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제국주의 성격과 21세기 타도 제국주의1 반제국주의의 요체는 여전히, 앞으로도 반미이다

* 이 글은 [현대사상연구소]에 <현대사상>에 실린 글입니다. 또한 지난 12월 30일 민주노총 주최 집담회 ‘윤석열 정권과 당면 정세대응을 위한 집담회’ 평화반제 영역 토론문으로도 제출되었습니다.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제국론’은 제국주의를 부정하는 이론이고, ‘다중론’은 계급을 부정하는 이론이다.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는 부당한 전제에 근거하는 비(非)이론이다. 몇 년 전까지 《제국》《다중》(마이클 하트, 안토니오 네그리)은 아카데믹한 지적세계와 자유주의 언론에서 제법 주목을 받았다.

요즘은 활동이 뜸하고 관심이 비교적 시들해졌지만, 《제국》을 국내에 소개했던 조정환 씨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현대 제국주의론을 부정했다.

‘전지구적 주권질서’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태들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국가주권의 확장메커니즘을 설명했던 ‘제국주의론’은 20세기 세계를 이해하는 데 긴요한 것이었지만 탈식민화가 전개된 20세기 후반부터는 적실성을 잃기 시작했다…
예컨대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한 전비는 점령을 통한 자원 확보나 상품 수출을 통해 볼 수 있는 이익을 훨씬 초과한다. 게다가 전후 ‘국가건설’ 프로젝트에 거대한 자금이 원조로 제공되어야 한다. 저항이 끝나지 않음으로써 전쟁은 항구화하고 전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누적된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제국주의’ 행동은 미국 자신을 연간 7000억 달러의 무역적자와 연간 4000억 달러의 재정적자를 기록하며 평균 매일 20억 달러를 차입해야 하고 또 매일 50억 달러의 이자를 지급해야 하는 ‘빚더미 국가’로 만들어 놓는다. 제국주의론이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제국주의론의 좀더 발전된 판본은 미국을 단일하게 행동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이해하기보다 여러 종속국 혹은 동맹국들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제국’으로 설명한다.(조정환, ‘제국주의는 죽었다, 21세기는 지구제국 시대’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① 왜 제국인가,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한겨레, 2007-08-31)

이러한 인식은 실천적으로는 어떻게 나타날까?

실천적으로 제국주의론은 민족해방을 아직도 유효한 투쟁전략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미국에 맞섰던 사담 후세인을 군사적으로 지지할 뿐만 아니라 탈레반을 민족해방운동의 전위대로 지지한다. 이런 시각에서는 테러와 납치도 민족해방운동의 부득이한 전술일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도 반제국주의 보루로 보일 것이다.(같은 글)

이 점에 대해서만은 정성진 교수가 다음과 같이 잘 비판했다.

제국론은 오늘날 세계에서는 국민국가 자체가 의미를 상실했다고 본다. 그래서, 독립적 국민국가를 수립하거나 유지하려는 민족주의는 아무런 진보적 의의도 없으며, 제국의 경향을 거스르는 역사적 반동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점령에 대항하는 이라크인들과 아프가니스탄인들의 투쟁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 문제가 여전히 현재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투쟁은 제국주의적 억압에 맞서 민족자결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므로 테러와 같은 잘못된 전술과 잘못된 정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투쟁을 제국주의 반대자들은 지지해야 한다.
제국주의, 미국 제국주의 또는 줄여 말해 ‘미제’라는 말은 1970년대만 하더라도 ‘빨갱이’의 ‘삐라’에서나 볼 수 있는 불온한 용어였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오늘날은 미국의 지배계급 중 핵심 집단인 네오콘 자신이 스스로 제국주의자임을 내놓고 자랑스럽게 자임한다. 자신이 제국주의라고 ‘커밍아웃’한 21세기 ‘벌거벗은 자본주의’에 다시 제국이라는 포스트모던한 옷을 입혀 주고, 이것이 제국주의에 비해 더 낫다며 변호하는 것, 이것만으로도 제국론은 진보의 담론으로서 자격을 상실한다.(정성진 경상대 교수, ‘지구제국’은 허상이다, 제국주의 되레 격화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① –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②, 한겨레, 2007 09 07)

