란과의 핵협정은 전혀 다르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해방 이후부터 북에 대한 적대시 정책으로 일관했던 미국이 북의 핵무력 완성 이후에 조미 정상 회담에 응해서 조미 공동선언을 했다는 점만으로도 기존의 합의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북의 핵동결과 조미 정상회담 이후에 사상 최대를 경신해 가며 정례적인 한미군사 훈련을 벌여왔던 미국이 훈련 중단 발표를 했다는 점도 엄청난 정세변화다.
이어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 경제봉쇄 철회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국면에서 미국과 한국 문재인 정권은 한사코 주한미군 철수 없는 평화협정을 체결하려 한다. 따라서 “평화협정이 평화를 보장하는가”라며 이 급변하는 변화에 기권을 선전할 것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정세를 주도해야 한다.
“지금의 물길에서 흐름을 바꿀 유력한 주체”가 미국이고, “미국은 앞으로 어떤 변덕을 부릴지 모”르며, “국면을 급랭시킬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고 남북, 조미 당국자 간 회담만 쳐다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노동자 민중의 변혁적이고 자주적 관점에서 적극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평화협정 체결 국면에서 미군철수와 한미연합사 해체, 국가보안법 철폐와 국정원 해체, 사드 철수와 미국 군사무기 수입 중단과 민중복지 같은 당면 요구를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평화협정 체결 국면에서 노동자 민중이 적극 개입하는 정도에 따라 평화협정이 굳건하게 평화를 보장하고 해방으로 나아가는 주춧돌이 될 수도 있고, 협정이 체결되지 않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파기되는 상황도 닥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자주적으로 투쟁함으로써 되돌릴 수 없는 확고한 “평화협정”이 되도록 투쟁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평화협정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투쟁하는 것 어디에 “환상”이 있는가?
지난 5월 「남북미 대화국면의 도래, 더 이상 넋놓고 봄 꽃향기에 취하지 마라!」라고 옳게 지적했었다. 그런데 엊그제 글을 보면 “봄 꽃향기에 넋 놓고” 있는 것은 누구보다도 노정협 자신이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북미회담에 대한 기대에 푹 빠져있다.(같은 글)
또 다시 문필조작까지 감행하며 상대방의 입장을 왜곡하고 있다. 참칭 “볼셰비키” 그룹이 우리가 “봄 꽃향기에 넋 놓고” 있다고 왜곡하는 글은 “조미 정상회담의 ‘역사적’ 의미를 알려면 조선일보를 거꾸로 보라!”(노정신, 6월 13일) 페이스북 글이다.
이 글은 “어이없고 황당한 美·北 회담, 이대로 가면 北 핵보유국 된다”는 조선일보 [사설]을 분석하고 적들의 입장으로부터 북미회담의 의미를 파악하고 이로부터 우리의 투쟁과제를 제시한 글이다. 우리는 “‘어이없고 황당하다’? 항상 착란적 상태에서 진실을 왜곡해 왔고, 비뚤어지고, 전도된 조선일보가 ‘어이없고 황당하다고’ 했으니 이번 합의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대표적인 극우파쇼 반공주의 신문인 조선일보의 바람과 정반대의 바람, 진보적인 노동자 민중의 염원인 사드 철거,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양심수 전원 석방, 유인납치한 북여성 종업원 12인 포함한 북공민 귀환을 주장했다. 그리고 “조미관계 정상화를 가로막는 구체제의 어두운 유산들, 기구, 관행, 제도, 의식이 사라져야 한다. 그 중 조선일보가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한다. 더불어 전쟁과 종북몰이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자유한국당을 필두로 모든 반역사적, 반시대적 세력들이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남북미 대화국면의 도래, 더 이상 넋놓고 봄 꽃향기에 취하지 마라!”는 입장의 일관된 연속이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을 마치 우리가 정세변화에 환상을 가지고 “봄 꽃향기에 넋 놓고” 있는 것처럼 왜곡하는 것은 트로츠키주의 특유의 악랄한 문필조작에 다름 아니다. 봄날은 이미 가지 않았는가?
