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특집 소련은 한반도의 점령군이었는가?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저자)
1945년 8월 15일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35년이 종결된 날이다. 8월 15일 광복을 맞은 한반도 전역의 민중은 환호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을 맞이한 지 3년도 안되어 한반도에는 남과 북을 중심으로 단독정부가 수립됐다. 해방정국을 거치면서, 분단을 주도하려는 세력이 힘을 키웠고, 급기야 1948년엔 남과 북에 이데올로기를 달리하는 두 개의 정부가 구성된 것이다. 단독정부 수립 2년 후 한반도에선 전쟁이 일어났다. 이른바 한국전쟁이라는 냉전의 열전은 무수히 많은 인명을 죽게 만들었다.
과거 반공주의가 모든 것을 합리화하던 군사독재 시절,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한국전쟁을 일으킨 북한과 북한의 동맹국이던 소련에게 전가됐다. 즉, 한반도 분단으로부터 비롯된 그 모든 비극을 단순히 소련과 북한에게만 책임을 전가했던 것이다. 또한, 한미동맹을 외치며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절대적으로 미화하는 반면, 북한과 소련에게는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안타깝게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절의 이런 반공주의는 현재까지도 한국전쟁을 평가하는 데 있어 강력하게 남아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되었다는 한국전쟁에 대해, 한국사회는 단순히 6월 25일 북한이 먼저 치고 들어왔다는 부분에만 중점을 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한국전쟁의 역사적, 정치적 기원을 왜곡하거나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전국노동자정치협회, 『한국사회와 변혁의 길』, 어깨걸고, 2020, p.80)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에는 1945년 미군이 한국에 진주했을 당시 일본에 항거했던 반파시스트들로 조직되었으며 국민들에 기반을 두고 있던 여운형을 중심으로한 건국준비위원회를 해체시킨 것과 이에 맞서 일본 파시스트 경찰과 일제시대 때 그들에 협력했던 일부 한국인들을 고용하여 국민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억압했던 역사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반도 최남단에 있는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노동자 농민의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살해당한 3~4만 명을 포함하여 최소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이미 한국전쟁 이전에 미군정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역사적 맥락이 완벽히 생략되기 때문이다.(노엄 촘스키, 김보경(역),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한울, 1996, p.33~34)
1945년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한 이후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군이 한반도 이남에는 미군이 진주했다는 사실은 학창시절 한국사 시간에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교과서 자료들과 더불어, 한국 사회에서 제법 진보적인 서적으로 인정받는 자료들은 소련이라는 대상을 하나의 점령군으로 인식하고 있다. 즉, 미국과 더불어 한반도 절반을 점령한 점령군으로써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다소 어폐 및 외면 받는 사실들도 제법 존재한다. 광복절 77주년을 맞아 이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보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힘을 합쳐, 파시즘을 무찌른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에 기여했던 주체는 바로 소련이었다. 모스크바 공방전이 있던 1941년 12월부터 1942년 11월까지 일군과 소련군 양측을 합하여 900만 명 이상의 병력이 동부전선에서 격전을 치를 때, 서부 전역에서는 북아프리카에서만 중요한 지상전이 있었고, 1942년 11월 영국이 엘 알라메인(El Alamain)에서 승리하여 추축군 6만 명이 손실을 입었을 때, 같은 달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는 소련군이 독일 제6군을 포위하고 기갑병력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943년 7월 독일군과 소련군 200만 명이 쿠르스크에서 500만 명이 스몰렌스크에서 흑해 연안에 이르는 600km의 전선에서 싸우는 동안 영미 연합군은 시칠리아에 상륙하여 6만 명의 독일군을 몰아냈다. 독일군이 1945년 4월 30일까지의 전체 손실은 11,135,500명이고, 이 중 부상자가 6,035,000명인데, 이 가운데 거의 900만 명은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손실이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군의 인명 손실은 13,488,000명인데, 이 중 10,758,000명이 동부전선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이런 어마어마한 독일군 병력 손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 축출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한 주체는 바로 소련이었던 것이다.(데이비드 M. 글랜츠 조너선 M. 하우스, 권도승 남창우 윤시원(공동번역), 『독소전쟁사 1941~1945』, 열린책들, 2007, p.356~357)
