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에 대한 양쪽의 공통 숭배, 착취계급 국가에 대한 뿌리 깊은 물신주의
사진은 한겨레 트위터
“친박은 ‘성조기’, 촛불은 ‘노란리본’…태극기의 동반자는 달랐다”(2017-03-01)
한겨레신문 기사 제목이다. 기사 제목일 뿐만 아니라, 최근 일련의 집회, 특히 3.1집회에서 나타났던 박근혜 탄핵 반대 박사모 집회와 박근혜 탄핵 촉구 촛불집회에서 서로 분리되어 나타났던 일들이다. 박사모 집회에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이와 구별(?), 분리(?)하기 위해 촛불집회에서는 태극기에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리본을 달았다. 양쪽의 집회는 박근혜 정권에 대한 태도뿐만 아니라, 세월호, 사드 등에서 완전히 상반되는 성격이었다. 한쪽은 극우파쇼 집회라면 다른 쪽은 진보적인 성격의 집회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국가,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에 대한 태도, 여기서 보여지는 국가숭배 사상, 국가 물신주의에 있어서만은 이 두 집회는 본질적으로 구별되지 않았고, 분리되지 않았다.
노골적이고 반동적인 국가주의, 애국주의, ‘식민지’ 노예주의 대 완화된 국가주의, 다소 은폐된 애국주의
박근혜 정부를 탄핵해야 하고, 진보적인 주장을 하는 촛불집회 내에서조차, 특정한 정부가 문제이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자체는 모종의 신성한 것이고, 중립적인 것이고, 객관적인 것이고, 국가는 정의로운 것이라는 환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의 국가에 대하여
이러한 국가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러시아 혁명 이후에도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레닌 역시도 “스베르들로프 대학에서의 1919년 7월 11일 강의”를 시작하며 “국가에 관한 문제는 아마도 무엇보다도 더 부르주아 학자, 작가 그리고 철학자들에 의해 혼란스럽게 된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 중 하나”(레닌, 국가에 대하여, 노동자정치신문, 37호, 38호, 2008년 3월)라고 강조했다. 이것도 부족했던지 “한 번 더 반복하지만 이 문제는 너무나 복잡한 것이고 부르주아 학자들과 작가들에 의해 그토록 혼란스럽게 되어 그것을 진지하게 깊이 생각하고 자주적으로 습득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이 문제에 몇 번씩 접근해야 하며 다시 또 다시 이 문제에 되돌아와서 명확하고 확실한 이해를 이루기 위해서 여러 측면에서 이 문제를 신중히 생각하는 것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레닌은 더 나아가 “매우 자주 이 문제는 지금까지 종교적인 문제들과 뒤섞여 왔고 매우 자주 종교적 교리들의 대표자들뿐만 아니라(바로 그들로부터도 이것을 기대하는 것은 완전히 자연스럽습니다), 종교적 편견들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을 여기는 사람들도 국가에 관한 특별한 문제를 종교에 관한 문제들과 뒤섞어 왔으며 – 매우 자주 복잡하고 이념 철학적인 접근방식과 그 근거를 가진 – 학설, 국가는 신적인 그 무엇, 초자연적인 그 무엇이며, 이것은 인류가 살아왔고 사람들에게 제공하거나 제공할 것이 있고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그 인간에게 주어진 그 무엇을 자체로 지니고 있는 그 어떤 힘이며, 이것은 신적인 기원의 힘이라는 것에 관한 학설을 세우려고 시도합니다. 그리하여 이 학설이 착취계급들 – 지주와 자본가들의 이해관계와 너무나 밀접하고 연관돼 있어 그렇게 그들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고 부르주아 대표자들 신사양반의 모든 습성, 모든 견해, 모든 학문을 너무 깊이 스며들게 해서 그것들의 잔재들과 여러분들은 가는 곳마다 마주칠 것이며”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런데 국가에 대한 문제가 이토록 “너무나 혼란스럽고 복잡하게 되어 있는 이유는”, “그 어떤 다른 문제 보다 더 많이 지배계급들의 이해관계를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국가에 관한 학설은 사회적 특권들의 정당화, 착취의 존립의 정당화, 자본주의 존립의 정당화에 복무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이 문제에서 공평함을 기대하는 것, 이 문제에서 마치 과학자연하는 사람들이 여기서 순수과학의 관점을 여러분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듯이 그렇게 이 문제를 취급하는 것 – 이것들은 가장 커다란 오류인 것입니다.”라고 하고 있다.
