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적(남과 북) 관점을 고수하며 우리의 대지에 단단하게 발 딛고 사회변혁의 길을 개척하자

* 이 글은 지난 7월 15일 제32기 현대사상 세미나 ‘노동자정치’에서 <한국사회, 남북 정치적 통일단결과 변혁 실현의 전망>을 제목으로 발표된 발표문의 후반부이다. 발표문을 수정, 보강하였다.

* 그림은 《강선의 저녁노을》(정영만, 1973)
한국변혁의 보편성과 특수성
러시아와 중국혁명처럼, 한국 사회변혁에서도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가 있다. 한국에서의 변혁 역시 “혁명의 근본문제는 국가권력의 문제임을 인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여전히 이 문제를 간과하는 개량주의, 청산주의, 의회주의가 대세가 되어 있다. 그러나 러시아식 혁명을 그대로 모방하는 교조주의의 문제도 일부 나타나고 있는데, 우리사회의 구체적 조건과 실정에 맞는 변혁전망을 마련하기 위해서 이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마오쩌둥은 《모순론》에서 모순의 특수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교조주의자들의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물질 매개의 운동형태를 취급할 때에는 그것과 다른 운동형태와의 공통점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즉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기초가 되는 것은 그 특수성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과 다른 운동형태와의 질적 구별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 유의해야만 사물을 구별할 수 있다. 어떠한 운동형태이든지 그 내부에는 모두 자체의 특수한 모순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특수한 모순은 그 사물이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특수한 본질을 구성한다….
이 문제에서 우리의 교조주의자들의 오류는 한편으로는 모순의 특수성을 연구하여 상이한 각 사물의 특수한 본질을 인식해야만 모순의 보편성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고, 제 사물의 공통적인 본질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데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물의 공통적인 본질을 인식한 뒤에는 또 아직 깊이 연구되지 않았거나 새로 나타난 구체적 사물을 계속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교조주의자들은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들이어서 구체적 사물에 대한 어떠한 면밀한 연구도 거절하며 일반적인 진리를 허공에서 떨어지는 어떤 것으로 보고 그것을 파악할 수 없는 순전히 추상적인 공식으로 만들어 버려 인류가 진리를 인식하는 이 정상적인 순서를 완전히 부인하며 또 그것을 전도시키곤 한다. 그들은 인류 인식의 두 과정의 상호연관-특수로부터 일반에 이르고 일반으로부터 특수에 이르는-도 모르고 있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을 전혀 모른다.

한국사회는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다. 이는 한국사회 변혁의 보편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여전히 미제국주의가 ‘점령군’으로 있는 자본주의 사회이며 분단사회다. 이북에는 사회주의 체제가, 이남에는 친미반공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이는 한국사회 변혁의 특수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한국사회에는 민족문제 해결과 국가보안법 철폐와 같은 민주주의적 요구, 노동자들의 권리 쟁취와 같은 요구들이 당면 과제로 남아있다. 그런데 한국사회 주요모순을 정파마다 다르게 이해하여 누구는 통일문제에 집중하고 노동운동을 경시하며, 누구는 노동문제에만 집중하고 통일문제에 기권함으로써 운동의 분열상과 협소함을 낳았다. 이는 시급히 극복해야 한다.
