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 쥴리’로 백자가 정작 비난받아야 할 것은 예술적 당파성의 결여다
민중가수 백자의 노래 ‘나이스 쥴리’를 둘러싸고 첨예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민주노총 여성위원회]는 성명을 통해 백자의 노래가 여성혐오이며 여성혐오자가 사과하지 않으면 민주노총 집회 무대에 세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민중예술가 한 편에서는 일부 동의하면서도 힘들게 투쟁해온 민중예술가를 일방 비난하고 무대에 세우지 않겠다는 것은 겁박이며 갑질이라고 비판했다. 또다른 민중예술가 일부에서는 여성 혐오 측면이 일부 있는 것은 사과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무대에 세우지 말라는 주장은 과도하다고 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노총 여성위가 ‘남성권력’ 언급하는 젠더적 관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맑스주의적 관점에 의하면 권력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부르주아와 거기에 복무하는 계급권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남녀 성별을 근거로 권력이나 계급이 나눠져 있지 않다. 남남 내부, 여여 내부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억압계급과 피억압계급으로 나눠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녀관계는 기본적으로 계급 적대 관계가 아니다. 다만 남여는 모순관계에 있을 수 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여성과 남녀는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 폭력에 맞서 같이 싸우고 계급억압 사회에서 완전한 해방을 위해 손잡고 싸우는 동지적, 동반자적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여남의 비적대적 모순을 적대적 모순으로 악화시킬 수 있는 후진적 인식을 극복하고 분열적, 대립적 행동을 바꿔나가야 한다.
백자의 노래가 성을 무기로 부패한 권력과 결탁한 여성과 그 권력자를 풍자하는 것인지 여성일반에 대한 혐오인지는 여기서는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예술의 계급성, 당파성의 문제다. 예술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며 누구의 이해를 집중적으로 대변하는가?
과연 백자의 노래 ‘나이스 쥴리’는 누구의 이해를 대변하고 무엇을 위해 만들어 졌는가?
백자의 노래에 대한 지지나 비난은 여성혐오를 둘러싼 논란도 있지만, 실제로는 이번 대선에서 누구와 어느 정치세력을 지지하느냐의 논란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백자의 노래는 쥴리라는 혐의를 받고 있는 김건희 씨를 비난하고 풍자함으로써 검찰 출신 국민의힘 유력 대선주자인 윤석열을 비난하는 것이다. 이로써 윤석열과 정치적으로 경쟁하는 민주당 지지자들과 민주당 대선 예비 후보자들의 이해관계를 직접 대변하고 있다
실제 백자의 노래에 열광하고 지지하는 세력들은 민주당과 민주당 대선 예비주자들의 지지자들이다.
백자는 민주당과 대선 주자들을 지지하거나 비판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윤석열 배우자를 풍자하는 노래를 만들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백자의 노래는 그의 개인적 의도를 넘어서서 첨예한 권력재편기에 특정한 정치적 결과를 낳고 있다. 이는 ‘줄리의 남자들’ 벽화와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고 똑같은 정치적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백자의 노래가 풍자 수준이 높냐, 예술성이 높냐 여부는 대선에서 주로 누구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다른 판단이 나올 수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백자의 ‘나이스 쥴리’는 더이상 민중예술이 아니다. 백자는 이 풍자를 통해 부르주아 권력 자체의 부패를 폭로하려 하지 않았다. 권력과 결탁해 몸을 파는 여자가 어떻게 ‘국모’가 될 수 있느냐는 폭로도 전혀 진보적이거나 민중적이지 않다.
지금까지 이 나라의 역대 대통령이 그랬듯, 그 배우자의 자리는 국모든, 영부인이라 부르든 전혀 신성하지도 않고 영광스런 자리도 아니다. 오직 민중을 억압하는 부르주아 통치자들의 배우자가 누리는 후광이나 그 가족권력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한 자리에 누구는 자격이 있고 누구는 없고 따질 정도로 신성시 될 성질도 아니다.
백자의 ‘나이스 쥴리’는 민중당 공동대표와 그 일각에서 지난 총선에서 “느그 장모 모 하시노?”라는 구호로 윤석열을 풍자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윤석열의 장모 최은순 씨는 실제로 파렴치한 요양병원 불법 설립과 22억 여원 부당수급혐의로 구속됐다.
여기서 “느그 장모 모 하시노?”라는 구호가 풍자성이 있는지 여부는 부차적 문제였다. 문제의 본질은 조국사태에서 ‘진보진영’을 자처하며 조국을 지지하며 조국을 ‘핍박’하는 윤석열에게 공세를 취하면서도 정작 그 윤석열을 임명했으며 반노동자성, 반민중성, 반민주성, 반민족성이 극에 달해 있는 민주당과 문재인 정권을 비호하는 문제였다.
이 점에서 “느그 장모 뭐 하시노?”는 진보진영의 구호가 전혀 아니었다. 적폐청산, 보수 청산을 명목으로 역사적, 구조적 모순을 심화시키는 민주당과 문재인의 작태와 실정을 은폐, 비호하는 구호였다.
국가보안법 이적표현물로 탄압 받은 백자의 노래 ‘혁명동지가’는 장엄하고 반미반제적으로 민중예술의 당파성과 예술성을 가지고 있었다.
“동만주를 내달리며 시린 장백을 넘어
진군하는 전사들의 붉은 발자국 잊지 못해
돌아보면 부끄러운 내 생을 그들에 비기랴마는
뜨거웁게 부둥킨 동지 혁명의 별은 찬란해
몰아치는 미제에 맞서 분노의 심장을 달궈 변치말자 다진 맹세 너는 조국 나는 청년”
그런데 ‘나이스 쥴리’는 그 장엄한 예술성을 상실했으며 부르주아 양당체제의 한 분파를 지지하거나 지지하게 됨으로써 진보적 당파성을 상실했다.
백자의 이 노래만 두고 본다면 그를 민중예술가의 범주에 두고 비난할 수 없다. 그는 그저 대중예술가에 불과한 것이다. 백자를 집회무대에 세우지 말라는 ‘겁박’이 아니더라도, 백자는 최소한 ‘나이스 쥴리’를 가지고는 민중의 저항 장소에 설 수 없을 것이며 오직 부르주아 선거연단에만 설 수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민중예술가로서 백자에게 결여된 것은 계급의식이고 예술적 당파성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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