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한 ‘참세상’ 등의 반동적 인식의 근원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민중언론’ ‘참세상’의 “제국의 위안부 논란, 모두 화가 나 있다 위안부 논의, 민족주의 감수성과 순결한 소녀 이미지 넘어설 수 없나”(성지훈 기자 2016.07.11.) 기사 인식은 심각하다. 몰계급적이고 몰역사적이다. 심지어 반동적이다.
이는 참세상 성지훈 기자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런 글이 참세상에 버젓이 실리는 걸로 봐서 ‘위안부’ 즉,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한 참세상의 태도가 성지훈 기자의 기사를 통해 나타난 문제로 볼 수밖에 없다. 비록 이 기사는 ‘중립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하지만, 첨예한 논란의 와중에서 중립적 입장은 대개는 잘못된 입장으로 경도될 수밖에 없다.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는 ‘학문적 자유’라며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지만, 이미 알려진 바처럼, 일본 군인과 ‘위안부’ 사이를 ‘동지적 관계’라고 표현하고, 위안부의 동원 방식과 위상에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는 말로 일본 제국주의 국가와 군대를 가해의 주체에서 누락하여 ‘위안부’를 일선에서 모집한 업자와 개별 여성 간의 자발적인 계약의 문제로 돌리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만행이라는 역사적 문제를 은폐, 정당화 하고, 점점 더 강화되고 있는 일본의 군국주의 책동을 합리화 하는 데 일조하게 될 수밖에 없다. 실제 아베 정부가 ‘위안부 문제’ 관련하여 “자발적인 매춘”이라고 하여 일본 제국주의와 군대의 잔학한 전쟁 범죄를 은폐, 면죄하는데, 박유하 등의 주장은 이 주장에 철저하게 부합하는 것이다.
참세상은 중립이나 균형적 소개로 위장하고 있지만 어떻게 박유하의 입장을 사실상 지지하고 있는가?
<학술 논쟁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이성적이고 건설적인 학술 토론보다는 감정과 화가 앞선 다툼으로 번져 가고 있다. 박유하 교수는 학술 연구의 결과를 공개하는 데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리는 상황이 됐다.>(참세상 성지훈 기자, 같은 기사, 이후 특별한 인용 표시가 없으면 같은 기사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단순하게 학술논쟁이 아니라 첨예한 현실의 문제다. 참세상은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리는 상황이 됐다”는 말로 사법기관이 개입한 문제를 꼬집고 있는 것 같지만, 박유하 교수를 비판하는 논자들이 감정과 화가 앞서 있다며 박유하 비판자들의 비판의 출발점이 된 역사인식을 ‘감정’의 문제로 왜곡하고 있다.
<학술의 영역에서 쓰이는 언어, 논리적인 비판이라고 보기 어려운 표현들이 동원됐다. 한 사회학자는 “박유하는 학문적으로 파산했다”고 말했다. 박노자 교수는 “박유하 교수의 연구는 역사 연구라기보다 창작 소설”이라고 비판했다. 정대협 관계자는 박유하 교수에 관해 묻자 “대응하고 싶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박유하 교수가 일본 우익의 논리에 복무한다는 비난은 박유하 교수를 비판하는 입장을 가진 이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정영화 교수도 박유하 교수에게 “정치적 의도가 의심된다”고 말했다.>
참세상은 여기서 박유하를 옹호하는 김규항의 입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대리 표명하고 있다.
<김규항 발행인은 “지금 박유하를 비판하는 논조 자체가 정상적인 지적 접근이 어려운 상태”라고 말했다. “이 문제를 바라보는 학자들이 화가 나 있고 흥분해 있다”는 지적이다. 김 발행인은 “위안부 문제는 우리의 화와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문제기 때문에 감정적 한계를 돌아보고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더욱 냉철하게 접근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국의 위안부 논란, 모두 화가 나 있다”는 참세상의 기사 제목은 바로 박유하를 옹호하는 김규항의 표현을 딴 것이고, 참세상의 이 기사는 위 인용문에서 볼 때도 김규항의 입장에 서 있다. 김규항이 박유하를 옹호하고 참세상이 김규항을 옹호함으로써 참세상이 박유하를 옹호하는 일련의 반동적인 ‘공감 사슬’이 마련된 것이다.
