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시대에서 청산의 시대로

신좌파 다원주의 노선 무엇이 문제인가?5​

1. 광주학살로 시작된 1980년 ‘불의 시대’

광주에서의 잔학한 학살로 시작된 1980년대는 혁명의 시대였다. 혹자는 불의 시대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헌신, 투쟁, 타도, 공동체 이러한 집단주의와 이를 성취하기 위한 규율이 적용되던 시기였다. 

1980년대 광주에서 내가 만약 저 자리에 있었다면 신군부의 총칼에 맞서 목숨을 내걸고 싸울 수 있었을까? 이런 시대적 문제 앞에서 청년들, 지식인들,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번민했다. 광주에서 신군부의 학살에 분노하던 이들은 학살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는 최근에는 탐사전문기자 팀 셔록(Tim Shorrock)이 미국 기밀문서인 체로키 파일을 폭로함으로써 미국 개입이 다시 한 번 공식 확인되었다. 

당시에도 이미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는 투쟁은 반미투쟁으로 나아갔다. 다시 반미투쟁은 우리의 현대사 전체를 되돌아보게 하였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 이후에 미국은 해방자가 아니라 ‘점령군’으로 진주하게 되었고, 박정희 군사 쿠데타나 역사적 고비마다 미국이 배후에 있다는 역사적 진실을 알게 되었다. 한편 분단이나 미군의 진주, 한미군사협정 같은 이남의 ‘식민지’적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 수십년동안 ‘빨갱이’로 매도되며 금기의 대상이었던 북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그들이 말하는 ‘자주성’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었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박정희 정권 하에서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폭로하고 산화한 뒤에 극단적인 반공체제 하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 산업재해, 무노조, 무권리 상태에서 억눌렸던 노동자들의 투쟁도 터져 나왔다. 이 당시에는 주로 섬유공업에서 여공들, 공순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는 여성노동자들이 민주노조 건설 투쟁을 중심으로 이 투쟁을 주도했다. 그러나 이 투쟁은 아직 극소수의 자각한 노동자들의 투쟁에 머물렀고 극단적인 반공주의 체제 하에서 억눌려 전면적인 정치의식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항쟁 이전에 사북 탄광 노동자들의 거대한 항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북 탄광에서 노동자들의 외침은 잠들어 있는 노동자들을 자각시키는 거대한 항쟁이었다. 신군부 권력 이후에 벌어진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 구로투쟁 등 노동자들이 역사의 주인, 투쟁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위한 기지개를 펴는 투쟁이었다.

학생들은 이른바 ‘위장취업’이라는 당시로서는 비법적 형식으로 노동자들의 삶의 현장으로 끊임없이 찾아들어갔다.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 학살 이후 곧바로 미국을 찾아가 쿠데타에 대한 사후 승인을 받았다. 물론 사후 승인이라는 것은 신군부 쿠데타에 대해 미국과 사전에 모의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공식적 승인을 받았다는 의미다.

전두환 정권은 파쇼적인 탄압과 함께 국풍 대학가요제, 3스(섹스, 스크린, 소포츠) 정책으로 정치의식을 무마시키기 위한 문화적 책략을 사용했다. 이 당시에 “아 대한민국!‘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이 노래는 정권이나 방송국 차원에서 ’건전가요‘로 지정함으로써 대중적으로 전파, 유포시기기도 했다.

대중가수 정수라는 1983년 “아! 대한민국”이라는 노래를 발표하여 “은혜로운 이 땅” 대한민국을 이렇게 노래했다.

아! 대한민국

(박건호 작사, 김재일 작곡)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

이렇게 우린 은혜로운 이 땅을 위해

이렇게 우린 이 강산을 노래 부르네

19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의 피가 체 마르고, 그 피울음을 그치기도 전인 1983년에 “은혜로운 이 땅”은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우리의 마음속에 이상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이라는 이상향으로 급변했다. 게다가 “농촌에 기름진 논과 밭 저마다 자유로움 속에서 조화를 이뤄 가는 곳 도시는 농촌으로 향하고 농촌은 도시로 이어”지는 도농복합체의 이상촌이 되었다. 