유럽 전선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련의 붉은 군대는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바꿔 놓았다. 1945년 8월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당시, 일본의 대본영은 “미국이 300대의 항공기와 수천 발의 폭탄으로 도시를 쓸어버리느냐, 한 대의 비행기와 한 발의 폭탄으로 그렇게 하느냐”에 대해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던 반면, 소련군의 만주 진격은 일본 지도부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렸다. 당시 일본의 스즈키 총리는 즉각 항복해야 한다고 단언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렇지 않을 경우 “소련이 만주, 한반도, 사할린은 물론 훗카이도를 점령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일본의 기초가 파괴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지도부는 소련군이 일본 본토에 들어오면 국내에서 친공산주의 봉기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도 우려했으며, 실제로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그런 상황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아주 틀린 시각은 아니었다.(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역),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들녘, 2015, p.300~301)
소련군은 만주진격 작전을 시작한 시점인 8월 9일부터 한반도 북쪽 끝에 도달했다. 개전과 동시에 소련군은 500여 대에 달하는 대규모 전투기, 폭격기들을 출동시켜 나진, 웅기, 청진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실시해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혔고, 8월 11일에는 소련 태평양함대 소속의 해군부대가 웅기에 상륙하였으며, 다음날에는 나진항에 상륙하는데 성공했다. 소련군과는 대조적으로 한반도에 가장 가까운 미군 부대는 일본의 남쪽 섬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었다. 소련군이 청진을 함락한 것은 8월 18일이었고, 8월 19일 일본 관동군은 소련에게 항복했으며, 이후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원산과 함흥에 진출했다. 이북 지역에 주둔한 소련군은 제25군 산하 6개 사단 및 1개 기갑 여단 등 12만 5,000명과 해공군 3만 명을 합하여 약 15만 명에 달했으며,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소련군의 손실은 전사 1,446명, 부상자 3,119명 등 4,717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통계는 소련군이 한반도로 진군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희생을 치렀다는 걸 보여준다.(정창현, 「[해방정국 3년] ③8월26일 소련군 사령관 평양 입성·시가 행진」, 『뉴시스』, 2020.01.19. https://newsis.com/view/?id=NISX20200116_0000891358&cID=10201&pID=10200)
한반도에 입성한 소련군은 1945년 8월 24일 평양에 입성하고 다음날인 25일에 소련군 사령관인 치스차코프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조선인민들에게! 조선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연합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몰아냈다. 조선은 자유국이 됐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신조선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땀과 노력의 결과이다.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오직 당신들 손에 달렸다.(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푸른역사, 2011, p.222~223)”
이반 치스차코프 사령관 |
반면에 9월 6일 한반도 이남에 상륙한 존 리드 하지가 이끄는 미군들은 달랐다. 미군은 적국이었던 일본과 오히려 가까이 지내고 조선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자세를 취했다. 1945년 9월 6일 선발대로 온 미군은 한국인과의 만남을 모두 거부하고 일본인과 만났으며, 다음 날 미군을 환영하러 인천항에 나온 군중에게 일본 경찰의 발포로 두 명이 사망했음에도 일본 측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미군은 9월 9일 서울 입성을 앞두고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다음과 같은 포고령을 발표했다.(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푸른역사, 2011, p.223)
“미군은 점령군의 지위로 들어오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로 처벌한다.
경인 지구에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를 실시한다.(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푸른역사, 2011, p.223)”
한반도 이북에 입성한 소련군의 포고령과 한반도 이남에 입성하여 발표한 미군의 포고령을 비교해보았다. 소련군의 포고령에는 자신들이 해방군임을 표명한 반면, 미군은 자신들이 이 땅의 점령군임을 표방했다. 따라서 포고령만 보면 소련군은 해방군이었고, 미군은 점령군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 근거를 두고 말을 하더라도 대다수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힘들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소련군이 보다 점령군적인 면모를 보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몇몇 근거들을 학계나 사회에서 언급하거나 내놓기도 한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북한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이 부정적이다. 초기에는 주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환영하는 분위기였고, 해방의 은인이라는 소박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폭행·약탈·강간과 같은 소련군이 저지르는 부도덕한 행위에 따른 반발이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곳곳에서 반소시위가 일어났고, 공산당의 형태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고태우, 『북한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15, p.14~15)”