‘위안부 문제’를 “화와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문제”라고 보고 이에 대한 분노가 “감정적 한계이고 진영 논리”라고 하는 김규항의 사고 자체가 심각하게 몰역사적이고 몰계급적이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한 ‘화와 트라우마’는 피해 여성들 개인들의 경험인 동시에 역사적인 문제다. 단순하게 흘러간 과거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역사적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진영 논리’, 철저하게 당파적인 입장에 서야 한다. 진영논리에 입각한 입장만이 이 문제를 “더욱 냉철하게” 접근하는 올바른 태도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해 누가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는가? 서로가 서로에게 화를 낸다며 서로에게 화를 내는 양자를 화해시킬 것인가? 이러한 반동적인 화해주의 입장에 대해 우리는 더욱 더 분노하고 화를 낼 수밖에 없다.
<‘학술 비판’을 ‘운동 감성’으로 대응하는 듯한 태도도 엿보인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반성매매 연구에 매진하는 중앙대 사회학과의 이나영 교수는 “1시간만 수요집회에 나와서 앉아 있어 보라”고 말했다. 정대협 관계자 역시 “김규항과 박유하 모두 수요집회 한 번 나와 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며 비판의 ‘자격’을 강조했다.>
위에서도 한 번 비판했지만,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논란은 단순하게 학술진영 내에서의 논란이 아니다. 어떠한 학술 논쟁이 현실의 문제를 배제할 수 있는가? 박유하 비판자들이 수요집회에 나와서 보라는 발언은 여러 비판 속의 일부 발언이고, 또 실천적인 투쟁에 직접 나와서 느껴보라는 주장은 충분하게 할 수 있는 주장이다. ‘학술논쟁’으로 포장한 박유하 등의 주장이 현실 운동에서 어떻게, 누구에게 정당성을 부여해주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직접 확인해보라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후에 더 말하겠지만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제국주의 침략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첨예한 현실의 문제이고, 지배계급 전체와 이에 대응하는 노동자 인민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참세상' 등의 반동적 인식의 뿌리
진보언론, 민중언론을 자처하고 있는 ‘참세상’이 이 문제에서 심각하게 반동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본질적 뿌리는 무엇인가?
<정대협이 대표하는 위안부 운동이 민족주의 감수성에 경도돼 논의를 이성적으로 진행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유하 교수는 우리 사회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순결한 소녀’의 이미지로 고정하고 다른 층위의 피해자들은 배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김규항 발행인 역시 “위안부 운동이 순결한 소녀에 방점을 찍는 매우 전근대적 여성관에 기초한 방식”으로 이뤄진다고 비판했다. 김 발행인은 “민족주의는 카타르시스를 끌어내는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지만 사실에 부합하는 운동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김규항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참세상의 이러한 입장은 근본적으로 이른바 ‘좌파’들의 민족문제에 대해 부정하는 태도에서 비롯됐다. 여기서 보편성과 역사성을 망각한 일부 잘못된 ‘여성주의’ 문제가 중첩돼 있다.
‘민족주의 감수성’은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가 아닌 것처럼, 허구의 감성이 아니다. 더욱이 식민지 민중이 겪었던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분노의 경험이 ‘민족주의 감수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소녀상’에 대해 “순결한 소녀에 방점을 찍는 매우 전근대적 여성관”이라는 김규항의 발상은 아주 저열하고 악랄하기조차 한 인식이다. ‘소녀상’은 성노예 피해 여성의 상징이자 사회적 낙인을 뚫고 저항하는 여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실제로 당시 젊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 여성들을 효과적으로 상징한다. 소녀상은 ‘순결한 소녀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성노예화하고 폭력과 억압, 심지어 학살만행을 자행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항의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다. 김규항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협소한 인식으로 ‘위안부’ 투쟁의 상징인 ‘소녀상’을 비난함으로써 ‘위안부’ 투쟁의 정당성을 폄하 또는 부정하고 있다.
