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사적유물론과 맑스주의연하는 한국 정치세력 비판

* 아래 글은 2월 강연 자료를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오늘 저한테 맡겨진 주제가 ‘진보적’ 정치세력들에 대한 분석이라고 들었습니다. 주제가 처음에는 너무 광범위하고, 오랫동안 같이 교류, 활동을 하는 관계가 아니고, 구체적인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떤 말씀을 드릴까 약간의 고민을 했습니다.

혹시 뻘소리나 하지 않을까? 동지들의 관심사항, 요구와 전혀 동떨어진 나만의 얘기를 하지 않을까? 그 부분은 서로의 토론과 대화로 풀어가면서, 상호관심사의 접점을 찾고 이해의 폭을 넓히고 심화시키는 것으로 했으면 합니다.

일단 정치세력들, 특히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정치세력들에 대해 분석을 하려면 그것을 위한 일정한 틀, 기준, 근거가 있어야 할 테인데, 그것은 사상적 틀, 기준, 정치적 근거가 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오늘 저의 다른 정치세력들에 대한 판단의 정치사상적 기준, 근거는 맑스-레닌주의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오늘의 논의를 전개하는 데 있어서 좀 더 솔직하고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견해와 의도를 숨기는 것을 경멸한다”는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의 주장처럼, 정치적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른 정치세력들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맑스-레닌주의적 관점으로 분석을 한다는 것은 철저하게 당파적인 관점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중립과 객관으로 위장하는 여타의 부르주아, 소부르주아 사조들은 자신의 계급적 입장을 은폐하거나 숨깁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히려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우회적으로 철저하게 관철시키려는 것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당파적인 입장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철저하게 당파적이지만 철저하게 비과학적이고 위선적이고 기만적입니다.

맑스는 자본론 서문에서 당파성과 과학성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들이 편견없이 경제학을 연구할 수 있었을 때는 독일의 현실에 근대적 경제관계가 존재하지 않았고, 이러한 관계가 나타났을 때에는 [부르주아적 시야를 가지면서도 그것을 편견없이 연구하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환경이 조성되어 버렸던 것이다. 경제학이 부르주아적인 한, 즉 그것이 자본주의제도를 사회적 생산의 과도적인 역사적 발전단계로 보지 않고 사회적 생산의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형태로 보는 한, 부르주아 경제학은 계급투쟁의 잠재적 상태에 있거나 오직 고립적이고 불규칙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동안만 과학으로 존속할 수 있다 …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부르주아지가 정권을 쟁취했다. 이 순간부터 계급투쟁은 실천과 이론 모두에서 더욱더 공개적이고 위협적인 형태를 취했다. 그와 더불어 과학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은 조종을 울렸다. 그뒤부터는 벌써 어떤 이론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가 문제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본에 유리한가 불리한가, 편리한가 불편한가, 정치적으로 위험한가 아닌가의 문제로 되었다. 객관적인 학자들 대신 고용된 앞잡이들이 나타났으며, 진정한 과학적 연구 대신 비양심적인 사악한 변호론이 나타났다(맑스, 자본론).

부르주아는 노자 간의 대립을 첨예하게 만드는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강화되자 더욱 더 자본의 입장에 서면서 당파성을 강화했습니다만, 그러면 그럴수록 과학성은 상실해 갔습니다. 그런데 초기 자본주의가 봉건제에 맞서 새로운 진보적인 생산으로 나타날 때는 부르주아적 당파성과 과학성이 대립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담 스미스나 리카도의 이른바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부르주아 당파성과 과학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도 소부르주아 ‘진영’에서도 “진영(陣營)”논리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중권이 그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입니다. 합리성과 객관성도 없이 자기편이라고 무턱대고 입장과 행보를 두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진영논리는 사실 쏘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 진영의 대립과 투쟁을 말할 때 나오는 얘기였습니다. 그런데 “진영”의 원래 의미는 “군대가 진을 치고 주둔하고 있는 일정한 구역”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세력의 어느 한쪽”을 말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되었습니다. 진을 치고 있는 군대 양 측은 곧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벌여야 하는 적들입니다. 이 마주보고 있는 진영은 전쟁이 중단되지 않는 한 서로 화해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적대적 관계입니다.

소부르주아 진영에서 진영논리를 비판하는 것은 이런 적대와 대립을 부정하기 위한 소부르주아의 계급적 처지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부르주아 진영도 바로 ‘진영’입니다. 오늘날 소부르주아는 노자 간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파산하고 일부가 노동자 계급으로 충원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의 처지는 불안정과 동요를 특색으로 합니다. 이들은 이로써 계급타협과 화해, 상생을 주장하며 ‘진영논리’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영논리는 자기 진영, 자기 계급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동자 계급의 사상은 당파적인 동시에 과학성과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입장을 투철하게 취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에서 진보성을 가지고 있고, 또 더 나아가 사회주의에서도 진보적인 계급으로 새 사회주의 중심 계급이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 서서 당파성을 견지한다는 것은 과학성과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이 당파성이 삶과 일치하는지 과학적인 진리인지 여부는 실천을 통해 검증될 문제입니다.

