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련과 스탈린 시대에 대한 역사 ‘수정주의’를 환영한다
“집단농장에는 쿨락(부농)과 성직자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니콜라이 미하일로프(Nikolai Mikhailov), 1930년대 쏘비에트 선전 포스터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청사, 김주환 옮김)은 역사 ‘수정주의’의 대표적인 저서였다. 이 책은 남침설에 바탕을 둔 기존 반공주의적 시각의 ‘한국전쟁’에 대해 수정주의 관점으로 접근해 충격을 줬다. 그런데 기존의 남침설에 대비해 북침설이나 북침유도설 등의 시각은 그 자체로 규명해야 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전쟁의 계급적 성격” 보다 중요하지 않다.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고 보는 반공주의 시각과 달리 이미 일본 제국주의 패전 이후 반도 남쪽에서는 ‘해방된 조국’에서 “누가 권력을 잡느냐”를 둘러싸고 유혈적인 계급 간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커밍스의 저서만큼 사회적 반향을 일으킬지는 모르겠지만, 스탈린 시대의 쏘련,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 ‘수정주의’ 관점으로 접근한 “러시아혁명 1917-1938 쉴라 피츠패트릭 지음, 고광열 옮김/사계절” 저작이 나왔다.
아직 그 내용 전체를 접하지는 못했지만, 책 소개 등을 통해 볼 때, 기존 제국주의 진영의 프로파간다로서 반쏘반공주의적 관점의 저작에 비해 진일보한 저작이라고 여겨진다.
기존 반쏘반공주의적 저작은 대다수는 스탈린=악마라는 고답적이고 진부한 관점으로 역사를 왜곡한다. 이 중에는 트로츠키주의적 관점의 역사서도 있고, 제국주의 진영의 역사서도 있다. 사실 이 둘은 서로 뒤섞여 있다. 트로츠키주의 진영의 쏘련과 스탈린 시대 역사서의 일반적 특성이기는 하지만, 특히 토니 클리프의 “소련 국가자본주의”가 전 세계적으로나, 한국사회의 지적, 정치적 환경에 끼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토니 클리프는 1928년 계획되고 1929년부터 본격화된 농업 집산화를 반혁명이라고 간주하고 이를 계기로 쏘련이 국가자본주의로 변모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맑스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언급했던 것을 인용하며, 이 과정은 “본원적 축적기 동안 영국 보다 훨씬 더 많은 피가 흘렀다”고 선정적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묘사는 제국주의 진영에서도 그대로 차용하여 반공주의적으로 과장해서 반쏘주의에 활용했다.
집산화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먼저 집산화 과정에서 벌어졌던 공산당과 빈농을 중심으로 한 중농의 결합 대 부농과 네프맨, 반볼셰비키 자본주의 복고파 진영 간의 격렬한 계급투쟁을 스탈린 공산당 대 농민의 대결이라는 식으로 몰계급적으로 바라본다. 또한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과 내전과 제국주의 개입, 신경제정책으로의 “전략적” 후퇴와 가위 위기(협상가격차 위기)로 표현되는 식량조달 위기와 신자본가(네프맨) 대두, 집산화의 필요성과 집산화 과정에서 벌어졌던 시행착오 및 계급투쟁 같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보다는 스탈린 관료주의의 등장과 반혁명으로 후퇴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바라본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점은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국혁명이냐 세계혁명이냐”는 논쟁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는 사실은 유럽 혁명, 특히 독일혁명의 패배 이후에 쏘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다. 스탈린은 “전기 더하기 쏘비에트”라는 레닌의 주장에 더해, 제국주의 약한 고리론으로 표현되는 레닌의 관점에 입각해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능히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등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에서도 혁명 러시아의 명운을 걸고 이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는 “일국혁명이냐 세계혁명이냐”의 대립이 아니라, 러시아혁명의 존속과 발전이냐 러시아 혁명에 대한 패배주의냐의 문제였다.
“일국혁명이냐 세계혁명이냐”는 도식 자체가 애초부터 비변증법적 관점이다.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성공적으로 건설하여 사회주의 모범적 진지를 창출하는 것이 국제혁명을 강화하느냐와 대립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국제주의는 이미 확고하게 전제되어 있다.
