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민주주의ㅡ④] 4. 인민대표대회제도의 회복과 전면적 발전: 개혁개방 이후

김정호 북경대 박사/전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자문위원

 

제1장 중국 ‘인민대표대회’의 역사

1. 인민대표대회의 전사(前史)

2. 인민대표대회제도의 확립

3. 인민대표대회제도의 시련 (지난 호)

 

 

4. 인민대표대회제도의 회복과 전면적 발전: 개혁개방 이후

 

문화대혁명이 국가와 인민에게 가져온 재난은 엄중하였으며, 인민대표대회제도에 대한 파괴 역시도 유례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모택동 주석이 일정하게 임표와 강청 등 4인방을 견제하고, 주은래 등 노(老) 혁명가들이 투쟁을 지속하였기에 인민대표대회제도는 뿌리를 보존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향후 회복 발전할 수 있는 희망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1976년 10월 강청 반혁명집단의 권력찬탈 음모가 최종 분쇄된 후, 오랜 기간 엄중한 짓밟힘 때문에 이름만 남게 된 인민대표대회제도는 중앙에서 지방까지 속속 회복되기 시작했다. 1978년 12월 개최된 중공 제11기 ‘3중 전회’는 사회주의 민주주의의 발전과 사회주의 법제도를 완비한다는 기본 방침을 확립하였다. 이는 인민대표대회제도의 새로운 건설과 발전을 위한 큰 방향을 제시한 셈이다. 그 후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지방의 각급 인민대표대회는 헌법과 법률 규정에 따라 충실히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각 방면의 사업은 착실한 성과를 거두어 나갔다.

 

1) 중공 제11기 ‘3중 전회’와 민주 법제의 회복

 

1978년 12월 18일~22일 수도 북경에서 중국공산당 제11기 제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약칭 ‘3중 전회’)가 개최되었다. 이 전체회의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정반(正反) 양측면의 역사적 경험을 총괄하면서 문화대혁명의 좌편향을 전면적으로 교정할 것에 대한 결정을 하였다.

“계급투쟁을 중심 강령으로”, “프롤레타리아독재 하의 영속혁명”과 같은 잘못된 구호를 과감히 중단시켰다. 모택동사상이 원래 간직하고 있던 과학적 요소를 정확하게 파악하는데 대한 의의를 충분히 긍정하였으며, 그 직전 진행된 ‘진리기준’ 문제에 관한 토론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였다.*

* 진리 기준에 관한 ‘대토론(大論)’은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개인숭배를 반대하고 ‘좌경’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전국적으로 전개된 사상해방 토론을 지칭한다. 1976년 10월, 10년간의 문화대혁명이 끝났지만 당내에선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좌경 방침을 고수하면서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을 가로막고 있었다. 화국봉 주석은 10월 26일 “마오 주석이 승인하고 말한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정치국원 왕동흥은 이를 1977년 2월 7일자 <인민일보> <해방군보> <홍기(紅旗)> 사설에 “문건을 잘 학습해, 요강을 붙잡자”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우리는 마오 주석이 내린 모든 결정을 단호히 수호하고, 마오 주석의 지시도 변함없이 따라야 한다.”라고 사설은 주장했다. 이로써 ‘두 가지 무릇(凡)’이라는 지도사상이 출현했다. 이 지도사상은 사실상 문혁의 과오를 견지하고, 과거의 개인숭배를 옹호하면서 새로운 개인숭배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무릇’은 많은 사람들의 저항을 받았다. 등소평은 1977년 4월 10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반드시 대대로 정확하고 완전한 모택동 사상으로 우리 전체 당과 전군, 전인민을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정확하고 완전한’이란 용어를 쓴 것은 다름 아닌 ‘두 가지 무릇’을 겨냥한 것이었다. 5월 3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등소평의 견해를 긍정하는 서신을 각 기관에 전달했다.