이 책에서 언급되듯이, 소련군의 북한 진주 초기 그러한 사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유럽에서도 소련군에 의한 약탈이나 폭행 그리고 강간 등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일에서의 소련군에 의한 강간 사건은 그 숫자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일각에서는 200만 명이나 되는 독일을 포함한 유럽 여성들이 소련군에 의해 강간당했다고 심각하게 과장되고 각색된 이야기를 사실인 냥 주장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아나톨리 칼린(Anatoly Karlin)이 쓴 ‘붉은 군대의 독일 여성 강간은 괴벨스의 작품이다’라는 자료에 따르면, 벨라루스 제1전선의 경우 4월 22일부터 5월 5일까지 90만 명의 붉은 군대 가운데 총 124건의 범죄 중 72건이 강간이었다고 주장했으며, 스탈린이 소련군의 강간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1945년 1월 19일 스탈린이 소련의 붉은 군대에게 “해방된 지역에서 강간을 자행하는 병사는 총살형에 처해질 것이다.”라고 내린 행정명령을 통해 반박이 가능하다.(김남기. 「냉전의 마녀들 서평: 한국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한국전쟁의 진실」,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21.07.28. http://mlkorea.org/v3/?p=10583&fbclid=IwAR3tmrhSgCQDDK-mtGD5_Z1AxvpyMaWvOtFIpnWykYcmSmU3_3DMsxJMGME)
소련군의 북한 지역 주둔 또한 마찬가지다.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에 따르면,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일본인과 한국인에게 강간과 약탈을 포함한 파괴행위를 저질렀는데, 그것은 아주 광범위했지만 적과 그들의 한국인 동맹자들에 대한 보복의 범위를 벗어났다고 한다. 또한 소련군에 의한 약탈과 강간은 남쪽으로 피난 온 일본인들에 의해 과장된 측면도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런 말들을 퍼뜨린 일본인들은 그들 스스로가 식민지의 공업, 광산, 심지어는 화폐 남발을 통한 경제 자체를 파괴하고자 했던 장본인들로 남을 비난할 처지에 있지 않았던 자들이라는 점이다.(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역),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p.482)
어찌됐든 소련군의 초기 진주는 다소 폭력적인 측면이 존재했던 건 사실이다. 아녀자의 강간을 포함하여, 약탈과 폭행도 있었다. 그러나 커밍스는 소련군이 다음과 같은 노력을 했다는 사실도 강조한다.
“1946년 1월에 이르러 소련은 헌병을 들여와 군인들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가했다. 한인 여성을 강간하는 자들은 즉시 사살하도록 되었다. 1945년에서 1949년까지 북한에 거주했던 독일 출신의 베네딕트 신부 호플레(Hopple)는 초기의 소련 점령군이 남루하고 굶주린 중국인 피난민 같아 보일 정도로 비참했다고 전했다. 그들은 “광범위한 강간 및 약탈을 저질렀다”고 한다. 그러나 “소련 관리들의 행위는 항상 정확했으며” 사병들은 철저한 통제하에 들어갔다. 소련군은 계속 보급물자를 징발했으나 모든 것에 대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영수증을 발행했다.(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역),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p.482)”
즉, 커밍스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소련군은 1946년 1월부터 부녀자 강간과 같은 문제를 일으키면, 즉시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소련군에 의한 강간 사건은 다소 과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각에서는 소련이 만주에서 개발된 많은 공장들을 운반해 갔듯이 북한 지역의 공장들도 반출했으며, 이것이 약탈에 가까웠다고 한다. 커밍스의 얘기를 계속 보도록 하자.
“실제로는 몇 안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한 증거가 없다. 소련에 의한 만주 공업의 반출을 조사하고 기록한 폴리 위원회(Pauley Commission)는 북한에서의 실제적 반출은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미 정보당국은 수개월 동안은 소련에서 중대한 반출을 행하고 있다고 믿었으나 1946년 6월에 이르면 그 이전의 보고가 후퇴하는 일본인들이 저지른 파괴에 근거했을지 모른다고 결론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소련 기술자들이 파괴된 공장들을 재건하는 데 최선을 다했으며, 1946년 중반에 이르러서는 생산이 1945년 수준을 능가하게 되었음을 지적했다. 1946년 9월에 남하한 어느 한인 전기 기술자는 소련이 북한 공업이 건재하도록 ‘의식적 노력’을 하고 있음을 보고했다.(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역),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p.483)”
소련군은 1946년 북한에서 진행된 친일파 청산 및 토지개혁과 같은 제반 민주개혁 과정에서 이러한 것들을 도왔고, 실제로 초기 북한 인민민주주의 정부에 큰 도움을 줬다. 앞에서 언급한 소련군의 약탈 및 강간 행위를 강조하는 이들은 이러한 사실은 또 외면하고 있다. 아래는 커밍스의 주장한 내용이다.
“비록 소련이 북한에서 저지른 것과 같은 규모에 이른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미군도 남한에서 여러 종류의 약탈을 자행했다. 뿐만 아니라 미군 점령 3년 동안에 강간의 보고들은 계속 되었으며, 1945년에는 경성제국대학(현재 서울대학교)의 일부 건물이 미군의 병영으로 징발되어 그 결과로 도서관과 연구실에 많은 약탈과 파괴가 행해졌다. 또한 미군이 38도선을 넘어 오는 난민들의 금품을 몰수했다는 증거는 그것이 상습적이었음을 암시할 정도로 많다. 이러한 행위가 미군 점령의 일반적 성격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한국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주의는 도처에 퍼져 있었다. 앞의 장들에서 보았듯이 인종적 편견은 미 군정청의 최고위층에 의해 표현되었다.(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역),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p.483~484)”
심지어 커밍스는 미군과 소련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교도 한다.