스탈린의 입장이 현실주의적이었기 때문에 반대파들은 당 내에서 압도적 패배로 극소수파로 전락했다. 이들 중 일부는 대중적으로 고립되고 나서 생산 사보타주를 하거나 심지어는 테러주의로 변모하는 등 반당, 반쏘비에트 분자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볼셰비키 내에서의 구체적인 논쟁을 통해 당시 역사를 살펴보기 보다는 레닌 사후 서기국을 장악한 음모가, 관료주의자 스탈린이 서기국을 통해 권력을 장악해서 반대파들을 내치고 철권을 휘둘렀다는 부르주아적 역사관이 마치 쏘련 역사의 정설인 것인 냥 남아 있다.
전시공산주의, 신경제정책, 농업집산화와 공업화: 혁명적 현실주의
이러한 기존 반공주의 역사관을 반대하고 실사구시하는 관점으로 쏘련역사를 살펴보려고 하는 ‘수정주의’ 역사적 관점은, 맑스레닌주의적 관점에 입각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극단적 분파주의, 반쏘반공주의에 찌들고 역사왜곡으로 점철된 기존 역사적 관점에 비해서는 진일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네프는 당시 혁명 지도부와 대중에게 ‘반동’의 불안을 안겨줬던 것이다. “혁명과 내전의 경험으로 주조됐고 스스로를 여전히 ‘무장한 노동계급’으로 여긴 1920년대의 젊은 공산당에게는 평화가 너무 일찍 찾아왔던 것이다.”
이는 네프를 철회하고 제1차 5개년 계획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노정을 다시 다잡은 스탈린 체제로 이어졌다. 레닌의 혁명이 잠시 ‘전략적 후퇴’를 한 것을, 스탈린 혁명이 원래 궤도로 올려놓은 셈이다. 부르주아 전문가들과 소자본가들은 축출당했고, 국가는 다시 경제를 장악했다. 소비에트 체제는 농촌의 대대적인 집단화를 근대화·공업화의 기틀로 삼고자 했다. 경찰력은 크게 강화됐고, ‘계급의 적’은 ‘굴라크’(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스탈린도, 대숙청도 모두 러시아혁명이었다”, 한겨레, 2017-12-28).
러시아 내 ‘좌익 공산주의’ 분파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 제국주의자들의 지원을 등에 업은 자본주의 복고 반혁명에 대응하고 내전에서 승리하고자 비상한 시기에 취했던 전시공산주의를 사회주의 건설의 원칙, 일반원리로 사고한다. 반면 부하린을 필두로 한 우익공산주의 분파들은 농민으로부터의 식량징발 등으로 농민과의 동맹이 약화되고 폐허가 된 생산을 복구하고자 자본주의에 일시적으로 양보, 후퇴한 신경제 정책을 더 장기간 지속시킬 것을 주장하고 더 나아가 사회주의 원칙, 일반원리로 격상한다. 이는 농민들이 “부자가 되라”는 부하린의 유명한 우익적 주장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흐루쇼프를 필두로 한 쏘련 내 우익분자들은 일시적인 전략적 후퇴를 기치로 삼아 시장사회주의 노선으로까지 격상시켰다. 고르바초프는 그 정점에 서서 쏘련의 자본주의 복귀를 야기한 인물이다.
그러나 레닌은 당시로서는 신경제 정책을 자본주의에 대한 일시적 양보, 후퇴지만, 사회주의 생산관계 내로 몰아넣어 포위, 섬멸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생각했다.
레닌이 신경제 정책에 대해 러일 전쟁 당시 포위 작전으로 러시아 군을 섬멸시킨 일본 노기장군 사례를 들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신경제 정책을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중단하고 농촌 집산화와 공업화를 실시할지가 볼셰비키 내부의 첨예한 쟁점이었다.
