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서방의 알바니아 침략

Albanian Life, 1984년, 제30권 제3호

출처: Marxists Internet Archive

번역: 김남기

 

1950년 영국과 미국 정보기관이 알바니아 침공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협조한 사실은 오래전부터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해당 작전에 대한 공식 기록은 런던 공문서보관소와 미국 워싱턴 국립문서보관소 두 곳 모두 제대로 전달된 적이 없으며, 미국의 “정보공개법(Freedom of Information Act)”에 따라 해당 자료를 얻거나 접근하려는 시도 자체가 “국가안보”라는 이유를 들어 거부당해 왔다. 유사하게도, 이 군사작전에 연루된 이들의 경우 작전에 대한 그 어떠한 내용이라도 유출하게 된다면, “공무상 비밀 보호법(Official Secrets Act)”에 따라 중대한 불이익이나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협박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많은 양심적인 영국 공무원들이 “국가 안보”라는 명목을 빌려 장관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정도의 공식 기록까지 비밀로 유지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 순양함 “제너럴 벨그라노(General Belgrano)” 격침과 관련된 기록이 그 사례이다. 이들은 용기 있게 그러한 문서를 유출했으며, 그 결과 최근 화이트홀(Whitehall)은 거리(street)라기보다 운하(canal)와 비슷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비로소 이 심각한 국제법 위반 사건에 대한 일관된 설명을 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영국 외무부와 미국 국무부 모두 오랫동안 이윤을 목적으로 한 자본주의적 사유기업 제도가 매우 합리적이기 때문에 -하늘의 뜻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면!-, 계획경제를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라는 다른 길을 따르는 국가는 반드시 국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와 억압을 통해 이 체제가 부과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영미 제국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회는 반드시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기에 외부로부터의 사소한 “불안정화” 조치만으로도 민중 봉기가 일어나 해당 국가를 소위 “문명화된” 국가들의 공동체로 복귀하는 데 충분했다. 1950년 영미 제국주의자들의 알바니아 침략은 이와 같은 관점에 기반한 것이었고, 그들의 재앙적인 수준의 작전 실패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선전에 스스로 속아버리는 어리석음을 보여준 자화상일 것이다!

침략의 시작과 기원을 알아보기 위해선 영국 정부가 알바니아의 파시스트 협력자들과 전범들을 알바니아 인민들의 분노를 피해 도망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던 시점인 1944년에서 1945년으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연합국 간의 합의와는 달리, 영국은 이후 이들 중 누구도 재판을 위해 알바니아로 송환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들에게 “정치적 난민(political refugees)”의 지위를 부여했다.

1949년 여름 전쟁 말기(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아바즈 쿠피(Abaz Kupi)와 함께 영국 연락장교로 활동했던 닐 맥클린(Neil McLean)과 줄리안 아메리(Julian Amery) 그리고 오버런 허버트(Auberon Herbert, 전쟁 이전 알비니아에서 활동한 귀족 가문 출신의 인물)와 미국 중앙정보국(CIA: Central Intelligence Agency) 소속 장교 두 명은 주로 이탈리아에 거주하고 있던 이 “난민”들을 순회하며, 영국과 미국 정부를 대표하여 이들을 알바니아 정부를 전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위원회로 결집시키도록 설득했다.

1949년 8월 26일 영국 외무부의 지원을 받아 이 전범들 중 핵심 인사 –발리 콤베타르(Balli Kombëtar, 국민 전선)의 지도자 미타트 프레셰리(Mithat Fräsheri), 군주주의 조직 레갈리테티(Legaliteti)의 지도자 아바즈 쿠피(Abaz Kupi), 그리고 나치 점령군과 함께 알바니아 민족해방전선에 맞서 싸웠던 세이트 크리예지우(Seit Kryeziu) 등이 여기에 해당 됨- 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자유 알바니아 위원회(Committee for Free Albania)”를 결성했다. 프레셰리(Fräsheri)는 언론에 다음과 같이 말을 남겼다.

“현재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Enver Hoxha) 정권은 너무나도 약해서 언제든 붕괴할 수 있다.”

같은 달 아테네 주재 미국 대사관이 미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호자 정권에 대한 영국 정부의 반감은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호자를 제거하는 일은 영국에서는 전혀 아쉬움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결성된 위원회가 사실상 알바니아의 합법 정부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달인 1949년 9월, 영국 외무부 장관 어네스트 베빈(Ernest Bevin)이 미국 워싱턴을 방문했다. 그의 방미를 위해 미 국무부에서 준비하고 작성한 브리핑 자료(Briefing Paper)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나온다.

“미국은 현재 모스크바 지배 하에 있는 호자 정권이 사라지기를 원하지만, 그 자리를 어떤 정권이 대신할지가 문제이다. 가장 바람직한 선택지는 현재 로마와 파리에 거주 중인 망명 지도자들로 구성된 알바니아 국민위원회(Albanian National Committee)”가 원하는 것처럼 서방 지향적인 정권을 세우는 것이다. 물론 알바니아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통치될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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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사태가 전개됨에 따라 미국이 영국 및 프랑스와 협조하여 행동할 것

미국이 가능한 한 알바니아의 현 소련 주도 정권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

미국은 알바니아의 친서방적인 요소에 대해 도덕적인 지지를 제공해줄 것.”

알바니아 문제와 관련하여 워싱턴에서 비공개로 진행된 논의에서 베빈은 다음과 같이 발언한 기록이 나온다.

