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의 정치적 특성과 ‘사회주의’를 내건 유사 무정부주의자들

* 이 글은 《맑스주의와 무정부주의》에 실린 글입니다.(편집자 주)

 

1. 아나키즘의 정치적 본질은 무정부주의이다

 

무정부주의의 정치적 본질은 무엇인가?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국가론의 핵심을 예로 들면서 이와 대비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정치적 본질에 대해 정리하고 있다.

무정부주의에 대항한 자신의 투쟁의 진정한 의미가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필요로 하는 ‘혁명적이고 잠정적인(transient) 형태’의 국가를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잠정적으로만 국가를 필요로 할 뿐이다. 우리는 목표로서의 국가의 폐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무정부주의자들과 결코 의견을 달리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피억압계급의 잠정적인 독재가 계급을 폐지하는 데 필수적이듯이, 착취자에 대항하여 국가권력의 도구와 원천들과 수단들을 잠정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가장 날카롭고 명확한 방식으로 무정부주의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즉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이란 멍에를 벗어던진 후에 ‘자신의 무기를 손에서 놓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들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하여 자본가에 대항해서 무기를 사용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만약 ‘잠정적인 형태’로서의 국가가 아니라면, 하나의 계급이 또다른 계급에 대항하여 무력을 체계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다.(레닌, 《국가와 혁명》, 김영철 옮김, 논장)

이를 통해 보면, 맑스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바쿠닌주의 같은 무정부주의의 경우)의 공통점은 (자본주의) 국가의 파괴와 국가의 사멸에 대해 동의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맑스주의자들은 기존 국가를 파괴한 뒤에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가 ‘잠정적인 형태’로 필요하다고 보고 있는 반면에, 무정부주의자들은 곧바로 국가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맑스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가 필요한 핵심적인 이유는, 생산을 계획적·집단적으로 조직하기 위하여, 기존 착취자들의 반혁명 음모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강화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들은 어떠한 형태의 국가도 반대한다. 그런데 맑스주의자들이 무정부주의라고 주장하는 아나키스트들은 정작 자신들의 정치적 본질이 무정부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국사회에서 아나키즘이라는 화두를 품고 살다보면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아나키즘은 정부를 부정하는 테러리즘 아닌가요?”, “아나키스트도 투표를 하나요?”, “아나키스트도 정당활동을 하나요?”, “직접행동으로 세상이 바뀌나요?” 사실 아나키스트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인데,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런 점이 궁금하다. 왜냐하면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강력한 국가체제인 한국에서 무(無)정부를 꿈꾸는 사람들은 비(非)현실을 넘어 반(反)현실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런데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해석하는 건 심각한 오해이자 편견이다.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골드만, 유자명 등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을 강제적인 억압에 반대하는 ‘반(反)강권주의’로 받아들였다. 국가만이 아니라 경제, 문화적인 억압 모두에 반하는 사상이 바로 아나키즘이다. 중앙집권화된 국가권력, 독점된 자본, 표준화되고 획일화된 문화, 가부장적인 권력을 거부하는 사상이 아나키즘이고, 아나키즘은 자율적인 개인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추구했다. 그래서 무정부주의로는 아나키즘을 절반도 설명하지 못한다.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인가”, 이후연구소, 2012. 5. 19.)

“정치적 테러”는 아나키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나키즘의 조류 중에서 가장 극단적이고 혁명적인 바쿠닌주의의 경우에 “정치적 테러”를 아나키즘을 실현하는 주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정치적 테러’는 아나키즘 조류의 일부가 사용하는 정치적 수단이라는 말은 “정치적 테러”를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아나키즘도 있다는 것이다. 아나키즘 조류 일부의 정치적 특성을 그 본질이라고 할 수도 없다.

다음은 혼란스럽게 표현되어 있고, 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는 아니라는 것을 위해 작성되었지만 실은 아나키즘의 정치적 본질이 바로 무정부주의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를 잘 보여주는 글이다.