1987년 6월 항쟁 이전 자유주의 부르주아는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역사에서 범민주 세력의 일환으로 진보적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옹호하며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 ‘민주주의자’를 자처하고 있지만, 국내외 독점자본과 제국주의의 입장을 대변하는 반동적인 세력으로 전락했습니다. 국가보안법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계급은 6월 항쟁과 직선제라는 형태로 당시 자유주의자들이 멈춰버린 곳에서 사회적 진보에 앞장서는 가장 중심적인 계급입니다. 노동운동 내부의 여러 가지 오류와 한계 지점이 많이 있지만 노동자 계급이 지금까지도 사회발전을 위해 진보적으로 투쟁하는 중심 계급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결국 당파성과 과학성은 진보적이고 열린 자세를 가지는 한 대립되지 않고 상호결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맑스레닌주의를 표방하면서 노동자 계급의 당파성과 과학성, 학문적 양심에 입각하려고 노력합니다. 철저한 당파성과 과학적, 양심적 태도를 결합해서 정세를 파악하고 정세에 대응하는 정치세력에 대해 논의할 것입니다.

정파, 혹은 ‘진보적’ 정치세력들은 저마다 사회모순을 자기 방식대로 인식하고 진보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세력화된 존재들입니다. 정세인식의 틀, 준거, 근거, 정세를 변화시키는 방식, 방법, 전략, 전술의 차이가 이들의 정치노선을 결정합니다. 따라서 현 정세에 대한 논의를 통해 정세를 중심으로 정파들이 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실천하는지를 중심으로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이들 정파들은 자본주의 사회, 특히 한국사회를 변화, 발전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역사발전 단계에 대해 분석하면서 한국사회라는 특수성에 대한 진단이 빠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일반, 보편을 분석하면서 한국자본주의라는 대상의 특수한 성격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한국자본주의를 변혁하고 한국적 특성에 맞는 새로운 진보적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사상적, 실천적 무기, 기치가 바로 맑스주의 사상인 것입니다.

맑스주의 사상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맑스주의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물질적 생산과 물질적 생산을 바탕으로 긴밀하게 형성되는 상호관계들을 중시합니다.

흑인은 흑인이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 그는 비로소 노예가 된다. 면방적기는 면방적을 위한 기계이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만 그것은 자본이 된다. 이러한 관계들로부터 떼 내어졌을 때는 그것이 자본이 아닌데, 이는 마치 금이 그 자체로서는 화폐가 아니거나 설탕이 설탕 가격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생산 속에서 인간들은 자연에 대해서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친다. 인간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협력하고 자신들의 활동들을 서로 교환하면서만 생산한다. 생산하기 위하여 인간들은 서로 일정한 연관들과 관계들 속에 들어가며, 또 이러한 사회적 연관들과 관계들 내부에서만 자연에 대한 인간의 작용, 생산이 일어난다.

생산 수단의 성격에 따라, 생산자들이 마주보며 들어가는 이러한 사회적 관계들, 즉 생산자들이 자신들의 활동들을 교환하고 생산의 총행위에 참가하는 조건들은 당연히 달라진다. …

따라서 개인들이 생산하는 곳인 사회적 관계들, 즉 사회적 생산 관계들은 물질적 생산 수단들의, 생산력들의 변경 및 발전과 더불어 바뀌고 전화한다. 그 전체성 속에 있는 생산 관계들은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들, 사회하고 부르는 것을 형성하며, 게다가 일정한 역사적 발전 단계에 있는 어떤 사회, 특유하고 구별되는 성격을 지닌 어떤 사회를 형성한다. 고대 사회, 봉건 사회, 부르주아 사회는 생산 관계들의 그러한 총체들이며, 이 생산 관계들 각각은 동시에 인류 역사에서의 특수한 발전 단계를 가리킨다(맑스, 임노동과 자본).

인간과 자연의 관계, 자본과 노동의 관계, 생산과 교환의 관계, 이러한 물질적 생산을 통해 형성된 사회적 관계들을 중심으로 어떤 특유하고 구별되는 일정한 역사적 발전에 따라 거기에 맞는 사회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들 생활의 사회적 생산에서 그들의 물적 생산제력의 일정한 발전수준에 조응하는 일정한, 필연적인, 그들의 의사와는 무관한 제관계, 생산관계를 맺는다. 이 생산 제관계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현실적 토대를 이루며, 이 위에 법적이고 정치적인 상부구조가 세워지고 일정한 사회적 의식형태들이 그 토대에 조응한다. 물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과정 일체를 조건지운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사회의 물적 생산 제력은 어떤 발전단계에 이르면 그들이 지금까지 그 안에서 움직였던 기존의 생산제관계, 또는 이것의 단지 법률적 표현일 뿐인 소유제관계와 모순에 빠진다. 이들 관계는 생산제력의 발전형태들로부터 질곡으로 전환된다. 그러면 사회적 혁명기가 도래한다(맑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

맑스가 “연구의 길잡이로 쓰였던 일반적 결론”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문장입니다. 즉 하부구조, 즉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통상적으로 알려져 있는 (역)사적유물론의 유명한 문장인 것입니다. 이 사적유물론의 테제는 “연구 길잡이”이자 “일반적 결론”입니다. 그 길잡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한 사회를 분석하고 연구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적유물론의 기본 테제를 “연구 길잡이”와 “일반적 결론”을 넘어 형식주의적으로, 경제주의적으로 사고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엥겔스는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에 단순하고, 곧이곧대로 반영되는 것만이 아니라고 합니다.