정성진 교수(현재는 퇴직)는 여전히 제국주의는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약소국가를 착취, 약탈, 지배한다고 하면서 이를 잘 반박하고 있다. 그런데 아프간 사례 등을 근거로 미국이 초과이윤과 원조 대가로 특혜를 얻기는커녕 천문학적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며 제국주의론을 부정하는 조정환의 주장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국주의 국가들이 (신)식민지 지배를 하면서 떠안게 되는 천문학적 부채는 제국주의론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베트남전에서도 미국은 천문학적 군사비 투입으로 막대한 부채를 떠안았다. 그렇기 때문에 미제국주의는 나토에 대해서는 군사비 전가, 한국에 대해서는 천문학적 미군 주둔비 인상과 최첨단 군사무기 판매를 강요하면서 군산복합체가 막대한 이윤을 챙기기도 하는 것이다. 아울러 막대한 부채를 보상하기 위해 제국주의 지배를 하는 국가의 천연자원을 수탈하고 시장을 지배하고 노동력을 저가로 사용하면서 제국주의적 이득을 챙기기도 한다.
미제국주의의 아프가니스탄 침략은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중동에 대한 지배력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아프간 북쪽에 있는 우즈베키스탄이나 투르크메니스탄 등 국가들이 이 전쟁 과정에서 자국 영토 및 기지사용권을 받았던 것처럼, 중앙아시아에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프간과 영토를 맞대고 있는 이란을 위협하고, 최근 미국이 ‘인권’을 내세워 중국의 통일국가 정책을 반대하여 분리주의 정책을 쓰고 있는 신장 위구르 지역과도 맞닿아 있는 전략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아프간에는 철, 망간, 우라늄, 희토류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데, 미제는 아프간 지배를 통해 이러한 자원들을 무한정 지배할 수 있었다. 더욱이 미국은 중앙아시아 가스콘소시엄 사업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탈레반을 제거하고 중앙아시아에서 석유와 천연가스를 장악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결국 2021년 미제국주의는 미군 2448명 사망, 최대 2조 달러가 넘는 막대한 전비를 소요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20년 전쟁에서 패배하고 도둑처럼 철군했다.


베트남은 물론이고 아프간에서의 미국의 막대한 전비 소요와 철군은 민중의 저항으로 인해 생긴 제국주의 패배의 생생한 모습들이다. 제국주의가 침략 비용을 쏟아 붓지 않고 언제나 승리할 것이라고 상정하지 않는 한, 이러한 침략과 안정적인 지배가 실패한 사례를 들어 제국주의론을 부정하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조정환은 “제국주의론이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라며 이 모순적 상황 앞에 손을 들어버렸지만, 엥겔스는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에 이미 변증법적 사고로 이 사태를 분명하게 예고했다.

군국주의가 전 유럽을 삼켜 버렸다. 그러나 이 군국주의는 또한 자신의 속에 자신의 몰락의 맹아를 내포하고 있다. 개별 국가들 사이의 경쟁은 그들로 하여금 한편으로는 매년 육군, 해군, 대포 등등에 훨씬 많은 돈을 지출하도록 만듦으로써 그들의 재정 파탄을 더욱 재촉했으며 … 군국주의는 자체의 변증법에 따라 붕괴될 것이다.(엥겔스, 《반듸링론》, 새길)

제국주의는 자유경쟁 자본주의 시대가 아니라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 시기에 본격 개막된 현대 독점자본주의의 산물이지만, 이처럼 제국주의 시대 이전에도 군국주의 경향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조정환은 미국의 천문학적 부채 등을 들어 “‘제국주의론’은 … 탈식민화가 전개된 20세기 후반부터는 적실성을 잃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천문학적 부채는 미제국주의를 언제나 따라다니는 천형(天刑)과도 같았다.
미제국주의는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한 뒤 베트남민족해방투쟁을 분쇄하기 위해 1965년 2월에 베트남에 군사개입하여 1973년 3월 베트남에서 철군할 때까지 침략전쟁을 치르면서도 막대한 부채를 떠안았다. 그런데 이는 제국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근거가 아니라 엥겔스가 강조했던 것처럼, 군국주의의 필연적 결과이자 위기의 모습이면서, 레닌도 《제국주의론》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제국주의의 침략성과 기생성, 부패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에 불과하다.