한국사회에는 분단모순과 계급모순이 중첩되어 있다. 이 중첩된 문제들을 통일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통해 통일단결된 하나의 전투적 대중정당을 건설하여 각 시기마다 힘을 배분하고 적절하게 배치하여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는 수정주의자들이 대세가 됐지만, 여전히 혁명을 고수하는 세력들조차도 마오가 비판했던 교조주의자들처럼 한국변혁의 특수한 문제를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한국의 교조주의자들 역시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들이어서 구체적 사물에 대한 어떠한 면밀한 연구도 거절하며 일반적인 진리를 허공에서 떨어지는 어떤 것으로 보고 그것을 파악할 수 없는 순전히 추상적인 공식으로 만들어 버려” 한국사회 변혁을 모색하면서도 러시아혁명 식의 쏘비에트 무장봉기 노선을 그대로 답습해버린다. 그런데 우리는 20세기 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을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남과 북이 분단되었고, 북에서는 사회주의가, 남에서는 미제 ‘점령’ 하의 자본주의 체제로 분단된 사회에서 반도 이남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려고 한다. 이러한 한국변혁의 특수성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다보니 변혁을 이야기해도 “순전히 추상적인 공식”을 제출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변혁의 구체성과 경로, 방식을 제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 동안의 [현대사상연구소]가 기획한 <노동자정치> 발표문을 보면 다들 변혁적 관점으로 가득 차 있고 훌륭한 내용들도 많으나 그 모든 발표문들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전부 전국적 관점이 없이 지역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사회주의 전망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같은 민족이면서 사회주의 사회인 북(조선)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무지하면서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심지어는 심각하게 왜곡하고 일방적으로 중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전국적 관점이 없다고 주장하면, 전국의 노동계급의 문제와 민중의 문제, 정치세력의 문제를 다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역적 관점이라는 것은 곧 분단적 관점, 지엽적 관점, 일면적 관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전국적 관점은 남과 북을 통일적으로 보는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남사회에는 해방 이후 미군정과 그 괴뢰 이승만 주구들에 의해 백만에 달하는 진보적 인민에 대한 대량학살이 자행되고 한국전쟁(조국해방전쟁)을 거치면서는 수백만의 진보적 인민들이 살해당하거나 전쟁으로 사망했다. 이승만 정권의 하야 이후 들어선 박정희 군사파쇼정권은 이남을 반공주의 병영체제로 변모시켰다.
1948년 단정단선에 맞서 외세축출 통일조국 건설 열망과 요구는 4.19때 학살 진상규명과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로 잠시 되살아나기도 했으나 이후 박정희 군사파쇼 정권의 국가보안법 백색테러 반공체제로 인해, 분단이 지속되면서 통일적 관점은 사라지고 분단적 관점이 대세가 되었다. 1980년대 이러한 통일운동 내에서 통일적 관점들이 일부 되살아나기는 했으나 국가보안법은 남과 북을 통일적으로 바라보는 운동에 대해 간첩조작, 회합통신으로 부단하게 탄압했다.
한국사회 자주파들은 대개 반외세 통일운동에 종사하고 있으나 변혁적 관점이 미약하다. 반면 한국사회 좌파들은 대개 계급운동에 종사하고 있으나 통일적 관점이 부족하고 심지어 반북적이기조차 하다. 해방 이전의 북의 항일무장 투쟁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1945년 이후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남과 북을 분리, 분열시키고 있으며 북과 북의 지도자들 대해 적대적이거나 비판적이다.
쏘련에 대해 스탈린이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등 좌익반대파들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당의 통일성을 높인 것을 근거로 당내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관료적 당으로 변모했다고 비난하고, 반혁명 테러 분자들을 청산한 것에 대해 잔인한 피의 숙청 운운하며 트로츠키를 옹호하는 세력들이 반쏘운동의 관점에 서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박헌영 일파의 숙청과 종파주의 사건을 척결한 것을 두고 똑같이 근거로 반북, 반김주의가 마치 독자적인 ‘좌파’의 입장인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분열적, 지역적 관점을 극복하고 전국적 관점을 가지기 위해서는 1948년 제주4.3항쟁과 여순항쟁 등 전국적 민중의 항쟁을 피바다로 만들며 실시된 단정·단선(단독정부·단독선거) 이래 분열된 남과 북의 통일을 추구한 운동의 사상과 정신을 이어나가야 한다. 특히 외세를 축출하고 민족 단결과 통일을 추구하는 문제는 남쪽 민중 운동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물론 북의 물리력만 바라보고 심지어 북의 군사력으로 무력통일을 기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평화애호 대신에 군사편향주의, 모험주의적 편향으로 남의 민중 역량을 무시하고 남에서의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정치적 과제를 외면하는가하면 그 반대 편향으로 민주당 특정세력과의 연립정부 운운하는 우경으로 경도되기도 한다.
