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탄병으로 살고자 했던 홍세화 선생을 추모하며 ㅡ그 삶과 인식의 진보성과 한계에 대해
한 생을 낮은 곳에서 척탄병으로 살고자 했던 홍세화 선생이 안타깝게도 암으로 투병하다 타계하셨습니다.
선생하면 떠오르는 상은 절개와 지조를 품고 있는 지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절개와 지조가 성마른 모습이 아닌 온화한 모습과 잘 어우러져 편안함을 자아냈습니다.
진보진영 내에서조차 숱한 변절과 투항, 출세주의적 욕망 추구와 자산증식욕이 가득찬 아수라 같은 세상에서 지조 있고 절개 있는 삶을 살다 가기는 쉽지 않을텐데, 그 지사의 상과 다르지 않은 삶을 실제 살다가 가셨습니다.
한겨레에 남긴 마지막 칼럼 [부기]에서도 온화하지만 지조와 절개를 굽히지 않는 진보 지식인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불온한 서생의 삐딱한 눈길 탓이겠지만, 진보적 대중지를 표방한 한겨레가 프티부르주아 신문에 가깝게 된 것은 꽤 오래전부터의 일입니다. 법조기자들을 비롯해 출입처에 안주함으로써 초창기에 비해 사회변화를 추동하는 현장에서 한겨레 기자를 만나기가 무척 어려워졌습니다. 그럼에도 한겨레 지면은 저에게 무척 소중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홍세화 칼럼] 마지막 당부: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2023-01-12)
그 칼럼에서 홍세화 선생은 “자연이 인간의 지배, 정복, 소유, 추출의 대상일 때, 인간도 다른 인간의 지배, 정복, 수탈, 착취의 대상이었다.”라며 신자유주의와 탐욕으로 점철된 자본주의 착취사회를 신랄하고 엄중하게 비판했습니다.
한 인간, 특히 정치적 인간을 진정 추모하는 길은 그 정치의 의미와 한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면의 한계도 있었겠지만 선생은 자본주의 착취사회를 엄중 폭로하면서도 그 정치적 결론은 무정부주의에 머무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유를 지향하는 인간이 최악의 날들을 끝내기 위해 자발적 반란을 끊임없이 일으켰지만 결국은 모두 실패로 귀결됐다. 그렇다면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에 마지막 기대를 걸어볼 만하지 않을까. 우군이 된 자연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도 소유주의가 끝없이 밀어붙인 성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 동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성장하는 게 아니라 성숙하는 것이다.
자유를 위해 싸우는 인간은 그 사회와 체제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간을 착취ㆍ수탈할 때 무수한 실패와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그 반란들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해서 저항을 멈추거나 자연의 반란에 기대하거나 “성장이 아닌 성숙”으로 성장과 성숙을 대립적으로 보며 성장을 멈추는 것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성장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집단 노동으로 만들어낸 생산의 성과를 독점하는 자본의 사적소유 체제가 한 쪽에서는 현기증 나는 부와 탐욕과 넘치는 행복을 향유하게 하고 바로 그 때문에, 그들 때문에 다른 쪽에서는 사회불평등과 끔찍한 빈곤과 불행을 안고 사는 자본주의적 성장이 문제입니다.
무정부적ㆍ무계획적이며 자본의 이윤추구가 지상목표인 체제의 성격으로 인해 난개발과 도시의 과도한 집중과 주택난, 환경오염과 농촌의 점차적 폐허화로 불균형ㆍ불균등하게 성장한 결과가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로부터 우리는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가 아니라 《공산당선언》에서 그 원칙으로 강조한 착취적 사적소유관계를 철폐하고 집단적ㆍ사회적 소유로 전환하고 성장이 사회 전체의 물질적, 정신적, 문화적 향유를 가져오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는 자본주의 착취체제를 철폐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 국가권력과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체제입니다.
