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과 사회주의에 대한 변질적 이해 – 전도(顚倒)된 인식이 낳은 사회주의 전도(前途)의 봉쇄

내년, 2017년이면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다.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해체 원인에 대해 과학적이고 실제적으로 분석하지 못하면, 자본주의의 부패와 기생성과 반동성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전망에 대해 제시할 수 없다. 이는 ‘대안 부재’가 되어 착취와 억압, 전쟁과 학살로 점철된 자본주의를 정당화하게 만들고, 노동자인민을 자본주의의 영구적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점에서 몇 달 전(4월과 5월) ‘다른 세상을 향한 연대’(‘변혁재장전’)에서의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해체(국가자본주의, 혹은 이 주장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관료가 지배하는 공동생산체제”로 규정하기도 하지만) 원인과 사회주의 전망에 대한 논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논쟁들은 사회주의에서의 계획과 시장, 이윤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과 계획기구의 구체적인 작동 원리와 방식(가령, 코시킨 계획과 리베르만 방식, 고스플란 등 중앙계획기구의 작동과 노동조합과 노동자 대중의 참여 방식의 문제 등), 콜호즈와 소포즈 등 농업에서 사회주의 생산의 문제를 둘러싼 논란과 그것의 구체적인 운영과 작동, 제국주의의 군사적, 정치적 포위와 파시즘의 공세 하에서 군사비의 엄청난 증가가 한편으로는 사회주의를 수호하도록 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사회주의가 고통 받고 제약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와 검토의 부족, 쏘련 사회주의의 직접적 해체 원인이 됐던 페레스트로이카 등 사회주의 건설과 해체 과정에서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역사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고 지극히 추상적이고 일방적인 주의주장으로 쏘련 등 사회주의를 분석, 비판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글들은 쏘련 사회주의와 동유럽 사회주의 해체의 내적 원인 바로 그것을 마치 새로운 사회주의 대안으로 제출하는 전도(顚倒)된 인식으로 말미암아 사회주의의 전도(前途), 즉 전망이나 가능성을 오히려 봉쇄한다. 따라서 사회주의에 대한 전도(顚倒)된 인식을 바로 세움으로써만 사회주의의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여기서는 위 글 중에서 ‘러시아 혁명의 변질과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전지윤)를 중심으로 다룬다. 왜냐하면 이 글이 다른 글들을 종합, 정리하는 차원에서 다루고 있고, 다른 글들 역시 이 글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관점을 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동안 제출되어 왔던 러시아 혁명과 쏘련 사회주의에 대한 다른 글들이나 단위의 관점과도 동일한 선상에 있기 때문에 이 글에 대한 비판은 다른 글들이나 다른 단위에 대한 비판도 포함하고 있다.

이 글에서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가 ‘국가자본주의’였다는 주장은 그 동안 우리가 논리적, 철학적, 역사적 관점에서 수차례 비판해 왔던 국가자본주의론과 본질적으로 하나도 다를 게 없기 때문에 심각한 논리적 모순과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왜곡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따로 비판하지 않는다. 또한 중소분쟁으로 가속화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약화와 사회주의권의 분열, 사회주의 해체의 외부적 요인이었던 제국주의에 의한 사회주의권의 군사적, 경제적 공세들에 대해서도 여기서는 다루지 않고, 유고의 ‘시장 사회주의’ 같은 수정주의 노선을 중심으로 한 내적 경제적 원인을 중심으로 다룬다.

사회주의에 대해 실질적으로 분석하고 전망을 모색하려면 이미 해체된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하지만, 국가보안법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다루지 못하고 있다. 다만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생존과 발전은 수정주의 노선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원칙을 견지하였기 때문이라는 정도로 말할 수 있다.

이제, ‘러시아 혁명의 변질과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의 관점이야말로 러시아 혁명과 사회주의에 대해 변질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살펴보겠다.