북은 사회주의 사회다. 그러나 ‘진보진영’ 내에서는 북을 국가자본주의로 보고 혁명으로 타도해야 한다는 세력, 노동자 국가이기는 하나 관료주의적으로 타락한 노동자국가로 바라보고 정치혁명으로 당과 관료권력을 타도해야 한다는 극렬하게 종파주의적인 트로츠키주의 두 분파와 ‘반자본주의 반조선노동당’이라는 양비론 기치로 ‘종북’이라는 용어를 창조한 정치세력들, 반공주의를 내면화 하여 반북적이거나 적대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상당수의 ‘진보’인사, 세력들, 말로는 북의 진보성을 승인한다고 하면서도 “역사적 그리고 국제정치적 악조건과 특수한 필요 때문에 굴절되어 버린 이북의 주체사상”이라며 국가보안법의 눈치를 보며 북의 사상과 역사에 대해 무지한 세력, 북을 같은 동포고 통일의 대상이기에 이해하고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주장까지 다양하게 있다.
이처럼 국가보안법과 이남의 백색테러 반공 병영체제는 이 사회를 변혁하고 진보적으로 발전시킨다는 대다수, 상당수의 ‘진보세력’들을 국가보안법의 인식으로 바라보게 하고 있다. ‘진보세력’들의 인식이 이러니 대중들의 반공주의 인식이야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남미에서 ‘진보인사’를 자처하고 사회변혁을 추구한다면서 반쿠바에 사로잡혀 있고 심지어 진정한 사회주의를 위해 쿠바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실제로는 극우세력, 극우인사라고 비난받을 것이 분명하다. 쿠바사회주의를 모르면서 사회주의 건설을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고, 남미에서 쿠바 사회주의와 연대하지 않고 쿠바 사회주의를 옹호하지 않으면서 진보와 사회주의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남에서 그것도 같은 민족인 북을 모르면서 사회주의 전망을 이야기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사회주의권이 해체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반만 맞다. 동유럽과 쏘련 사회주의는 해체됐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도 북은 생존하였고 심지어 제국주의의 고립말살책에도 불구하고 발전하고 있다. 북을 과학적, 역사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변혁전망을 모색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북에 대해 핵심적인 부분만 말할 것이다. 보다 풍부한 논의는 [민족과 계급]을 보기 바란다. 더 나아가 금기로 되고 있는 북지도자들의 회고록을 보면 더 깊게 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보안법이 왜곡한 북사회에 대한 기본인식을 위하여
북은 수령을 중심으로 통일단결된 사회이다. 북에서는 수령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존경은 이민위천(以民爲天), 즉 인민대중 제일주의와 통일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수령이 인민대중을 믿지 않고 인민대중에 의거하지 않는다면 수령에 대한 인민대중의 절대적인 믿음은 있을 수 없다.

“혁명운동, 공산주의 운동에서 지도문제는 다름아닌 인민대중에 대한 당과 수령의 영도문제입니다.”

수령은 근로인민대중의 최고뇌수이고 통일단결의 중심이다…인민대중에 대한 수령의 영도는 노동계급의 당을 통해 실현된다…노동계급의 혁명위업은 수령에 의해서 개척되고 승리적으로 전진하며 완성되는 수령의 혁명위업이다. 이러한 노동계급의 혁명위업은 하루이틀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가면서 수행해야 할 장기성을 띠는 위업이기 때문에 이 위업을 끝까지 완성하자면 반드시 혁명전통을 빛나게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말하자면 이 위업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 사회주의·공산주의 건설을 위한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을 대를 이어가면서 수행해야 완전히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위업을 완성하려면 혁명전통을 계승해야 한다.(《북한의 사상 -주체의 사상·이론·방법》, 태백)

수령과 당과 인민대중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북에서는 스탈린 사후 쏘련에서 ‘수령’에 대한 중상과 후르시초프 수정주의의 등장이 사회주의를 해체로 몰아갔다고 인식하고 있다. 북에서는 계속혁명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고, 그 핵심 원칙은 당과 대중의 단결이고 혁명의 계승이다.
북에서는 철학의 사명이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자주적인 운명개척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북에서는 “사람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개별적, 생물학적 속성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인간의 본질이라고 하고 있다. 북의 이러한 사상은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군사에서의 자위로 나타나고 있다.