1961년의 국방예산특별교서에서 케네디대통령은 전(前)정권과 달리 재정적 배려를 우선하여 군사예산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적 필요에 대해 재정을 적응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표명하였다. 이것에 의해 비로소 유연반응 전략에 필요한 계속적인 군사비 증액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방만(放漫)재정’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한 것이 케인즈경제학의 미국적인 발전형태, 즉 뉴·이코노믹스였다…
케인즈경제학에 의해서 정당화된 군사경제는 50년대, 60년대의 미국경제의 번영과 확실히 관계가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이것은 미국의 경제적 잠재력을 침식하는 성질을 띠고 있던 것이어서 베트남전쟁이 확대되면서 그 부정적인 면이 전면에 드러난다…
미국정부의 군사조달은 베트남개입에 의해 한국전쟁 당시와 비슷한 내용을 갖게 되는데, 전통적인 장비·물자에 대한 정부수요가 커짐에 따라서, 자동차, 기계, 섬유, 고무 등의 산업은 활황(活況)을 맞게 되고 이것을 중심으로 고용도 크게 진전되었다.
실업률이 3%대로 떨어지면서 발생한 노동시장의 핍박과 노임 상승, 이리하여 중대한 소득이 소비로 향했던 바로 그때에 소비재의 큰 부분이 전쟁터로 돌려져 민수생산마저 축소되기 시작한다-재정적자 통화증발로 대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추가된 구매력에 걸맞을 만큼의 상품이 시장에 나오기는커녕, 거꾸로 상품량이 절대적으로 감소하게 되면서 비정상적인 인플레이션이 나타난다….
케인즈경제학과 뉴·이코노믹스는 재정정책에 의한 경기안정과 지속적 성장을 목표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입각한 군사비팽창과 적자재정이 가져온 결과는 군사기구가 지켜야할 객체인 미국경제의 성장력 쇠퇴와 인플레이션이며, 또 미국의 부와 권익의 세계적 확장을 보장하는 제도적 조건인 국제통화제도의 동요였다. 부와 그 질서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 본래의 목적에 대하여 반역한 것이다.(아키오사카이坂井昭夫, 《독점자본주의와 군사노선》, 허강인 옮김, 세계)