1978년 6월 2일 등소평은 전군 정치공작회의에서 “실사구시는 모든 것을 현실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이론과 실천을 결합하는 것이야말로 모택동 사상의 출발점”이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다시 한 번 ‘두 가지 무릇’에 대한 비판을 가한 셈이다.

1978년 5월 10일 호요방의 지도하에 있던 중국공산당 중앙당학교 내부 간행물 <이론동향> 60호에는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제목의 글이 발표되었다. 다음날인 1978년 5월 11일 <광명일보>가 특약 논설위원의 서명으로 이 기사를 재게재했다. 이 글은 진리를 검증하는 기준은 ‘사회적 실천’일 뿐이며, 이론과 실천의 통일은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주장하면서 ‘두 가지 무릇’ 관점을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이 글은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진리의 기준에 대한 대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반년 이상 전국 주요 신문과 잡지에 진리의 기준과 관련된 찬반 양면의 수많은 기사가 실렸다. 결과적으로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사상은 대다수 인민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이 토론은 곧 이어 개최될 당의 제11기 3중 전회를 위한 이론적‧사상적 준비를 하였다. 오랜 개인숭배와 교조주의를 바로잡고 사상노선을 바로잡는 데 있어 이 논쟁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전체회의는 ‘두개의 무릇’ 노선을 비판하면서 “사상을 해방시키고, 실사구시에 입각하여, 일치단결로 미래를 향한다(团结一致向前看)”는 지도방침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 민주주의의 발전과 사회주의 법제 건설을 완성하고, 당 사업의 중점을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로 이전한다는 기본 방침을 확정하였다.

 

▲역사적인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 전회 모습

전체회의는 우선 인민민주주의를 보장하기 위해선 반드시 사회주의 법제를 강화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법제를 통해 민주주의를 제도화하고, 이러한 제도와 법률이 안정성, 연속성, 권위를 갖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의지할 법이 있고(有法可依), 일단 법이 만들어지면 반드시 의지해야 하며(有法必依), 법의 집행은 엄숙해야 한다(执法必严). 위법은 반드시 추궁되어야 한다(违法必究)고 하였다.

문혁을 총결산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자리에서 ‘법제’를 강화하는 방침이 채택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문혁과 같은 혼란이 발생했던 근본원인이 신생 사물이라 할 수 있는 사회주의가 아직 중국에서 ‘제도’로 공공화 되지 못했던 탓이 크다는 반성에 따른 것이다. 이 때문에 법제의 강화를 통한 제도화의 길을 모색하였으며, 이 같은 방침은 이후 실천이 증명하듯 올바른 방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법제는 당연히 인민대표대회의 업무와 관련된다. 따라서 법제 강화를 위해선 앞으로 입법사업을 전국인민대표대회 및 그 상무위원회의 중요한 의사일정으로 배치할 수밖에 없다. 검찰기관과 사법기관 역시도 독립성을 유지하고 법률과 제도, 인민의 이익, 사실과 진상에만 충실하여야만 한다. 모든 인민이 법 앞에서 평등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하며, 어떤 개인도 법률을 초월하는 특권을 누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들이 이어졌다.