농민의 자식들은 농촌의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고 도시에서는 다시 저임금, 열악한 주택 조건에서 도시 빈민이 형성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현실에서 소망하는 모든 일들이 다 이뤄질 수 있다는 노래가 전국방방 곳곳에 울려 퍼졌으니 이 얼마나 초현실주의적인 현실인가? 이러한 초현실주의적 문화는 현실의 고통과 어둠을 묻는 마취제와 같은 것이었다.

박정희 시대인 1975년 제정된 내무부 훈령 410령을 근거로 거리를 배회하는 부랑인들을 단속하는 한국판 ‘부랑자 단속법’은 전두환 시대에 와서도 계속됐다. 전두환은 삼청교육대로 신군부식 부랑자 단속법을 계속했고, 이 단속으로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인사들도 인권을 유린당하면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더불어 형제복지원에서 영장도 없는 무법적 구금과 살해, 인권유린 등이 자행되면서 형제복지원에서만 1975년부터 1988년 동안 657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6월 항쟁이 아니었다면 형제복지원에서의 인간 살해는 계속됐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 앞에서 1980년대는 오늘날 경멸받고 있는 역사적 인식, 거대담론이 작용하던 시기였다. 이 당시에는 노동자 계급의 무권리 상태, 군사독재에 의한 개인 인권의 실종과 유린 상태, 통일논의에 대한 파쇼적 탄압, 박정희 체제에 이은 반공주의 백색테러와 미국에 대한 숭배의식 등으로 개인의 인권, 권리와 거대담론 간의 불일치, 괴리가 없었다. 

그러나 6월 항쟁과 직선제의 쟁취, 87년 노동자투쟁과 전국적인 민주노조의 결성, 민주주의의 성취 등으로 이 사회는 앞으로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 당시 국가보안법의 탄압을 뚫고 금서였던 《자본론》이 번역됐으며 진보적인 서적들과 북과 관련한 책들이 앞 다퉈 출판되기도 했다.

한국사회 모순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사회성격논쟁(혹은 사회구성체)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국사회가 여전히 (신)식민지 사회이니, 주변부 자본주의니 파시즘이니 국가독점자본주의니 하는 논쟁이 계속됐다. 이러한 논쟁은 단순하게 학구적인 논쟁만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대중운동과 결합했다. 전두환 파쇼 정권과 투쟁하고 미제국주의를 이 땅에서 내쫓고 분단된 조국을 통일시키고 노동자들의 노동3권을 쟁취하고 노동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들을 논리적, 사상적으로 표현한 것들이었다. 이 논쟁들은 다 한국사회의 모순들, 부조리들을 해결하기 위한 것들이었지만, 이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한 순서, 방법, 집중성 등을 두고 무수한 정파들이 생겨났다. 

1980년대는 통일운동과 노동운동, 민주화 운동, 빈민운동, 농민운동과 지식인 운동, 청년학생 운동이 고양되고 이를 논리적으로 인식하는 이른바 사회과학의 르네상스 시대가 펼쳐졌다. 진보적 청년과 지식인들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다시 역사의 주인으로 떠오른 노동자계급을 중심계급이라고 인정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전통적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고 외국 영화, 외국 문화, 외국문학을 일방 동경하는 대신에 우리 전통 민족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도 나타났다. 이 시기에 전통문화 계승은 국수적인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들 속에서 민중적으로 발전했다. 민중문학도 제도권 반공주의 학습에 반발하여 역사와 사회를 새롭게 배우자 하는 학습운동의 열풍도 뜨겁게 일어났다.

2. 소비에트권의 붕괴와 함께 시작된 1990년대 청산주의의 시대

그런데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동유럽과 소련사회주의 해체라는 격변이 일어났다.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진영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 진영 간의 ‘냉전’에서 승리한 자들은 제국주의 진영이었다. 미국 국무부에서 일했던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에서 이제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났고, 자본주의 이후 자본주의와 다른 새로운 시대는 없다고 선언했다. 맑스가 인류역사 발전을 원시공산제-고대노예제-자본주의-공산주의로 나눴는데, 이제 공산주의 체제가 망했으니 자본주의가 인류의 마지막 생산양식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승리 선언문이다. 

그런데 이념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은 실제로는 무이념의 시대가 아니라 일방적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의 독주시대가 계속된다는 의미다. 미국 중심의 패권주의, 미국 예외주의, 미국 단독의 깡패 경찰주의가 개막된 것이다.