“옴스테드는 소련인들이 한인을 하인으로 고용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한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미국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예를 들면 한인을 경멸조의 ‘구크(gook)’라는 단어로 지칭하지 않는 사람은 두 손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그는 소련인과의 많은 대화에서 비록 소련인들이 한인의 음식과 종교를 헐뜯기는 하지만, “그러한 종류의 태도가 나타난 적은 결코 없었음”을 발견했다. 그 결과 적어도 그의 관측으로는 한인들이 미국인에 대하여 “무뚝뚝하고, 무표정하고, 무관심한”데 반하여 소련인과 한인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친근해 보였던 것이다.(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역),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p.484)”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소련군은 조선인들에게 미군보다 더 친절하게 대했고, 그 나라의 문화를 보다 존중하는 태도를 가졌으며, 인종주의적 편견을 거의 가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미군 내에서는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만연했다. 과거 반공주의 시절 소련이 북한의 건국을 도왔다는 사실을 토대로 북한을 소련의 위성국가로 보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아래의 내용을 통해 반박이 가능하다.
“북한 정부는 소련의 직간접적인 영향력 아래에서 수립되었으나, 그렇다고 초기 북한을 단순한 위성국가로 볼 수는 없다. 북한은 동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상대적인 측면에서 자율성을 지녔으며, 소련은 북한의 든든한 후원국가였다. 북한 집권층은 소련을 비롯한 국제 공산권의 후원을 받으면서 전후 경제 복구와 사회주의 건설을 할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외압에 대처하면서 1950년대 후반 시점에는 자율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요컨대 1945년부터 1950년대 말까지 북한의 대외관계는 상대적 자율성에서 절대적 자율성으로 자율성을 확장하는 과정이었다.(김성보, 『북한의 역사1, 건국과 인민민주주의의 경험 1945-1960』, 역사비평사, 2011, p.245~246)”
즉, 소련 군정 하에서의 북한 정부의 건설은 자국 인민민주주의 정부의 자율성을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미군정 통치를 받았던 남한과 확연한 차이가 나며, 당시 소련군의 역할은 북한에 건설될 자율성이 보장된 인민주주의의 정부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 소련군을 미군과 똑같은 점령군으로 보려는 시각은 몰역사적인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밝힌 많은 근거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소련이 북한에서 점령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많은 부분에서 각색되거나 부풀려졌음을 알 수 있다. 소련은 분명히 자신들이 해방자임을 주장했고, 비록 일부 약탈이나 강간과 같은 불상사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세워질 인민민주주의 정부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또한 해방정국부터 현재까지 미국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남아 많은 부분이 미국에 의해 제약을 받는 남한과 달리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은 남한과 미국 관계하고는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심지어 리영희 교수는 북한이 소련과 대립하고 있고, 갈등하기 때문에 ‘북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걸 구체적인 근거를 통해 입증했었다. 따라서 소련은 한반도 이북을 해방시킨 존재였고, 북한이 소련이나 중국과의 관계에서 자율적인 측면을 보이는 것은 바로 소련이 해방군으로써 들어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백남운의 저서 『쏘련인상』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겠다.
“조쏘 양국간에 체결된 경제 급 문화 협정은 그 내용에 있어서 인민공화국의 통일발전을 촉진시키는 기본조건으로서 인민경제 2개년 계획의 급속한 실현을 목표로 삼는 민주건설의 협정인 것이다.
이와 반대로 미제와 그 괴뢰인 이승만정권 간에 체결된 소위 한미협정은 조선의 통일독립을 백방으로 방해하고 미제의 식민지로 만드는 기본조건으로서 세계침략의 별명인 마샬식 원조를 집행하는 약탈협정인 것이다. 즉 한미군사협정, 한미 재정 급 재산 이양에 관한 협정, 한미경제원조협정 등은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조선을 군사적으로 정치적ㆍ경제적으로 미제에게 예속시키려는 매국적 협정들이다.
1948년 8월 24일의 한미군사협정에 의하여 해안경비대와 육군의 통솔권은 미군이 장악하게 된 것과 미군이 요구하는 대로 남반부의 지역과 기관을 제공하게 된 것은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예속된 것이다. 남반부에서 인민학살을 집행하는 망나니는 이승만 역도이지만 인민학살의 총참모가 미군인 것은 이 협정에 근거한 것이다.(백남운, 『쏘련인상』, 선인, 2005, p.207~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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