[…]유물론의 역사 파악에 따르면, 역사에서 종국적인 결정적 계기는 현실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입니다. 맑스도 나도 결코 이 이상의 것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명제를 경제적 계기가 유일한 결정적 계기라고 왜곡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명제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추상적이고 허무맹랑한 공문구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경제적 처지는 토대입니다. 그러나 상부 구조의 다양한 계기들 ― 계급투쟁의 정치적 형태와 계급투쟁의 결과들 ― 전투가 끝난 후 승리한 계급이 확립한 헌법 등등 ― 법 형태, 그리고 또 이 모든 현실적 투쟁이 거기에 참가한 사람들의 머리에 반영된 것으로서의 정치적, 법률적, 철학적 이론, 종교적 견해와 이 견해의 교의 체계로의 가일층의 발전 등도 역사적 투쟁의 진행 과정에 영향을 주며 많은 경우에 주로 이 투쟁의 형태를 결정합니다. 이 모든 계기들은 상호 작용을 하며, 이 상호 작용 속에서 결국 경제적 운동은 무한히 많은 우연들(즉, 그 내적 상호 연관이 너무 멀거나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상호 연관이 없다고 간주하고 지나쳐 버릴 가능성이 있는 사물들과 사건들)을 통해서 필연적인 것으로서 자신을 관철해 갑니다(엥겔스가 쾨니히스베르크의 요제프 블로흐에게, 1890년 9월 21일).

우리 두 사람은 무엇보다 정치적 관념, 법적 관념, 기타 이데올로기적 표상들과 이런 표상들에 의해 매개되는 행동을 경제적 기초 사실로부터 추론하는데 중점을 두었으며 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에 우리는 내용적 측면에 치우쳐 다음과 같은 형식적 측면을 간과하였습니다: 이 표상들 등등이 태어나는 양식, 그리하여 이것은 적들에게 오해 내지 곡해를 위한 좋은 구실을 주었습니다 … 이와 관련하여 또한 이데올로기들의 다음과 같은 황당무계한 표상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영역들의 독자적인 역사적 발전을 부인하기 때문에, 그것들의 역사적 작용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원인과 결과를 영원히 상호 대립하는 두 극으로 간주하고 그것들의 상호 작용을 완전히 망각하는 조잡한 비변증법적 표상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 신사들은, 역사적 계기가 또 다른, 결국 경제적인 원인들에 의해 일단 생겨나자마자 그 주변 환경에 대해서, 심지어 그것을 낳은 원인들에 대해서까지 반작용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종종 거의 의도적으로 망각하고 있습니다(엥겔스가 베를린의 프란쯔 메링에게, 1893년 7월 14일).

2. 우리는 경제적 조건들을 역사 발전을 종국적으로 제약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인종 자체는 하나의 경제적 요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음 두 가지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3. a) 정치, 법, 철학, 종교, 문학, 예술 등등의 발전은 경제적 발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 모두는 서로에 대해서 그리고 경제적 토대에 대해서 반작용을 가합니다. 경제적 상태가 유일하게 능동적인 원인이고 다른 모든 것은 단지 수동적인 결과한 불과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종국적으로 언제나 관철되는 경제적 필연성에 기초한 상호 작용이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국가는 보호 관세, 자유 무역, 재정 상태의 불량 여부에 의해 영향을 미칩니다 … 그러므로 일부의 사람들이 자기들 편한 대로 생각하듯이 경제적 상태가 자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되, 그들을 제약하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기존의 사실적 관계들에 기초하여 만듭니다. 비록, 여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계들에 영향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 사실적 관계들 중에서 경제적 관계들이 종국적 결정적 관계들이며, 경제적 관계들을 추적해야만 이해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엥겔스가 부레슬라우의 보르기우스에게, 1894년 1월 25일).

맑스주의는 경제적 관계들이 “종국적”이고 “결정적” 관계들이지만, 곧바로, 단순하게, 자동적으로 상부구조에 반영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법, 이데올로기 등 상부구조가 역으로 경제적 토대에 작용하며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는 것을 간과하지 않습니다.

엥겔스가 “상부 구조의 다양한 계기들 ― 계급투쟁의 정치적 형태와 계급투쟁의 결과들”을 말했던 것처럼, “모든 현실적 투쟁”이 “정치적, 법률적, 철학적 이론”, 심지어 “종교적 견해와 이 견해의 교의 체계로의 가일층의 발전”을 낳고, 이것이 “역사적 투쟁의 진행 과정에 영향을 주며”, 더 나아가 “주로 이 투쟁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는 실제적인 현실을 여타한 형태로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독자적인 역사적 발전”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역사적 작용”을 하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사상은 현실에서 출발하여 역사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힘입니다. “비판의 무기”가 현실적인 힘을 받으면 “무기의 비판”이 되어 현실을 변화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법률은 지배계급의 지배를 정당화 하고, 피지배계급을 지배하는 수단이지만, 과거 10시간 노동제 입법화에서 보듯,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도 반영돼 있습니다.