북의 선군정치(先軍政治), 선군사상은 군사 우선주의만으로 협소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김일성이 사망하고 ‘고난의 행군’ 강행군이 시작된 이후 김정일은 자신의 시간과 정열의 대부분을 군에 대한 현지지도에 투자하였다. 김정일이 군을 현지지도 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군을 챙기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두 차례에 걸친 7개년 계획의 실패로 경제에서 시장의 영역을 확대하는 정책들이 도입되고 그것이 지속되면서 사회 전체적으로 다시 ‘사상’과 ‘정치’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었으며, 소련이 몰락하고 사회주의경제권의 붕괴로 인하여 ‘개혁과 개방’의 압박이 가중되고 당조직마저 사상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김정일은 군을 통해 다시 ‘사상’과 ‘정치’를 앞세우려고 하였던 것이며 이것이 바로 ‘선군정치’의 핵심이다…
군부대에서는 김정일의 지시대로 콩 농사, 염소 키우기, 텃밭 이용하여 야채와 채소 키우기 등 식량을 스스로 공급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하고 그 모범을 창출하여 공장과 기업소 그리고 협동농장 등 사회단체들이 따라 배우도록 하였다. 또한 군부대들은 나라 곳곳에 파견되어 발전소와 도로 그리고 토지정리 등 방대한 공사와 건설에서 양어장과 오리공장, 돼지공장 그리고 유원지 등 인민생활에 직절(결)되어 있는 공사와 건설까지도 도맡아 하였다. 이들이 거둔 성과는 곧 김정일의 자력갱생노선이 옳다는 증표가 되었으며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사수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치는 ‘혁명적 군인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이들의 행적과 행보는 외부에서 압박하여 오는 소위 ‘제국주의의 도전’을 막아내는 방패이며 내부에서 자라고 있는 물질적 이기주의의 싹을 자를 수 있는 칼로 자리 매김을 하였던 것이다.(박후건, “DPRK에서의 경제건설과 경제관리체제의 진화”, 도서출판 선인, 2019년 11월 8일)

북의 선군정치는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시기에 형성되었던 ‘혁명적 군인정신’을 바탕으로 사상과 정치를 우선으로 하는 사상을 말한다. 군대는 독립적인 군대가 아니라 당의 철저한 통제를 받아야 하고 군에서 검증되고 훈련된 인사들이 당의 기간대오가 되고 인민대중들에게 복무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유럽과 쏘련 사회주의 해체 직후인 1992년 4월 20일 북에서는 “사회주의 위업을 옹호하고 전진시키자”라는 제목의 ‘평양선언’을 발표했는데, 이 선언에는 발표 당시에는 70개의 국제 공산당 및 노동자당이 서명하였고, 지금은 300개 이상의 당들이 지지 서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평양선언은 동유럽과 사회주의권의 해체에 대한 북의 평가의 일단과 북의 사회주의관이 담겨 있다.

일부 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좌절되고 자본주의가 복귀된 것은 사회주의위업실현에서 큰 손실로 되지만 그것이 결코 사회주의의 우월성과 자본주의의 반동성을 부정하는 것으로는 될 수 없다.
사회주의는 오래전부터 인류가 그려온 리상이며 인류의 미래를 대표하는 사회이다.
사회주의는 본질에 있어서 인민대중이 모든 것의 주인으로 되고 모든 것이 인민대중을 위하여 복무하는 진정한 인민의 사회이다…
일부 나라들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잘되지 않은 것은 그 나라들에서 인민대중의 근본요구에 맞게 사회구조를 수립하지 못하고 과학적 사회주의 리론의 요구에 맞게 사회주의를 건설하지 못한데 그 원인의 하나가 있다…사회주의 위업을 옹호하고 전진시키기 위하여서는 매개 당들이 자주성을 확고히 견지하고 자체의 역량을 튼튼히 꾸려야 한다…매개 당은 자기 나라의 실정과 자기 인민의 요구에 맞는 로선과 정책을 세우고 그것을 인민대중에 의거하여 관철해나가야 한다.
매개 당은 언제 어떤 환경속에서도 혁명적 원칙을 버리지 말아야 하며 사회주의 기치를 높이들고 나가야 한다.
