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가 누락한 제21장

어떤 책에 대한 서평을 쓴다고 하면 먼저 번역자의 노고를 찬양하는 것이 통상의 예다. 그런데 나는 무례하게도 이 통상의 예를 과감히 벗어던지려 한다. 나는 장상환에 대한 신랄한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가 번역한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원제목은 《인간의 세속의 부-국부 이야기》, 1936)라는 책에 대한 서평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장상환은 이 책을 번역하면서 원래 책 내용에 있는 한 장을 의도적으로 삭제했기 때문이다. 장상환은 ‘옮긴이의 말’ 뒷부분에서 “원본의 총 22장 가운데 집필 당시인 1930년대 소련과 관련된 21장은 오늘날에 비추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해 번역에서 제외했다”고 간략하게 설명한다.

그런데 장상환은 ‘옮긴이의 말’ 앞부분에서는 “혹 독자들은 20세기 중반에 쓴 책을 21세기의 원년에 다시 번역해 펴내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그때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 그래서 이 책은 오늘날에도 전혀 낡은 책이 아니다”라고 하고 있다.

장상환의 말대로 이 책은 이명박의 표현을 빌자면 ‘전대미문’의 전 세계적 대공황의 초입에서 전혀 낡은 책이 아니라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탄생배경과 현실을 분석하고 되돌아볼 수 있는, 그래서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이 책이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했다. 여기에 번역자인 장상환에 대한 비판의 핵심이 들어있다. 과연 장상환이 이 책이 오늘날에도 전혀 낡은 책이 아니라고 하면서 오늘날에 비추어 낡은 것이라고 번역에서 제외한 21장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가?

아마 대부분의 독자가 리오 휴버먼의 책이 이미 1982년에 1쇄가 발행되고 92년에 7쇄가 번역된 사실을 잘 모르고 있을 것이라 본다. 장상환이 새롭게 번역하면서 책의 주요한 장을 누락시켰다는 점을 알고 있는 독자는 더더욱 별로 없을 것이다.

휴버먼의 책은 국내에서 당시에 《경제사관의 발전구조》(청하출판사, 번역자 장찬영)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아마 이 책이 이러한 제목을 달게 된 것은 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는 휴버먼이 책을 발행하면서 썼던 머리말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휴버먼은 1936년 이 책을 발행하면서 이 책의 목표에 대해 “하나는 경제 이론으로 역사를 설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역사로써 경제 이론을 설명하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장상환이 원저에서 번역을 하면서 누락한 21장이 ‘경제사관의 발전구조’에는 잘 나와 있다. 원래 휴버먼의 21장에는 ‘계획의 원리’가 들어 있다. 이 책의 전체 구성을 보면 제1편은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까지’이고, 제2편은 ‘자본주의에서 어디로’로 되어 있다. 1편이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의 발달사를 본격적으로 그리고 있다면 2편은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강력한 고발과 사회주의로의 전망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리오 휴버먼

저자는 이를 머리말에서 “이 책에서는 경제 제도의 발달이라는 견지에서, 일정한 교의가 왜 일정한 시기에 태어났는가, 어떻게 하여 그것이 사회생활의 특정한 구조에서 발생하였는가, 그리고 그 구조의 양태가 변했을 때 그것이 어떻게 발전되고, 수정되고, 타파되었던가를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제13장의 ‘낡은 질서는 변화한다’에서 저자는 봉건제의 낡은 질서가 어떻게 부르주아지 중심으로 변하고 민중들이 앞장선 프랑스 혁명으로 깨져나갔는지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 낡은 질서는 봉건제를 깨뜨리고 들어선 새로운 자본주의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어떻게 “자본주의 구조의 양태가 변했을 때 그것이 어떻게 발전되고, 수정되고, 타파되었던가를 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봉건제라는 낡은 틀과 속박을 깨고 나왔지만 상업무역의 시대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달사는 흑인노예의 매매와 “상업 즉, 정복, 해적질, 약탈, 착취, 이러한 것들이 당시에 자본주의적 생산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자본이 축적된 방법이었다”고 저자는 폭로하고 있다. ​