1990년대 중반에는 이러한 전 세계적 격변으로 인한 국제적 고립과 제국주의 공세의 고조, 게다가 자연재해 등까지 겹쳐 소비에트권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던 조선과 쿠바를 “고난의 행군”과 “특별한 시기”라는 미증유의 난관으로 몰아갔다. 중국은 개혁개방으로 공산당이 무너지고 자본주의로 변모하는 것은 기정사실인 것처럼 여겨졌다.

국제적으로 깡패 미제국주의의 소비에트권이라는 대항자가 사라지자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계속해서 일극 체제가 강화되고 서방의 노동자들은 투쟁으로 쟁취한 복지체제를 강탈당해야 했다. 유고 내전처럼 사회주의 하에서 오순도순 사이좋게 살던 민족들은 제국주의가 부추긴 분쟁으로 인해 내전이 벌어져 수십만이 서로 죽고 죽이는 살상극을 벌였다.

이러한 80년대 말과 90년대를 넘어서 진행된 역사적 격동으로 인해 이 때부터는 1980년대와 정반대 방향으로 지적 흐름, 사상적 흐름이 시작됐다. 사상이 무너지고 조직이 무너지고 (대중)운동이 무너졌다.

이 사회와 이 사회 모순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근본적으로 변화, 변혁하기 위한 논의들은 이제 청산의 대상이 되었다. 이 사회를 근본개조한다는 혁명의 낙관적 전망 대신에 낙담, 절망, 회의와 동요가 넘쳐났다. 자기 삶을 다 바쳐 투쟁했던 투사들 사이에서 자기 삶과 세계관을 부정하는 이른바 ‘고백’ 유의 회의적 자기고백들이 시작되었다. 전망을 가지고 노동현장으로 뛰어든 진보적인 학생들은 상당수가 현장을 떠났다. 이른바 ‘전위’조직을 만들자고 하던 혁명세력들은 대다수 합법운동으로 전환하거나 운동 자체를 청산하게 되었다.

문학에서도 이러한 청산주의 사조들이 판쳤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던 공지영의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1989),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 》(1991),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1993) 같은 후일담 소설이나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 같은 최영미의 시가 갈 길을 잃은 청년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언론에서는 이를 부각시켰다.  

현실 사회주의권이 해체되어 전망을 상실하고 “세상이 변화했다”는 게 이들의 청산의 이유였다. 그러나 역사적 격변이 진보적인 청년들과 학생들, 지식인들과 민주인사들, 급진적 조직들이 운동을 진보적 운동을 청산하기 하고 변절하거나 투항하거나 무력해 지면서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을 때 역설적으로도 여전히 변화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었다. 현실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새롭고 빠르게 변화한다. 그러나 겉으로 보아서는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 그 이면에서 변화하지 않은 불변의 현실이 있다. 그것은 이 사회의 근본모순이다. 

우리들 외부에서 격변이 시작됐지만, 부조리하고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우리의 현실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않았다. 외세가 이 땅에서 물러난 것도 아니었다. 노동자들이 착취 없는 삶을 사는 것도 아니었다. 분단문제가 해결되고 통일이 달성된 것도 아니었다. 현실의 근본적 모순과 부조리는 그대로 계속되는데도 불구하고 현실을 인식하는 인식, 신념들이 먼저 변화해간 것이다. 노동자 민중의 목숨 건 투쟁으로 삶이 더 나아지고 우리사회가 더 변화했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부조리, 모순들, 억압구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90년 민중가수 정태춘은 대중가요 1983년 “아! 대한민국”과 똑 같은 제목으로 비틀고 풍자해서 대한민국의 변치 않는 비참하고 저주스런 현실을 고발했다.