중공 제11기 3중 전회는 신중국 성립 이래 장기간 존재했던 ‘좌편향’ 오류의 속박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중국공산당은 자신의 지도사상을 바로잡고 진정한 맑스주의에 입각한 사상•정치•조직노선을 다시 확립할 수 있게끔 되었다. 3중 전회가 확립한 과학적 맑스주의노선의 인도 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인민대표대회제도의 건설은 이제 새로운 역사적 발전 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3중 전회가 끝난 후 1980년 8월 31일 등소평은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당과 국가 영도제도의 개혁>에 관한 연설을 통해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 지도체제 개혁의 필요성, 개혁 원칙, 방향 및 내용에 대한 체계적인 구상을 내놓았다. 이는 중국 정치개혁과 관련된 강령적 문건이기에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문건에서 등소평은 당과 국가 영도제도의 개혁은 ‘제도건설’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과거 발생했던 당과 국가의 각종 오류는 일부 지도자의 사상‧작풍 과 관련된 측면이 존재한다. 하지만 조직 및 사업체계와 관련된 측면이 더욱 근본적이다. 제도가 좋으면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이라도 제멋대로 행동할 수 없고, 반대로 제도가 나쁘면 좋은 사람도 정반대로 향할 수 있다. 비록 모택동과 같은 위대한 인물일지라도, 그가 일부 잘못된 제도의 영향을 받았기에 당과 국가 및 그 자신 모두에게 불행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평가에 기초하여 제도방면에서 중요한 개혁들이 제시되었다. 헌법을 더욱 조밀하고 정확하게 만들며, 각급 인민대표대회제도를 보완하고 강화할 것이 강조되었다. 중앙에 고문위원회를 설치함으로써 원로 동지들이 지도와 감독, 고문 역할을 수행하게끔 배려하였다. 문란해진 국가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국무원에서 지방의 각급 정부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사업체계를 수립한다는 계획이 제시되었다. “지금부터 무릇 정부 직권에 속하는 업무는 모두 국무원과 지방 각급 정부에서 논의 결정하여 문건을 공표하고, 더 이상 당 중앙과 지방 각급 당위원회가 지시를 발표하거나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한다는 것이다.

* 등소평, “당과 국가 영도제도의 개혁”, <등소평문선>제2권, 인민출판사 1994년판, p.339.

앞으로 각 사업단위들은 보편적으로 ‘직원대표대회’ 혹은 ‘직공대표회의’를 설치하여 자기 단위의 중대 문제에 대해선 스스로 토론하고 결정토록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각종 ‘사업단위’(단지 ‘기업’만이 아닌 학교‧공공기관 등이 포함됨) 차원의 ‘직원대표대회’가 노동조합과 같은 이익조직이 아니라 사회주의 민주주의라는 차원에서, 그리고 사회주의 제도의 일부분으로서 거론되고 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당과 관련해선, 당 위원회가 진정으로 집단지도체제를 실천함을 통해 개인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않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당 위원회 내부에선 명확한 분업체계와 개인 책임제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였다. 사회주의국가에 있어 당 내부의 민주주의는 중요한 구성 요소라 할 수 있다. 이로부터 국가 전반의 민주주의를 인도할 수 있는 동력이 나온다. 이렇게 볼 때 당내 민주주의의 실천과 관련하여 당 위원회의 ‘집단지도체제’ 원칙의 수립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계속해서 사회주의 민주주의와 법제사상의 지속적인 심화과정에 대해 좀 더 언급하기로 하자. 이 부분은 개혁개방 시대에 있어 인민대표대회제도의 발전과 관련된 이론적 기초가 된다. 제11기 3중 전회 이후 중공 중앙은 일련의 회의를 개최하여 후속 문건을 발표하였는데, 이를 통해 사회주의 민주주의 및 법제의 지위와 역할에 관하여 논술하였다.

▲중국철로공정그룹(中国中铁) 제2기 4차 직원대표대회 예비회의 모습(2018년2월7일)

1981년 6월 27일, 제11기 6중 전회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 (이하 약칭 <결의>)를 통과시켰다. <결의>는 “우리 당의 새로운 역사 시기의 분투목표는 국가가 점진적으로 현대적 농업과 산업, 현대적 국방과 과학기술을 갖춘, 고도의 민주주의와 문명을 구비한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결의>는 또한 점진적으로 고도한 사회주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정치제도를 건설하는 것은 사회주의혁명의 근본임무 중 하나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건국 이래 이 임무를 중시하지 않았기에 ‘문화대혁명’이 발생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 제공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뼈아픈 교훈이며, 반드시 민주와 집중의 원칙에 입각하여 각급 국가기관의 건설을 강화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처럼 문화대혁명에 대한 역사적 교훈으로부터 도출된 ‘사회주의 민주주의 건설’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기에, 우리는 중국공산당의 이 같은 결심을 결코 가볍게 대할 수는 없다. <결의>는 계속해서 강조한다.