아나키즘도 하나의 사상이지만, 다분히 ‘이상향’을 꿈꾼다. 문제는, 다른 사상과는 달리 아나키즘은 ‘모든 권력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 물론 아나키즘은 ‘국가’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국가는 권력의 행사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 그 권력을 반대하고 부정하는 아나키즘과 국가는 늘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 국가권력은 그 속성상 통치와 지배에 순응하는 국민을 원한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근본적으로 국가권력을 반대하고, 불복종한다 … 아나키즘이 왜 이다지도 국가권력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대립각을 세우는가? 아나키즘의 어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아나키(anarchy)‘는 ‘시원, 근원, 통치 혹은 지배’을 뜻하는 그리스어 ἀρχός(arkhos)에서 유래한다. 이 말에 “~이 아니다, 혹은 ~이 없다(not, without)”는 것을 뜻하는 부정접두사 ἀν(an)가 결합하여 ‘아나키’가 만들어졌다. ‘아나키’란 본래 “통치 혹은 지배가 없음”을 의미한다. 아나키즘(anarchism)은 ‘아나키’에 “사상이나 주의”를 나타내는 ‘이즘(-ism)’이 결합한 것이다 … 아나키즘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국가와 정부의 폐지’가 아니라 ‘권력과 권위, 혹은 지배와 통치의 폐지’다. 이 입장에 선 아나키스트들은 전자를 통한 후자의 목표, 즉 ‘국가와 정부의 폐지를 통한 권력과 권위, 혹은 지배와 통치의 폐지’라는 목표를 이루고자 하였다. 다수의 아나키스트들은 이 의미의 사상 및 운동을 전개하면서 무력이나 폭력 수단을 사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다”라는 부정적 인식이 고착되었다.(채형복(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칼럼] 아나키와 아나키즘: 기원과 의미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는 자의 절대자유-아나키즘(2), 뉴스민, 2015년 4월28일)

‘국가’가 가장 잘 조직된 ‘권력’의 중심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모든 권력을 반대한다”는 아나키즘이 “‘국가’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아나키즘은 ‘국가’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라면서도 “아나키즘은 근본적으로 국가 권력을 반대”한다는 주장도 심각하게 배치되는 주장이다.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명제와 “근본적으로 반대”한다는 주장은 하나로 성립될 수 없는 주장이다.

게다가 “아나키즘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국가와 정부의 폐지’가 아니라 ‘권력과 권위, 혹은 지배와 통치의 폐지’이다”라는 명제와 “아나키스트들은 전자를 통한 후자의 목표, 즉 ‘국가와 정부의 폐지를 통한 권력과 권위, 혹은 지배와 통치의 폐지’라는 목표를 이루고자 하였다”는 명제도 서로 배치되는 주장이다. 이 명제가 말하는 것은 아나키즘은 “권력과 권위, 혹은 지배와 통치”를 궁극적으로 폐지하는 것인데, 그 수단은 바로 “국가와 정부의 폐지”이다.

맑스주의에서 국가의 본질은 바로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조직화된 폭력이다. 맑스주의는 자본주의 국가 권력을 타도함으로써 기존 자본의 “지배와 통치”를 철폐하고자 한다. ‘아나키’란 본래 “통치 혹은 지배가 없음”을 의미하는데, 그 어원을 통해 볼 때도 아나키즘은 곧 무정부주의이다. 아나키즘의 본질이 무정부주의라는 주장을 반박하려면 국가 권력의 본질이 “통치와 지배”에 있다는 맑스주의 국가론의 핵심을 반박해야 한다. 그런데 “국가는 권력의 행사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는 윗글 필자의 주장에 비춰볼 때도 아나키즘의 본질은 역시 무정부주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인 바쿠닌도 분명히 하고 있는 점이다.

나는 공산주의를 싫어한다. 그것은 자유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 없이는 인간적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공산주의는 사회의 모든 세력을 집중하여 국가에 흡수시키려 한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재산을 국가로 집중시킨다. 이와는 반대로 나는 국가의 폐지를 바란다. 국가의 권위와 보호라는 원리가 근절되기를 바란다. 국가는 도덕과 문명을 구실로 한층 인간을 노예화 하고 억압하고 착취하고 약탈하였다.(《아나키즘》, 玉川信明, 오월)

여기에는 바쿠닌이 베른에서 열린 ‘평화자유동맹’ 회의에서 열린 연설에서 한 발언 핵심이 담겨 있다. 1872년 아나키즘 국제 대회에서는 자신들의 정치적 핵심을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1. 프롤레타리아가 달성해야 할 최대의 의미는 일체의 정치적 권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2. 정치적 권력을 파괴하기 위한 소위 혁명적 임시 정부의 권력과 같은 조직은 모두 속임수에 불과하다.

3. 일체의 부르주아 정치를 배제하고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는 사회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연대를 공고히 해야 한다.(같은 책.)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국가,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포함하여 “일체의 정치적 권력을 파괴”하는 무정부주의가 아나키즘의 본질이라는 것이 여기서도 분명하게 표현된 것이다. 그런데 아나키즘은 “사회 혁명”을 주장하는데, 이 말은 기존 (자본주의) 국가 권력을 타도하고 새로운 권력을 세우는 정치 혁명을 반대한다는 의미이다.