1917년 10월에 권력을 잡고 나서 볼셰비키가 취했던 많은 의문스러운 조치들(사실상 볼셰비키만으로 구성된 권력 구성, 소비에트 내에서 반대파 추방, 다른 좌파들에 대한 박해, 당내 분파 금지,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의 무력화, 1인경영 도입 등)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이것은 대개 부르주아적 세력과 시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됐고, 볼셰비키의 선택은 프롤레타리아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반면 이에 대한 반대는 보통 민주주의에 대한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잣대라고 반박받았다. 물론 후대에 그것을 신화화하며 더 편협한 형태로 발전시킨 책임까지 레닌과 볼셰비키에게 지울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나는 ‘사회주의는 원래 그 자체로 민주주의적인 것’이라고 강조하며 몇 가지 기준을 세워서 노동자 국가의 변질 정도를 측정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사회주의는 원래 민주주의적인 것’이란 말은 ‘민주주의가 없다면 그 사회는 사회주의가 아니다’는 말도 되지만, ‘그 사회가 사회주의라면 이미 민주주의적인 것이다’는 말도 될 수 있다.

이 순환론을 피하려면 우리는 사회주의와 노동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이론과 실천을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재검토해봐야 한다. ‘노동계급 스스로의 자기 해방’,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중심으로 해서 혁명조직에 대한 이론, 변혁의 전략과 전술 모두를 재구성해 볼 수 있어야 한다.(전지윤, 러시아 혁명의 변질과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다른 세상을 향한 연대)

위 글은 러시아 혁명이 변질돼서 쏘련이 국가자본주의가 됐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원칙에 대해 강조하지만, 사회주의의 원칙에 비춰 볼 때, 이것이야말로 러시아 혁명과 사회주의에 대해 변질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글은 “1917년 10월에 권력을 잡고 나서 볼셰비키가 취했던 많은 의문스러운 조치들(사실상 볼셰비키만으로 구성된 권력 구성, 소비에트 내에서 반대파 추방, 다른 좌파들에 대한 박해, 당내 분파 금지,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의 무력화, 1인경영 도입 등)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라고 주장한다.