이러한 혁명적 입장을 고수하고 밀고 나가지 못하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적 전망과 대안이 없는 불모의 무정부주의로 귀결됩니다.
한국사회 진보적 지식인, 활동가, 단체, 조직들은 쏘련과 조선, 쿠바 같은 현존 사회주의를 보며 이 사회 내부의 변화, 변혁을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동유럽과 쏘련사회주의 해체, 생존한 사회주의에 닥친 불운과 곤경, 즉 조선의 고난의 행군과 쿠바의 특별한 시기를 보며 동요하고 변절하고 진보적 운동을 청산했습니다.
사회진보연대 같은 조직은 현실 사회주의가 해체되고 타락한 것이 프롤레타리와 독재와 중앙집중 경제에서 비롯되는 관료주의에 있다고 봤습니다.
일각에서는 사회주의가 되면 국가의 소멸로 나아가야 하는데 국가와 관료기구가 도리어 확장되면서 망하게 되었다면서 이를 “국가사회주의”의 오류로 보았습니다.
명령경제ㆍ지령경제의 문제라며 중앙집중 경제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트로츠키 세력들 일부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했기 때문에 해체는 잘 된 것이고 생존한 나라들도 인민의 반란으로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트로츠키주의 다른 일부에서는 타락한 노동자 국가니 기형적 노동자국가니 하며 관료체제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쏘련과 동유럽의 해체는 실제는 맑스주의(레닌주의) 혁명적 원칙을 버리고 프롤레타리아 인민독재를 약화시키고 제국주의에 사상적ㆍ문화적ㆍ정치적으로 굴복, 투항한 결과며 중앙집중 체제를 약화, 해체시켜버린 결과였습니다.
후르시초프에 시작되고 고르바초프의 이른바 신사고로 정점에 달한 사상의 변절, 자본주의적 개혁ㆍ개방 등으로 인해 나타난 다당제, 사유화가 해체의 원인이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대신 분열된 문제와 사회주의 내부에서 대국주의와 사대주의로 정치적, 경제적 자주성을 손상시키고 훼손한 문제도 심각했습니다.
결국 이로써 전 세계적으로나 국내적으로도 역사적 사회주의, 현존 사회주의를 부정 내지 적대시 하는 좌우익 청산주의, 무정부주의가 판을 치게 됐습니다.
사회주의를 고수하는 나라들을 비판하는 것이 진보의 표상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반북주의가 진보의 마땅한 세계관이 됐습니다.
한겨레 등이 창간 정신을 버리고 다원주의 사상으로 타락한 것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홍세화 선생도 이러한 정치적 흐름을 극복하지 못하고 영향을 받았습니다.
주지하듯《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망명객의 처지를 걷게 됐던 한 지식인의 비운의 삶을 알게 됐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사회 진보적 지식인이 얼마나 야만의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는지 잘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며 몇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홍세화 선생은 프랑스 사회를 똘레랑스라는 말로 정의 내렸습니다. 이는 보통 관용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선생은 용인의 미덕으로 강조했습니다. 인종적ㆍ민족적ㆍ성별 차이 등에 대해 용인하고 이해하는 프랑스 사회의 미덕에 대한 찬사였습니다.
한국사회의 야만적 정치상황에 비해 프랑스의 톨레랑스는 정치적 진보이자 미덕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프랑스 사회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왜곡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망명객을 포용하고 노동자 파업에 관대한 프랑스 사회의 미덕이 발전해온 역사적 출발이 봉건왕과 수천의 봉건 반동배들을 처단하고 민중이 앞장서 투쟁한 대혁명이며 그 이후 격렬한 계급투쟁을 발전시켜온 프랑스의 급진주의 전통의 결과라는 것이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프랑스의 톨레랑스 이면에서 어린이, 여성, 노인 가리지 않고 수만 명의 파리꼬뮌 전사들을 학살하고, 알제리, 마다가스카르 등 아프리카와 베트남 등지에서 수십 만을 잔학하게 학살하고 지금까지 나토의 구성원으로 침략전쟁을 자행한 야수와 같은 제국주의 면모가 은폐될 수 있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한국사회 야만에 비춰 프랑스가 분명 정치적으로 진보한 측면이 있기는 이것이 톨레랑스의 찬미 속에 감춰져서는 안 될 것이고 제국주의 양당 체제의 대들보로 전락한 프랑스 사회당 같은 사민주의에 대한 지지로 귀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더욱더 아쉬운 점은 홍세화 선생이 노동당고문이고 녹색정의당 당원이라는 점인데, 진보정당 활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로써 평소 반북ㆍ반공주의적 관점을 취해 왔다는 점입니다.