소위 혁명이라는 것은 낡은 권력을 뒤엎어 새로운 권력을 수립하는 것이지만 새로운 권력이 다시금 민중을 억압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악순환 되는 정치 본연의 모습은 부정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정치혁명 그 자체가 부정된다.(같은 책.)

맑스주의가 정치 혁명을 통해 새로운 권력을 세우고 이를 통해 토지와 기업 등 생산 수단을 전 사회로 집중시키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에 무정부주의자들은 정치 혁명을 반대하고 ‘사회 혁명’을 주장하는 것이다.

바쿠닌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프루동의 경우는 어떠한가?

푸르동은 ‘적극적 무정부 상태’를 외치며 자신이 목표로 하는 사회체제 내지는 신질서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 프루동이 그리는 미래 이상사회는 대개 노동자 자신이 자치관리하는 기업을 경제단위로 하여 지역·지방·국가로 연합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 푸르동의 경우, 국유화가 아니라 ‘사회화’이다.(같은 책.)

바쿠닌이 정치적 테러를 포함해 폭력적 수단을 통해 기존 국가 권력을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온건한 무정부주의자인 프루동은 이를 반대한다. 그러나 바쿠닌이나 프루동이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그 권력에 의한 국유화를 반대한다는 점은 일치한다.

 

2. 반혁명 분자가 된 무정부주의자들

 

실제로도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아나키스트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에 대해 극렬히 반대했다. 볼셰비키 권력은 기존 타도된 권력자들뿐만 아니라, 혁명을 주장하는 무정부주의자들하고도 격렬하게 투쟁해야 했다.

‘Golos Truda’지는 봉기 직후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어떠한 형태의 지배도 거부하도록 호소하는 바이다.” … 이 생디칼리스트 잡지는 소비에트를 향해, 정당 지도자들이나 이른바 인민위원회들로부터 자유로운, 분산된 독립된 단위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만약 어떤 정치적인 집단이 그들을 압제의 수단으로 변화시키고자 시도한다면 인민들은 다시 한 번 무기를 들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페트로그라드의 아나키스트 그룹들은 곧 “혁명의 제3단계이자 마지막 단계”이며 “사회민주당의 권력과 대중의 창조적 영혼 간의 …… 권위주의 체제와 자유주의 체제간의, …… 마르크스주의 원칙과 아나키스트 원칙간의 마지막 투쟁에 대한 이야기로 들끓었다.1920년 3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차 범러시아 식품공장 노동자대회는 아나코 생디칼리스트 집행부(막시모프, 야르추크, 그리고 세르게이 마르크스)가 제안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들은 이 결의문을 통해 볼셰비키 정권이 프롤레타리아와 농민들에게 “무제한적이고 비통제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려고 하며, 가공할만한 집중화를 모순점에 이르기까지 진행시키고 있고 …… 나라 전체에서 생기있고 자발적이며, 자유로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결의문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소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것은 사실상 정당 심지어 개인적 인간들에 의해 프롤레타리아에게 행사하는 지배권이다.” 이 대담한 문장을 직접 쓴 막시모프는 비정당적 소비에트와 자유노동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를 요구한 것이다.(폴 애브리치,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 예문)

비정당적 소비에트는 가능하지 않다. 1917년 2월 혁명 직후에 소비에트 내에서 다수파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었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가 다수파가 되기 전에는 러시아에서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그러나 임시 정부가 “빵과 토지와 평화”라는 당시 러시아 인민들의 염원을 배신하자 소비에트 내 다수 인민들은 일관되게 이러한 요구들을 위해 투쟁해 왔던 볼셰비키를 지지하게 되었고, 이 속에서 10월 혁명이 대중적인 기초와 지지 속에서 이뤄지게 되었다. 러시아 인민들의 혁명적 창조물인 소비에트는 가장 대중적인 조직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당적 소비에트는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반혁명적 세력들이 이 내에서 다수파가 된다면 소비에트는 혁명의 기관이 되지도 못한다.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들은 그럼에도 비당적 소비에트를 요구했으며,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를 주장했다. 이는 실제로는 혁명 권력에 대한 반대, 즉 반혁명이었다.

이 점에서 아나키즘의 정치적 본질이 무정부주의라면, 무정부주의는 곧 반혁명과 일치하기도 한다. 러시아에서는 실제로 그랬고, 역사적으로 1930년대 스페인 내전에서 아나키스트 세력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함께 프랑코 독재와 제국주의에 맞서 목숨을 건 투쟁을 하고 있었던 인민 전선 정부에 맞서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이는 실제로는 ‘반혁명’이 되었다. 주관적 혁명가들이 실제로는 반혁명 분자들이 되기도 하는데, 무정부주의자들이 그러했고, 이들과 정치적 특성들이 일치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실제로 그러했다.