레닌의 이 강의는 러시아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하고 쏘비에트라는 노동자 민중의 대중국가가 새로운 사회의 기초가 되었던 시기에, 가장 선진적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그럼에도 국가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이처럼 가장 어렵고 복잡한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국가의 문제가 자본주의 하에서는 지배계급의 “사회적 특권들의 정당화, 착취의 존립의 정당화, 자본주의 존립의 정당화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민중이 국가의 계급적 본질을 이해하면 “사회적 특권들의 정당화, 착취의 존립의 정당화, 자본주의 존립의 정당화에 복무”하는 모든 지배계급의 존립의 기초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레닌은 국가의 본질이 “다른 계급에 대한 한 계급의 지배유지를 위한 기구”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는 노예 소유주들을 보호하고 노예들을 착취하고 억압하기 위한 물리적 폭력을 근간으로 하는 기구이고, 봉건 사회에서는 봉건 지배자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 민중의 착취자, 수탈자들인 자본가(해외의 자본가들을 포함해서)들을 위한 국가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레닌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공화국들 중 하나”인 미합중국조차도 “그 어디에서도 자본의 권력, 사회 전체에 대한 한줌의 억만장자들의 권력은 아메리카에서처럼 그렇게 조잡하게, 그와 같이 공개적인 매수를 가지고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본은 일단 그것이 존재하는 이상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 어떤 민주주의 공화국도 그 어떤 선거권도 문제의 본질을 바꿔내지 못합니다.”라며 미합중국 국가의 본질에 대해 폭로하고 있다.
오늘날 미제국주의가 전 세계에서 자행하고 있는 전쟁과 파괴, 내전 유도, 암살과 감시, 민주주의 파괴, 인권 유린, 정치공작을 보면 레닌의 이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 주장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미제국주의는 “75개국 이상에서 은밀한 군사작전 실시.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리비아, 소말리아, 예멘, 파키스탄 7개국에 폭격”을 가하고 “2014년 11월 24일 현재 무인기(드론)로 최소 1,147명 살해”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그 중 98%는 무고한 남성과 여성과 아동”이라고 하니 그 참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미국 자본주의 국가가 자국 내의 노동자 민중에게 자행하는 야만적 살해 행위는 어떤가?
‘진보적’이라는 민주당 오바마 정부 하에서 “2013년-2016년 마이클 브라운, 애릭 가드너 등 4,124명의 노동자들이 경찰에 의해 살해당했다.”( http://www.plp.org/challenge/2017/1/14/obamas-presidential-accomplishments.html)
이것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내걸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전쟁 책동을 벌이고 있는 미국 제국주의의 적나라한 실체이다.
미국에서는 부시든 오바마든,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국가의 폭력적, 폭압적 본질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트럼프 하에서도 마찬가지다.
권력자의 면모와 상관없이 미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거대 독점자본가들이기 때문이다. 미국 거대 정보기관과 국방부, 국무부, 월가, 언론, 정치인들은 다 독점자본이 움직이고 있다. 미제국주의가 일으키는 전 세계 전쟁의 배후에는 군산복합체가 있다.
그런데도 미국 내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사회에서도 박근혜의 “불통”, “어눌한 연설”과 비교해 세련되고 화려한 연설을 하고 친근하게 소통하는 오바마에게 찬사를 보내는 구제불능의 노예들이 있다. 이처럼 미국 숭배 노예들이 성조기를 들고 다니는 극우 파쇼들과 최소한 국가, 미제국주의에 대한 환상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무엇이 있는가?
레닌은 그리하여 “공화국이 그 어떤 형태들로 감춰져 있다 해도, 비록 그것이 가장 민주적인 공화국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만일에 그 공화국이 부르주아적이라면, 만일에 그 공화국에 토지와 공장에 대한 사적 소유가 남아있다면, 그리하여 사적 자본이 임금노예제로 사회 전체를 틀어쥐고 있다면, 즉 만일에 우리 당의 강령과 소비에뜨 헌법이 천명하고 있는 것이 그 공화국에서 실행되지 않는다면, 이 국가는 – 다른 사람들에 의해 어떤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한 기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구를 우리는, 자본의 권력을 타도해야만 하는 그 계급의 손아귀에 가져올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가 보편적인 평등이라는 모든 낡은 편견을 내던질 것입니다. 이것은 기만입니다. 즉 착취가 있는 동안은 평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주는 노동자와 평등할 수 없고 굶주린 자는 – 배부른 자와 같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미신적인 존경을 가지고 언급하고 이것이 전 국민적인 권력이라는 낡은 옛이야기를 믿는, 국가라 불린 그 기구를, –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기구를 내던지고 이렇게 말합니다. 즉 이것은 부르주아적인 거짓이라고.”라고 주장한다.
국가 물신주의 근원인 반공주의, 종북몰이
박근혜 권력은 분쇄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로지 노동자 민중의 투쟁에 의해 박근혜 권력이 분쇄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통합진보당 해체에 앞장섰던 반동적인 권력의 노예들인 헌법재판소 판관들에게 노동자 민중의 운명이 내맡겨져 있는 처지가 아닌가? 박근혜 개인의 하야가 아니라 박근혜 권력을 떠받치고 있는 권력의 중추들, 검경, 국정원, 자본언론 등이 분쇄되어야 한다. 재벌의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가 분쇄되어야 한다. 미제국주의 주둔군이 물러가야 한다.