맑스주의에서 법칙은 내적 모순에 의해 필연적으로 관철되는 모든 현상과 대상의 본질적 성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엥겔스는 “인간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되, 그들을 제약하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기존의 사실적 관계들에 기초하여” 만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실적 관계들 중에서 경제적 관계들이 종국적 결정적 관계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맑스주의는 인간의 투쟁, 노력을 결코 배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의지, 주체적 투쟁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실천만이 진리의 검증 기준입니다. 다만 법칙을 정확하고 과학적으로 인식할 때 인간의 투쟁, 노력이 헛되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물 발전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면 인간의 투쟁, 노력은 자칫하면 속된 말로 “맨 땅에 헤딩”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대로 법칙을 인식하고 거기에 맞춰 효과적으로 활동을 하는 것을 합목적적, 합법칙적이라고 합니다.

레닌은 “정치는 경제의 집중적 표현이다”라고 합니다. 레닌은 태만하게 경제분석을 하면서 정치투쟁을 도외시하는 경제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정치적 기초를 세웠습니다. 레닌은 맑스주의의 사적 유물론을 왜곡하여 경제적 토대 위해 자동적으로 정치적 상부구조가 결정되기 때문에 폭넓게 경제투쟁에 매진하다보면 자동적으로 정치적 전망을 찾을 수 있다는 식의 러시아 경제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모든 “경제주의자들”에게 지배적인 견해, 즉 정치 선동은 경제 선동의 뒤를 좇아야 한다는 견해에 비춰 이 관점을 주시해 보라. 경제 투쟁은 대중을 정치 투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적용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이러한 관점이 과연 올바르단 말인가? 전적으로 옳지 않다. 경찰의 폭압과 전제주의의 광폭함이 드러나는 모든 현상들, 온갖 사례들이야말로 그 같은 “끌어들이기”를 위해 부족함 없이 “널리 적용될 수 있는” 수단이지, 결코 경제 투쟁과 관련된 현상들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지방의 행정장들, 농민에게 가해지는 체벌, 뇌물에 찌든 관리들, 도시 “평민”에 대한 경찰의 대우,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탄압, 지식과 세상에 눈뜨려는 국민적 지향에 대한 공격, 세금 짜내기, 이교도 탄압, 병사들에 대한 가혹한 훈련, 대학생과 자유주의적 지식인에 대한 군대식 처우 ― “경제” 투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은 이 모든, 그리고 이와 유사한 수천 가지 억압 현상들이 어째서 정치 선동을 위해서나 정치 투쟁으로 대중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반적으로 덜 “널리 적용될 수 있는” 수단이자 계기란 말인가? …

노동자들이 전횡과 탄압, 폭력과 권력 남용이 행해지고 있는 ― 그것이 어느 계급에 관계된 것이든 ― 각종의 모든 사례들에 대응하는 법을 익히지 않는다면,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관점에서가 아닌 바로 사회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대응하는 법을 익히지 않는다면, 노동자 계급의 의식은 진정한 정치의식이 될 수 없다. 노동자들이 구체적인, 게다가 항상 절박한(당면한) 정치적 사건들과 사례들을 통해 다른 사회 계급들의 지적, 도덕적, 정치적 생활이 표출되는 모든 현상에 걸쳐 그것들 각각을 관찰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리고 모든 계급, 계층, 집단의 생활과 활동의 모든 측면에 대해 유물론적 분석과 유물론적 평가를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노동자 계급의 의식은 진정한 계급의식이 될 수 없다. 노동자 계급의 주의, 관찰력, 의식을 배타적으로, 혹은 그렇지는 않더라도 우선적으로 노동자 계급에게로 돌리려는 자는 사회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아니 더 올바르게 말하자면 이론적 지식보다는 정치 생활의 경험에서 생겨난, 현대 사회의 모든 계급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충분하고도 명료한 이해와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경제 투쟁이 정치 운동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가장 널리 적용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우리 “경제주의자들”의 설교는 그 실천적 중요성으로 볼 때 극히 유해하며, 극히 반동적이다(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개인적으로 레닌의 글 중에서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문장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노동자 계급이 뼈에 새겨야할 가장 중요한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주의는 현장 내에서는 조합주의와 연결됩니다. 협소한 시야에 사로잡히다 보면 자기 조합원들의 이해에만 사로잡히게 됩니다. 노동자 계급의 원대한 이상, 전망 보다는 하루하루의 임금과 단협(임단협 투쟁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 역시 반편향입니다.)에만 매몰되며 자기 자신, 가정의 삶이 전부가 되고 사회 전체를 진보적으로 발전시키는 사명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때문에 심지어는 똑 같은 현장에서, 똑 같은 일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배척하고 배제하는 일들도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경제주의는 이처럼 조합주의와 연결되고 이기주의로 통합니다. 이러한 자생적인 의식을 넘어 노동자가 전 세계를 진보적으로 발전시키는 중심 계급이라는 사명감과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경제적 요구 투쟁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현상들, 측면들에 대해 통찰력 있게 이해하고 관심을 가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노동자 내부뿐만 아니라 정치적 관심을 이 사회 전체의 피억압자들, 가령 학생, 청년, 여성, 이주노동자, 농민, 소상공인 등으로 관심을 넓혀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심지어는 노동자들이 구체적인 사안사안, 당면의 절박한 정치적 사건들을 통해 “다른 사회 계급들”의 감정, 이해, 입장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회의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의 행태, 이해, 속물적 근성, 속물적 근성의 뿌리, 저들의 노동자 민중 분열책, 기만책, 회유책 등을 이해하고 폭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노동자 계급의 정치투쟁이고 정치의식인 것입니다. 노동시간 단축의 과제가 있기는 합니다만, 노동자 계급이 지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앞장서서 깊게 인식하고 새 사회의 이정표를 제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동자 계급의 정치투쟁, 정치의식의 발전에 복무해야 하는 것이 정치조직의 임무이기도 한 것입니다.