아무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체제 속에서도 평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을 불어넣는 평화주의”에 빠져 있지 않고, “노동계급의 정치적 무장을 해제하는 환상”에 빠져 있지 않은데 그것을 타도하자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의도적인 악의적인 왜곡이거나 신기루로 착란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들은 “노동자혁명의 확대가 전쟁을 끝내는 유일한 길이다. 남한, 일본의 노동자혁명과 중국 북한의 정치혁명으로 동아시아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수립하자!”고 주장한다.
“노동자혁명의 확대가 전쟁을 끝내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데, 아직 한반도(조선반도)에는 전쟁이 개시되지 않았고, 노동자 혁명 역시 개시되지 않았다. 그런데 시작되지 않은 전쟁을 끝내자고 하는 것도 착란적이지만, 노동자 혁명은 어떻게 오는가? 전쟁이 개시되어야지만 오는가? 그렇다면 혁명의 그 날을 위해 전쟁을 기도해야 하는 호전적인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노동자 민중과 함께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위해 싸워야 하는가? 그리고 이 속에서 혁명의 주체를 세우고 조건을 확립해야 하는가?
이들은 레닌과 볼셰비키, 국제주의자들이 1차 대전의 발발을 막기 위해 평화애호를 주창하며 싸우고, 그러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터졌을 때 전쟁을 중단시키고 평화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내전을 통해서라도 혁명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는 사실을 전면 망각하고 있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호전주의자가 아니라, “빵과 토지와 평화”라는 민중의 열망을 가지고 일관되게 투쟁했기 때문에 민중의 지지를 받고 혁명을 성사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1917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황제체제를 타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지속하고 빈민들에 대한 토지분배 약속은 헌신짝처럼 버리고, 굶주림을 지속시킨 러시아 자본가들과 이들과 한 편이 된 멘세비키 같은 과거의 혁명세력들은 역사의 반동으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남한, 일본의 노동자혁명과 중국 북한의 정치혁명으로 동아시아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수립하자!(볼셰비키 그룹, 같은 글)
북에서 “정치혁명”을 하자? 관료집단을 타도하자?
이들의 공상적 관념과 달리 북의 공민인 김련희 씨는 자신이 직접 경험의 북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보자.
세계의 모든 여론이나 남쪽 사람들이나 북에 대해서 너무나도 모르는 게 뭐냐 하면, 유튜브같은 걸 보면 현재 북의 발전상이라든가 이런 게 보여 지잖아요, 이걸 ‘아 많이 발전했구나’하고, 그냥 일반적으로 발전했구나하고 바라보겠지만 북쪽 사람들은 목숨과 바꾼 거예요, 그게…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병과의 싸움에서 죽으면서 지켜낸 조국이거든요. 그 목숨과 바꾼 조국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다칠 수 없는 내 목숨과도 같은 조국이거든요. 그런데 그 정도로 2천5백만이 수령과 당과 군대와 인민이 하나의 일심단결로 똘똘 뭉쳐서 목숨 바쳐 지켜낸다는 것을 온 세계 사람들은 몰라요. 지금도 김정은위원장님이 뭐라고 하면 ‘아, 내부결속을 위해서 내부가 와해가 될까봐 저런 말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건 정말 모르는 바보 같은 소리예요. 내부결속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 남쪽이나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나 각 파가 있고 갈등이 생겨서 서로 결속이 필요하겠지만, 북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의 일심단결로 해서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이런 말이 있드시 철저하게 믿고 신뢰하고 무조건 따르는 이런 걸 다른 사람들은 세계는 정말 모르거든요.
그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그 영도자와 인민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그런 것 아닌가요. 북은 영도자와 인민과의 관계가 아니예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거든요. 그게 하나의 나라이기 이전에 하나의 가정이고 영도자는 그 가정의 아버지인거예요. 이런 혈연적으로 이어진 가정이기 때문에 절대로 바늘틈도 들어갈 짬이 없다는 거예요. 그 세계를 잘 몰라요. 그 얼마나 위력한지, 그 힘이…([김련희 대담] “막상 간다고 생각하니 두려워요.”, 박명철 재미언론인, 자주시보, 2018/06/24)
이처럼 철벽같은 북의 정치적 일체감으로 볼 때 착오적인 주장이지만, 이들의 말대로 북에서 “정치혁명”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미제국주의가 원하는 자본주의의 복고일 수밖에 없다. 제국주의자들과 싸우고 있는 북에서 “정치혁명”의 도래를 기원하는 이들은 과연 사회주의자들인가? 제국주의자들의 이해에 복무하는 반혁명 집단인가?