아, 대한민국

(정태춘 작사 작곡)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사랑과 순결이 넘쳐 흐르는 이 땅

새악시 하나 얻지 못해 농약을 마시는 참담한 농촌의 총각들은 말고

특급호텔 로비에 득시글거리는 매춘 관광의 호사한 창녀들과 함께

우린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나

아 우리의 땅, 아 우리의 나라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기름진 음식과 술이 넘치는 이 땅

최저임금도 받지 못해 싸우다가 쫓겨난 힘없는 공순이들은 말고

하룻밤 향락의 화대로 일천만원씩이나 뿌려대는 저 재벌의 아들과 함께

우린 모두 풍요롭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만족하게 살고 있지 않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저들의 염려와 살뜰한 보살핌 아래

벌건 대낮에도 강도들에게 잔인하게 유린당하는 여자들은 말고

닭장차에 방패와 쇠몽둥이를 싣고 신출귀몰하는 우리의 백골단과 함께

우린 모두 안전하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평화롭게 살고 있지 있나

아 우리의 땅 아 우리의 나라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나

아 우리의 땅 아 우리의 나라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양심과 정의가 넘쳐 흐르는 이 땅

식민 독재와 맞서 싸우다 감옥에 갔거나 어디론가 사라져간 사람들은 말고

하루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을 휘두르는 저 민주인사와 함께

우린 너무 착하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바보같이 살고 있지 않나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거짓 민주자유의 구호가 넘쳐 흐르는 이 땅

고단한 민중의 역사 허리 잘려 찢겨진 상처로 아직도 우는데

군림하는 자들의 배부른 노래와 피의 채찍아래 마른 무릎을 꺾고

우린 너무도 질기게 참고 살아왔지 우린 너무 오래 참고 살아왔어

아 대한민국 아 저들의 공화국 아 대한민국 아 대한민국

정태춘이 그린 1990년의 대한민국의 참담한 현실은 소비에트권의 해체라는 격변 사태에도 불구하고 계급적, 민중적, 민족적, 대중운동 차원에서 투쟁을 계속하도록 했다. 

노태우 정권은 이에 앞서 1989년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던 교사 1천527명을 비롯해 89년 전후 사립학교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200여명을 해직시키고, 200명이나 되는 교사들을 시국사건 관련 임용에서 제외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노태우 정권은 1980년 6월에는 해고자 복직서명을 주도한 전교조 교사 1천여 명을 중징계하는 파쇼적 만행을 자행했다.

노태우 정권 하에서 현대중공업에서는 어용노조의 직권조인에 맞서 노태우 쿠데타일인 12월 12일부터 128일 투쟁을 전개했다. 이 공장 점거 투쟁 과정에서 노조파괴를 위한 1.8 테러사건과 2.21 식칼테러사건이 벌어졌다. 골리앗 고공에서의 점거 투쟁도 시작됐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파쇼 군사 정권의 대대적인 검거 작전에도 불구하고 ‘평등사회’, ’노동해방‘을 내건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 출범했다. 

노태우 정권은 또한 1990년 4월 3일 방송 장악을 위해 KBS 방송민주화에 호의적이었던 서영훈 사장을 비롯해 윤혁기 부사장 등 임원 및 간부 4명을 해임시키고 서기원 서울신문 사장을 낙하산으로 임명했다. 노태우 정권은 이에 저항하던 KBS조합원 및 사원 117명을 백골단을 동원해 강제연행해 갔다. 노태우 정권은 정권에 항의하여 방송 민주화를 위해 농성을 하던 노동자들을 강제연행하고 또다시 333명을 싸우던 경찰측은 밤 11시 45분에 ‘여의도 진압작전’이란 명칭으로 KBS 농성 강제해산에 돌입해 50여분 만에 본관 2층 로비에서 사원 333명을 강제로 끌고 갔다. 이 투쟁으로 14명의 노조 간부들이 구속됐다.

1991년에는 한진중공업 박창수 열사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 의해 타살을 당하는 천인공노할 일이 벌어졌다. 강경대 열사가 백골단에게 타살당하고 김귀정,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김기설 등이 잇달아 분신 저항을 하며 극악한 탄압만큼이나 극렬한 저항이 이뤄졌다.

여기에 노태우 정권은 강기훈 씨가 김기설 열사 유서 대필을 했다고 구속시키는 희대의 날조극을 벌이기도 했다. 

6공 시절 4,573명의 노동자들이 노조활동 관련해 강제해고를 당했다. 이는 하루 3.1명꼴이고 한 달 93.3명 꼴이다. 부당해고자들 중 복직된 노동자들은 3.9프로인 177명에 불과하다.(전노협, 전국노동자신문 57호, 1992년 5월 6일자 참고) 이것만 보더라도 노태우 정권 하에서 노동자들이 얼마나 혹독한 탄압을 당했는지 잘 알 수 있다.