여기서 우파 부하린이 있었다면 프레오브라젠스키로 대변되는 트로츠키 좌익파들은 사회주의 원시적 축적으로 표현되는 방식으로, 그것도 신경제 정책 초기에 이를 폐기하고 농촌 집산화 등 전면적인 사회주의 조치를 단행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반면 스탈린은 당내 좌우 편향을 비판하면서 1928년을 집산화와 대대적 공업화로의 전환의 해로 잡았던 것이다. 공업생산의 회복, 농촌 협동농장 실험의 부분적 성공, 신경제 정책의 성과가 극점에 달하고 그 반대로 농촌 내 네프맨이라는 신흥 자본가들이 생겨나고 부농들이 식량조달을 거부하면서 협상가격차 위기 등 위기가 극심해지는 시점이 바로 포위 공격을 끝내고 대공세를 취할 시기였던 것이다. 그것은 제2차 러시아 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농촌 내에서의 미증유의 계급투쟁이었다.
“크게 강화”된 “경찰력”은 그러한 계급투쟁의 한 가운데에서 “계급의 적”에 대한 투쟁의 일부였다. 노동자 계급과 빈농이 중심이 된 계급투쟁 외에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아 국가에서 국가권력을 동원한 반혁명 분자에 대한 억압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혁명에 대한 지극히 낭만적인 태도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누가 누구를”이라는, 누가 지배하고 누구를 아군과 동맹군으로 하고 누구를 중립으로 하고 누구를 적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는 계급투쟁의 문제다. “크게 강화”된 “경찰력”이라는 형식만 보고 기층 대중들의 열화와 같은 투쟁을 무시한다거나, 쏘비에트 체제를 파시즘의 경찰국가로 묘사하는 것은 파시즘과 쏘련을 동일시하여 파시즘의 반민중적 폭압과 독점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은폐하려는 제국주의 프로파간다의 일종이다.
과거에 혁명적 현실주의만이 혁명을 유지, 강화시켰다면, 이제는 혁명적 현실주의만이 과거에 대한 과학적인 평가를 통해 새로운 혁명적 전망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스탈린은 레닌의 충실한 계승자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 스탈린 체제의 ‘위로부터의 혁명’은 단지 상층 지도부의 일탈이나 배반이 아니라 혁명적 대중의 지지에 기반을 뒀으며, 그런 점에서 “레닌의 혁명과 스탈린의 혁명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것이 지은이의 냉정한 지적이다.”(같은 기사)
이러한 격변적 상황에서 계급투쟁은 선진 노동자와 빈농 같은 기층 대중들의 뜨거운 지지와 요구 속에 추진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적 열기 속에서 부분적으로 ‘지나침’이 있었다. 스탈린은 이에 대해 “성공에 취하여”라는 유명한 글에서 볼셰비키 당원들이 이 ‘지나침’에 휩쓸려서 관료적 조치가 강화되고 중농과의 동맹이 약화되는 것을 경계했다.
스탈린은 사상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레닌주의의 충실한 계승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레닌의 혁명과 스탈린의 혁명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수정주의’적 역사해석이 나오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노경덕 교수와 신진 역사가들이 방대한 러시아 자료와 실증적인 탐구로 스탈린 시대와 쏘련 역사를 독립적으로 연구하려는 흐름들이 점차로 생겨나고 있다.