마오쩌둥 역시 경제와 정치,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관계에 대해 지극히 심오하고 중요한 주장을 합니다.

학문연구에서 미지(未知)로부터 지(知)에 이르는 모순도 이러하다. 마르크스주의를 처음 연구하기 시작할 때는 마르크스주의를 모르거나 또는 아는 것이 많지 않은 상태와 마르크스주의의 지식과는 서로 모순된다. 그러나 학습에 노력하면 미지로부터 지로 전환될 수 있으며, 아는 것이 많지 않던 데로부터 아는 것이 아주 많은 데로 전환될 수 있으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맹목성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자유자재로 적용할 수 있는 데로 개변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와는 다른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서는 생산력이 주요한 것이며, 이론과 실천과의 모순에서는 실천이 주요한 것이며, 경제토대와 상부구조와의 모순에서는 경제적 토대가 주요한 것으로 그 위치는 결코 서로 전환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견해가 아니라 기계적 유물론의 견해이다. 물론 생산력, 실천, 경제적 토대가 일반적으로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유물론자가 아니다. 그러나 또 생산관계, 이론, 상부구조 등의 일정한 조건하에서는 반대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도 역시 인정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생산관계를 변경하지 않고서는 생산력이 발전할 수 없을 때에는 생산관계의 변경이 주요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레닌이 말한 바와 같이 “혁명적 이론이 없이는 혁명적 운동도 있을 수 없다. 그런 때에는 혁명적 이론의 창시와 제창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어떤 일(어떠한 일이나 다 마찬가지다)을 하려고 할 때 아직 방침, 방법, 계획 또는 정책이 없다면 방침, 방법, 계획 또는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결정적인 것이다. 정치, 문화 등의 상부구조가 경제토대의 발전을 저해할 때에는 정치적 및 문화적 혁신이 주요한 결정적인 것이 된다. 이렇게 말한다면 혹시 유물론을 위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대두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려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체로서의 역사발전에서는 물질적인 것이 정신적인 것을 결정하며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결정한다는 것을 승인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또 정신적인 것의 반작용, 사회적 존재에 대한 사회적 의식의 반작용, 경제토대에 대한 상부구조의 반작용도 인정하며, 반드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마오쩌등, 모순론).

이론과 실천의 통일, 즉 지행합일(知行合一)도 마찬가지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알지 못하면서 하는 행동은 맹목적으로 될 수 있고, 행동하지 못하면서 아는 것은 공허할 수 있습니다.

인식하고 실천하고 더 깊이 인식하고 더 높게 실천해야 합니다(마오쩌둥, 실천론).