각급 인민대표대회 및 그 상설기구(상무위원회를 지칭)는 권위 있는 인민권력기관이 되도록 해야 하며, 기층정권과 기층 사회생활에 있어 인민에 의한 직접 민주주의를 점차 실현해야 한다. 특히 ‘직원대표대회’나 ‘촌민위원회’처럼 도시 및 농촌의 근로대중 스스로에 의한 기업과 마을의 민주적 관리를 중점적으로 발전시키도록 해야 한다.

▲농촌 자치를 실행하고 있는 ‘촌민위원회’의 선거 모습

 

필히 인민민주주의를 공고이하고 헌법과 법률을 완성함으로써, 어느 누구도 이를 엄격히 준수하고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되게끔 해야 한다. 사회주의 법률제도는 인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생산과 업무 및 생활 질서를 보장하며, 범죄행위를 제재하고 계급의 적으로부터 파괴행위를 타격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야 한다. ‘문화대혁명’과 같은 혼란한 국면은 어떤 범위 내에서라도 결코 재연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의>는 강조하고 있다.

당 규약에 따라 중국공산당의 정식 당 대회는 5년마다 한 번씩 열린다. 1982년 9월 중국공산당 제12차 당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대회에서는 사회주의 물질문명 건설과 정신문명 건설 모두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킴을 통해서 보장되고 지지되어야 함을 명시하였다. 사회주의 민주주의는 또한 정치‧경제‧문화‧사회생활 각 방면으로 확대되어야 하며, 기업과 사업단위의 민주적 관리를 발전시키고 기층 사회생활의 대중적 자치제도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1987년 10월 중국공산당 제13차 당 대회는 정치체제 개혁을 진행하지 않으면 경제체제 개혁 또한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정치체제 개혁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점진적으로 완성시키며, 사회주의 법률제도를 온전히 갖추어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관료주의 현상과 봉건주의 잔재의 극복을 위한 노력을 강제함으로써 경제체제 개혁과 대내외 개방을 촉진시켜야 한다. 정치개혁의 장기적 목표는 고도한 민주주의의 실현과 법률제도의 완비이며, 이를 통해서 효율이 넘치고 활력이 충만한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건설하도록 하는 것이다. 단기적 목표는 사회 각 방면의 적극성을 불러일으키는데 유리한 지도체제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992년 10월 제14차 당 대회는 중국의 정치체제 개혁의 궁극적 목표를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민주정치의 건설이라고 규정하였다. 당시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 해체라는 국제적 대사건을 목격한 상황에서, 결코 서방의 다당제와 의회제를 도입하려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 이를 위해선 서구식 의회제도가 아닌 인민대표대회제도를 진일보 완성하여야 하며, 인민대표대회 및 그 상무위원회의 입법과 감독기능을 강화하고 인민 대표의 역할을 더욱 잘 발휘토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1997년 9월 제15차 당 대회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반드시 법제를 완비하는 것과 긴밀히 결합하여야 하며, 법치를 실현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민주주의와 법률제도 건설이 ‘법치’의 실현이라는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연관지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법치란 무엇인가?

인민민주주의 하에서 ‘법치’는 광범위한 인민대중이 당의 영도 하에서 헌법과 법률의 규정에 따라 각종 경로와 형식을 통해 국가 업무, 경제‧문화‧사회 사무를 직접 관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 법치는 국가의 모든 사업을 법에 따라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민주주의의 제도화와 법제화가 실현됨에 따라, 기존과 같이 제도와 법률이 몇몇 지도자들의 교체에 따라 덩달아 변화하지 않게끔 된다.