주지하듯, 1944년 금1온스를 35달러와의 교환 비율을 정하여 달러를 세계 기축통화로 만들게 된 브레튼우즈 체제 개막으로 미국은 자본주의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되었다. 이 달러 지배체제는 달러가 가진 종이쪼가리의 물신적 힘이 아니라 미국이 가진 금융적, 군사적, 정치적 힘을 바탕으로 하였다. 그러나 달러 지배체제는 미국이 달러를 무차별적으로 발행하여 제국주의 패권을 유지하는 동시에 미국 경제의 약화와 기생성과 부패성을 더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군비를 쏟아 부으면서도 이에 근거하여 막대한 이윤을 얻고 전후 장기호황과 부강한 미국의 기반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쏘련과의 군사경쟁, 제3세계 침략과 개입 등 전 세계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침략, 팽창, 패권 정책 이면에서 미국은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라는 ‘쌍둥이 적자’에 시달려야 했다. 달러 증가발행(증발)은 금1온스, 달러 35달러라는 고정된 교환기준을 흔들면서 달러가치를 지속적으로 하락시켰다. 달러가치가 하락하자 미국과의 교역에서 다른 국가들은 달러 대신 미국이 보유한 금을 요구했다. 결국 1971년 8월 15일 닉슨은 금태환 정지를 선언했다. 금태환 정지는 더 이상 금이 실질적인 가치물임을 부정하는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금만이 진정한 가치를 가졌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사례인 것이다.
베트남전 당시 소득세 증세 시도와는 상반된 조치이기는 하지만, 영국의 ‘대처리즘’에 이어 신자유주의의 상징이 된 1980년대 초 ‘레이거노믹스’ 당시에도 막대한 군사비 지출과 재정적자가 있었다. 1985년 플라자 합의는 미제국주의 위기를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전가하는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이처럼 미국을 수호하고 부강한 미국을 만드는 제국주의 정책이 반대로 미국을 약화시키고 미국을 위기로 빠지게 하는 모순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한 것이다. 이는 ‘쇠퇴하는 제국주의’ 체제의 불안정하고 동요하는 모습이다. 여기서 ‘쇠퇴’는 절대적인 성장을 멈췄다는 의미가 아니라 제국주의 모순의 증대, 즉, 다른 국가에 대한 위기의 전가와 불만과 균열의 증대, 침략성과 기생성과 부패성의 공존, 인플레이션의 심화와 주기적 경제공황, 저성장 등 위기의 심화, 이 모순을 처리, 극복하기 위한 더한층의 침략성과 제국주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국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자국 내 노동자 인민들한테까지 그 모순과 위기를 전가하는 반동성의 증대와 민주주의의 억압과 파쇼성의 증대 등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정환은 “제국주의론의 좀더 발전된 판본은 미국을 단일하게 행동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이해하기보다 여러 종속국 혹은 동맹국들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제국’으로 설명한다.”고 한다. 제국주의가 국가를 중심으로, 국가와 그 배후에 있는 자국 독점자본의 이해를 위해서 활동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특정 제국주의 국가가 단독으로 움직인다는 말은 아니다. 반대로 오히려 제국주의는 제국주의 간, 비제국주의와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협정이나 블록, 기구를 맺어 활동한다. 나토는 서유럽 국가들의 군사동맹체지만, 그 나토를 움직이고 있는 국가는 미국이다. 1944년 미제국주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알린 브레튼우즈 협정에 의거해 1961년 설립된 국제통화기금(IMF) 역시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 약탈기구이다.
유럽연합(EU)은 유럽국가들의 정치·경제 공동체인데, 이를 개별 국가의 해체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여기에도 미국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고, 유럽연합을 주도하는 국가는 독일이다. 이 유럽연합은 통화의 통일과 개별 국가 간의 재정이라는 모순에 처해 있고, 국가 간 협력의 이면에서 대립과 경쟁이 작동한다. 경제위기 국면에서 이 모순은 더 격화된다. 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Brexit)는 이 모순의 격화를 잘 보여준다.


초국적 자본은 개별 국가를 거점으로 국경을 넘나들며 국제적으로 활동한다는 의미이지 다국적 자본의 의미가 아니다. “여러 종속국 혹은 동맹국들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미국의 모습은 제국주의를 부정하는 근거가 아니라 깡패 제국주의 두목인 미제국주의가 취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조정환은 20세기 후반부터의 ‘탈식민화’를 근거로 제국주의 지배체제를 부정하는데, 이처럼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이 없으니 반제국주의 의식도 없다. 제국주의를 부정하니 제국주의 피억압국가, 피억압 민족도 안중에 없고 이로써 침략에 대한 저항도 부정하게 된다.
여전히 개별 국가는 살아 있고 한 편에는 침략하고 지배하고 억압하는 제국주의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침략 당하고 주권을 침해당하고 억압당하는 (신)식민지 국가가 있다. “제국주의는 죽”은 게 아니라, 한 줌도 안 되는 (독점)자본의 이해를 위해, 한 줌도 안 되는 국가가 수십억, 수백 개 국가를 교살하고 침략하고 지배하고 있다. 죽은 것은 제국주의가 아니다. ‘민족해방’을 부정하고 침략에 맞서는 국가들에 대한 지지를 외면하고, 제국주의의 핵독점에 맞서 자위권의 일환으로 만든 ‘북핵’을 부정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인식이 썩고 부패하여 죽어 버렸다. 이러한 인식은 실천적으로는 미제국주의와 현대 제국주의 체제의 이해에 봉사하게 된다.