배우면서 가르치고(학강學講), 가르치면서 배워야(강학講學) 합니다. 지도하면서 지도받아야 합니다. 맑스레닌주의의 조직적 원리이자 구현체인 전위정당에서도 똑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대중을 지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중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면 지도할 수 없습니다. 대중으로부터 검증되고 신뢰받지 못하면서 언감생심 가르치고 지도하려 든다면 대중들로부터 외면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원리들이 유물론적 변증법의 기초이며, 이는 또한 우리의 생활, 삶에서도 생생하게 적용되는 삶의 보고(寶庫)이자 지혜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맑스주의의 심오한 사상에 대해서 경제결정론, 경제환원론이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가령 “마르크스주의는 만사를 경제로 환원한다”며,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맑스주의는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현상을 오직 단순하게 경제가 결정하고 경제로 환원하기 때문에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명할 수 없으며 그로 인해 적절하게 해결할 전망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시피 이는 경제가 무조건적으로, 아무런 매개 없이, 자연적으로 결정되고, 경제로 환원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예만 들어도 맑스주의, 맑스주의자들에 대해 경제결정론, 경제환원론, 경제결정론자, 경제환원론자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악의적인 비방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맑스주의를 이런 식으로 비난할게 남아 있다면, 당대, 동시대에 펼쳐지던 사건을 생생하게 다루고 예측하고 전망을 하는 역사학의 금자탑인 맑스의 프랑스혁명사 관련한 일련의 저작들,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프랑스 내전>을 사심 없이 읽어보면 더 이상 그러한 악선전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경제결정론, 경제환원론으로 매도하는 자들이 맑스주의의 계급투쟁론, 전위당론을 비난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맑스주의에 대한 비난의 동일선상에서 맑스주의가 말하는 “노동자 중심성”, “계급 중심성”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다원주의, 부문운동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들은 노동, 생태, 여성, 인종을 동렬에 놓습니다. 이들을 각자 부문적으로 분리시켜 봅니다. 그런데 노동의 문제는 뒤집어 말하면 자본주의의 문제, 자본의 문제입니다. 자본주의가 생태파괴, 여성차별, 인종차별을 낳는 원흉인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철폐되어야지만 다양한 부문적 문제들도 해결될 단초가 열립니다. 경제적 토대의 변화, 즉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철폐되고 새로운 세상이 이윤에 기초한 세상이 더 이상 아니게 될 때, 인간의 의식도 공동체적 연대의식으로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산양식의 변화만으로 자동적으로 인간의 의식이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생산양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투쟁 속에서 인간의식이 변화, 발전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변화된 생산양식에 맞춰 새 사회에 맞는 새로운 문화, 의식을 창조하기 위한 문화혁명이 힘차게 전개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상당수, 대다수 시민사회단체들은 맑스주의의 노동자 중심성, 계급중심성, 계급모순을 부정합니다. 심지어 정의당, 노동당 등 사민주의파, ‘신좌파’ 정치세력들도 이를 부정합니다. 사회진보연대 같은 ‘좌파’ 정치세력들도 노자 간의 적대가 주요모순, 중심적 모순임을 부정하고 “복수적대”, “다층적 및 중층적 모순”이니 하면서 다원주의를 지지합니다.

구조적 모순은 지금까지 상세하게 얘기했던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를 궁극적으로 결정한다는 사적유물론적 관점으로 사회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진보적인 정치세력들은 자본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인식하고 자본주의 철폐를 통해 모순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변혁당>, <노동자연대>, <노건투>(현재 두 조직으로 분화), <사회주의자> 등 한국사회 “좌파”들은 대체로 이 같은 이 구조적 모순에 동의합니다.

한국사회는 고도로 발전한 독점자본주의 사회입니다. 한국사회는 독점자본이 이 사회의 실질적 지배자들입니다. 미제국주의 독점자본과 미제국주의 국가 역시 한국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국가는 이 같은 독점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폭력과 억압의 기구입니다.

국가는 자본(독점자본, 그 최고형태인 꼰쩨른으로서의 재벌)과 유착, 실은 국가가 자본에 종속되는 자본의 요구에 의해, 전체 자본의 이해 대변, 독점자본과 중소 자본, 독점자본의 이해를 중심으로 독점자본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 전체 자본을 대변합니다.

근로자파견제, 정리해고제와 각종 노동악법 도입은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상부구조로서의 법이고, 국가는 이 법을 폭력적으로 관철시킵니다. 그런데 국가는 폭력과 억압의 기구이면서도 동의와 설득으로 자본의 이해를 국민적 이해로 포장하여 관철시켜나가기도 합니다. 국가는 계급투쟁이 격렬해지면 양보와 타협을 통해 질서를 창출하려고도 합니다. 자본활동의 자유를 위해 국가는 규제완화 조치를 취하고 각종 법인세, 종합부동산세 등의 감세조치를 취하기도 합니다. 자본의 파산 시에 공적자금으로 자본을 구제하기도 합니다. 신자유주의, 케인즈주의도 독점자본주의 하에서 국가가 취하는 정책들의 일환이기도 합니다. 금융, 재정정책, 인구 정책도 국가가 취하는 정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좌파’들은 대다수가 트로츠키주의자들로 독점자본주의는 인정하지만 국가가 독점자본에 종속되어 있는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스탈린주의”라며 거부합니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 서문, <임박한 파국,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등에서 분명하게 강조한 최근 자본주의의 주요한 모습인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구조적 모순은 2018년 1월 현재 한국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2018년의 구조적 모순은 하루아침에 자고 일어났더니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2018년 사회적 모순은 역사적 산물로 만들어진 것이다. 2018년 한국자본주의는 역사적 축적물로 생겨나고 오늘날의 모습으로 형성됐습니다. 결국 구조적 모순은 역사적 축적물로 이 둘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한 사회를 분석한다는 것은 구조적 모순뿐만 아니라 또 다른 측면으로 한 사회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돼 왔는지를 밝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국사회 이른바 좌파들은 구조적 모순은 인식하되, 역사적 모순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한국사회를 온전하게,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적폐(積弊)는 “오랫동안 쌓여 뿌리박힌 폐단”이라고 합니다. 가령 촛불투쟁에서 요구들을 보면 이명박, 박근혜 정권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오랫동안 제기되어 온 문제들입니다.