이처럼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정치를 벗어나는 문제가 중국에서는 문혁이후 일관되게 강조되어 왔다. 그리고 실제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법제 작업 역시 꾸준히 전개되어 왔음을 우리는 뒤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요즘 한국과 서구 언론들이 ‘시황제’ 운운하면서 중국사회를 여전히 개인독재나 우상숭배가 만연하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그간의 중국 내부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혹은 매우 의도성 짙은 행위라고 판단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과거 문혁에 대한 교훈에서 얻어진 법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법치의 필요성과 의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법치는 또한 사회주의시장경제 발전의 객관적 요구이자 사회주의 문명 진보의 중요한 표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법치의 실현이 이루어질 때라야 비로소 국가의 장기적 안정이 보장될 수 있다고 본다.

‘법치’의 의의를 이처럼 사회주의 건설의 측면과 결합해서 중시하고 있다는 점에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혁과정에서 모택동과 같은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해 국가체계 전반이 흔들렸던 역사적 교훈은 단지 그 한 측면일 뿐이다. 위 <결의>에선 새로운 측면이 추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사회주의시장경제의 객관적 요구”라고 하는 점이 그것이다. 이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이 반드시 법치를 실현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필연성을 보여준다. 현대 시장경제는 법제가 완비된 국가에서만 발전할 수 있으며,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시장경제는 중국 법제의 완비를 강제하는 새로운 동력으로서 작용한다.

잘 알다시피 상품경제의 발전은 근대 서구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동력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유럽 계몽사상가들은 천부인권설, 사회계약설, 법의 정신 등과 이론화 작업을 통해 상품교환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사실상 관념적으로 반영하였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권리와 존엄성에 관한 확고한 전통이 형식적으로나마 서구사회에 비교적 확고하게 뿌리내릴 수 있었다.

소련과 중국 등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은 근대 시민사회의 형성이 충분치 않은 반봉건사회의 환경에서 사회주의 이행에 성공했다. 사회주의는 원래 자본주의와 비교할 때 개인보다는 집단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자칫 개인과 집단 양자는 대립관계를 형성하고 전자가 경시되는 문제가 나타났다. 중국을 비롯한 현대 사회주의국가들은 뒤늦게나마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를 결합하는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채택함으로서, 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진핑 시대의 오늘날에 와서도 법치의 강화 작업은 계속되고 있는데, 시장경제가 발전할수록 더욱 고도한 법치가 요구된다. 그것은 현대 시장경제가 ‘제도’와 ‘규범’을 떠나서는 잠시도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주요 문건이나 ‘결의’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중공공산당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와 법제에 대한 인식은 제11기 3중 전회의 기초위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의 발전은 개혁개방의 진행에 따른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론적 방면에서의 일종의 승화이다.

이상 문화혁명 이후 개혁개방의 실천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이 발전시켜온 사회주의 민주주의 및 법제와 관련한 일련의 중요 관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민주주의가 없으면 곧 사회주의가 존재할 수 없으며, 사회주의 현대화도 있을 수 없다.

(2) ‘4대 현대화’ 목표의 달성을 위해서라도 필히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발양하고 사회주의 법제를 강화시켜야 한다.

(3) 점진적으로 고도한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건설하고 사회주의 법제를 완비하는 일은 사회주의 현대화의 중요한 목표이자 필요조건이다.

(4) 당과 국가의 지도체제를 개혁하고 완성하는 것은 정치생활에 있어 민주화, 경제 관리의 민주화, 전체 사회생활의 민주화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길이며, 현대화 건설 사업을 순조롭게 발전하도록 촉진하는 길이다.

(5) 사회주의 민주주의는 자본가계급의 민주주의, 개인주의적 민주주의, 유럽식 ‘민주사회주의’와는 구별된다. 전자는 민주와 집중, 민주와 당의 영도를 긴밀히 결합시키는 새로운 민주주의이다.