이 글에서 사용한 “의문”이라는 단어는 단순하게 “알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는 수준을 넘어서 대단히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 글은 “볼셰비키만으로 구성된 권력 구성, 소비에트 내에서 반대파 추방, 다른 좌파들에 대한 박해, 당내 분파 금지,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의 무력화, 1인경영 도입” 등 레닌과 볼셰비키의 조치들을 비판하며, “이것은 대개 부르주아적 세력과 시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됐”다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해 가고 있었던 쏘련에 대한 비판과 부정적 태도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노동계급 스스로의 자기 해방’,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라는 명목으로 “사회주의와 노동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이론과 실천을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것으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혁명조직에 대한 이론, 변혁의 전략과 전술 모두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결국 위 글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중앙집중제, 중앙집중계획, 전위당의 지도에 대한 부정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회주의의 핵심적 원칙과 운영원리, 전위당 노선에 대한 부정이나 폄하는 자치, 평의회, 분산적 계획, 더 나아가 이 원리가 실제 실현됐던 유고 등 ‘시장 사회주의’의 경제 및 정치 원리나 소부르주아 무정부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주관적으로는 그러한 정치적 의도는 아니라고 답변할지 모르나, “사실상 볼셰비키만으로 구성된 권력 구성, 소비에트 내에서 반대파 추방, 다른 좌파들에 대한 박해, 당내 분파 금지,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의 무력화, 1인경영 도입” 등 이 글이 비난하는 레닌과 볼셰비키의 조치가 바로 소부르주아 무정부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사실상 볼셰비키만으로 구성된 권력 구성”이라는 주장은 쏘련 권력의 원천인 쏘비에트에 비당원 대중, 다민족이 광범위하게 참여했던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당과 노조, 당과 소비에트, 당과 국가를 분리시켰던 당적 원칙과 운영원리와도 맞지 않는다. 그런데 이 주장이 사회혁명당 좌파의 분리 이후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1918년 초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을 반대하여 떨어져 나간 역사적 상황을 인식하기를 회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일당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지도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전위정당의 지도와 주도성을 부정하거나 혹은 소부르주아 무정부주의, 더 나아가 다당제를 옹호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후대에 그것을 신화화하며 더 편협한 형태로 발전시킨 책임까지 레닌과 볼셰비키에게 지울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라는 글에서 보듯, 이 글은 후대는 물론이고 레닌 당시의 볼셰비키에 대한 비판임을 알 수 있는데, 과연 “다른 좌파들에 대한 박해”는 어떤 다른 좌파를 박해했다는 것인가? 그 좌파가 멘셰비키인가? 사회 혁명당 좌파인가? 아니면 당시 ‘좌익공산주의’ 세력들을 의미하는 것인가? 위 글이 지극히 추상적이고 구체적인 정치적, 역사적 맥락을 분석하지 않고 일방적인 주장만을 담고 있어서 그 ‘박해’가 누구에게 이뤄졌는지, 어떠한 정치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뤄졌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런데 “다른 좌파들에 대한 박해”와 “분파금지”를 연결시키는 것을 봤을 때, 이 주장은 민주집중제를 거부하고 당내 또 다른 강령을 가진 분파를 옹호하면서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무정부주의를 옹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이 비판하고 있는 “노동조합의 무력화”는 레닌과 볼셰비키가 아니라, 노동조합의 국가기구화, 군사화를 고집한 트로츠키 아닌가? 레닌과 볼셰비키가 왜 노동조합 무력화의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레닌은 노조의 국가기구화, 군사화를 주장하며 당 내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심지어 당을 위기로 몰아넣었던 트로츠키의 입장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직업동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조건들 하에서 거의 예외 없이 망라하는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으로 필요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조직입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고려인데도, 뜨로츠끼 동지는 그것을 항상 잊어 먹고 그것에 기초하지 않으며 그것을 평가하지도 않습니다. … 가장 기본적인 이론적 문제들 중 하나인 이 문제의 논의에 넘어가면서 나는 우리가 여기서 굉장히 독특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조직의 대열 속에 산업노동자들을 예외 없이 망라하고 끌어넣으면서 직업동맹은 지배하고 통치하는, 정부 구성권을 갖는 계급의 조직, 독재를 실현하는 그 계급, 국가적 강제를 실현하는 그 계급의 조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국가적인 조직이 아니고 이것은 강제의 조직이 아니며, 바로 이것은 교육적인 조직이고 참가시키고 배워주는 조직이며, 이것은 학교, 통치의 학교이며 바로 경영의 학교이고 공산주의의 학교입니다.([노동자정치신문 44호] 직업동맹, 현 시기 그리고 뜨로츠끼 동지의 오류에 대하여, 2008년 10월 2일, 러시아어 번역 임채희)

이제 남은 “공장위원회” 무력화와 “1인경영 도입”이 어떠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나타나고 어떠한 쟁점을 담고 있는지 살펴보자! 이 논란은 1918년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생산의 조직화, 국유화를 둘러싼 원칙과 방법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당시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생산과 분배의 조직화에 있어서 중앙집중화를 반대하고 공장위원회별로 자주관리를 주장했다. 레닌은 이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조합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는 행정에의 참가라는 실제의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 또한 달성된 성공이나 정정된 오류에 엄밀히 입각하여 이 경험을 더욱 발전시키려 하지 않고, 경제관리의 기관들은 ‘선출하는 생산자대회들 혹은 생산자대회’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 … 그리고 우리는 소비에트 국가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경제형태들의 건설이라는 실제의 업무를 계속하고 시정해가는 것이 아니라, 이 업무에 대한 쁘띠부르조아적이고 무정부적인 파괴를 목도하고 있는데, 이러한 파괴행위는 부르조아 반혁명의 승리로 귀결될 뿐이다.(V.I 레닌, “러시아공산당 제10차대회의 결의. 우리 당내의 생디칼리즘적, 무정부주의적 편향에 대하여의 최초의 초안”,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노동자의 사상’ 제1호에서 재인용)