성노예 협정, 한일군사정보협정, 사드배치, 전쟁위기와 한미일 동맹에 의한 반북 신성동맹, 일제 이후 해방을 맞고 미제국주의가 새로운 “점령군”으로 이 땅에 들어오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만들어졌던 모순이 오늘날에 발현되어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치안유지법에서 유례 되는 국가보안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북몰이는 반공주의 사상으로 한국판 지배계급의 사상입니다. 종북몰이는 한국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인식을 지배합니다. 심지어는 이 지배계급의 사상에서 운동진영 상당수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사회 “좌파” 운동진영 상당수는 반쏘, 반북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역사적 모순들을 이해하지 않고 자본의 경제적 모순만 이해하려 한다면 한국사회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크게 엔엘(NL)과 피디(PD) 진영으로 나눠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 진영은 원래 엔엘알(NLR)과 피디알(PDR)로 각각 민족민주혁명 진영과 민중민주혁명 진영이었습니다. 한국사회를 인식하는 방법의 차이, 혁명의 단계, 방식은 달라도 다 그것이 다 혁명을 하기 위한 노선의 차이였습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한국사회 운동진영이 엔엘알(NLR)과 피디알(PDR) 진영으로 나눠져 있다는 주장은 엄밀하게 보면 틀린 주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80년대 한국사회는 변혁운동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것이 “노동해방”이라는 대중적 요구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 불어 닥친 동유럽과 쏘련 사회주의 진영이 반혁명 공세로 해체된 후 한국사회에서는 청산주의 열풍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맑스주의의 위기” 운운하며 포스트 맑스주의, 자율주의, 해체주의 등 소부르주아 사상이 창궐하게 됩니다. 맑스-레닌주의를 마치 오래되고 낡은 이념인 냥 “구좌파”로 낙인찍고 “신좌파”가 창궐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미 유럽에서는 스탈린 시대 이후 흐루쇼프 때인 1956년 쏘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난하면서, 변화된 상황 속에서 “의회주의적 길을 통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평화이행론”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1961년 쏘련 공산당 22차 당대회에서 “전인민의 국가”, “평화이행론”, “평화공존론” 등 반맑스주의 사상을 대대적으로 유포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평화이행론”은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한정적으로 적용되는 이론이라고 했으나 나중에는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들을 사로잡은 이념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스페인, 이탈리아 공산당을 필두로 프랑스공산당, 미국 공산당, 더 나아가 인도공산당 등 전 세계 대다수 자본주의 국가들 내에서 유로꼬뮤니즘이 지배하게 됩니다. “서유럽 맑스주의”는 서유럽에 나타난 맑스주의가 아니라 반맑스주의 사상입니다. 물론 흐루쇼프 등장 이전에 유고슬라비아를 중심으로 반맑스주의 노선인 “시장 사회주의” 노선이 등장하고 이것이 흐루쇼프 사상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흐루쇼프의 반맑스주의 사상에 대해 마오쩌둥 시절의 중국 공산당은 이를 “수정주의” 노선으로 배격하며 중소분쟁이 일어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크게 손상되게 됩니다. 일본 공산당은 알바니아 공산당 등과 함께 처음에는 중국 공산당을 지지합니다만, 나중에는 우경적으로 변모하여 오늘날과 같이 명색만 공산당이고 여전히 “적기”라는 기관지를 발행하고 있지만 “국민정당”으로 타락했습니다.

이후 1968년 유럽에서는 반쏘비에트 “신좌파” 기조가 등장하게 되지만, 이 이론은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는 구호에서 보듯, 불모의 무정부주의 사상입니다. 러시아에서 1917년 2월 혁명 이후 레닌이 유명한 4월 테제를 발표하면서 “쏘비에트에게 권력을!”이라는 구호를 정식화 했는데, 이것이 1968년 유럽에서의 대중투쟁에서는 저렇게 변형되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이미 유럽과 대다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나타났던 우경화가 한국에서는 1990년 쏘련 해체 이후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자행된 전대미문의 대학살과 반공주의 체제 하에서 맑스레닌주의자들이 사실상 절멸하게 되고 대중운동이 오랫동안 암흑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군사정권에 맞서는 끈질긴 투쟁이 벌어지고 광주학살 이후에 격렬한 대중투쟁으로 나타나게 되면서 뒤늦게 맑스주의의 르네상스 시대를 구가했는데 너무나 짧게 끝나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후 한국에서도 트로츠키주의가 1980년대에 수입되게 되는데 쏘련 해체 이후에 이들이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주지하듯, “소련은 국가자본주의였다”, “소련과 쿠바, 북한 같은 현실 사회주의는 타도해야 하는 반동 체제다”, “소련 해체를 환영한다”, “소련 해체는 새로운 혁명을 건설하기 위한 좋은 기회이다”는 트로츠키주의 “국가자본주의론”이 여전히 변혁을 고수하는 대다수 운동진영을 사로잡게 됩니다. 현재 노동당처럼 의회주의 ‘진보정당’에도 이러한 사조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신좌파’ 사상은 반쏘, 반북을 특징으로 합니다. 과거 “종북”이라는 용어의 창시자들이자 “반자본주의, 반조선노동당” 기치를 내걸었던 세력들이 사회당입니다. 이들이 지금은 노동당 내부를 장악했습니다. 심상정을 필두로 한 정의당의 주요 지도자들, 노조 운동 내부의 한석호 같은 자들도 모두 격렬한 반쏘, 반북주의를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최근 일단의 “좌익 공산주의” 세력들도 반쏘, 반북을 기치로 하고 있습니다.