 
제국주의 반대 이전에 누가, 무엇이 제국주의인지를 선규명해야 한다

 

사실 이러한 “제국론”을 제외하면 진보진영 내에서 제국주의를 부정하는 세력은 그다지 많지 않다. 문제는 제국주의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제대로 된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올바른 반제국주의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제국주의를 인식하면서도 실천적으로는 반북으로 말미암아 인권담론, 평화담론에 사로잡혀 실제로는 제국주의자들의 이해에 복무하는 제국주의의 진보적 ‘벗’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또한 레닌 《제국주의론》에 대한 인식의 결여, 현대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실제로는 진짜 제국주의인 미제와 서방 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하는 경우도 있다. 이제 우리에게는 제국주의의 참된 성격이 무엇인지, 그에 근거해 누가 제국주의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국주의론은 그동안의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계는 미국·유럽연합·일본·러시아·중국 등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그러한 강대국과 약소국의 지배-예속 관계가 주된 특징이라고 본다. 따라서 제국주의 세계체제의 모순은 각 국민국가 내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제국주의 국가와 피억압 민족의 첨예한 대립이 중층적 구조를 이룬다…
제국주의론의 이런 기본 인식은 지난 세기에는 물론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세계대전이라는 형태로 폭발했던 제국주의 국가 간의 격렬한 경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라는 형태로 지속됐고, 1989~91년 옛 소련 블록 붕괴 이후에는 좀더 다극화한 제국주의들 간의 경쟁으로 격화하고 있다. 최근의 사례가 다름 아닌 2001년 9·11을 기화로 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 및 점령과 이를 둘러싼 서유럽·러시아·중국 등과의 갈등이다.(정성진, 같은 기사)

정성진 교수는 현대 제국주의가 “오늘날 세계는 미국·유럽연합·일본·러시아·중국 등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그러한 강대국과 약소국의 지배-예속 관계가 주된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정성진 교수는 과거 쏘련도 제국주의로 규정하고 당시 냉전을 쏘련과 미국 제국주의 간 경쟁으로, 2차 대전도 제국주의 간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성진 교수는 이어서 “미국·유럽연합·일본”뿐만 아니라 “러시아·중국”도 제국주의로 규정하고 있다. 미제국주의가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중동국가에 대해 자행한 야만의 침략극을 “서유럽·러시아·중국 등과의 갈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비단 정성진 교수의 주장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상당수 ‘좌파’를 자처하는 단체들, 인사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차이나 붐>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인상 깊게 기억하겠지만, 훙호펑은 뚜렷한 좌파적 시각으로 중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바라본다. ‘좌파’라고 하니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고 공산당을 칭송하는 ‘관방’학자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훙호펑은 정확히 그 반대편에 서 있다. 그는 지구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대안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현 중국 체제의 모순과 한계를 신랄하게 폭로한다. 말하자면 그는 홍콩 민주화 시위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독립 좌파 그룹들에 가깝다….
언제나 핵심적인 역할을 한 변수는 자본의 이해관계였다. 이것은 미국의 반대편, 즉 중국 쪽에서 바라봤을 때에도 분명히 드러난다. <제국의 충돌> 제4장 “세력권”은 중국의 자본주의적 성장이 무르익은 2000년대 이후에 중국이 추진한 자본 수출, 남반구 시장 확보, 미국 핵심 산업에 대한 도전 등을 정리한다. 명색이 ‘사회주의’인 중국이 19세기 말 제국주의 국가들을 연상시키는 이런 시도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부의 과잉축적 모순을 해소해야만 하는 탓이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강경 대외 전략 이면에는 심각한 경제적 이해관계가 있다.
훙호펑은 패권 대립의 두 당사국 모두 국내의 경제적 모순을 대외 전략으로 해소하려 하며, 그래서 지구 전체를 놓고 세력권 투쟁을 벌인다고 해석한다. 이 상황은 지난 세기 벽두에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J. A. 홉슨이 당시 열강들의 첨예한 긴장과 대립 이면에 도사린 현실을 진단하며 내놓은 결론과 너무도 유사하다. 국내 재분배라는 또 다른 해법을 한사코 거부한 제국들이 “과잉자본과 과잉생산 능력”을 해소하기 위해 선택한 대안이 오늘날 우리가 ‘제국주의’라 부르는 자본 수출, 식민지-세력권 확보 투쟁 그리고 열강 간 전쟁이었다.([장석준 칼럼] ‘차이메리카’ 시대의 파국…미·중 충돌은 ‘제국들의 충돌’이다” ‘이데올로기’가 아닌 ‘이익’이 지배하는 세계, 프레시안, 2022.11.14.)