(6) 인민대표대회제도를 강화하고 완비하는 일은 중국 사회주의 민주제도를 발전시키고 완성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내용이다. 인민대표대회제도는 중국의 근본적인 정치제도이며, 일원제를 견지한다는 점에서 3권 분립 혹은 양원제와는 구분된다. 중국공산당은 전인대에서 제정된 헌법과 법률이 규정한 틀 내에서 활동하고, 또한 자체 당내 민주주의의 실천을 통해서 사회 전반의 인민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데 앞장서야 한다.

이상의 관점들은 몇 차례 당 대회의 결의에만 그치지 않고, 이하에서 보듯 국가의 근본법인 헌법에 반영되어 실제 국가 의지로 전화된다.

 

2) ‘78년 헌법’에서 ‘82년 헌법’으로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제정된 1978년 헌법은 제헌헌법인 ‘1954년 헌법’의 일부 기본 원칙을 계승하였다. 4대 현대화 임무를 추가하고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발양하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과학과 교육 사업의 발전, 1954년 헌법이 일찍이 규정하였지만 1975년의 문화혁명 헌법에 의하여 취소되었던 국가기관의 일부 직능과 공민의 일부 권리를 회복시켰다. 하지만 1978년 헌법은 ‘4인방’이 분쇄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만들어진 것이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 된 이래 30여년에 이르는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교훈을 전면적으로 담기에는 부족하였다. 문화대혁명 중의 ‘좌편향’ 사상이 헌법 조문에 미친 영향을 철저히 씻어내지 못하였으며, 곳곳에 낡은 정치적 관점에 입각한 조문을 간직하고 있었다.

예컨대 ‘무산자계급의 문화대혁명 승리’, ‘유소기 자본가계급 사령부’, ‘무산자계급 독재 하의 영속혁명’, ‘계급투쟁 중심’과 같은 표현이 그것이다. 임표, 강청 두 반혁명집단의 헌법에 대한 영향을 철저히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1978년 헌법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82년 12월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5차 회의에서 헌법에 대한 수정이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1982년 헌법이다. 이번 헌법 수정의 전체적 지도사상은 ‘4개 기본원칙’ㅡ 사회주의 방향, 인민민주주의, 중국공산당의 영도, 마르크스레닌주의·마오쩌둥사상 견지ㅡ 이었다.

이번 헌법의 수정과 토론 작업에는 모두 2년이 걸렸다. 1980년 9월 10일,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3차 회의는 중공 중앙의 건의를 받아들여 헌법수정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헌법수정위원회와 그 사무처가 설립된 이후 각 지방, 각 부문, 각 방면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진지한 연구를 거쳐 1982년 2월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수정 초안> 토론 원고가 제출되었다.

헌법수정위원회 제2차 회의는 9일 간의 시간을 이용하여 이 토론 원고에 대한 토론 및 수정작업을 진행하였다. 전인대 상무위원회 위원, 전국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회 일부 위원, 각 민주당파와 인민단체의 책임자, 중국공산당 중앙의 각 부문, 국무원 각 부문, 인민해방군 각 지도기관 및 각 성, 자치구, 직할시의 책임자들 또한 수정 의견을 제출하였다.

같은 해 4월, 헌법수정위원회 제3차 회의는 다시 9일 간의 토론을 진행하고 헌법수정 초안을 통과시켰다. 전인대 상무위원회가 이를 공표하여 전국 인민들에게 넘겨 토론토록 하였다. 지난 1954년 헌법제정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전체 인민의 토론 규모 역시 매우 크고 참가자 수가 많았다. 이는 전국적으로 노동자, 농민, 지식인과 기타 각계 인사들의 헌법 개정에 대한 열망이 매우 높은 것을 반영한다.