러시아의 저명한 무정부주의자였던 크로포트킨은 1920년 3월 레닌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러시아는 명목상으로만 혁명적 공화국이 되었다. 현재 러시아는 소비에트가 아닌 당위원회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러나 크로포트킨은 희망을 잃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1920년 5월 이렇게 확신하고 있다. “나는 미래에 깊은 신뢰를 갖고 있다. 나는 생디칼리스트 운동이 앞으로 오십 년을 통하여 공산주의 무정부사회의 창조를 선도하여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폴 애브리치,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 예문)

“공산주의 무정부 사회의 창조”, 이것이 무정부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이 다시금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의 정치적 본질인 모든 권력에 대한 반대, 즉 무정부주의는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러시아 혁명 이후 실제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에 대한 반대로 나타났다. 심지어 이들은 정치적 테러를 사용하여 레닌을 암살하려는 기도를 하는가 하면 볼셰비키 정치 지도자들을 암살을 서슴지 않고 자행했으며, 심지어는 1921년 3월에 벌어진 크론슈타트 반란에 동조하여 여기에 참여하기조차 했다.

엥겔스는 《반뒤링론》에서 궁극적으로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멸한다”고 하면서도, “국가는 금명간에 폐지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무정부주의자들의 요구도 이 점에 비춰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저작에서 엥겔스가 강조했던 혁명의 핵심적인 원칙,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여 생산 수단을 우선 국가 소유로 전화시킨다”는 원칙을 부정하고, 무정부주의자들은 즉각적으로 국가 권력의 폐지를 요구했던 것이다. 맑스주의에 있어서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닌 사멸한다”는 것은 즉각적·인위적으로 국가가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 없는 사회로 이행할 수 있는 물질적 제반 조건들 속에서 국가가 소멸한다는 것이다.

맑스는 “고타 강령 비판”에서 이를 낮은 수준의 공산주의(사회주의)와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공산주의)로 나누었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흔적을 남긴 사회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만큼 분배받는” 사회라면, 공산주의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풍요로운 물질적, 문화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해야 하고, 구상과 집행을 분리하고 관료주의를 낳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구별이 사라지고, 농촌과 도시의 구별이 사라져 도농 복합체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 지배 계급에 의한 반혁명 책동이 사라져야 하는데, 이는 일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수준에서 혁명이 벌어져서 제국주의 체제가 소멸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소련 사회주의에서도 1930년대 중반에 사회주의의 승리가 선언되자 국가 소멸이 이뤄져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이 당 내에서 등장했는데, 스탈린은 이를 맑스주의의 국가 소멸론을 제국주의 체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언급하는 것은 맑스주의를 창조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염불 외우듯 하는 것이라고 조소하기도 했다.

이로써 우리는 아나키즘이 국가 소멸의 정치적·경제적 조건을 이해하지 못하고 즉각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정부주의이며, 이들은 곧 정치적 공상주의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에 의하면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이란 멍에를 벗어던진 후에 자신의 무기를 손에서 놓아야” 하며, “그들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하여 자본가에 대항해서 무기를 사용해야 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데, 이는 반혁명 분자들과 제국주의자들에게 무장 해제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와의 차이는, 전자가 집중된 대규모의 공산주의적 생산을 찬성하는데 반해, 후자는 세분된 소규모 생산에 찬성한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름 아닌 바로 권력문제, 국가문제에서의 차이는 우리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투쟁을 위해 국가의 혁명적 제형태를 혁명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찬성하지만, 무정부주의자는 이에 반대한다는 점에 있다.(레닌, “먼 곳으로부터의 편지”, 1917)

레닌의 이 주장처럼 아나키즘의 정치적 본질이 무정부주의라면, 이 정치적 본질을 바탕으로 경제적 본질이 나온다. 생산 수단의 국가 수중으로의 집중은 맑스주의의 핵심적인 경제적 원칙이다. 아나키즘은 정치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반대하고, 이 국가에 의한 생산 수단의 집중에 대해 반대하여 “세분된 소규모 생산에 찬성”한다. 아나키즘의 정치에서의 무정부주의는 생산에서는 자치제, 상호 부조로 나타난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 무정부주의자들은 공장위원회별로 노동자 통제와 자치를 주장하며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볼셰비키 권력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들은 생산의 무정부성과 무계획성을 원리로 하는 자본주의를 반대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생산에서는 자본주의의 본질과 다를 바 없는 무정부적 주장을 했던 것이다.

