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베트남군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불편한 진실

사진설명: 친미극우 남베트남 초대 대통령 응오딘지엠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는 미국 거주 남베트남 망명자들.

 

김남기(학생)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분단됐다. 제네바협정에 따르면 2년 이내 남북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해야 했지만, 민중의 80%가 호치민과 공산당을 지지할 것을 알고 있던 미국 아이젠하워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그 과정에서 아이젠하워는 17도선 이남에 자신들의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는데 그것이 바로 응오딘지엠을 대통령으로 한 베트남 공화국(Republic of Vietnam)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월남 혹은 남베트남이다.

사실 남베트남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가 자신들의 식민주의 전쟁을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 구도로 포장하기 위해 세운 바오다이 황제의 베트남국 연장선상이었다. 이른바 바오다이 해결책을 통해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에 베트남국을 세웠는데, 이는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확산되던 1949년의 일이었다. 당시 프랑스군은 안정화 전략(Pacification)이라는 명목 하에 자신들 하수인을 기반으로 한 밀집촌을 세우고, 베트민이 활동하는 지역으로 의심이 되면 마을 주변에서 무차별 폭력과 부녀자 강간 그리고 집단 양민학살을 저질렀다. 또한 마을 가축을 죽이고 불태우며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네이팜 폭탄을 투하했다. 이러한 프랑스군 전략은 미국과 남베트남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어받게 된다.

여기에는 프랑스군 휘하에 있는 군대가 있는데 그게 바로 바오다이 국가 소속의 괴뢰 베트남군이었다. 이 군대의 기지는 보통 남베트남 지역에 있었으며, 응우옌반티에우나 응우옌까오끼 그 외의 남베트남 측 군부나 지도부들 또한 달랏(Da Lat)에 있는 프랑스측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많다. 추가적으로 구정 공세 시기 베트콩 용의자를 재판도 없이 처형한 남베트남군 경찰 총장 응우옌응옥로안 또한 이쪽 출신이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남북이 분단되자 미국은 남베트남 바오다이에서 자신들의 괴뢰 앞잡이 응오딘지엠으로 바꾸는 전략을 수립했고, 미국으로부터 막강한 지원과 후원자를 얻은 응오딘지엠은 토착 세력인 빈쑤옌과 까오다이 세력 그리고 호아하오 세력들을 하나둘씩 숙청하거나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썼다. 이런 과정 때문에 일각에서는 “응오딘지엠이 친불파를 숙청했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기도 하는데, 결과적으로 토착 친프랑스 세력의 힘을 약화시킨 것이지, 이것이 식민주의자들에 대한 인적청산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미국의 남베트남군에 대한 전략은 이러했다. 1971년 대니얼 엘스버그가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에는, “미국은 24만 명에 달하는 남베트남 정규군(ARVN)을 훈련시키는 한편, 재정 지원을 지속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프랑스와도 협력하기로 결정했다”라고 나온다.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남베트남은 말 그대로 프랑스 제국주의에서 미제국주의의 하수인 국가가 된 것 뿐이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지배자 미제가 들어와 한반도 이남을 미제국주의 반공기지로 세운 것과 일맥상통한다. 한국에는 미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이 있었다면, 남베트남에는 미제국주의 앞잡이 응오딘지엠이 있었던 것이다.

1954년 9월 제네바 회담 결과에 따라 인도차이나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에 대한 남베트남의 원조가 사라지자 남베트남군에 대한 군사원조는 과거 한국군을 훈련시켰던 미국 오다니엘(O’Daniel)이 지휘하는 군사원조고문단이 맡게 되었다. 6개월 뒤인 1955년 2월에는 훈련교육단이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이 시점부터 미국은 남베트남을 자신들의 반공군사기지로 만들었다. 1954년 시점에서 남베트남군(ARVN)은 최소 20만 명 이상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1951년에는 공군, 1952년에는 해군 그리고 1954년 10월에는 해병대가 창설됐다. 적어도 공군과 해군은 프랑스 식민지배 기간에 만들어진 것이다. 즉 이런 행정기반에서 남베트남군은 병력을 확장했다.

1959년 이후 남베트남은 병력이 증가되었는데, 1960년에 이르러 디엠 정권은 정규군 17만 5,000명과 민병대 10만 명, 자경단 6만 명 그리고 경찰력 4만 5,000명으로 급증했다. 1963년에는 50만 명 규모를 자랑하는 군대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군인의 증가가 주민이 남베트남 정권을 지지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슷한 시기 응오딘지엠 정권은 가족정치를 실행하여 자신의 동생 응오딘누에게 경찰력을 부여했고, 누는 비밀경찰을 통해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학살하는 야수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그렇게 해서 죽게 된 사람이 수만 명에 달한다.