레닌은 왜 공장위원회별로 생산자대회를 열어 경제관리의 기관들을 선출하자는 좌익공산주의자들을 조합주의자, 무정부주의자로 비판하고 있는가? 그것은 중앙집중 계획을 실시하자는 주장에 반대함으로써 행정 참여의 실제적인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자치를 주장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무정부성, 무계획성을 옹호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한 조합주의인 것은 고도로 집중된 중앙계획에 반대하는 공장위원회별, 혹은 노동조합별 생산자대회는 각 공장별, 조합별 이해를 전 사회의 발전, 전체 인민의 이해보다 우선적으로 내세우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볼셰비키 강령 초안에서도 분산성, 자치성을 옹호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을 근본적으로 비판했다.

공산주의 건설을 위해서는 노동을 전국적인 규모에서 가능한 최대로, 극히 엄격하게 집중하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본의 위력과 노동의 무력함의 근원의 하나인 노동자의 직업적 분산상태 및 지방적 분산 상태와 세분상태를 극복하는 것이 전제가 된다.(V.I. 레닌, “러시아공산당(볼) 강령 초안, 1919년 2월 23일, 노동자의 사상 제1호에서 재인용)

그런데 레닌과 볼셰비키의 이러한 주장은 맑스와 엥겔스의 사회주의에 대한 원칙이기도 했다.

일단 사적소유에 대한 최초의 근본적인 공격이 일어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더더욱 앞으로 나아가 모든 자본, 모든 농업, 모든 공업, 모든 운송, 모든 교환들을 더욱더 국가의 수중에 집중시켜야 함을 알게 될 것이다.(F.엥겔스, “공산주의의 원칙들”, 노동자의 사상 제1호에서 재인용”

엥겔스에게서 자본주의 사적소유를 철폐하는 공산주의의 최초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바로 생산수단을 국가 수중으로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도 자본가적 사적 소유 철폐와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생산수단을 집중시키고 생산력을 가능한 한 고도로 급속히 증대시키는 것을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

맑스와 엥겔스에게 ‘민주주의’는 순수한 민주주의도 아니고 추상적인 민주주의도 아니었다. 바로 노동자 혁명을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통해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사회주의 생산을 조직해나가는 것이었다. 이는 곧 기존의 수탈자를 수탈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이 대중권력이 자본주의 무정부성, 무계획성을 극복하고 생산력을 고도로 급속하게 증대시켜 노동자들의 물질적,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생산이 목표였다.

그런데 위에서 레닌은 “이 업무에 대한 쁘띠부르조아적이고 무정부적인 파괴를 목도하고 있는데, 이러한 파괴행위는 부르조아 반혁명의 승리로 귀결될 뿐이다.”라고 하여 우리들에게 쏘련 사회주의 해체와 관련해서 극히 중요한 경고를 하고 있다. 뒤에서 구체적으로 더 살펴보겠지만, “쁘띠부르조아적이고 무정부적인 파괴”가 바로 사회주의를 파괴하는 주범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즉 오늘날 ‘노동계급 스스로의 자기 해방’,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운운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 중앙집중계획, 중앙집중제, 전위정당의 생산과 분배에 대한 지도를 거부하는 각종 무정부주의적 소부르주아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계급 스스로’라는 구호가 노동계급 스스로 세운 중앙집중 국가권력과 대비시키고, ‘아래로부터’라는 구호가 이미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를 대립시키는 비변증법적 형이상학의 관념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좌익 공산주의 소아병’에서도 이처럼 지도자와 대중을 분리시키는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한 바가 있다.

