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고전읽기]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3장, 4장(끝)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

 

일시: 2022년 10월 11일(화) 19시

* 세미나는 격주 화요일에 합니다.

* 직접 참여하기 어려운 동지들을 위해 영상으로도 세미나를 같이 합니다. 영상으로 참여하실 분들은 안내 전화로 참여 의사를 밝히면 온라인 세미나 링크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참가 문의: 010-3398-0248

 

오늘날 횡행하는 잡다한 개량주의자들이 들으면 격분하거나 소스라치게 놀랄 소리지만,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입니다. 혁명이 역사발전과 인류의 진보를 끌어온 주된 동력입니다.

이는 승리한 혁명은 말할 것도 없고, 승리 이후에 패배한 혁명, 일시적인 승리를 전취한 적이 없더라도 혁명적 요구를 내건 투쟁은 항상 역사를 진보적으로 끌어간 기관차였습니다.

제국주의의 고립과 포위말살 공세에 맞서 싸우는 조선, 쿠바, 중국 같은 진보적 인류의 기지들, 전취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영웅적으로 투쟁했지만 쓰라리게 패배했던 쏘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역시 반파쇼 투쟁과 식민지 해방과 사회주의 위업으로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복지와 민주주의 발전, 해방의 전망 등으로 역사의 기관차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심지어 이들 나라들과 인민들은 패배를 통해서도 우리가 확고하게 벼려야할 혁명적 원칙과 버려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쓰라린 교훈으로 삼도록 하고 이로부터 우리의 나아 갈 길을 제시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 제국주의 억압을 당하는 민족들 역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요구와 전망만으로는 착취와 억압을 철폐할 수 없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할 때만이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도 1945년 해방 이후의 격렬한 민족적, 계급적 투쟁들, 1980년대 광주에서의 학살로부터 시작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서는 피어린 혁명적 투쟁들로부터 역사가 진보하고 발전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깊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번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3장, 4장(끝)은 혁명적 투쟁이 아니라 질서당으로 비롯되는 반동 복고파들의 권력 장악기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맑스는 봉건 반동 복고파 역시 봉건제로의 복귀를 열망하나 실제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군주정을 타도하는데 기여하도록 역사의 선고를 받은 그들은 자신이 싫어하는 공화정을 유지해야 하는 역사적 운명에 처해 있었다”고 반동파들의 모순적 처지에 대해 분석합니다. 이에 따라 이들 반동파들은 프랑스 자본주의 발전 속에서 역사의 진보성을 잃어버린 부르주아 세력과 반동화된 ‘공화정’을 수호하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행보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을 날카롭게 폭로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대혁명기 자코뱅의 영광스러운 반봉건 투쟁의 진보성을 상실하고, 노동자계급의 투쟁 앞에서 마침내 1848년 6월 반동 학살자로 전락한 부르주아들과 역사변화 속에서 ‘봉건제’로 역사를 거스를 수 없고 ‘공화정’을 비호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봉건 질서당, 이들이 내세운 보나빠르트와의 대립과 충돌, 화해의 성격을 맑스는 이렇게 분석합니다.

“오를레앙파(입헌군주파)와 정통왕조파 연합의 왕정복고에 대한 갈망에 반하여 보나빠르트는 그의 실제권력의 원칙 즉 공화정을 표방하븟이, 보나빠르트트의 복고에 대한 갈망에 반대하여 질서당은 공동통치권, 즉 공화정을 표방하였다. 정통왕조파는 오를레앙파에 반대하여, 그리고 오를레앙파는 정통왕조파에 반대하여 현상유지, 즉 공화정을 표방한다. 질서당의 이 모든 분파는 각기 자신의 왕과 자신의 왕정복고 형태를 가슴에 품고서 상대방의 찬탈이나 등용에 대한 염원에 대비한 것으로써 부르주아지의 공동통치 즉 중도적이고 특정주장을 유보한 형태인 공화정을 서로 주장한다.”

이것이 프랑스에서의 제 계급 간의 격렬한 투쟁과 화합, 갈등을 거치며 진보적인 노동자계급을 압살하고 대통령과 행정권력을 중심으로 ‘3권 분립’으로 나타나 오늘날 보편화된 부르주아의 통치 형태인 공화정의 출생의 비밀입니다. 이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부르주아 공화제는 부자들과 자본가들을 위한 부르주아 계급독재라는 정치적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이 땅의 공화제 역시 그 출생의 공공연한 비밀은 외세에 굴종한 채 민족을 배신하고 민중의 피바다 위에서, 민중의 해방 열망을 짓밟고 확립된 것이었습니다.

맑스는 또한 노동자계급의 6월 봉기를 반대하고 나섰지만 여전히 자신들을 ‘사회주의’라고 참칭하는 ‘민주파’ 소부르주아 기회주의 세력들의 질서당 반동파에 맞서는 의회 내부의 투쟁들이 “순수 이성 내의 반란”이라고 조소를 보내고 있습니다.

맑스는 1848년 6월 봉기의 패배와 부르주아의 권력 장악과 짝퉁 나폴레옹인 루이 보나파르트를 내세운 질서당 복고파들의 권력 장악이라는 반동적 후퇴와 패배의 시기에 오히려 혁명에 대해 말합니다.

맑스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라는 교훈을 이끌어냅니다.

맑스는 “보호관세의 폐지”, “국가 예산의 조정”, “외국산 육류와 곡류의 자유로운 도입”, “볼떼르주의”, “언론의 자유, 결사권, 보통대중교육”, “국가의 지원을 받는 협동조합”, “누진세”, “상속의 제한”, “대공사의 국영화” 등이 ‘사회주의’라고 하는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 세력들에 대해 “혁명이 진행되면 제 여건이 신속이 성숙되므로 온갖 색조의 개혁파와 중산계급의 가장 온건한 주장들도 가장 과격한 혁명파의 깃발인 적기의 주위에 모이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혁명적 충돌을 제거함으로써, 모두에게 최상의 세계라고 공표”하는 사이비 ‘사회주의’ 세력들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자유롭고 역사적인 자기운동으로 더 발전하지 못하는 한에서만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론적 표현이” ‘공론적 사회주의’였는데, 이들 무정부주의적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은 “공론적 사회주의의 절충가들이거나 연금술사들”이라고 주장합니다.

맑스는 이러한 잡다한 가짜 ‘사회주의자’ 대신, “혁명적 사회주의는 혁명의 영속성, 혁명계급의 독재,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독재를, 계급차별의 전면적 폐지, 계급차별을 낳는 모든 생산관계의 폐지, 이러한 생산관계에 부합하는 모든 사회관계의 폐지, 이러한 사회관계를 야기하는 모든 사상의 혁명화로 가는 불가피한 이행경로라고 선언한다”라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러한 맑스의 무정부주의적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에 대한 엄중한 비판은 수억, 수십억 인류가 역사적 진보를 위해 분투하고 지금도 분투하고 있는 현실의 사회주의 국가와 민족해방투쟁에 대해 부정하거나 경시하면서, “자유인들의 연합체”니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니 “참여와 자치와 자율”이니, “분권화”니 하며, 오늘날 21세기에도 횡행하는 (범)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자’들, 사이비 ‘사회주의자’들을 그대로 연상시킵니다. 이러한 ‘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가 (이제) 자유롭고 역사적인 자기운동으로” 확고하게 발전한 21세기 현대 자본주의에서, 그것도 맑스와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유포되고 있다는 것이 더욱 더 심각합니다.

맑스의 고전을 자구 그대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실천적 관점 속에 왜곡하지 않고 더 열심히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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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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