“동아시아사회주의연방공화국” 수립?
왜 “전 세계프롤레타리아독재연방공화국”은 아닌가? 마구 내지를 것이라면 더 담대하고 패기 있게 내질러야 할 것 아닌가?
트로츠키 특유로 “좌익적” 공담이 남발되고 있다. 이들에게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빠져 있다. 제국주의 하에서 “제국주의 전쟁 필연성”은 전쟁의 원리, 원인, 내적 법칙을 규명한 것이지, 전쟁을 막을 수 없다는 전쟁 필연론이 아니다. 혁명을 위하여 전쟁이 필수적이라는 필수론도 아니다. 전쟁은 주체의 투쟁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다. 극도로 과격한 공담을 남발하면서 현실에서 이들은 숙명주의, 기권주의, 패배주의에 빠져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항상 혁명의 궁극적 목표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 궁극목표를 위한 당면목표의 제시는 한사코 회피한다. 혁명이 궁극목표라면 이 궁극목표는 무엇인가에 의해 충족되어야 한다. 혁명을 위한 조건과 토대가 구축되어야 한다. 당면 투쟁에 기권하면서 먼 미래의 혁명을 선전하는 것으로는 궁극적 목표도 채울 수 없다.
레닌은 러시아 10월 혁명 발발 직전에도 “전투하러 가면서 자화자찬하지 말고 전투에서 돌아오면서 자화자찬하라.”라는 러시아 속담을 인용하면서 최소강령을 무시하는 부하린을 신랄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우리는 “조미 정상회담의 ‘역사적’ 의미를 알려면 조선일보를 거꾸로 보라!”는 글 말미에서 “헤겔은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이성적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곧 이성적이지 않은 것은 사라져야 한다는 변증법적 표현이기도 하다. 남북관계, 조미관계 등이 급변하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역사발전 단계에서는 존재할 필요가 없는 구체제의 유산들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 사라지게 투쟁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돌이켜 보니, 급변하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역사발전 단계에서 존재할 필요가 없는 “구체제의 유산”들 중에는 문필조작을 일삼을 뿐만 아니라, 반쏘 반북주의에 빠져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노사, 노사정 간의 상생과 타협을 목표로 추구하는 사회적 합의주의 사상은 현실에서의 자본과 권력이 가하는 대 노동자 적대와 공세에 의해서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파산돼 버렸다. 남북관계, 조미관계의 급변과 함께 새로운 정세 변화를 따라 잡지 못하거나 정세를 진보적으로 선도하지 못하는 몰역사적이고 분파주의적 반동사상 역시 파산할 수밖에 없다. 과학적, 역사적 인식과 혁명적 실천만이 새로운 시대, 새로운 국면을 주도해나갈 수밖에 없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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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개창한 노동자 투쟁연대인가 보니 여전하게 과거의 사상, 주의와 결별하지 않은 채로 반복한 상황입니다. 그 분의 진정한 친구를 주장한 도서의 개념으로보니 정 반대의 정서추수라는 점을 확연하게 알 수 있는데 여전히 이런 추수주의를 가지고 회귀한 모습을 지금도 목도하고 있습니다.
조미관계 변화에 관한 노정협의 정세분석 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동아시아에 기적처럼 버티고있는 사회주의국가 조선에 의해 추동되고 있는 현하 정세는 말그대로 ‘세계사적’ 규모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변화의 끝이 어디를 가리킬지는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 모두에게 이 육중한 역사적 의미 앞에서 수수방관하며 손놓고 지켜볼 자유만큼은 결코 없다는 점 하나는 명백한 듯합니다.
남한의 모든 ML주의자는 다시한번 사유를 벼리고 철저한 과학적 인식으로 무장하여, 가장 올바른 노선으로 현 정세를 돌파해나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