중앙집중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대비시켜서 사고하고, 민주주의를 계급지배의 한 형태로써 사고하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본질에 대해 왜곡하고 피상적인 이해를 하거나 ‘순수 민주주의’로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개념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계급지배의 한 형태라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의 계급 지배 형태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하는 것이다. 레닌의 말에 따르면, “즉 그것은 피착취자를 위한 민주주의, 그리고 착취자를 억압하는 수단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한 계급을 억압한다는 것은 그 계급에 대한 불평등을, ‘민주주의’로부터 그 계급을 배제시킴을 의미”(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하기 때문이다.

결국 다수자인 노동자 계급과 근로민중의 국가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유지, 강화하기 위해서는 정치군사적으로는 반혁명 분자들의 파괴 책동, 자본주의 복귀 시도를 분쇄해야 하고, 경제적으로는 중앙집중화된 대규모 생산을 조직하고 생산력을 고도로 발전시켜야 한다. 또한 사회주의 내에 남아 있는 자본주의의 물적 토대인 소상품 생산을 포위, 고립시키고 사회주의 생산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문화혁명은 필수적이다. 사회주의 내에서의 수정주의는 바로 소생산자들과 그들의 자본주의적 의식인 자유주의 사상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고 사회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전위정당의 정치사상적 지도와 경제관계에서의 지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레닌과 볼셰비키, 이후 스탈린과 볼셰비키가 소부르주아 무정부주의 사상과 투쟁하면서 사회주의의 정치적, 경제적 원칙을 강화해나가고 있을 때, 유고에서는 이와 정반대되는 소부르주아 사회주의 사상이 지배해나갔다. 이른바 ‘시장 사회주의’다. 유고의 시장 사회주의는 생산의 중앙집중화에 맞서 ‘민주화’, ‘권력분산’, ‘노동자 자치’ 등의 구호를 내세우며 ‘노동자 자주관리’를 실시했다.

노동자 자치는 기업관리제도에 있어서의 일대 근본적인 변혁이다. <노동자자치 법령>이 규정한 중요한 조치사항을 보면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적절히 분리한 뒤 민주적으로 선발된 노동자 관리위원회가 기업에 대한 경영권을 행사한다. 둘째, 기업경영권 가운데서 노동자집단의 주도적 지위를 확립하고, 기존 기업 경영자의 지위와 역할을 변경, 기업경영자는 노동자집단의 일개 고용원으로서 더 이상 국가기구의 파견 대리자나 기업 내 정책결정권자로서의 지위를 갖지 않는다. 셋째, 기업 내에 광범위하게 직접민주제를 실시, 기업간부와 노동자위원회 그리고 관리위원회 성원에 대한 민주선거제와 정기윤번제를 시행한다.(김정호 북경 인민대, 「연합노동의 좌절, 연방의 해체」,  수정주의의 전위, 유고 시장사회주의,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노동자의 사상 1호)

유고(정식 명칭은 유고 공산주의 동맹)의 시장사회주의자들은 이미 1940년대 말에 쏘련과 대립하여 ‘사회주의로 가는 유고의 길’을 발표하고, 쏘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전위정당 노선, 사회주의 중앙집중 계획과 대비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전위정당 노선을 약화시키고 자치와 분산성, 권력분산을 옹호해가기 시작했다. 이른바 흐루시초프 수정주의와 ‘유로 꼬뮤니즘’의 정치적, 경제적 원리가 여기서 비롯됐던 것이다. 이후 중국의 ‘시장 사회주의’ 노선도 여기서 비롯됐다.

그런데 유고의 시장 사회주의 노선이 본격화 된 것은 1960년대 이후부터였는데, 유고 내부의 대표적인 시장 사회주의자인 카르텔은 “시장이 바로 노동에 따른 분배의 실험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인인 것이다.”(현대사회주의 비교연구, 최성 엮음, 노동자의 사상, 같은 글)라고 주장했다.