사회주의위업은 민족적 위업인 동시에 인류공동의 위업이다.
모든 당들은 자주성, 평등의 원칙에서 동지적 단결과 협조, 련대성의 류대를 강화하여야 한다.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국제적단결은 필수적이다…
종국적 승리는 사회주의를 위하여 단결하여 투쟁하는 인민들에게 있다.
사회주의 위업은 필승불패이다.

북에서는 생산에 있어서 자력갱생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제국주의 포위 속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하는 북의 사회주의 건설의 조건과 함께 이 원칙이 사회주의 국가 간에도 호혜와 평등의 원칙 위에서 국제주의적으로 단결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력갱생 원칙은 북이 추구하는 자주성의 원리와도 맞다. 북에서는 생산에 있어서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정치사상을 우위에 두면서 기술, 문화를 결합시키고 있다.
‘천리마운동’과 ‘대안의 사업체계’는 북의 사회주의 생산의 주요 사례이다. 스탈린 사후 후르시초프 하에서 쏘련은 공산주의 경제권을 하나로 묶는 코메콘(COMECON, 경제상호원조회의)을 만들어 북에도 참여를 강요하였다. 더불어 후르시초프는 스탈린의 중공업 우선 정책을 비난하며 북에 대해서도 소비재 산업에 집중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북에서는 코메콘 내에서의 공산주의 분업이 자칫하면 발전한 공업국가와 원료를 제공하는 후진국가로 나눠서 자주적인 발전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보고 참여를 거부하였다. 중공업 우선 정책 폐기 요구에 대해서도 기계산업의 발전 없이 쌀이 나올 수 있냐며 중공업을 중심에 두고 농업과 경공업을 병행하는 정책을 고수했다.
이에 대해 쏘련 후르시초프는 북에 대한 원조를 절반이나 삭감하여 전후 복구 이후 경제발전을 모색하던 북의 경제를 난관으로 몰아갔다. 천리마운동은 가중된 정치적, 경제적 위기를 돌파하고 사회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전개된 대중적인 생산운동으로 북의 자력갱생 정신을 대표한다.

외국 그 어디에서도 중공업육성에 필요한 투자자금을 차관의 형태로도 공급받거나 끌어낼 수 없었던 김일성은 투자의 원천을 조선 국내에서 찾았다. 근로대중에게 나라의 어려운 사정을 직접 이야기하고 이들이 생산을 더 하도록 독려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이때 김일성이 직접 방문한 곳이 바로 강선제강소이며, 이곳 근로자들은 김일성의 호소에 호응하여 6만 톤의 생산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강선제강소에서 12만 톤의 철강재를 생산해 내는 기적에 가까운 성과를 내었다.
이것을 계기로 김일성은 근로대중에게 직접 증산을 호소하는 현지지도를 전국적인 단위에서 벌이게 되며 이것이 조선의 경제건설의 상징이라고 하는 ‘천리마운동’으로 발전한다. ‘천리마운동’으로 조선은 5개년계획기간(1957-1961년) 동안 연평균 36.6% 성장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내었다. ‘천리마운동’은 단순한 증산운동이 아니었다. 천리마운동은 처음에는 집단으로 참여하여 증산운동을 벌이는, 즉 근로자 모두가 참여하지만 각각의 근로자가 다른 근로자들의 협동과 협조를 전제하지 않고 개인적 차원의 증산운동을 벌이는 것이었으나, 증산운동을 집단적 차원에서 벌이는 ‘천리마작업반운동’으로 바뀐다…생산과 증산이 집단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여 각 근로자가 집단의 이익을 자기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집단주의(공산주의)형 인간으로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김일성은 이렇게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집단주의(공산주의)형 인간은 교육과 교육을 통해 만들어질(개조될) 수 있다고 믿었다…이를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이들을 교양하고 이끄는 사람이 바로 당원(黨員) 또는 당일군들이며 이들의 임무와 역할인 것이다.(박후건, 같은 책)

‘천리마운동’과 ‘대안의 사업체계’에서도 북은 물질적 혜택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공산주의적 지도와 사상교양으로 대중의 참여와 자발성을 고양시키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 군에 대한 당의 지도를 강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산지도에 있어서도 당의 역할을 강조한다. 특히 당이 생산에 일일이 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지만, (지방)당위원회가 정치적 지도와 사람사업을 집중 전개함으로써 생산이 인민복리에 복무하는 과정인 동시에 집단주의를 원칙으로 공산주의적 사회로의 인간개조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강선제강 노동자들의 전후 복구 과정을 그린 [민족과 운명] <노동계급편>으로부터 <군당책임비서>, <한 당일군에 대한 이야기>, <우리 위원장> 등 조선영화를 보면 북이 생산과정에서 당의 역할과 공산주의 사상의 문제를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북에서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조국통일 3대 원칙으로 고수하고 있다. 북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있다면 상호 체제를 인정하면서 연방제 원칙하에 남과 북이 통일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북에서는 맑스레닌주의의 주체사상의 관계를 계승과 혁신의 관점으로 보고 있다.