현실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의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상의 문제는 어떠한 실천적 입장으로 귀결되는 것일까?

‘신냉전’이 아니기에 다시 생각해봐야 할 논점들

작금의 미-중 다툼이 20세기 중반의 냉전보다는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제국주의 열강 충돌과 더 가깝다면, 이제껏 ‘신냉전’이라는 틀에 익숙해온 우리의 시각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시간을 들여 여러 측면을 검토해봐야겠지만, 당장 다음 두 가지 논점이 떠오른다. 둘 다 우리의 운명에 참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논점이다.
첫째는 이른바 ‘이념’ 동맹 혹은 ‘가치’ 동맹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많은 이들이 대미 동맹을 여전히 냉전 시기의 틀로 바라본다. 마찬가지로 대중 긴장 역시 이 틀로 해석하려 한다. 마치 과거에 미합중국과 대한민국이 반공 혈맹이었듯이 이제는 자유주의 국제 규범을 수호하는 동맹국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중국은 자유주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대적해야 할 상대라는 것이다.
비록 아주 소수이지만, 이런 주류적 틀에 반발하며 이를 뒤집은 시각을 고수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중국을 여전히 모종의 ‘사회주의’ 국가라 바라보며 시진핑 체제의 중화인민공화국이 미국의 제국주의 패권에 맞서 남반구 국가들 혹은 다극화된 새 세상을 위해 분투한다고 믿는다. 이들 중 일부는 이 시각을 연장해, 우크라이나 침략을 자행한 푸틴의 러시아조차 다극화 세계를 열기 위해 싸우는 전사라 추켜세운다.
그러나 두 입장 모두, 냉전 향수병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21세기 지구정치경제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훙호펑의 진단처럼, 미국과 중국이 반세기 전 미국과 소련보다는 한 세기 전 영국과 독일에 더 가깝다면, 어느 쪽을 향해서든 ‘이념’ 동맹이나 ‘가치’ 동맹의 청구서를 들이미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이 시대에 그런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으며,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철저히 냉소적인 ‘이익’ 동맹뿐이기 때문이다….
신, 구 두 제국 중 어느 한 쪽의 지정학적 지배 전략에 맞서겠다고 다른 쪽의 지배 전략에서 자유나 해방의 가능성을 찾을 수는 없다. 그것은 지배자들이 만들어놓은 가상 세계 안에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짓일 뿐이다. 우리에게 ‘지정학 비판’은 필요하지만, ‘대항 지정학’은 필요하지 않다. 해방의 가능성은 오직 지정학 세계 바깥에 있다.(장석준, 같은 글)