무정부주의의 정치적 본질로부터 나오는 이들의 정치적 특성은 혁명에 대한 공상성이다. 혁명에 대한 공상성은 혁명을 비현실주의적인 것으로 하여 혁명에 대한 대중적 전망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무정부주의자들은 보통 바쿠닌의 대를 잇기보다는 프루동, 크로포트킨 같은 자치주의자들의 대를 잇는데, 이들의 경우에는 기존 국가 권력을 타도하는 것을 부정하고 기존 생산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속에서 자치와 부조를 주장한다. 결국 어느 모로 보나 무정부주의는 혁명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3. ‘사회주의를 내건 유사 무정부주의자들

 

지금까지 무정부주의의 정치적 본질로부터 나오는 대표적인 정치적 특성을 살펴보았는데, 이를 다시 정리하면, 무정부주의자들은 첫 번째, 권위 일반과 정치적 중앙 집중과 지도자들을 반대한다. 두 번째, 경제적 중앙 집중을 반대한다. 세 번째, 현실성이 결여되었고 공상적이다. 네 번째,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반대한다.

이렇게 무정부주의의 대표적인 특성을 정리해보니 이는 ‘사회주의’를 내걸고 활동하고 있는 대다수 한국 정치 세력의 특성과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오늘날 창궐하는 무정부주의는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공식적으로는 무정부주의를 반대하고 있는 한국 ‘사회주의’ 정치 세력들조차도 실제적으로는 무정부주의의 정치적 영향을 받고 있다. 이들을 유사 무정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대다수 사회주의 정치 세력은 비판의 자유를 운운하면서 당의 정치적 통일성을 반대한다. 심지어 ‘소비에트 다당제’를 주장하기조차 한다.

사태를 더욱 더 악화시킨 것은 유일한 합법정당이 된 공산당 내에서 위기상황에서 당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로 당내분파형성권의 일시적 정지라는 중대한 당내민주주의 제한조치가 취해진 것이었다. 당내분파형성권의 일시적 정지는 치명적인 오류였는데, 그 이유는 공산당이 유일하게 합법정당이 된 조건에서 공산당 내 당내민주주의는 그 중요성이 더욱더 높아졌음에도 이 조치로 오히려 약화되고 이 조치가 이후 영구적 조치로 고착화되어 당내 다수분파가 소수분파를 연속적으로 배제, 억압하여 당내민주주의를 빠른 속도로 파괴해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레닌과 러시아공산당이 당시의 열악한 조건과 비상사태라는 조건에서 커다란 문제의식 없이 취해간 공산당 일당제와 소비에트다당제의 파괴, 당내민주주의의 제한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이후 영구적인 것이 되었으며 왜곡된 노동자민주주의는 이후 역전의 계기를 잡지 못하고 완전히 변질되고 말았다.(성두현, “민주주의의 심화발전으로서의 사회주의”, 사회주의자, 2020년 7월 6일)

윗글의 필자는 소련 사회주의를 비난하고 심지어 ‘관료적’ 사회주의이며, 실상은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은 소련이 국가자본주의이거나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항상 주장하는 내용과 하등 다르지 않다. 이들은 소련 내에서 구체적으로 작동했던 계획 기구의 실상이나 노동조합과 생산 참여 문제, 상품 관계와 계획의 문제 등 이론적 논쟁, 협동조합화와 국유화의 문제, 대두하는 2차 경제의 문제와 시장사회주의 등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특히 흐루쇼프 때 대두하여 고르바초프 때 정점에 달한 수정주의의 문제와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문제, 제국주의의 문제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도 다루지 않는다. 심지어 스탈린을 비판하면서도 스탈린의 저작을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인용하지 않고 일방적 주장으로 왜곡을 일삼기도 한다.

이러한 트로츠키주의자들 같은 사고와 방식은 윗글에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났는데, 이들은 항상 “소련은 형식적인 국유화는 되었으나 노동자 참여와 민주주의가 보장되지 않았다”, “관료주의가 지배했다”, “관료주의 때문에 소련이 망했다”와 같은 지극히 일반적이고 상투적인 주장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비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당의 통일과 민주주의적 중앙 집중을 거부하고 당 내에서 다른 강령을 가진 당 내 당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무정부주의적 주장을 남발한다. 그리고 이것이 소련의 해체를 낳은 원인이 되었다고 극단적으로 비약을 한다.