우리 당 안에는 주체사상밖의 다른 사상이 있을 수 없으며 또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체사상을 우리 당의 유일사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의 일부 일군들은 주체사상이 우리 당의 유일사상이라는 것을 옳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데로부터 어떤 사람들은 우리 당의 주체사상을 맑스-레닌주의와 대치시키는가 하면 또 계급교양이나 혁명전통교양은 주체사상교양과 별개의 교양인 것처럼 리해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여러 번 강조한 바와 같이 주체사상은 맑스-레닌주의의 모든 혁명적 원칙을 다 계승하고 있습니다. 맑스-레닌주의는 근로인민대중이 간고한 혁명투쟁과정에서 쟁취한 고귀한 혁명적 재부입니다. 인간의 자주성을 완전히 실현하며 혁명을 끝까지 할 것을 요구하는 주체사상이 무엇 때문에 맑스-레닌주의의 혁명적 원칙을 버리겠습니까. 주체사상은 맑스-레닌주의의 사상리론적 재부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력사 발전의 요구에 맞게 그것을 더욱 발전 풍부화시키고 있습니다. 원래 사물의 발전은 계승과 혁신의 두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승과 혁신의 어느 한 면만을 보는 것은 형이상학적 관점입니다. 혁명사상이 발전하는 경우에도 계승과 혁신의 두 면을 가지게 됩니다….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맑스-레닌주의 창시자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비하여 혁명의 주체인 인민대중의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이 훨씬 높아졌으며 사회 발전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이로부터 새로운 력사적 환경에 맞게 혁명의 리론과 방법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제기됩니다.(김정일, 〈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1987년,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이처럼 북에서도 맑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과의 관계에서 여러 가지 논란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체사상이 맑스레닌주의를 계승했다고 보는 관점으로부터 주체사상을 당의 유일사상으로 강조한 이후부터는 맑스레닌주의와 대치시키는 흐름들도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북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부분에 대해 언급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입각점으로 삼아 우리 사회를 변화, 근본 개조시킬 것인가?
자주적 맑스레닌주의를 입각점으로 삼아 우리 사회 변혁의 길을 개척하자

 

남에서 변혁의 특수성은 외세를 척결하고 분단된 민족을 통일하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는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1948년 단정(단독정부), 단선(단독선거)의 시기에 남과 북의 자주적 통일과 해방세상을 염원했던 역사적 요구와 민중의 열망에 기초하는 것이다.
분단된 민족을 통일하는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대단결, 우리민족끼리 사상을 필요로 하는데, 민족문제 해결의 과제 앞에서 계급해방의 문제를 무매개적으로 들고 나오면서 민족의 단결을 계급화해로 간주하는 좌익편향도 있다.
남에서 독자적인 선변혁을 하고나서 후통일로 나아가자는 노선은 쏘비에트형 혁명노선이다. 이 변혁노선은 통일문제를 변혁과정에 전면적으로 배치하지 않고 실업이나 빈곤, 공황 등 이남 자본주의 내부 모순의 증대로 남쪽의 노동자계급이 중심이 되어 민중이 참여하는 변혁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남쪽에서의 변혁 이후 북과의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남에서 변혁이 이러한 보편적인 발전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점을 전면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는 앞에서 말한 쏘비에트형, 당면한 유럽혁명의 과제와 같은 보편적인 수준의 관점밖에 없고 이남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 특수한 변혁의 조건과 경로에 대한 모색이 없는 것이다.