당시 유고 서기장이었던 티토는 이 주장을 적극 지지하면서 시장 사회주의 노선을 펼쳐 나갔다. 유고 내부의 랑코비치 부서기장을 중심으로 이에 반대하여 사회주의 계획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시장 사회주의 노선이 결국 승리했다. 이 시장 사회주의 노선은 한편으로는 유고에서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도록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약화시키고 자본주의적 모순들을 극명하게 나타나게 했다.

첫 번째는, 지역격차의 확대와 민족대립의 재현이다. … 두 번째는, 사회적 투자의 약체화이다. 자금이 정치조직의 수중에서 기업으로 대폭 이전된 결과, 원료개발, 농업개발 등 채산성이 나쁜 산업부문과 교통, 수리, 교육, 보건 등의 사회적으로 필요한 부문의 자금확보가 쉽지 않게 되어 신문 등에서도 그 폐해가 빈번히 취급되어졌다. 세 번째는, 생산의 무정부성이라 불리는 제 현상의 심각화이다. 디노메이션이 인플레를 가속화시켜 데이날의 가치저하가 한층 빈번하게 매스컴에 실리는 만화의 소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 기업은 자주적 결정권을 얻었지만, 동시에 경쟁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경제에 정통한 경영전문가층의 역할이 높아지고 노동자에 의한 자주관리는 오히려 형해화하는 경향이 눈에 띠게 되었다.(같은 글)

기업별 ‘민주성’, ‘독립성’, ‘분산성’, ‘자치’의 강화는 지역별 민주성, 독립성, 분산성, 자치를 강화하도록 하고, 이는 민족별 민주성, 독립성, 분산성, 자치를 강화하도록 하면서 유고 시장사회주의 사회 내부의 모순이 확대 심화되는 계기가 됐다. 이 모순의 심화는 무정부성으로 나타나면서 결국 기업 간 지역 간, 민족 간, 노동자 간 빈부격차와 불평등,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민족 갈등과 대립을 고조시켰다. 이 때문에 “알바니아인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코소보 메트비아 자치구와 크로아티아 공화국 등에서 민족대립이 더 극심하게 나타났다.”(같은 글)

결국 1980년대를 전후로 유고 내에서는 민족주의 노선이 더욱 극심해지고, 이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게다가 일련의 기업 파산과 인플레이션 심화, 13-14%의 실업 증대, 외채 증대, 제국주의 국가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자본주의 모순이 극심하게 나타났다.

유고연방 공산당에서는 이러한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1980년대 중반에 <사회주의 자치정치체제 운행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라는 입장을 채택하고 ‘시장 사회주의 모순’을 극복해보고자 하는 시도를 하였으나, 이미 각 공화국과 기업 단위에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자리 잡고 당의 전위성과 주도적 역할이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노력을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1991년 6월 유고 연방이 해체되면서 자본주의로 최종 복귀했다.

이는 다른 동유럽 국가들이나 쏘련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역시 이러한 길을 걷고 있다.

결국 이를 통해 볼 때도, “노동계급 스스로의 자기 해방”,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노선은 앞에서 말했듯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중앙집중제, 전위당 노선에 반대하여 자치, 분산적 계획, 평의회주의 노선을 옹호하는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쏘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보는 관념적이고 분파적인 주장은 물론이고, ‘스탈린주의 관료주의가 쏘련 사회주의를 해체시켰다’는 주장 역시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에 대해 조금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현실의 사회주의 역사와 정반대되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유고의 시장 사회주의 노선이나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고르바초프주의, 중국의 등소평주의 등은 모두 ‘스탈린주의’ 노선에 반대하여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사회 해체 원인에 대한 규명과 새로운 사회주의 전망을 제시할 때도 확고한 맑스레닌주의 사상에 입각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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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러시아 혁명과 사회주의에 대한 변질적 이해 – 전도(顚倒)된 인식이 낳은 사회주의 전도(前途)의 봉쇄”의 1개의 생각

  • 2016년 8월 15일 9: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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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랑코비치 부서기장의 이름은 처음 들었네요…^^ 이제까지 티토만 줄기차게 들어왔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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