지금 태극기 성조기를 들고 준동하고 있는 극우 무리들 배후에 누가 있다고 보는가? 그 자금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가? 종북몰이는 누가 획책하는가?
왜 극우 박사모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박근혜를 옹호하고 있는가?
저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물신주의, 미제국주의라는 국가에 대한 물신숭배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극기와 성조기로 상징되는 그 국가들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 노동자 민중의 해방에 대한 염원을 짓밟고 대학살을 저지르며 그 확고한 지배의 기초가 세워졌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국내외 자본의 공화국이 되었다.
국가에 대한 환상, 그 국가의 상징은 국기에 대한 환상은 법에 대한 환상으로 이어진다. 국가처럼 법은 정의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라는 “법치주의”의 환상에 빠져 있다. 법의 근본적 성격이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수단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법은 근원적으로 중립적이고 좋은 것인데 단지 그 법이 지켜지지 않아서 문제라는 식으로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속, 수배, 손배 가압류를 당하고 벌금을 추징당해본 노동자들은 이 법이 자본과 가진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레닌은 국가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가장 어렵고 복잡하고 힘든 문제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그 국가의 본질에 대해 계급적인 인식을 할 수 있는가?
먼저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이 법과 권력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강정과 밀양, 성주에서 노동자 민중은 국가권력과 미제국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점점 더 날카롭게 이해해가고 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국가와 법의 본질에 대한 자주적인 인식에 도달할 수는 없다.
언론과 교육이 국가에 대한 맹신과 물신주의를 365일 내내 우리들 머릿속에 심어놓으려 하기 때문이다. 특히 반공교육과 더불어 미디어가 펼치는 종북몰이는 한국 사회에서 국가의 본질에 대해 맹신을 하게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진보진영”, “진보인사” 들 내에서도 이런 국가 물신주의가 팽배하다.
한국에서 국가 물신주의를 만들어온 지배계급의 이념은 반공주의다. 현재는 종북몰이를 통해 이 반공주의가 확대재생산 되고 있다.
심상정의 “헌법 내 진보”가 대표적인 것이다. “종북”이라는 용어의 창시자가 바로 “좌파” “운동진영”이다. 그 “종북”을 이유로 분열행위를 자행한 것도 바로 “진보” 세력들이었다.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하는 <노동자 연대>의 반공반북주의
쏘련과 “북한”, 쿠바가 타도해야 하는 반동적 국가인 “국가자본주의”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 연대>는 적개심에 사로잡혀 사리분별을 못하고 있다.
2월 13일 말레이시아에서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이 피살됐다. 이 일은 동아시아 국제 정치의 커다란 이슈로 떠올랐다. 백주대낮에 국제공항에서 독재자의 친척이 피살된 건 그 어떤 스릴러 영화보다도 충격적이었다. 현실이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자극적인 건 단지 남한만의 일이 아니다.”(김영익, 김정남 피살로 드러난 김정은 정권의 불안정성, <노동자 연대> 197호, 2017-02-17)
“단지 남한만의 일이 아니다”라는 것으로 양비론을 슬쩍 걸쳐 두지만 그것으로 이들의 정치적 본색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 연대>는 처음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김정남 피살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사건 직후부터 북한, 남한, 미국, 중국 등 관련 국가들이 현지 수사를 놓고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고 있다. 부검과 시신 인도 여부를 놓고도 각국의 물밑 외교전이 벌어졌다. 수사 결과에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당국이 어떤 수사 결과를 내놓아도 이는 소동을 가라앉히기는커녕 새로운 논란과 의문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같은 기사)
이들은 “김정남 피살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고 하고, 이를 두고 “치열한 외교적인” 벌어지고 있으며, “수사 결과에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으며, “말레이시아 당국이 어떤 수사 결과를 내놓아도” “새로운 논란과 의문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고 한다.
실제로 이 첨예한 정치적 사건에 대해 무수한 의문이 제기될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한국사회에서 거대한 종북몰이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고, 미국에 의해 북에 대한 “테러지원국 재지정” 압박이 가해지도록 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 때문에 반도와 동북아에 전쟁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 연대>는 처음의 가정과는 정반대로 확신에 차서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피살 사건의 맥락과 파장에 더 주목해야 한다. 그러려면 물음을 던져 봐야 한다. 1990년대만 해도 서방 세계에서 김정일의 후계자로 유력하다고 예상돼 온 김정남이 어쩌다 말레이시아에서 홀로 객사하는 신세가 됐나?