객관적 발전 수준으로만 보면 한국변혁은 이미 높은 수준의 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 혁명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폭로와 사회주의 전망에 대한 풍부한 선전이 필요하다. 그러나 변혁의 궁극 목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조건이 필요하고, 거기에 맞는 올바른 경로와 정확한 수단이 필요하다. 국가보안법을 철폐하지 않고 북에 대한 반북적 관점이 팽배한 상황에서 변혁적 전망을 가질 수는 없다. 동유럽과 쏘련 해체 원인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우리의 정치적 교훈으로 삼아야 하지만, 동유럽과 쏘련 모델을 그대로 우리의 대안모델로 삼을 수는 없다.
국가보안법이 만든 북에 대한 왜곡된 영상, 즉 지배계급의 반공주의 사상을 극복하지 않고 남에서 사회주의 전망을 운운하거나 인민대중이 사회주의를 이남 자본주의를 대신하는 구체적인 자신들의 대안적 전망으로 삼을 수는 없다.
스탈린은 “민족이란 공통의 언어, 영토, 경제적 생활, 그리고 공통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구성에 기초하여 형성된,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인민의 안정적 공동체”라고 규정을 내렸는데, 이는 민족에 대한 과학적인 정의다. 그러나 이 정의는 일반적인 정의다. 우리 민족의 문제는 경제생활의 공통점이 상반되는 사회주의 북과 자본주의 남의 민족적 통일이라는 특수한 문제를 안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공통의 영토가 없이 세계적으로 나눠져 있다 하더라도 남과 북, 해외동포가 3자연대로 민족문제 해결에 총단결 해야 한다. 
외세를 축출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남과 북이 (연합)연방제로 통일해야 한다. 서로 간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통일이 가능하냐는 제기는 민족문제 해결의 과제 앞에서 계급문제 해결의 과제를 무매개적으로 들이미는 것이다. 중국의 ‘일국양제’처럼 체제가 다르다 해도 민족적 통일과 공존이 가능하다.
남과 북의 통일은 계급혁명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모순의 해결과정이기 때문에 통일만으로 계급해방이 성취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단을 척결하고 남북통일을 가로막는 제국주의를 이 땅에서 몰아내지 않고 계급해방으로 곧바로 나아갈 수는 없다. 통일이나 통일과정은 궁극적 목표인 변혁으로 이행하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과정이 될 것이다. 물론 선통일 후변혁의 과제라면서 노동자계급의 노동3권 쟁취나 삶의 진전과 복지의 증진, 제반 노동악법, 반민주 악법 철폐 문제를 뒤로 미루는 것은 대기주의적이고 우경적인 관점이고 통일의 주체인 노동계급의 사상적 고양과 통일을 외면하는 우편향적 태도다.
국가보안법 철폐, 평화협정 체결, 미군철수, 미일한 전쟁동맹 해체, 노동자 생존권 보장과 노동3권 쟁취, 민주주의 구현, 민중의 전면적 복지사회 구현 같은 당면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급진 민주권력이 들어서야 한다. 물론 이 급진 민주주의 권력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궁극목표를 곧바로 전면 실현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핵심 산업 국유화와 은행 국유화 등 사회주의 요구의 실현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이는 주체역량의 준비 정도, 노동자와 민중의 요구 정도, 객관정세 등에 달려 있다.
남과 북의 자주적 통일을 달성하는 문제는 외세, 즉 제국주의를 척결하는 과제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자본주의는 상품생산이 지배적인 체제로 내부 노동자 인민의 착취와 억압에 바탕을 둔 생산양식을 의미한다. 반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독점자본이 생겨나고 독점자본의 요구, 지향에 따라 다른 나라, 민족의 이권에 개입하고 내정에 간섭하며 정치적, 경제적, 금융적으로 지배하고 경제적으로 초과이윤을 수취하고 수탈하며 때로는 군사적 침략을 자행하는 관계의 문제다. 자본주의가 다른 나라와 관계를 맺지만 기본적으로 한 사회의 독자적 생산양식의 문제라면, 제국주의는 다른 나라, 민족, 민중에 대한 억압 및 지배, 침략이 본질이다.