동유럽과 쏘련 사회주의의 해체 무렵인 1989년 논문으로 발표되었고 1992년 극우세력인 헌정회에 의해 국내에 단행본으로 출간됐던 《역사의 종언》(프랜시스 후쿠야마)이 있었다. 이 《역사의 종언》은 동유럽과 쏘련 사회주의 진영이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는 시점에 더 이상 공산주의라는 체제의 대안은 없으며 자본주의가 인류의 마지막 생산양식이 되었다는 자본주의자들, 제국주의자들의 승리선언이었다.
극우세력인 헌정회는 이 책을 출간하면서 여전히 국내에 공산주의자들, 저항하는 통일운동세력들을 시대착오 세력으로 극렬 비난했다. 그런데 이 자본주의 승리 선언에 맞춰 고르바초프의 배반적 이데올로기인 ‘신사조’ 페레스트로이카에 경도되어 거기에서 공산주의의 희망을 보았던 혁명조직, 혁명가들이 앞 다퉈 자기‘고백서’를 발표하며 전향 대열에 합류했다. 광주항쟁으로 다시 시작된 혁명의 시대가 가고 청산주의의 시대가 되었다. 사회주의권의 해체와 북에서 재해까지 겹쳐 가중된 고난의 행군, 쿠바에 강요된 ‘특별한 시기’에 조성된 위기를 보며 상당수 통일운동 세력들도 진보운동을 청산하고 난파하는 배에서 뛰어 내리는 쥐새끼들처럼 사회변혁, 사회진보의 대열에서 이탈했다.
그런데 20세기 역사의 종언 선언이 21세기에 이데올로기의 종언 선언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다원주의’ 정의당이 그 당적 표현이고, 장석준뿐만 아니라 사회진보연대가, 사회진보연대에서 나왔지만, 그 세계관, 인식의 근원에서는 하등 다르지 않은 홍명교나 박노자 등 지식인들이 이러한 ‘신좌파’적 무정부주의적 정치적 사조에 막대한 영향을 받고 또 유포하고 있다.

‘이념의 시대는 지나갔다’, ‘거대담론의 시대는 지나갔다’, ‘반미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념 혹은 이데올로기. 계급과 계급투쟁 제국주의와 반제투쟁, 사회성격론, 사회구성체론 등 사회와 역사에 대한 총체적 인식은 더 이상 비집고 들어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인식해야 할 진리도 없다. 분쇄해야 할 주적도 없고 주적이 없으니 통일전선도 없고, 변혁전망도 없고 변혁전망 자체도 무용하다.
이념과 가치를 거부하는 이들의 이념이야말로 현실과 무관한, 현실에 뒤떨어진 이념에 불과하다, 이들의 인식은 서구에서는 후르시초프의 스탈린 탄핵 이후에 들이닥친 반스탈린, 반쏘비에트 노선과 공산주의 운동의 유로꼬뮤니즘의 우경화, 정치적 전망의 상실 속에서 68년 혁명 이후에 만연한, 한국에서는 1990년대 초반부터 물밀 듯이 밀려온 포스트 모더니즘적, 다원주의적 사고, 신좌파적 사고에서 유래했다. 이는 또한 정치적 대안에 대한 회의, 대안 모색 자체가 필요 없는 무정부주의적 사고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현대제국주의 체제를 미중 간 제국주의 경쟁, 미러 간 제국주의 경쟁과 대립으로 보는 관점은 이들만의 관점이 아니다. 심지어 국내 맑스레닌주의를 자처하는 일부 진영(노사과연이 이를 대표하고 있다), 그리스공산당을 비롯해 국제공산주의 진영의 상당수도 이러한 인식에 사로잡혀 있다. 특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미국과 중국 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오늘날 제국주의 체제가 미중 간, 미러 간 패권주의 경쟁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규정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제 제국주의에 대한 일반적 인식, 제국주의 반대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오히려 현대 제국주의 성격을 제대로 밝혀 누가, 무엇이 제국주의인지, 오늘날 반제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규정하는 것이 실천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현대제국주의론의 분석도 역시 제국주의에 대한 고전적 저작인 레닌의 《제국주의론》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레닌은 《제국주의론》의 5가지 표지(특징)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생산과 자본의 집적이 고도의 단계에 달해, 경제생활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독점체를 형성
둘째, 은행자본이 산업자본과 융합하여 ‘금융 자본’을 이루고, 이를 기초로 하여 금융과두제가 형성
셋째, 상품 수출과는 구별되는 자본 수출이 특별한 중요성
넷째, 국제적 독점 자본가 단체가 형성돼 세계를 분할
다섯째, 자본주의 거대 열강에 의한 전 세계의 영토적 분할이 완료