쏘련이 국가자본주의였고 스탈린이 반혁명의 화신으로 레닌의 변절자로까지 취급하는 트로츠키적 역사해석의 이론적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정성진 교수조차 이러한 흐름에 합류하고 있다. 다만 정성진 교수는 레닌과 스탈린의 연속성을 주장하되 레닌주의 자체에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 흐름에 합류하고 있다. 학문적 양심과 사상적 후진성이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볼셰비키는 10월혁명 이후부터 노동자계급에서 당원들을 모집하고 이들을 꾸준히 사무·행정·관리직으로 보내는 등 ‘프롤레타리아 발탁’을 이어왔다. 스탈린 체제의 ‘문화혁명’ 기간에는 노동계급의 ‘상향이동’이 더욱 급격하게 늘었다. 1933년말 소련에서 ‘지도 간부직이나 전문직’으로 분류된 86만1000명 가운데 6분의 1이 넘는 14만명 이상이 5년 전만 하더라도 생산직 노동자였다. 제1차 5개년 계획 동안 사무직으로 옮겨간 총 노동자 수는 최소한 150만명이었다. “스탈린 체제에서 중요했던 쪽은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자 출신, 즉 관리직 및 전문직 엘리트 안에서 새로 발탁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중추’였다.”(같은 기사)
레닌은 혁명 이후 어디선가 볼셰비키는 이제 행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일반 대중이 국가기구나 생산기구 전반에 참여하는 대중국가를 묘사했지만, 러시아의 구체적인 현실은 부르주아 전문가들한테 일부 양보를 하고 이들을 귀한 몸으로 모셔 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국가운영의 행정적 경험의 부족, 생산단위 운영의 경험, 노동자 계급의 기술적 숙련이 부족한 상황에서 기존 볼셰비키 활동가들이 투쟁하고 타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국가와 생산을 운영하는 데는 숙맥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스탈린 시대에는 레닌의 정신에 따라 프롤레타리아에게 전문기술을 배우게 하고, 생산운영을 배우게 하는데 총력집중 했다.
그 성과로 부르주아 일부 전문가들한테 양보가 아니라 노동자계급 출신이 관리직과 전문직으로 대거 진출하게 됐던 것이다. 새 사회에서는 인텔리들이 특수한 신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전문가, 숙련가가 되고 지식인이 되어 혁명적 노동자 인텔리가 대거 육성되어야 한다.
콜호즈(집단농장)에 대거 참여한 과거 빈농과 노동자 계급 출신 전문가들, 공업발전에 따르는 수백만 명의 공업노동자들이 스탈린 시대를 떠받치는 ‘문화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숙청”은 여전히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 도시와 농촌의 대립, 구상노동과 실행노동의 대립이 남아 있고, 신출세분자들이 대거 당내로 진입하는 상황에서 관료주의와의 투쟁이었다.
그런데 쏘련은 왜 자본주의로 복귀했는가?
이 점에서도 실사구시하는 입장에 서야 한다. 레닌과 스탈린 시대뿐만 아니라,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절, 그리고 쏘련 전 기간 동안에 계획과 시장의 문제를 둘러싼 격렬한 내부 논쟁, 내부 투쟁이 일어났다. 자본주의는 상품시장이 지배하는 체제다. 심지어 인간 노동력도 상품이 된다. 자본주의는 무정부성과 무계획성을 특징으로 한다.
사회주의는 상품시장 사회를 철폐한 사회다. 계획이 중심이 되는 체제다. 그런데 쏘련 사회주의는 당시 발전수준에서 일거에 계획생산으로 변모할 수는 없었다. 1928년 집산화와 공업화는 이 계획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전 사회적 투쟁이었다. 이 투쟁의 성과로 1929년부터 전 세계 대공황으로 자본주의 체제가 휘청거릴 때 쏘련에서는 실업이 일소되고 안정적인 계획생산 체제가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유고의 시장사회주의를 필두로, 흐루쇼프, 브레즈네프를 거치면서 상품시장이 강화되고 이윤에 대한 강조가 늘어났다. 마오쩌둥 이후 중국도 마찬가지다. 장기적으로 시장을 절멸시키고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강화해야 하는데, 반대로 시장과 사회주의를 절충하다가 결국은 시장에 포위되면서 1980년대 중반에는 본격적으로 시장이 우위를 차지하게 됐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당의 타락과 이데올로기적 후퇴도 가속화 됐다. 결국 이를 바탕으로 사유화가 전면화 되고 정치영역에서는 다당제가 들어서면서 동유럽과 쏘련이 자본주의로 복귀하게 됐던 것이다.
쏘련에 대한 반쏘반공주의는 북에 대한 반공주의, 종북몰이와 연결되어 있다. 스탈린 악마화는 북에 대한 악마화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스탈린 시대와 쏘련 역사, 스탈린 이후의 쏘련 역사 전반에 대해 실사구시하고 과학적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제국주의, 반공주의 프로파간다로부터 독립해서 마찬가지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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