이 점에서 우리의 역사적 문제이자 극복과제인 반외세는 다른 나라를 배척하는 배외주의, 인종주의 의미가 전혀 아니라 제국주의의 간섭과 침략, 지배를 반대하고 자주적 관계, 호혜평등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과 러시아를 제국주의로 규정함으로써 이 땅에서 반제과제 실현을 혼란으로 몰아가는 흐름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다. 중국, 러시아 제국주의론은 부르주아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 신좌파, 트로츠키주의자들, 심지어 맑스레닌주의를 자처하는 세력들까지 합세하여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미제와 일제가 우리와 한반도, 동북아에서 자행해 왔고 지금도 자행하고 있는 제국주의 폭력과 작태에 비춰볼 때 러시아, 중국이 우리에게 어떤 제국주의 면모를 보였는가? 러시아, 중국이 우리를 침략하고 억압했는가? 초과이윤을 수취했는가? 원료자원을 약탈했는가? 금융적으로 우리를 수탈하고 자본수출을 대가로 특혜와 이권에 개입했는가? 내정에 간섭하고 인권을 말살하고 쿠데타를 배후조종했는가?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전쟁을 책동하는가? 인권문제를 빌미로 북에 대한 제재와 고립말살에 앞장섰는가?
중러 제국주의론은 미제와 일제, 미일한 전쟁동맹, 반북적대와 말살을 막아야 하는 반외세의 전국적 과제에 비춰볼 때, 미·일제국주의 침략 약탈 지배상을 은폐, 왜곡, 전가하고, 지배와 간섭 척결이라는 과제를 혼돈케 하는 제국주의 프로파간다의 일환이다.
남과 북의 통일을 위해서, 이남에서 외세 척결과 철저한 민주혁명을 위해서는 이남 내부에 분열된 운동의 통일과 단결이 필수적이다. 정파의 단결은 민중 단결의 기초이다. 진보적이고 통일전선적 태도로 분열된 운동이 단결해야 한다.
이남에서 자주통일과 변혁을 추구하는 세력들이 견지해야 할 사상은 맑스레닌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하면서 자주사상으로 인식을 확장하는 것이다. 북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전제하고 맑스레닌주의의 역사적 제한성을 주장했다고 해서, 맑스레닌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무장하지 않고 도외시 한다면, 이는 착취사회, 계급사회에서 우리의 철학적 사명을 소홀히 하고 정치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된다.
맑스레닌주의의 원칙과 방법, 체계를 고수해야 한다. 계급사회에서 지배계급이 내세운 이데올로기적 무기인 관념론에 맞서 전투적 유물론에 철저하게 입각해야 한다.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이라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원리를 분명히 하지 않고, 계급투쟁 관점을 중심에 세우지 않고 맑스레닌주의를 경시, 나아가 부정한다면 이는 우경으로 빠지게 되는 길이다. 이는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을 전제했다는 북의 사상도 온전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편협한 입장에 빠지게 된다.
《민족과 계급》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세워야 한다. 민족문제를 중시하면서 계급문제를 경시하면 과학적 관점이 결여된 것이고, 계급문제를 중시하면서 민족문제를 경시하면 역사적 관점이 결여된 것이다. 민족문제를 중시하는 사람, 세력들은 우경적 편향을 경계하고, 계급문제를 중시하는 사람, 세력들은 좌경적 편향을 경계해야 한다.
교조화된 맑스레닌주의는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철학사상이 될 수 없고 우리가 안고 있는 특수한 역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맑스레닌주의 원칙을 세우면서도 이를 우리의 구체적 역사적 조건, 풍토 속에 뿌리 내려 토착화, 현지화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자주적 맑스레닌주의가 우리의 세계관의 출발이자 정치적 입각점이다. 이것이 우리의 계승과 혁신의 원칙이자 면모가 돼야 한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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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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