전체 인민들의 토론과정에서 많은 의견과 건의가 제출되었다. 헌법수정위원회 사무처는 이들 의견과 건의에 기초하여 초안에 대해서 다시 한 차례 수정을 가하였다. 제안된 합리적 의견들은 많이 채택되었으며, 100군데에 가까운 보충과 수정작업을 하였다. 이 초안은 헌법수정위원회 제4차 회의에서 5일 간 각 조문마다 토론을 벌인 후, 11월 23일 헌법수정위원회 제5차 회의에서 통과되어 비로소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5차 회의(1982.11.26.~12.10) 심의에 제출된 후 확정되었다.

 

▲1982년 헌법 소책자

1982년 헌법에서 주목할 점은 인민대표대회제도의 완비와 관련된 일련의 중요한 규정을 한 것이다. 주요하게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직권 확대 ▲현급 이상 지방인대에 상무위원회 설치 ▲각급 인대 및 상무위원회 조직기구의 강화 ▲ 각급 인대 상무위원회에 지방성 법규를 제정할 수 있는 권한 부여 ▲농촌 인민공사의 정치‧사회 합일 제도 폐지와 향(鄕) 정권의 회복 등이다.

이 밖에도 국가주석의 권한을 조정한 점 역시 주목된다. 국가주석은 이제 더 이상 전국 무장력을 통솔하지 않으며, 최고 국무회의를 소집할 수 없게 되었다. 국가주석이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며 외국사절을 접대하는 일 뿐이다. 다른 직권은 모두 전인대 혹은 그 상무위원회의 결정에 입각해서 권한을 행사한다.

국가기관 내 설립된 ‘중앙군사위원회’가 전국 무장력을 지도하도록 하였다. 이는 국가기관의 일대 중대 개혁이라 할 수 있으며, 이로써 국가제도는 진일보하게 완비되게 되었다. 물론 군대의 건설에도 유리하였다.

1982년 헌법은 또 국가주석과 부주석, 전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과 부위원장, 국무원 총리와 부총리, 국무위원, 최고인민법원 원장, 최고인민검찰원 검찰원장의 연임은 두 기를 넘지 못하도록 명문화하였다. 이로써 과거 지도 직위에 있어서의 종신제는 폐지되었다.

이상의 내용을 갖는 1982년 헌법의 제정은 중국의 인민대표대회제도가 새로운 전면적 발전단계에 진입하였음을 뜻한다.

1982년 헌법이 공표된 후 지금까지 모두 다섯 차례 부분적 수정이 이루어졌다. 제1차 수정 내용은 1988년 4월 12일 제7기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제1차 회의에서 통과된 <중화인민공화국헌법개정안> 제1조와 제2조이다. 여기서 “사영경제는 사회주의공유제경제의 보충이다”라는 규정이 추가되었으며, “토지사용권은 법에 의거 양도할 수 있다”라는 내용이 새로 담겼다.*

* 중국은 모든 토지는 국가 소유이거나 집체 소유이다. 개인의 경우 단지 토지사용권만을 부여받을 수 있다. 이 토지사용권(개인주택은 70년, 공장•상업용일 경우 40년)을 시장경제 환경에 조응하여 매매를 허용함으로써 재산권 행사의 폭을 넓힌 것이다.

제2차 수정 내용은 1993년 3월 29일 통과된 <중화인민공화국헌법수정안> 제3조에서 제11조까지이다. 여기서 “우리나라는 사회주의초급단계이다. 국가의 근본임무는 중국특색 사회주의 건설 이론에 입각하여 역량을 집중하여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을 진행하는 것이다.”는 내용이 새로 생겼다. ‘국영경제’를 ‘국유경제’로 수정하였으며*, “국가는 사회주의시장경제를 실시한다.”, “국가는 경제입법을 강화하고, 거시적 조절장치를 완비한다.”라는 규정을 첨가하였다. 또한 현급 인민대표대회의 회기를 전인대와 마찬가지로 3년에서 5년으로 늘렸다.