‘전근대적 여성관’은 역사의식을 결여하고 추상적인 여성관, 성노예 피해자들은 물론이고 이와 오랫동안 헌신적으로 연대해온 활동가들, 일본군 성노예에 분노하는 다수의 상식적이고 보편적 인식과도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자유주의’ 여성관을 가지고 있는 김규항이다. 김규항은 분파주의에 사로잡혀 사리분별을 못하고 있다. 김규항을 통해 박유하를 옹호하는 참세상도 마찬가지다.
<논의가 생산적인 토론보다 감정 다툼으로 비화하면서 정작 담론의 발전은 정체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아시아여성평화기금’에 대한 입장 차이다. 박유하 교수는 이 기금이 실질적 보상이며 관이 관여한 일본의 공식적인 보상에 가깝다는 입장이다. ‘제국의 위안부’에서도 “과거에 기금에 반대했지만 지금은 그때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것”이란 김문숙 민족과여성역사관장의 말을 인용해 기금 수용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김문숙 관장은 정대협 결성 초기부터 정대협 활동에 관여했고 부산 정대협 대표를 지냈다.) 그러나 정대협은 이 기금의 수령을 거부하고 피해자들에게 기금을 수령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박유하 교수는 이 기금의 수용을 거부하면서 일본 내부의 양심적인 시민, 지식인들과의 연대도 어려워졌다고 주장한다. 기금에 대한 갈등과 사실 이상의 비난이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과의 관계마저 차단했기 때문이다. 박유하 교수에 따르면 아시아여성평화기금의 발기인인 와다 하루키 교수는 “일본 정부가 기금의 부족분을 충당하기로 약속했다”고 말했다. 박유하 교수는 “일본 정부가 기금 조성에 직접 관여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아시아평화기금 관련해서 박유하 입장을 무비판적으로 소개하면서, “기금에 대한 갈등과 사실 이상의 비난이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과의 관계마저 차단했기 때문이다.”라고 확정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단순 소개가 아니라, 이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일본 내부의 양심적인 시민과 지식인을 대표하는 사람은 와다 하루키 교수이다. 아시아평화기금에 앞장서면서 이를 통한 역사적 화해를 주장하는 와다 하루키 교수의 주장에 대해서는 서경식 선생이 완곡하면서도 날카롭게 비판했다.
<와다 선생님은 과연 ‘아시아 여성기금’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이유를 제대로 인식하고 계신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한다면, 와다 선생님에게는 조선민족(조선반도 남북의 주민 및 재일조선인을 포함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총칭)의 마음이 과연 보이는 것일까, 하는 의문입니다.
…지난 2월 16일,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의 일본에 대한 심사에서 일본의 스기야마 신스케杉山晋輔 외무 심의관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강조하면서 “일본군과 정부에 의한 위안부 ‘강제연행’은 확인할 수 없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그 발언 중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일본정부가 취해온 대응책의 사례로 ‘아시아 여성기금’의 활동을 들었다고 합니다. 즉 일본정부는 이제까지 그렇게 해왔듯이 이번 ‘합의’도 외교적인 자기방어 레토릭으로서만 활용하겠다는 자세를 명확하게 내보인 것입니다. 그런 시선으로 보면, “아베 총리와 박 대통령에게, 이제 한걸음 더 노력해 주기 바란다”고 한 와다 선생님의 견해는 요시미 교수의 견해에 비해 너무나 애매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와다 선생님이 우려한 ‘과오’는 어디까지나 국가책임을 부정하고 싶은 일본정부 입장에서 보면 ‘과오’가 아니라 오히려 외교적 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들은 시종일관합니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거기에 가담했습니다. 그것이 ‘과오’였다면 ‘아시아 여성기금’의 실패 원인을 성찰하지 못하고, 그것을 사상적으로 심화시켜 후대에 계승하지 못한 자들의 ‘과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참으로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이런 의미에서 와다 선생님 자신의 책임도 결코 작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초심은 어디 가고 왜 반동의 물결에 발을 담그십니까, 서경식, 와다 하루키에게 묻다, 한겨레, 2016-03)
위 인용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2015년 12월 28일, 한일 외무장관회담으로 이른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최종합의’(이하 ‘합의’)가 발표됐다. 이 반동적인 한일 정부 간 합의는 ‘위안부 문제’가 불가역적, 즉 되돌릴 수 없는 최종적으로 합의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로써 한일 간 역사적 문제는 최종 해결됐고 이제는 화해와 협력으로 미래로 가야 한다는 점이 강조됐다.