결국 트로츠키파, 신좌파, 좌익공산주의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의 기치가 바로 쏘비에트 혐오, “북한” 혐오인 것입니다.

트로츠키 진영, 특히 국가자본주의 진영은 “노동자연대”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만, 사실 한국사회 대다수 좌파진영, 즉 구 “노건투”, 해방연대(최근 사회주의자 발행), 변혁당 등 대다수가 트로츠키 노선을 공식 천명하고 있거나 트로츠키 노선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노동자연대가 1990년대 초기 등장했을 때 “남한도 북한도 아닌 오직 국제사회주의”라는 구호를 내걸었는데, 해방 이후 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했다고 하면 나오지 않았을 주장입니다. 이 역시 구조적 모순뿐만 아니라 역사적 모순을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극단적인 분파주의 사상인 것입니다.

이들은 “아래로부터”를 모토로 내걸고 간부와 조합원, 지도자와 대중 같은 위와 아래를 대립시키는데, 이를 통해 단결과 통일, (민주주의적) 중앙집중사상과 중앙집중 계획을 거부합니다. 한국사회 대다수 “좌파”들은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분산적 계획”, “민주적 계획”, “아래로부터 계획” 등을 옹호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사실 자본주의의 무정부성, 무계획성에 맞서 고도로 창조적이고 중앙집중적인 생산을 조직해야 하는 과제를 회피하는 “시장 사회주의” 조류입니다. 이는 비변증법적이고 무정부주의 사상의 일종입니다.

이들이 내거는 “국제주의” 사상은 반쏘 반북주의로 인해 공허하거나 해롭기조차 합니다. 반쏘 반북 사상은 제국주의의 이해와 부합하게 됩니다.

지금 시간이 없어서 인용을 하지 못하는데, “노동자연대”, “변혁당”, 구 “노건투”, “사회주의자” 등 ‘변혁’ 정파들은 “북핵문제”에서 양비론이나 중립적인 입장을 취합니다.(이에 대해서는 “한국사회 민족문제 이해를 위해서 – 한국의 양두구육식 반쏘 반북 ‘진보급진파’들에게”, 노동자정치신문, 2018년 1월 18 2018년 2월 2일(개정판)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미국핵도, 북한핵도 다 마찬가지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도 미제국주의의 군사적 위협과 핵무기 위협 같은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부족한데다가 트로츠키주의 분파주의와 결합해서 나타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북핵문제”는 조어(造語)이고 실은 미제국주의에 의한 핵독점전략이자 군사적, 정치적 포위절멸 공세의 일환입니다. “한반도 비핵화”는 일반론적으로는 옳은 주장인 것 같지만, 실은 미제국주의나 한국 지배계급, 조중동 등 극우 언론 등의 주장과 일치합니다.

위에서 잠시 언급했던 “사회진보연대” 역시 쏘련을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당독재로 전환했다면서 이를 “일괴암주의”라고 비난합니다. 사회진보연대는 이를 근거로 전위당이나 더 나아가 당일반을 부정합니다. 이 사상이 이번 민주노총 선거에서 “사회세력화” 주장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당을 부정한다고 하지는 않지만, 이 주장은 현재 진행되는 우경적인 “진보정당” 운동에 대한 비판을 가장했지만, 그를 빌미로 당 자체(당형태)에 대한 거부나 회피하는 주장에 불과합니다.

일단 이 정도로 한국사회 정치조직에 대한 소개를 마치면서 부족한 부분은 동지들과의 토론으로 더 풍부하게 논의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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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맑스주의 사적유물론과 맑스주의연하는 한국 정치세력 비판”의 1개의 생각

  • 2018년 4월 23일 8:3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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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들은 마극사/마르크스주의라고 주장하지만 실제의 예는 공단주의/생디칼리즘적인 실천을 주로 하는 상황인데 번역자의 소원과는 달리 그 분의 도서에서 출원한 제국주의적 경제주의의 침윤의 문제가 너무나 큰 듯 합니다. 새 시대를 개창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를 개창하기 위해 오히려 극복대상화하는 사상, 주의들로 당건설을 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새로운 인자들조차 양성하지 않으니 몇 년째 아니 10여년 이상 표류를 하는 상황입니다. 물론 당 건설을 일단 한 곳은 소년, 소녀가단으로 비유하자면 음처리를 위시한 다수가 너무나 부족한 상황으로 볼 수 있는데 일단 건설은 했지만 머지 않아 문제를 생성한 일보전진 이보후퇴의 상황이 아닐 수 없는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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