1988년 당시 779명에 달하던 양심수는 노태우 정권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1989년에는 1,515명, 1990년에는 1,812명, 1991년 1,352명 등으로 증가해 6,614명에 달하며 감옥은 양심수로 넘쳐났다. 특히 1991년 4월은 노태우 정권의 야만적 탄압이 극한에 달한 시점이었다.

기층의 노동자 민중은 계속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도 청산주의에 빠진 지식인들과 정치조직의 우경화와 탈주는 계속됐다.

이즘에 세계 진보운동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안기부 탄원서’ 사건이 벌어지게 됐다. 1991년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삼민동맹, 노동계급이 하나로 합쳐 한사노당(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결성하려 하지만 곧바로 안기부(현재 국정원)에 의해 침탈을 당하게 된다. 이들은 1992년 전위정당 노선을 전면 폐기하고 합법주의 운동을 하겠다는 내용의 굴욕적인 탄원서를 안기부에 제출하는 치욕적인 작태까지 연출한다.

탄원서

1. 저희들은 92년 1월 17일 경찰당국이 발표한 ‘한국 사회주의 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 사건 관련자들로서, 본 사건으로 이미 구속된 주대환씨 등 4인의 석방과 본 사건에 대한 관계당국의 관대한 조치를 탄원합니다.

2. 저희들은 세간에 본 사건이 합법적인 진보정당에 대한 정부 당국의 비우호적 태도로 비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3. 경찰당국에서는 본 사건이 합법적으로 등록된 ‘한국 노동당(가칭)’과는 무관한 것으로서,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에 해당되는 비합법조직, ‘한국 사회주의 노동당 창준위’에 대한 수사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강조하고 싶은 중요한 사실은, 경찰당국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91년 7월 결성된 ‘한국 사회주의 노동당 창준위’는 91년 12월 조직원의 자발적 결의에 의해 해산되었다는 것입니다. … 91년 12월 조직의 해산 이후, 이 조직의 성원들은 정부당국에 합법적으로 등록한 ‘한국 노동당(가칭)’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92년 2월부터는 91년 11월 18일 대통령께서 직접 그 대표자들을 면담하신 바 있는 ‘민중당’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4. 91년 11월 18일 대통령께서는 민중당 대표자들과의 면담자리에 “합법적인 진보정당운동을 보호, 육성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셨습니다. …

5. … 저희는 진보세력의 변화 중 관계당국에서 주목해야 할, 각별히 중요한 의미를 띠는 사건으로서 ‘한국 사회주의 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의 자발적 해산을 꼽고자 합니다.

이 조직의 해산은 그간 노동운동 등의 정치적 그룹이 지향해 온 ‘비합법 전위조직노선’, 세칭 ‘지하조직노선’이 개명한 시대에 사는 일반 국민에게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으며, 이러한 노선으로는 이 사회의 발전에 궁극적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6. 또한 ‘비합법 전위조직노선’의 폐기는 그간 진보세력 일각을 지배해 온 ‘폭력혁명노선’에 대한 부정으로 직결됩니다. …

7. 저희들의 생각의 변화에는 한국 사회의 거대한 변모가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요인으로 사회주의권의 몰락이라는 세기적 대격변의 영향을 들 수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이름 아래 노동자의 국가로 알려져 왔던 사회주의 국가가 실은 공산당의 일당 독재에 다름 아니었음을 많은 사람들이 확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회주의권의 현실을 하나하나 목도하면서 저희들은 사회주의권에 대한 그간의 동경을 내버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

8. 비합법 전위조직으로서의 ‘한국 사회주의 노동당 창준위’의 해산에서 합법정당으로서의 ‘민중당’으로의 합류에 이르는 과정은 저희들의 이런 사고의 전환을 행동으로 증명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밝힙니다. …

9. 마지막으로 관계당국에 간곡히 말씀드리고 싶은 바는, 본 사건의 처리 방침이 4인의 구속자와 저희들 관련자들뿐이 아니라, 여전히 비합법 조직운동을 하고 있는 많은 젊은이들의 운명을 규정할 것이며, 부분적으로는 이 사회의 건전한 발전 여하에 영향을 미치리라는 점입니다.