이 합의에 ‘아시아여성기금’이 일부 정당성을 제공했다. 이러한 합의 이전에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 내에서 집중 부각됐는데, 이는 한일 간 ‘위안부 문제에 대한 최종합의’를 정당화하는데 이용됐다.
<“한국의 정대협이나 일본의 일부 인사들이 북한과 연대해서 일본의 ‘군국주의’만 비판해 온 것은 운동이 ‘냉전적 사고’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이 책 일본어판에서 인용)>(서경식, 같은 글, 서경식은 자신의 일본어판 저서,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에 실려 있는 박유하의 글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주의자들, 이른바 좌파를 표방하지만 실은 반공주의 자유주의자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민족문제에 대한 역사적 인식의 결여, 이의 필연적 귀결로 나타나는 반북반공주의도 이 문제에 대해 반동적 태도를 취하게 되는데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과 중국 침략과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일반성과 이 제국주의 침략과 전쟁에서 여성에 대한 성노예라는 특수한 문제가 중첩돼서 나타난 문제다. 자본주의 착취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침략과 전쟁의 집중적이고 가장 심각한 피해자는 보통 여성이다.
<이른바 “위안부 여성”은 1932-1945년 사이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아시아 전역, 주로 11개의 일본 식민지 국가로부터 수십만 명의 어린 소녀들을 대상으로 사전 계획되고, 조직되고 제도적으로 실행된 인신매매와 성노예 제도였다. 그 제도가 진행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첫 시작은 일부 직업 윤락녀들이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곧 여성에 대한 성착취의 산업적 시스템으로 발전했고 어마어마한 규모로 커지면서 근대사에서 전례 없는 규모의 성적 잔혹 행위가 수반됐다.
“위안부” 제도의 전시 매춘은 홀로코스트의 살인과 그 규모와 같다: 산업적 규모의 공장식으로 사육화한 강간: 여성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이며 조직화되고 정당화된 인적 조달, 감금, 고문, 잔혹 행위, 성노예화, 그리고 폭력적 탄압이 행해졌다. 전쟁 후, 이 만행의 역사는 정책, 정치 그리고 편견 등이 한데 어울려 망각을 불러오며 기록에서 사라졌다. 고문, 구타, 신체 훼손 그리고 하루 최고 50차례의 일상적 강간을 살아남은 위안부 여성들은, 퇴각하는 일본 병사들에 의해, 전쟁 범죄의 증거를 숨기려는 의도로, 종종 총살당하거나 수류탄으로 살상됐다. 다른 40%의 위안부 여성들은 성노예로 착취당하는 동안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성노예 여성들 4명 중 1명만이 살아남았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하며, 이 사망률은 최전방 전투병사의 사망률 혹은 대서양을 횡단하던 노예무역 최절정 시기에 항해 중 사망한 아프리카 노예들의 사망률보다 더 높다. 이것이 “위안부 여성” 문제를, 공인받지 못하고 배상받지 못한 20세기 최대의 전시 잔혹 행위 중의 하나로 만든다.>(미디어오늘, 미국 월간지 “이게 사과라면 한국은 국가 기능 힘들다”, 카운터펀치, “위안부 합의, 사과가 아니라 완전한 항복… 전시 매춘, 홀로코스트 살인과 같은 규모, 2016년 01월 07일, 미디어오늘은 이 기사 하단에 카운터펀치, “South Korea’s Betrayal of the ‘Comfort Women’(‘위안부’ 피해자 배신한 한국 정부)이라는 뉴스프로 번역글을 싣고 있다.)