* 국영경제는 국가가 직접 기업을 경영하는 것으로서 과거 계획경제 시대의 관행이다. 시장경제 하에서 국가는 국유기업에 대한 소유권만을 행사하되 그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위탁한다.

제3차 수정 내용은 1999년 3월 15일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2차 회의에서 통과된 <중화인민공화국헌법수정안> 제12조에서 제17조까지이다. 여기서 주요하게는 “중화인민공화국은 법에 입각하여 통치하며(依法治国), 사회주의 법치국가를 건설 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제4차 수정은 2004년 3월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2차 회의에서 이루어졌다. 이번 수정은 중국이 전면적 샤오캉(小康)사회 건설과 사회주의 현대화 추진에 박차를 가하는 새로운 발전단계에 진입한 것을 배경으로 한다. 주요하게는 ‘국가의 인권 존중과 보장’을 헌법에 정식 명시했으며, 경제발전에 상응하는 사회보장제도의 건설, 개인의 합법적인 사유재산은 침범할 수 없다는 내용 등이 들어있다.

최근의 제5차 수정은 2018년 3월 11일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주요하게는 과학적 발전관, 시진핑(習近平)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 생태문명 건설과 관련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제1장 중국 ‘인민대표대회’의 역사ㅡ 끝)

* 김정호 박사의 중국에 대한 풍부한 소개는 중국에 대한 일방적인 편견과 왜곡이 판치는 우리사회에서 새로운 인식을 주고 있으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무릇 한 사회에서 대해 제대로 인식하려면 그 인식을 가로막는 지배적인 편견과 여론, 즉 그 사회를 지배하는 지배계급의 사상과 싸우면서 자주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중국혐오의 정치적 기원 1-5/2>, <반제를 ‘미중, 미러 패권주의’ 반대로 내거는 인식상, 실천상 오류1-3> 등에서 다뤘던 것처럼,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일방적인 편견과 왜곡, 특히 미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에 대한 고립 와해 공세에 맞서 싸우는 한편, ‘진보진영’ 내에서 중국을 자본주의로 인식하는 흐름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제시했다. 그러나 우리는 제국주의 공세에 맞서 중국을 옹호하고 중국을 실사구시적으로 바라보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중국의 ‘개혁개방’, ‘사회주의 시장경제’ 노선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이다. 레닌 당시 볼셰비키가 취했던 신경제적 정책을 근거로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있는데, 레닌의 신경제정책은 사회주의의 일반적 원칙이 아니라 내전으로 파괴되고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농민과의 동맹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취해진 일시적인 방책이었다. 이 방책에 있어서도 레닌은 일시적인 후퇴이고 양보조치이지만, 종내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포위, 파괴하여 사회주의를 강화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역사적 맥락은 다르지만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노선 역시 중국의 역사적 조건 내에서 출현했다는 점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극복되어야 하는 노선이라고 본다. 특히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가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할 단계이며 조선 역시 필연적으로 그 길을 통과해야 한다는 인식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하지 못한다. 이는 ‘자주성’을 생명으로 하는 조선의 사회주의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며 진행되는 사실과도 부합하지 못한다.

 ‘홍위병’으로 상징화된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공주의 인식과 싸워야 한다. 문화대혁명은 후르시초프로 대변되는 국제적인 수준에서의 수정주의와의 투쟁, 사회주의 발전에 있어서 필연적인 사상, 의식, 문화혁명의 필요성 등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은 당적수준에서 질서 있게 전개되지 않았고 극단적인 편향도 있었다. 조선에서는 후르시초프의 수정주의 노선에 대해 주로 비판하면서도 당시 중국에 대해서는 교조주의적인 입장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도 온전한 역사적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그럼에도 중국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아직 일천하다. 중국에 대한 인식은 발전 과정에 있는 인식이다. 용광로 같은 논의를 통해 우리의 입장을 발전, 수립, 통일시켜 나가야 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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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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