관계당국에서 현명한 결단을 내리신다면, 이는 구시대적인 비합법 조직 운동에 매달려있는 많은 진보세력을 합법정당으로 나오게 하는 물꼬를 트는 역사적 결정이 될 것입니다. … 다시 한 번 관대한 조처를 호소하며, 인사를 대신합니다.

1992. 2. 24

황광우 정광필 구인회 임영탁 최정식 이상민 윤영상 김성은 이영이 박병우 박용준 조근래 신지호 한승주 이상귀 조진태 안명균 유병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이름 아래 노동자의 국가로 알려져 왔던 사회주의 국가가 실은 공산당의 일당 독재에 다름 아니었음을 많은 사람들이 확인하였”다는 인식에서 보듯, 이들은 한때 자신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무산자 민중독재를 지지하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지금도 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원칙은 맞는데 그것이 일당독재, 개인독재로 변질되어서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독재는 폭압과 전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지배당하냐”의 문제이고 어느 계급의 이해를 집단적으로 대변하는 독재냐의 문제이다. 이는 수천 년 동안 지배와 억압, 탄압을 당해왔던 기존 피억압자, 피수탈자들이 혁명으로 새로운 사회의 주인이 되어 수천 년 동안 토지를 독점하고 부와 권력을 독점하며 민중을 지배해 왔던 자들, 세력들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억압하는 정당한 ‘민중독재’이다. 이 ‘민중독재’가 없다면 혁명으로 분쇄된 과거의 억압자, 수탈자들이 호시탐탐 과거로 복구하려고 노리기 때문에 민중독재는 필수적이다. 이러한 의미의 ‘독재’라면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그 프롤레타리아와 민중의 이해를 집중하고 있는 당‘독재’도 문제 삼거나 대립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낭만적이고 공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와 당의 필요성을 인정할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렇다면 지도자와 대중,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당, 아래와 위를 대립시키는 것은 무정부주의적인 인식이다. 지도자 중에서도 대중들에게 군림하는 지도자가 있는가 하면 인민대중을 하늘로 떠받들고 인민대중의 이해를 실현하는 것을 정치적 최고목표로 삼는 지도자가 있기 때문이다. 당도 마찬가지다. 

기존 노동자 국가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당독재로 변질되어서 망했으면 그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문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해서 문제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당독재로 변질되는 것은 필연이고 이로 인해 사회주의권이 해체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사회주의 동경을 버리고 진보적 운동의 청산을 정당화 하고 있다. 

먼저 그것이 자신들이 우익 백색테러 독재의 상징인 국가정보원에 탄원서를 제출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당독재로 더 나아가 일인독재로 변모되었다는 인식에서는 이들이 얼마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낮은 인식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들이 청산주의, 패배주의에 사로잡히게 된 계기가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해체 때문인데, 이들 사회주의 국가들은 이들이 인식하는 것과 정반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당독재의 문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당이 제국주의와 싸우면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이해를 철저하게 대변하고 인민대중을 중심에 세우면서 군대와 노조, 사회 전체를 올바로 이끌어나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국가에서 당의 일당독재가 문제라는 인식은 다당제라는 자본주의 정치제도가 마치 민의와 ‘민주주의’의 척도라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다당제에서 그 다당은 누구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는가? 노동자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진보적인 정당을 제외하면 기존 정치를 지배하는 정당들은 다당으로 포장되어 있고, 심지어 선거로 권력자들이 정기적으로 교체되기도 하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기존 기득권자들, 자본가들, 부자들의 이해를 대변한다. 하나의 정당이 민중의 신뢰를 잃으면 다른 당이 대신 권력을 잡고는 또 기존 정당의 반민중적 행태를 되풀이 한다. 민중은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하는 권리 외에는 정치무대에서 언제나 소외당해 있다. 민중의 민주주의, 가난한 자의 권리는 언제나 무시당하고 소외당한다. 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는 “사회주의권에 대한 그간의 동경을 내버”리면서 결국은 자본주의의 억압적, 관료적 정치질서에 투항하고 이 질서에 적극 편입하여 새로운 반민중적 정치질서를 떠받치는 파렴치한 정치적 기생충들이 되었다. 