심지어 권력의 중심에 있는 볼셰비키의 당의 지배적 역할을 반대하고 “소비에트 다당제”를 옹호하기도 하는데, 이는 앞에서 소개했던 “볼셰비키 정권이 프롤레타리아와 농민들에게 ‘무제한적이고 비통제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려고 하며, 가공할만한 집중화를 모순점에 이르기까지 진행시키고 있고 … 나라 전체에서 생기 있고 자발적이며, 자유로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다”며, “비정당적 소비에트와 자유 노동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를 요구한”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의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들은 당 내 민주주의가 당의 혁명성과 통일성과 민주 집중제가 아니라 “당 내 분파 형성권”이다. 이들이 내세우고 있는 분파 활동의 자유는 당시 볼셰비키당을 분열과 위기로 몰고 갔던 당 내 분파들과 심지어 이후 ‘좌익 반대파’ 강령처럼, 당 내 다른 강령을 가지고 활동하는 반당 분자들의 활동의 자유에 다름 아니다. 이들에게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최고 형태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소비에트 다당제’이다.

권력을 잡은 당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화하고, 이로써 당의 통일성과 지도성, 그리고 대중성을 강화하려 하기보다는 다당제라는 명목으로 권력을 나누려고 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화하려는 ‘편협한 공산주의자들’에 비해 참으로 대단한 ‘관용적 휴머니스트’ 아닌가? 다원주의적 사고에 빠져 있는 <사회주의자>는 소부르주아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에 다름 아닌 것이다.

부르주아 체제에서야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되어 있기에 다당제는 필연적이다. 다당제로 포장되어 있지만 번갈아 가며 권력을 잡는 부르주아 지배 정당이 있고, 이 부르주아 지배에 저항하는 노동자 계급의 정당이나 소부르주아 정당이 있다. 반면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부르주아 계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부르주아를 대변할 정당의 필요성도 사라진다. 노동자 계급의 당은 노동자 계급뿐만 아니라 농민 등 전체 인민의 대변자로 당의 지도력 하에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을 강화하게 된다.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아 당이 일당이냐 다당이냐가 본질이 아니라 이 당의 통일성을 가지고 어떻게 인민대중에게 봉사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력을 제대로 구사하느냐가 본질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다당이 되었다는 것은 당의 통일성이 파괴되고, 당이 계급 독재의 구현자로서 자기 역할을 방치한 결과 단일한 지도력을 상실하고 사회주의 정치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보여줄 따름이다. 이 다당제를 통해 소부르주아 세력과 반혁명 세력들이 사회주의를 약화시키고 해체로 몰아갈 수도 있다.

부르주아 다당제를 민주주의의 척도로 보지 않고서야 어찌 “공산당 일당제”를 비난하고 “소비에트 다당제”를 마치 사회주의의 모범적 원리인 양 내세울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유사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자>답지 않은가!

전 세계적으로도 트로츠키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른바 사회주의자들이 그렇지만, 특히 한국에서 대다수 사회주의자가 현실 사회주의와 지도자들에 대한 혐오 하나는 무정부주의자들 그 이상으로 극렬하다. 특히 분단 체제에서 현실의 사회주의에 대해 왜곡하고 극단적으로 중상하고 있고, 조선일보 등 극우 신문에서 종북몰이에 앞장서고 있는 한국의 유사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누가 조선일보이고 누가 사회주의자들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노동자해방투쟁연대(노해투)> 지도급 인사인 이용덕 씨의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방법이 어떻게 총살일 수 있는가?”라는 글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듯이, 한국 사회의 진보적·급진적이라고 하는 정치 세력들, 개인들의 현 정치적 수준이 극우 파쇼 신문인 조선일보의 극단적 반공주의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저들 무정부주의적 반공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소련 및 현실 사회주의 비판은 반공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2차 대전 전후의 미제국주의를 비롯한 제국주의 진영의 냉전이 반소비에트로서의 반공이 아니면 대체 무슨 반공인가?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 반공주의 보루로 역할을 해온 한국에서의 반공은 과연 소련과 중국과 조선에 대한 반대로서의 반공이 아니었던가? 한미일 군사동맹의 반공은 도대체 누구를 적대시하고 격퇴하기 위한 것이었는가?

조중동, 극우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비롯한 반공주의자들이 항상 적대시하고 비방하는 체제는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조선’ 아니었는가? 국가보안법상 ‘이적’(적을 이롭게 한다)이라며 적대시 하는 대상 역시 ‘조선’이 아니었는가?