홍세화 선생은 《생각의 좌표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는가》라는 책을 썼는데, 참 통찰력 있는 제목이지만 한국사회 진보세력들의 반북주의적 사고가 바로 분단ㆍ국가보안법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홍세화 선생이 그러한 입장을 취했다는 점이 대단히 안타깝습니다.
홍세화 선생은 북‘세습’논란이 가열되고 있을 때 ‘진보의 경박성에 관해’(한겨레신문, 2010-10-10일 칼럼)에서 북‘세습’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북한에 관해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세계는 일단 지극히 부정적으로 형성되는데, 그중 일부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독서나 특별한 경험을 통해 그때까지 형성한 의식을 뒤집는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성찰과 회의, 고민이 생략됨으로써 ‘극도의 부정’이 ‘극도의 긍정’을 낳고 ‘모 아니면 도’ 식의 시각만 남아 섬세함이나 균형감각이 설 자리를 잃는다는 점이다.”
홍세화 선생은 한국사회가 북의 권력 승계에 대해서 “3대 세습”이라며 “극도의 부정”을 하고 이것이 국가보안법을 용인하고 대북 적대 감정과 적대시 정책을 낳는 상황에서 이 “극도의 부정” 과정에 편승하게 됩니다.
야만의 백색테레 체제에서 남민전 전사에 대한 법살을 하고 선생 자신도 이로 인해 망명객이 되어야 했던 상황에서 한국사회에 만연한 극도의 반북적 부정과 싸우고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조장된 반공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이 진보적 지식인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역사적 배경인 분단체제와 그 버팀목인 미제국주의와 그 프로파간다에 맞서 싸우는 것이 진보적 지식인ㆍ활동가의 자세이고 이것이 진보의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북에 대해서는 국가보안법이 강요한 인식에 맞서 자주적으로 사고하고 금기를 뚫고 내재적으로 사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절실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사회 진보적 지식인, 단체들이 북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제국주의와 반공체제가 강요하고 조장한 반북인식에 그대로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특히 남민전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인데 이 조직은 한국전쟁 전후 반공백색테레 체제가 강요한 반공주의, 분단적 관점을 뚫고 전국적ㆍ통일적 관점을 취하면서 1945년 해방 직후의 혁명적ㆍ통일적 관점을 고수, 계승하고 있는 조직입니다.
김남주 선생도 이 조직의 사상을 계승해 민족성과 계급성을 동시에 추구했습니다.
그 점에서 홍세화 선생이 남민전 사상을 계승ㆍ발전시키지 못하고 사민주의에 경도되거나 반북ㆍ반공주의에 경도되어 이른바 한국사회 ‘좌파’의 대표적 사상가가 되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홍세화 선생은 이후 대체로 사민주의는 극복했지만 노동당 유의 반북ㆍ반공 ‘사회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남민전의 진정한 전사가 되지 못한 점은 매우 안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사회 정치지형이 지조 있는 진보적 지식인을 그렇게 가둔 게 아닌가 해서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변절ㆍ투항하지 않고 정치적 소신을 지키고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한국사회, 자본주의를 비판했던 선생의 삶은 우리가 쫓아야 할 고결하고 훌륭한 삶이라고 봅니다.
고인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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