이처럼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학하게 수십만 여성에게 자행한 전쟁범죄였다. ‘위안부’ 여성들의 피해 증언을 들어보면 일본군 성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여성을 참살하고 다른 여성들이 그 시신 끓인 물을 마시게 하는 등 전대미문의 끔찍한 경험들로 가득차 있다. 박유하 등이 ‘젠더 문제’를 우선적으로 내세우면서도 정작 수십만 여성이 겪었던 참혹한 고통을 ‘동지적 관계’, ‘자발적인 계약’의 문제로 돌리는 것은 범죄행위와 다를 바 없다.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나 성노예 피해자들이 강렬한 식민지 경험과 피해자 개인의 경험을 통해 민족주의적 인식이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은 운동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필연적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정대협이나 성노예 피해자들은 오키나와, 필리핀 성노예 문제, 주한미군 성범죄 등의 문제에 연대하면서 국제주의 인식과 보편적 인식으로 계급의식이 확장돼 나갔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 투쟁 과정에서 설사 일부 ‘민족주의 감수성과 순결한 소녀 이미지’가 나타났다면,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것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미 운동 주체들 사이에서는 점점 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실천이 이뤄지고 있지만, 만약 여전히 부족한 점이 있다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인식에 입각해 한·중·미·일 인민들과의 국제연대를 통해서 한미일 제국주의 동맹에 맞서 투쟁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투쟁에 동참해야 한다.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독일 파시즘의 전쟁과 대량학살에 대한 반성이 제국주의와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독점자본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파시즘의 배후인 독점자본에 굴복하고 특정 정권을 비호하는 것을 통해 결국 제국주의 국가를 옹호하는 반동적 인식과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는 결국 애국주의, 국가주의다. 자유주의자들이 스스로 혐오하는 국가주의, 애국주의로 귀결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태도 때문이다.
와다 하루키 교수는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동북아 문제, 특히 한반도(조선반도)의 역사적 문제에 대한 글을 많이 쓰고,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도 글을 쓰기도 했지만 사회당 주도의 연립정권을 지지하는 것으로 국가주의에 빠져들고 말았다.
<사회당의 무라야마 위원장을 수반으로 하는 3당 연립정권이 탄생하자, 무라야마 총리는 취임 직후의 국회 연설에서 안보조약 긍정, 원자력발전소(원전) 긍정, 자위대 합헌 등 그때까지 지켜온 당 노선을 전면적으로 변경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을 때의 기자회견에서 기자로부터 천황의 전쟁책임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것은 없다”고 즉답을 했습니다. 모두 어이가 없을 정도로 경박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서경식, 같은 글)
이처럼 자본주의 국가를 개혁한다는 사회당의 ‘현실주의’ 노선은 급기야 권력을 잡고는 “안보조약 긍정, 원자력발전소(원전) 긍정, 자위대 합헌” 까지 나아가고 천황의 전쟁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사실상 천황제를 옹호하는 반동적인 국가주의, 애국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군국주의 책동과 제국주의 역사에 대한 부정은 아베 정권 들어 이른바 해석헌법이라는 이름으로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전쟁하는 국가로 변모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파쇼 책동은 동북아에서 미제국주의의 반공주의 전선 재구축의 일환으로 지속적으로 추진됐고, 이는 일본 독점자본의 이해와도 부합하기 때문에, 미·일 제국주의와 투쟁하지 못한다면 파쇼화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미·일 제국주의가 중심이 된 미·일·한 동맹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약화된 자신의 힘을 보충하고 제국주의 진영의 공동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독촉하고, 나아가 동북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 첨병의 역할을 떠맡도록 부추긴 일련의 장기적 계획은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이미 그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새삼 반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1953년 11월 15일 일본을 방문한 당시 미국 부통령 닉슨은 미일협회 환영석상에서 “일본에 전쟁 포기의 헌법을 강요한 것은 미국의 오류였다”라고 단언하였다. 이는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을 저지시키고자 하는 전 세계 민중의 열망을 뒤엎어버리고 군국주의의 재개를 희망한다는 미국의 속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은 사건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1953년 7월 15일부터 교섭이 시작되어 1954년 3월 8일에 조인된 미일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일본 재군비의 본격적 단계를 열었고 방위청이 설치됨과 동시에 자위대가 발족되었다. … 이는 미국의 아시아 전략, 즉 반제국주의 세력의 진압을 위해 일본의 군사력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공식화하고 명분화한 것이다.>(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2, 되살아나는 전쟁음모, 138쪽)
“일본에 전쟁 포기의 헌법을 강요한 것은 미국의 오류”라고 하여 마치 미국이 한 때는 평화헌법 제정의 주체인 것 같지만, 이조차도 사실 쏘련, 중국, 조선을 비롯한 전 세계 평화애호 인민과 일본 민중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미국의 한결 같은 전략은 한국과 일본을 반공주의 전초기지로 만들어서 쏘련과 중국, 조선을 고립 파멸시키는 것이다. 쏘련이 해체되고 중국이 수정주의의 길을 걸으면서 자본주의화 되는 역사적인 변화가 있지만, 여전히 한미일 동맹은 반북을 바탕으로 일본을 재무장시키고 한국을 작전기지로 해서 미제국주의의 지배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독점자본과 국가권력의 이해와 철저하게 부합하는 것이다. 일본 사회당이든 민주당이든 이러한 미제국주의 중심의 반공동맹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왔다.