“영국은 엔베르 호자 정권에 대해 끊임없이 적대 정책을 추구해 왔다.

베빈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기회가 생기면 호자 정권을 무너뜨리려 노력하는 데 동의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게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호자가 축출된다면 어떤 정권이 이를 대체할 것이냐고 물었다. 혹시 세워질 수 있는 왕이 있는가?에 대해서도 말이다.”

다음 달인 1949년 10월, 국무부는 워싱턴 주재 영국 대사관의 참사관인 호야 밀러(Hoyar Millar)에게 알바니아에서의 미국 목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각서를 제출했다.

“… 소련이 지배하고 있는 정권을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미국은 이 망명자들이 알바니아 미래를 결정하는 데 있어 중대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미국과 영국 정부는 현재 호자 정권 전복을 목표로 행동을 계획 중인 알바니아 국민위원회의 모든 활동을 통제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접촉을 유지해야 한다”

다른 한편, 침공의 군사적 측면은 영국 정보기관인 MI6 소속 해롤드 퍼킨스(Harold Perkins) 대령에 의해 계획되고 있었다. 또 다른 MI6 장교인 데이비드 스마일리(David Smiley) 대령은 전쟁 중 맥클린(McLean)과 아메리(Amery)와 함께 알바니아에서 쿠피(Kupi)의 영국 연락장교로 활동했으며, “자유 알바니아 위원회(Committee for Free Albania)”가 목적을 위해 모집한 알바니아인들의 훈련하는 것을 조직했다. 그러나 실제 작전은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공동으로 수행될 예정이었다.

1950년 봄, 스마일리(Smiley)는 몰타에 직접 훈련소를 설립했으며, 겉으로는 주둔군 참모부 부참모장(Deputy Chief of Staff)으로 임명되었다. 알바니아인들은 외딴 요새인 “빙겜나 요새(Fort Bingémna)”에서 비밀리에 훈련 받았는데, 이 요새는 험한 길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었다. 훈련 과정은 주로 무기 사용과 무선 조작 교육으로 구성되었다. 스마일리의 참모진에는 알바니아 통역관 3명, 무기 훈련 담당 장교 1명, 병참 장교 1명, 무선 장교 2명이 포함되었다. 이 두 명의 무선 장교는 런던과의 통신을 담당하는 동시에 알바니아인들에게 무선 기술을 교육했다. 스마일리의 아내는 전쟁 중 암호 전문가였으며, 신호의 암호화와 복호화를 맡았다. 훈련 동안 알바니아인들은 출신 지역에 따라 4~6명씩 소규모 부대로 나뉘었으며, 각 부대에는 페달 동력식 라디오가 지급되었다.

한여름이 되자 훈련 프로그램은 마무리됐고, 훈련받은 각 침투 그룹들은 영국 해군 요원들이 승선한 어선을 탄 뒤 일정한 간격을 두면서 몰타를 떠났다. 아드리아해에서 이들은 작은 전통 선박인 카이크(caique)로 옮겨져, 외딴 바위 해안에 야간 상륙했다. 계획은 이들이 내륙으로 이동하여 친구와 친척들을 만나고, 봉기 조직 가능성에 대한 신호를 본국에 보내는 것이었다. 모든 그룹이 출발한 후 몰타 기지는 폐쇄되었고, 스마일리는 그리스로 이동하여 영국 군사사절단(British Military Mission)에 배치되어 겉으로는 명목상 직책을 맡았다. 코르푸(Corfu)에는 무선 기지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침투 작전은 완벽한 대실패였다. 알바니아에 침투한 요원 그룹 대다수가 상륙하자 사살 되거나 포로로 붙잡혔다. 이들 중 일부는 육로를 통해 그리스로 탈출할 수 있었고, 바로 그곳에서 세금 납부자 부담으로 영국으로 이송됐다. 스마일리는 독일에서 자신의 연대에 합류하기 위해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나중에 작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이 작전이 실패한 이유를 영국과 미국 정보기관 사이의 연락장교가 바로 영국의 이중간첩인 킴 필비(Kim Philby)였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물론 현재 알바니아인들은 이와 같은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엔베르 호자는 자신의 저서인 “알바니아에 대한 영미의 위협(The Anglo-American Threat to Albania)”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제국주의자들은 모든 희망을 타락한 세력들에게 걸고, 한 손에는 단검을, 다른 손에는 금을 들고 우리 국민을 위협하거나 뇌물로 매수하여 자신들의 추종자로 만들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보안기관과 인민방위 조직의 영리함, 결단력, 경계심, 신속한 행동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포로로 잡힌 요원들에게 그들의 첩보 본부와 무선 연락을 하도록 강요하며, 본부를 완전히 속였다. 상황은 점점 더 발전하여, 그들이 함정에 빠진 요원들에게 우리가 지시한 대로 모든 것을 전달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들을 재판에 회부했고, 추악한 범죄가 모두 드러난 후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을 내렸다.

우리의 유명한 무선 작전과 알바니아 인민의 지혜, 정의감, 혁명적 경계심이 외국 적들의 계획을 굴욕적으로 실패하게 만들었을 뿐, 일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킴 필비(Kim Philby)의 공적 때문이 아니다. 알바니아를 물어뜯으려 했던 자들은 이 신성한 땅에 이빨뿐 아니라 뼈까지 남기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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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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