또한 응오딘지엠 정권은 케네디 행정부의 대통령 비서인 로버트 맥나마라의 기획에 따라 전략촌 계획(Strategic Hamlet)을 세웠다. 이 전략촌 건설 계획을 통해 과거 프랑스가 했던 전략을 그대로 이용했고, 이는 당연히 민중의 반발을 샀다. 쉽게 말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마을 단위의 코호트 격리를 공산주의자들을 막는다는 핑계로 마구잡이로 한 것이다. 그 결과 1963년 말 기준에서 베트콩은 남베트남 지역의 75%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베트남 근현대사를 연구한 저명한 역사학자 버나드 폴(Bernard Fall)에 따르면 1957년부터 1965년 4월, 즉 남베트남에서 처음으로 북베트남 대부대가 발견된 것으로 전해지는 시기 이전까지, 이 사이에 15만 명이 넘는 ‘베트콩’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사실상 1965년 이전 미국과 남베트남이 저지른 대량학살이라고 주장했다. 즉 이 과정에서 죽은 건 베트콩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폴에 따르면 베트콩들은 미군 기갑부대, 네이팜탄, 제트폭격기, 그리고 구토유발 가스 등의 치명적인 환경 속에서 싸웠고, 이런 최신식 군사력 앞에서 베트콩과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이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이 급격한 군대 증가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이 민중에게 전혀 지지받지 않았다는 사실과 무능하다는 사실이 한 전투에서 밝혀졌는데, 그게 바로 1963년에 치러진 압박 전투(Battle of Ap Bac)다. 1963년 1월 2일에 치러진 압박 전투에선 최소 1/5이나 1/6의 우월한 병력과 최신식 APC 장갑차 그리고 헬리콥터와 미군 고문단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은 83명이 전사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투입되었던 헬기 15대 중에서 14대가 손실을 입었으며, 이 가운데 5대는 전투 현장에서 파괴되었다. 투입되었던 10대 이상의 APC 장갑차 중 3대가 파괴되었다. 반면 무기와 화력 그리고 병력에서 밀렸던 베트콩은 18명의 전사자와 39명의 부상자만 나왔다.

그 외에도 남베트남군은 1964년 12월에 치러진 빈지아 전투나 1965년에 치러진 동쏘아이 전투에서 베트콩에게 대패했다. 1964년 12월엔 수도 사이공으로 부터 30km 정도 떨어진 빈 지아에서 베트콩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병력상으로 2.5배나 많은 남베트남군에게 큰 타격을 주고 전투에서 승리했는데, 베트콩은 32명이 전사했지만, 미군사고문단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군은 압도적인 장비와 화력에도 불구하고 201명이 전사했다. 심지어 빈지아 전투 소식을 들은 호치민은 작은 디엔비엔푸 전투라 표현할 정도였다. 1965년 5월 말에는 베트콩 부대가 꽝응아이 근처에 있던 남베트남군 여단을 매복 공격하여, 며칠 동안의 전투 끝에 남베트남군 2개 대대를 완전히 괴멸시키기도 했다. 1965년 6월 남베트남군은 동쏘아이 전투에서 미정규군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베트콩보다 3.5배나 더 많은 전사자를 내고 대패했다. 추가적으로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미군 20명도 같이 전사했다.

이처럼 남베트남군은 군대로서도 허접하기 짝이 없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남베트남군의 탈영병 숫자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미 국방부 자료에 의하면, 1966년 한 해에 12만 4000명의 남베트남 병사들이 탈영했다. 남베트남 지상군의 21%에 해당되는 숫자였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남베트남군의 탈영병 숫자는 수십만 명에 달했다. 한마디로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군대였다. 역사학계와 군사학계를 막론하고 미국의 개입이 없었으면 1965년이나 1966년에 남베트남이 패망했을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학설이다. 즉 남베트남이라는 나라는 1965년 린든 존슨 정부의 대대적인 군사개입을 통해 목숨이 10년 더 연장된 것뿐이었다.

1973년 파리 평화회담 1년 후인 1974년 북베트남 공산당은 통일을 위한 총공세를 논의하여 1975년 3월에 실행했다. 실행하자마자 남베트남군의 주요거점인 부온마투옷이 5일만에 함락되고, 다낭과 후에 호이안 퀴논 나짱 등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진격으로 단기간에 함락되었다. 최후로 형성된 쑤언록 방어선은 레민다오 준장 휘하의 남베트남군이 방어를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함락되었고, 북베트남군 총공세 개시 1달 만인 4월 30일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전쟁이 끝나고 남베트남이 패망했다.

마치 한국전쟁때 인민군의 진격에 1달 만에 임시수도 부산까지 밀렸던 그 역사가 그대로 연상될 정도다. 한국의 경우 정부수립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일어난 일이라 최소한의 변론이 가능할지 몰라도 남베트남의 경우 군사력이나 장비면에서도 북베트남군에게 밀렸고,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서도 패망했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답이 더더욱 없는 국가였다.

거기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응오딘지엠을 초대 건국 대통령으로 세웠던 남베트남 공화국의 군부는 육군 중령 한 사람만 빼놓고 죄다 프랑스 식민군 출신의 민족반역자들이었다. 당시 100만 이상의 병력을 자랑했던 남베트남 군대의 대다수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군에 복무했던 반역자들이었다. 1963년 압박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을 지휘했던 후인반까오(Huỳnh Văn Cao)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 복무했고, 위에서 언급한 응오딘지엠을 죽인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 또한 식민지 시절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서 복무한 인물이었으며, 남베트남의 4성장군이었던 까오반비엔(Cao Văn Viên)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서 복무했던 인물이었다. 이처럼 남베트남군의 지도부는 프랑스에 빌붙어 민족반역의 길을 걸었던 반역자들의 집합체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남베트남군은 그냥 미국의 지원으로만 간신히 버티던 부정부패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으며, 정통성이라곤 1%도 존재하지 않는 집단이었다. 이런 군대가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승리를 쟁취한 호치민의 군대에게 패배하게 된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하게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라는 문제가 들어가 있으며, 베트남 전쟁 참전 혹은 침략전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국의 반공주의자들이 항상 외면하는 아주 불편한 진실이다. 또한 이런 한심한 군대와 국가를 기념하며 미국과 호주 등에서 활동하는 보트피플은 말 그대로 답이 없는 이들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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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엔푸』, 보 응우옌 잡, 강범두(역), 길찾기,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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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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