이 명단에 버젓이 이름을 올린 자들, 이들 조직의 핵심 활동가들 중 상당수는 현재 민주당이나 국민의힘 국회의원이나 도지사 등 권력자들로 행세하고 있다. “저희들의 생각의 변화에는 한국 사회의 거대한 변모가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인으로 사회주의권의 몰락이라는 세기적 대격변의 영향을 들 수 있”다고 버젓이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주의권에 대한 그간의 동경을 내버”리고 노태우 정권에 투항했지만 보다시피 변화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자신들의 인식이고 신념이고 사상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이 당시에 이른바 “북방외교”로 해체되고 있었던 쏘련과 개혁개방의 길을 가고 있었던 중국과 수교하였다. 노태우 정권의 북방외교는 쏘비에트의 해체와 당시만 하더라도 개혁개방으로 자본주의로 변모할 것이 분명한 중국의 미래를 예상하고 더불어서 당시에 타오르던 통일논의를 체제내화 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더불어 노태우는 탄원서에 나온 것처럼, “민중당 대표자들과의 면담자리에 ‘합법적인 진보정당운동을 보호, 육성하겠다’”면서 기층 운동은 극렬한 탄압을 가하면서 흔들리고 동요하는 운동세력들은 포섭, 개량화 시키려고 하는 양동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다.

민주화 투쟁을 같이 해왔던 김영삼은 3당 합당으로 노태우 군사정권 품으로 뛰어들어 민자당을 만들었다. 3당 야합 이후인 1993년 김영삼은 군정종식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권력을 잡고 군사정권을 연장했다. 김영삼 정권 들어서 동요하고 흔들리던 진보운동 진영은 군사독재의 퇴장과 민주주의의 진전이라는 미명 하에 전투적 노동운동 위기, 맑스주의 위기라는 위기담론을 유포하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권 시절에 다시 한 번 진보운동 진영 중 투항자들이 대거 생겨났다. 1993년 김영삼의 집권은 진보운동 진영 내에서 불안정하게나마 군정이 종식되고 민주주의가 진척된 상황이니 더 이상 전투적 노동운동, 학생운동은 필요하지 않은 것 아니냐 하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때를 전후로 쏘비에트권 해체 이후 노동운동 위기론, 학생운동 위기론이 다시금 등장했다. 진보적 사회진출, 애국적 사회진출이니 하며 변화된 세상에 맞춰 진보 운동도 기조를 맞춰야 한다는 주장들이 앞 다퉈 나왔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처럼 김영삼은 1990년과 1991년에 대중적으로 시작된 8.15 범민족대회와 범청학련 통일대축전 남측 행사 같은 유독 통일운동에 대해서는 극렬한 탄압을 지속했다. 학생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영삼 정권은 1996년 한국대학생총연합회(한총련)을 이적단체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수만 병력과 헬기, 각종 진압장비를 동원해 연세대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청년학생들을 고립무원의 상태로 내몰았다. 김영삼 정권은 수천 명 학생을 강제 해산시키고 54명을 구속하고 시위가담자 1천 7백여 명을 연행하는 전대미문의 폭력을 자행했다. 전투성은 군사독재 시절의 유산에 불과하고 이른바 “개명한 시대”, 명목적 민간정부 하에서 이러한 야만적인 폭력이 자행됐다. 이후로도 한총련을 고사, 해체시키기 위한 탄압을 계속했다. 이 탄압으로 대중적인 학생운동, 통일운동은 많이 약화됐다. 그러나 탄압만으로는 대중운동이 무너지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1980년대에 더 극심한 탄압 속에서 이미 대중운동은 괴멸을 당했을 것이다.

“세상이 변했다”며 위기론을 제출하는 위기론자들 자신들의 운동적 위기, 진보적 세계관의 위기였다. “세상이 변했다”는 담론은 세상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노동자 민중의 투쟁에 따라 진보적으로 변화·발전했다는 의미로서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기존의 진보적인 운동노선, 세계관도 그에 발맞춰 변해야 한다는 투항논리에 다름 아니었다. 지금이 최선의 세계이니 진보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한 투쟁은 의미가 없다는 자기변호론이었다. 변화 발전하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을 포기한 패배주의, 좌절, 낙담의 표현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자신감과 전망의 상실, 진보적 세계관의 동요, 사상의 후퇴가 투쟁의 후퇴, 조직의 후퇴를 낳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상적 동요, 혼돈으로 방황하고 있던 많은 지식인들, 청년들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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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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