결국 제국주의자들과 반공주의자들이 적대하고 있는 현실적인 대상들, 즉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현존하고 있는 조선과 쿠바의 사회주의와 현실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공히 반대하고 심지어 타도해야 한다는 대상 역시 하나로 일치한다.(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4) “대극은 어떻게 상통하는가? – ‘극좌’ 국제코뮤니스트전망과 극우의 만남”, 노동자정치신문, 2019년 4월 1일)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은 “선험적 사고나 예정되어 있거나 예지된 법칙” 대신 “순수하게 본능적인” 것을 내세우며 “과학, 아니 차라리 과학의 압제에 대항하는 삶의 반란”(《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을 주장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사회 현상의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사회과학적 법칙들의 과학적 가치를 회의적으로” 본다. 과학적 사고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은 인텔리겐차가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자들과 ‘지식의 특권을 사용함’으로써 노동자들을 지배”하기 때문에 “우리의 새로운 철천지원수는 지식의 독점이며, 그것을 독점한 것이 바로 인텔리겐차이다”(같은 책)라며 인텔리겐차에 대해 경멸을 보낸다. 심지어 이들은 혁명적 인텔리겐차에게도 마찬가지의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전위 정당에 대해서도 극렬히 반대한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노동 운동의 이러한 강인한 생명력은 노동자들이 지도자들의 손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탈취하여 마침내 스스로 그것을 움켜쥐게 되는”이라며, “지도자들 일반을 떠나 ‘대중’에게 호소”하며, “‘지도자’와 ‘대중’을 대립시키”는 경제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신념에 철저하고 흔들림 없는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것이고, 엥겔스가 “권위에 대하여”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을 비판했던 것처럼, 권위 일반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들처럼 인텔리겐차 자체에 대해 부정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레닌의 비판은 한국의 유사 무정부주의자들에게도 해당된다.

이들 유사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자는 대개 지도자와 대중들을 분리시키고, 민주주의와 중앙 집중, 위와 아래, 비판의 자유와 통일을 대비시킨다. 또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를 외치고, 참여와 중앙 집중을 대비시키고 국유화가 되었다고 사회주의가 아니라 노동자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든가, 아니면 중앙 집중 계획 대신 민주적 계획, 분산적 계획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소련과 현실 사회주의의 중앙 집중적 경제를 지령 경제, 명령 경제라 비판하면서 분산적 계획, 민주적 계획을 옹호한다. 사회주의 국유화에 대해서도 노동자 통제와 대비시키면서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근거로 사용하는데, 이는 위에서도 언급했던 생산 수단의 전국적 차원의 집중을 반대하고 노동자 통제와 자치를 주장했던 러시아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국유화나 국영 경제로 정의하지 않고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으로 정의했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위다.”(최일붕, “스탈린주의란 무엇인가?”, 노동자 연대, 198호, 2017-02-24)

무엇보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마르크스의 대안사회가 ‘국가 사회주의’와 동일시된다. 또 ‘사회주의’가 ‘공산주의’로부터 분리되어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동일시된다. 또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 대안사회의 핵심을 어소시에이션이 아니라 사적 소유의 폐지, 국유화, 중앙계획에서 찾는다.(정성진, “1990년대 후 마르크스의 대안 사회론 연구의 혁신”)

‘현실 사회주의’의 경험은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반드시 공산주의적 생산관계를 담보하지 않으며 생산수단이 국유화된 사회에서도 소외된 노동이 다시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현실 사회주의’의 경험은 생산수단이 국유화된 조건에서 노동자민주주의가 발전하지 못하고 변질되면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가 발전해가는 것이 아니라 관료가 지배하는 생산체제가 출현하게 될 뿐이며 이것은 결국 자본주의로 회귀하게 됨을 보여준 생생한 역사적 사례이다.(성두현, “민주주의의 심화발전으로서의 사회주의”, 사회주의자, 2020년 7월 6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국유화(사회화)’비판은 뒤로 하더라도 역사적 사회주의 실험에 대한 비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생산의 주체이자 소비의 주체인 노동자들의 민주적 통제가 실질적으로 실현되지 않는 국유화는 형식 만들기에 불과할 뿐이며, 관료적 통제와 민주적 계획경제가 아닌 중앙 집중에 근거한 명령계획경제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사회화는 분명 국유화를 기본 요건으로 하지만 그것과 동일시 돼서는 안 된다는 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사회화는 ‘사회적 소유로의 전환뿐만 아니라 조절과 통제의 사회적 형태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즉 소유형태에 대한 변화만이 아니라 민주적 계획과 통제가 결합될 때 비로소 사회화는 실현되는 것이다.(선지현, ‘사회화운동의 과제와 방향(마지막회)’, “이제는 현실투쟁으로 등장시켜야”, 변혁정치 12호,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 2015.11.01.)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지에게서 점차로 일체의 자본을 빼앗고, 모든 생산 도구들을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 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공산당선언》, 백산서당)는 것이 사회주의의 요체라고 주장했다. “부르주아지에게서 점차로 일체의 자본을 빼앗고”는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을 단 하나의 문구로 표현한 “사적 소유 철폐”인데, 이는 자신의 정치적 지배,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에 의해 집행되며 이 권력에 의해 국유화로 새로운 소유 형태가 수립되는 것이다. 이렇듯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에 의한 사적 소유 철폐와 국유화는 하나로 긴밀히 연결되어 공산주의의 요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노동 계급의 해방”과 “모든 생산 도구들을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 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는 국유화가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사회주의 국유화가 “노동 계급 자신의 행위”가 아니면, 타인에 의해 강요된 행위라도 된다는 말인가?