‘위안부 문제에 관한 최종합의’(이하 ‘합의’) 역시 형식적으로는 한일 정부간 합의였지만, 그 배후에는 한미일 동맹의 걸림돌을 제거하고자 하는 미제국주의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점은 겉으로는 독도문제 등 영토문제에서 반일 애국주의를 부르짖고, 아베 정권의 식민지 역사 왜곡을 규탄하는 체하면서도,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왜곡을 하고, 한일군사정보협정 체결 시도를 하고, 일본 자위대 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한국 내 권력자들의 위선적인 행동의 역사적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자유주의 ‘좌파’들의 반동적 인식은 바로 역사적 인식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다. 이들의 몰역사적 인식은 ‘스탈린주의 비판’이라는 맹목적인 반쏘 혐오주의, 반북반공주의로 나타나면서 제국주의와 지배계급의 이해와 일치하게 되는 경우조차도 있다.
이들은 계급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강조에도 불구하고 역사성과 과학성의 부재로 말미암아 민족문제에 기권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의 추상적인 국제주의는 민족문제에 대한 기권으로 결국 자유주의적 애국주의에 빠져들기도 한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역사의식과 과학적인 인식을 가지고 제기되어야 한다. 이것이 결여되어 있는 추상적 국제주의는 실제로는 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하게 된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강조하면서 리비아, 시리아 등지에서 미제국주의와 나토 제국주의가 배후에 있는 반란군들의 소요를 ‘민주주의 투쟁’이라고 환호와 찬사를 보낸다면 그것은 제국주의에 부화뇌동하는 것이다. 국제주의를 주장하면서 반북주의에 빠져 있다면 역시 미일 제국주의와 한국의 한미일 제국주의 동맹의 이해에 복무하게 된다. 권력의 역사왜곡에 반대하면서 제국주의가 은폐, 조작한 현실 사회주의의 진실과 역사, 쏘련의 대조국 전쟁, 스페인 내전과 반제국주의 인민투쟁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제국주의의 역사왜곡에 놀아나는 것으로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것이다.
일본 내에서 재일조선인 차별 문제, 조선학교 무상화 문제 등과 싸우지 않고, 반북주의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아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분노하면서도 정작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대량 살해와 여성에 대한 강간 등 잔혹한 전쟁범죄에 대해 침묵한다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아니다. 미국 내에서 자국의 대외 침략에 맞서 제국주의 반대를 내걸고 싸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아니다.
한일 간 ‘위안부 최종 합의’를 규탄한다!
오키나와에서 주일 미군기지 헤노코 이전을 반대한다!
오키나와와 동북아에서 미군은 철수하라!
일본 평화헌법 개정과 군국주의 책동을 반대한다!
한일 양국 권력의 역사왜곡을 반대한다!
한국 내 싸드 배치를 반대한다.
북에 대한 고립말살 책동과 한미일 동맹의 전쟁 책동을 반대한다!
미국 국가권력의 인종주의 학살(실은 피지배계급에 대한 학살)에 반대한다!
이것이 한미일 독점자본과 국가권력에 반대하는 한미일 노동자 인민의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구호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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