김정남과 김정은의 갈등은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3대 세습 과정에서 이복동생한테 밀려난 김정남은 해외(주로 중국)에 거처를 마련해 살아야 했다. … 김정은으로의 “이상한” 권력 승계, 이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이복형의 존재는 오늘날 북한 김정은 정권이 처한 문제의 일면을 보여 준다. 그래서 북한 권력에 배척당한 채 사실상 망명자로 살았던 김정남의 피살은, 오늘날 북한 김정은 정권이 내면적으로 안고 있는 불안정성을 힐끗 드러내고 있다.(같은 기사)
“김정남, 3대 세습의 걸림돌”이기 때문에 암살을 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노동자 연대>가 반북반공을 모토로 내걸고 있고, 그것을 기초로 사건과 사물을 인식한다는 점에서만은 조종동, 종편이나 박사모와 한 치라도 다를 것이 있는가?
국가물신주의 극복은 해방의 첫걸음
결국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국가 물신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종북몰이 반공주의 공세에서 벗어나 자주적이고 과학적인 인식을 해야 한다.
한국 현대사를 공부해야 한다. 해방 이후 노동자 민중의 통일정부 구성에 대한 열망을 깨고 진주한 미군정과 1948년 “단독정부” 구성과 한국 전쟁, 이 과정에서의 민중대학살, 군사독재로 이어지는 격동에 찬 한국 현대사를 자주적으로 공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가의 본질을 다룬 과학적 맑스주의 사상을 학습해야 한다. 엥겔스의 국가에 대한 이론은 국가의 탄생에 대한 가장 풍부한 이해를 하게 한다.
“국가는 문명 사회를 총괄하는 힘으로서 모든 전형적인 시기에 예외없이 지배계급의 국가이며, 또 본질적으로 모든 경우에 압박받고 착취당하는 계급을 억압하는 기관이다. …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착취(die Ausbeutung)가 문명의 기초인 만큼, 문명의 발전은 끊임없는 모순 가운데서 진행된다. 생산에서의 온갖 진보는 동시에 피억압계급, 즉 대다수의 생활 처지가 낙후됨을 의미한다. 한 쪽을 위한 온갖 선(Wohltat)은 필연적으로 다른 쪽에게는 악(Übel)이며, 한 계급을 위한 온갖 해방(Befreiung)이 다른 계급에게는 새로운 억압(Unterdrückung)이다. 그 가장 명료한 실례가 바로 기계의 도입이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오늘날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미개인들의 경우에는 권리와 의무간의 차이가 도저히 있을 수 없었다. 반면에 문명은 한 계급에게 거의 권리만을 주고, 다른 계급에게는 거의 의무만을 부담시킴으로써 아무리 미련한 자라도 권리와 의무 간의 차이와 대립을 알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럴 리는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지배계급은 사회와 자기를 동일시하고, 마치 지배계급에게 좋은 것은 전체 사회에도 좋은 것처럼 말한다. 그러므로 문명은 진보하면 할수록 자신이 생산한 부정적 죄악을 점점 더 사랑의 보자기에 싸서 미화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기만적으로 부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 이전의 사회형태에서는 물론 문명의 첫 단계에서조차 모르고 있던, 즉 관례화된 위선을 부리지 않으면 안된다. 마침내 이 위선은 절정에 달하여 착취계급의 피압박계급에 대한 착취는 오로지, 또 전적으로 피착취계급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처럼 된다. 따라서 피착취계급이 이런 줄을 모르고 반란까지 일으킨다면, 그것은 은인, 즉 착취자에 대한 그야말로 비열하고 배은망덕한 소치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F·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김대웅 옮김, 도서출판 아침)
“문명이 진보하면 할수록 자신이 생산한 부정적 죄악을” “미화”하거나 “기만적으로 부인”하면서 “관례화된 위선을 부리지 않으면 안”되는데, 자본주의에서 “이 위선은 절정에 달하여” 착취계급의 착취조차도 “피착취계급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포장된다. 국가는 중립적인 것이며 전체 국민의 국가가 된다. 이 국가에 대한 환상이 노동자 민중에게 받아들여지면 국가에 대한 임금노예들의 노예화는 완성이 되는 것이다. 더불어 노동자 민중의 투쟁에 대해 “그야말로 비열하고 배은망덕한 소치라고 주장하”는 지배계급의 파렴치함도 완성된다.
정권교체에 대한 환상 역시도 국가 물신주의의 하나다. 체제와 국가 기구, 제도들을 내버려두고, 자신들의 독자적인 대중투쟁 대신에 자신을 대리하는 한 정치인의 교체만으로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정권교체에 대한 기대와 환상, 법률에 대한 환상, 국회에 대한 환상, 보통선거제에 대한 환상도 국가에 대한 노예화의 한 표현이다. 국가 물신주의를 극복하지 않으면 해방도 없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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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환상을 벗어나야 하는 일은 급선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