레닌의 제국주의론 표지는 제국주의의 기본적인 특징을 밝히고 있는 지표이다. 레닌은 이러한 지표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조건적이고 상대적인 측면”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레닌은 이 5가지 표지를 통해 제국주의의 성격을 밝히고 당시 진행되고 있는 전쟁의 원인, 제국주의적 성격을 밝혔다. 레닌은 이를 근거로 제국주의는 자유경쟁 자본주의 단계에 비해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산물이라는 점을 밝혔다. 레닌은 제국주의를 최고의 발전단계, 쇠퇴하는 자본주의 최후의 단계라고 규정하였다.
레닌은 당시의 전쟁이 기존에 세계를 분할한 제국주의와 식민지 재약탈과 전리품의 재분할을 위한 신흥 제국주의 세력과의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이로써 제국주의 국가 내부의 사회주의자들은 자국 제국주의에 총부리를 대고 내란을 통해 제국주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의 노동자 민중은 제국주의 체제에서 민족해방 투쟁을 통해 자결권을 쟁취하고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레닌은 《제국주의론》은 제국주의의 경제적 기초를 보여주고 있지만, 경제분석이 목표가 아니라 이를 통해 “현대의 전쟁과 현대의 정치”를 이해하고자 했다. 레닌은 나중에 저자 주에서 “짜리즘의 검열을 의식하면서” 제국주의에 대한 정치적 분석과 폭로를 마음껏 하지 못하고 은유적인 말로 대신했다고 밝혔다. 레닌은 경제분석을 기초로 해서 제국주의 체제의 반동적인 정치적 성격을 밝히려고 했던 것이었다.
레닌은 “제국주의란, 독점체와 금융자본의 지배가 확립되어 있고, 자본수출이 현저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국제 트러스트들 간의 세계분할이 시작되고, 자본주의 거대 열강에 의한 지구상의 모든 영토분할이 완료된 발전단계에 있는 자본주의”라고 규정하고 있다.
레닌은 5가지 표지를 개별적으로 나눠서 살펴본 것이 아니라 통일적인 관점으로 제국주의를 보았다. 독점은 제국주의의 경제적 기초이지만 독점이 곧 제국주의는 아니다. 독점을 기초로 하지 않은 제국주의는 없어도 독점이 곧 제국주의는 아니다. 독점이 곧 제국주의라면 브라질, 멕시코, 한국, 인도, 인도네시아, 남아공 등 자유경쟁 단계를 벗어난 대개의 자본주의 국가가 다 제국주의 국가가 된다. 실제 이를 근거로 독점자본주의인 한국을 제국주의 체제로 규정하는 진보단체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독점체에 있어서도 세계에서 차지하는 독점체의 규모, 위상을 살펴봐야 하고 자본수출에 있어서도 “현저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더욱이 가장 중요한 것은 독점체가 성장해서 금융적으로 세계를 약탈하고 지배하는지 봐야 한다. 영토분할의 경우는 과거 식민지 시대와 다르게 ‘신’식민지 지배로 바뀌었다. 이는 역사적으로는 러시아혁명과 민족해방투쟁의 성과적 측면, 영토적 지배가 가지는 식민지 지배의 난관과 비용, 영국이 가진 식민지 지배권을 미국이 가져오면서 식민 지배 방식의 변화 등 때문이다. 이는 현대의 제국주의 지배가 더욱 세련되고 더욱 고차원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지 (신)식민지배를 부정하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노/정/협

이 기사를 총 420번 보았습니다.

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