정성진에게서 볼 수 있듯이 현실 사회주의는 ‘국가사회주의’로서 프롤레타리아 국가조차도 부정될 것으로 간주한다. 구 PD 진영 대다수는 소련을 ‘국가사회주의’라고 비판했다. 소련에서 흐루쇼프를 필두로 고르바초프에 와서 정점에 달한 수정주의에 의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약화되고 결국 소련이 해체된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 집중 계획을 “명령적”, “지령적”이라 비판하면서 수정주의자들처럼 “민주적 계획”을 집어넣는다.

소련에서 “자본주의로 회귀”는 “생산 수단의 국유화”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반대로 국유화된 생산 수단을 사적 소유로 전환시키면서 일어났다. ‘노멘클라투라’라고 일컬어지는 관료들은 생산 수단의 사유화 속에서 반인민적인 최대 이익을 추구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소련 해체 뒤에 올리가르히라는 러시아판 재벌로 변모했다. “국유화가 반드시 공산주의적 생산 관계를 담보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그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사회주의 내에서도 부르주아적 물질적 이해에 사로잡히지 않는 공산주의적·이타주의적 계급 의식을 고양시키는 것이지, 국유화에 소극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프루동이 그리는 미래 이상 사회는 대개 노동자 자신이 자치 관리하는 기업을 경제 단위로 하여 지역·지방·국가로 연합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 푸루동의 경우, 국유화가 아니라 ‘사회화’이다”(《아나키즘》, 玉川信明, 오월)라는 앞의 인용문처럼, 무정부주의자들은 생산 수단의 ‘국가’ 소유에 대해 부정적이기 때문에 국유화 대신 사회화를 주장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중앙 집중에 부정적인데다가 사회주의 국가 자체도 억압과 통제의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유사 무정부주의자들 역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소유, 즉 국유화와 사회화를 대립, 대비시키면서, 국가가 소멸되지 않은 낮은 수준의 공산주의, 즉 사회주의에서 국유화가 바로 사회적 소유의 가장 높은 형식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 유사 무정부주의자는 사회주의 건설의 현실성을 외면하고 공상적이다. 이들은 머릿속으로 그려낸 완벽한 사회의 상을 그려놓고, 제국주의 포위 같은 현실적 제약 속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하고 있는 현실 사회주의에서 국가가 강화되었다면서 이들 국가를 적대시하고 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강화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 군사적 무장 해제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이러한 ‘아래로부터주의자들’이 “운동이 아래로부터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니 엉망이군”이라는 식으로 외친다며, 이들을 “바보들의 심오한 사상”이라고 조소했다.

이들의 이러한 비변증법적 사고는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과 국제적 수준에서의 혁명을 대립시키는 것으로 절정에 달한다. 그런데 혁명의 “민족적” 임무와 국제적 임무가 과연 분리될 수 있단 말인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성공적 건설이 국제적 혁명에 해악이 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이들 ‘사회주의’를 내건 유사 무정부주의자는 미제국주의 핵 위협에 맞서 자위권을 일환으로 만든 ‘북핵’에 대해서도 대다수가 규탄하고 있다. 이들은 소부르주아 평화주의에 사로잡혀 제국주의의 위협 앞에서 무장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자본가들이란 멍에를 벗어던진 후에 자신의 무기를 손에서 놓아야” 한다고 무정부주의자들처럼 외치고 있는 것이다.

“바보들의 심오한 사상”의 끝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사회주의 깃발을 내건 유사 무정부주의자들이 “사회주의 대중화”, “사회주의 대오” 형성을 주창하며 나서고 있는데, 자신들의 반공주의와 유사 무정부주의를 청산하지 않는다면, 설사 그것이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남는 것은 “대중화”와 “대오” 밖에 없다. 과연 이렇게 사회주의 대오에서 이탈한 “대중화된 대오”를 어디에 쓸 것인가?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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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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