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민중항쟁의 역사를 저들과 화해시키지 말자!
경기중서부건설지부 조직차장 조원하
제주 4.3 항쟁이 70주년이 됐다. 70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제주도 곳곳은 피 흘림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돌 하나에도 풀잎 하나에도 당시 48년 제주민중이 흘린 피는 흔적은 사라졌으나 어김없이 4월이면 제주에는 학살의 기억이 돌아온다.
제주는 조선말부터 일제의 지배가 끝나는 시점까지 지배계급의 수탈이 이어진 공간이었다. 봉건 시대부터는 제주지역의 떨어지는 생산력에도 불구하고 전복이나 귤 같은 특산품을 진상해야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일제하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일제는 본격적으로 식민지 경영에 나선 이후에 산림, 광산 및 조선반도 근해의 어장들에 대한 본격적인 수탈에 나섰다. 특히 제주지역의 경우 일본의 무분별한 근해어업으로 인한 어장의 황폐화와 30년대 이후 중국본토 침략을 위한 제주의 군사기지화가 이루어지며 강제노동이 주민들을 상대로 이루어 졌다. 이에 제주 내부에서는 사회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20년대 야학이 만들어 졌고, 경제적 수탈로 불만이던 제주의 민중은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32년 제주잠녀항쟁이다. 수산물을 착취해오던 일본인 선주와 자본가들을 향한 제주잠녀(해녀)의 투쟁은 그 당시 목포에서 경찰관을 파견할 정도로 거세었다.
1945년 해방이후 건국준비위원회는 전국적으로 인민위원회로 구성이 되고 민중들의 직접자치를 위한 첫걸음을 시작하였다. 이후 미군정이 들어온 1946년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인민위원회는 사라졌으나 제주지역은 상당히 오랜 시간 남아서 인민위원회를 이어간다.
제주에서의 4.3 항쟁의 시작에 대하여 수많은 원인들에 대해 이야기가 되고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본질적인 문제는 두 가지로 압축이 된다. 하나는 경제적 측면으로 미군정의 미곡정책의 실패와 이 정책을 담당한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로 인한 혼란이었다. 다른 하나로는 이남의 단독정부 수립의 움직임 속에서 해방정국을 맞이한 조선민중의 분노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며 친미로 돌아선 과거 일제에 충성했던 친일세력에 대한 청산요구가 바로 4.3항쟁을 부른 가장 본질적 문제로 봐야 한다.
4.3 항쟁의 가장 본질적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은 당시 군경과 서북청년단을 통하여 학살을 지시한 미군정이다. 1948년 2·7 구국투쟁으로 이남의 노동자·농민·학생 등 해방조국의 분단을 반대하는 총파업과 동맹휴학 등의 전국적 투쟁은 제주 4.3 항쟁에서 미군정과 이승만 일파들과의 본격적 무력대결로 이어지게 되었다. 미국이라는 외세에 의해 민족자결이라는 원칙은 사라지고 혼란과 탄압 속에서 3만 명 이상을 학살한 저들이 얻은 것은 왜정부터 내려오던 정치결정권과 경제적 혜택의 독식이다. 그러한 독식을 다시 얻어내기 위한 해방 후 전체 노동자·민중의 저항에 대해 학살과 탄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4·3 항쟁, 당시 저들이 학살한 3만 영령의 피이다.
이번 4.3 항쟁 70주년을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적 폭력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진보적 지식인부터 과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는 부르주아지들까지 4.3 항쟁의 잔혹함에는 공감한다. 문제는 4.3 항쟁에 대한 참혹함과 국가폭력에 대한 사과만이 남으며 4.3 항쟁에 대한 본질적인 책임과 4.3 항쟁을 이끈 사람들에 대해 구체적 역사적 조명을 하는 것에는 의도적인 거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 하듯 4.3 항쟁의 문제는 바로 지금까지도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친일·친미 지배계급의 책임의 문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4.3 항쟁 70주년 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이야기 했던 4.3의 완전해결이라는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물론 4.3 항쟁 과정의 국가권력의 학살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보상에 대한 마무리하는 측면은 존재하나, 그것에 국한된 이야기와 화해만을 던지는 것이 바로 저들이 4.3 항쟁을 대하는 태도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로의 4.3 항쟁을 끌어가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4.3 항쟁에 대한 포용으로 과거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했던 민중항쟁의 역사를 제거하고 오직 학살 피해자로 남기느냐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대한민국이라는 역사는 누구의 피를 뿌리며 올라왔는가? 4.3 민중항쟁, 4.19 민중혁명, 5.18 민중항쟁, 6월 민주항쟁, 7. 8, 9 노동자 대투쟁, 08년 촛불항쟁부터 17년 정권퇴진까지 민중의 저항은 총으로 칼로 피를 본 역사, 그리고 그 역사를 기억하는 민중의 투쟁으로 마지못해 과거사에 대해 국가권력은 책임을 인정하는 정도이고 바로 문제의 본질을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만을 남기려는 지배계급의 역사의식에서 무엇을 우리는 봐야하는가?
아직도 제주 4.3 공원의 백비를 우리는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4.3이 항쟁이라고 말하는 우리는 백비에 민중항쟁이라는 글을 새겨 넣지 못했다. 진정 우리의 역사가 항쟁의 역사이고 항쟁에 참여한 영령들이 우리의 조상이라면 더 이상 4.3 항쟁을 화해시키지 말자. 그것이 4.3 영령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고 저들에게 책임을 묻는 투쟁일 것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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