저자는 “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으로부터 피와 오물을 흘리며 나타난다”는 맑스의 유명한 자본론 한 문장을 인용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식민지 약탈을 하기 위해 노예상인에게 배를 빌려 주었는데 이 배의 이름은 ‘예수’였다. 예수의 자비로움과 사랑이 부르주아지와 국가에게만 충만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야만적인 폭력과 약탈의 원죄를 안고 있는 자본주의는 엔클로우저(울타리치기) 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했다. 지주들은 농사를 짓던 공유지를 목양지로 바꿔서 양털을 파는 것이 훨씬 더 수익을 올렸기 때문에 공유지에서 농민들을 내쫓았던 것이다. 지주들은 엔클로우저 운동을 하면서 수백만의 농민들과 가족들의 거주지를 불태웠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거주지를 불태우는 것을 막다가 불에 타죽는 사람조차 생겨날 지경이었다.

이 운동은 16세기부터 19세기 초반까지 계속되었으니 수백 년 동안 계속된 폭압적 조치로 하루아침에 토지에서 쫓겨나 걸인과 부랑자가 된 농민들의 참상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박탈한 결과 도시공업에는 수많은 노동력이 공급되었고, 농민들의 참상을 통해 자본주의는 착취의 근원인 살아 있는 노동력을 광범위하게 공급받으며 발전했다.

자본주의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철도, 항만, 도로건설 같은 교통수단과 통신의 발전 등으로 시장이 급격하게 확산됐다. 시장의 확산과 더불어 생산물이 대규모로 공급될 필요성이 생기면서 대공업도 같이 발전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발전은 노동자를 대공업 하에 집중시켰고 공장규율이라는 명목 하에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였다.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장시간 노동, 극단적인 저임금 속에서 이제는 공장노예로 전락하였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조차도 자본축적을 위해서 환기도 안 되는 작업장에서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하루 14시간 이상씩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그런데도 어느 방직 공장 소유자인 G. A. 리씨는 “일찍부터 복종, 근면 및 규칙성의 습관을 들이는 것보다 수신에 유익한 것은 없다”고 뻔뻔하게 말했다. 그러나 리씨는 자신의 아이들에 대해서만은 수신을 반대하고 막돼먹은 아이로 길렀을 것이다. 리씨처럼 어린아이들의 수신을 강조했던 왕립 학술원 회장이었던 지디씨는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설립을 반대하면서 “가난한 노동 계급에게 교육을 실시하게 되면 …. 사실상 그들의 수신과 행복에 해를 끼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교육은 그들의 사회적 계급이 그들에게 운명적으로 정해준 농업과 다른 고된 직업에서 그들을 훌륭한 사용인으로 만들기는커녕, 그들에게 자신의 인생의 운명을 경멸하도록 가르칠 것이다”라고 했다.

현재의 고통을 내세의 행복으로 만회하면 된다고 강조하여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저항을 가로막으려 했던 종교인의 주장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페일리 부주교는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는 1793년에 “빈자가 부자를 보고 곧잘 부러워하는 또 한 가지는 부자의 안락함이다.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은 문제를 전혀 잘못 생각하고 있다. …. 휴식은 노동의 정지이다. 그런 까닭에 피로를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그것을 즐길 수 없고, 맛 볼 수조차 없다. 부자는, 빈자에게 휴식이 가져다주는 원기 회복과 즐거움을 보며,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자들은 진정한 휴식의 즐거움을 부러워하기는커녕 전혀 맛보려 하지 않았다. 성경에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누누이 경고했지만 부자들은 언제나 내세의 안락보다는 현세의 안락을 위해 성경말씀을 무시했다. 지배계급의 이해에 복무하는 성직자의 주장은, 모든 게 마음먹기 나름이기 때문에 프랑스처럼 피비린내 나는 혁명을 하지 않고 세상을 아름답게 보면 고통스런 이 땅도 천국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 프랑스와 달리 영국의 가난한 자들은 처음에 “부자들의 재산을 탈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계급모순도 증가하면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을 ‘경멸’하기 시작했다. 비록 제도권 교육을 노동자들이 받지 못했더라도 자본주의의 노예적 공장제도와 이에 맞서는 기계파괴 운동과 파업투쟁의 경험, 불온한(?) 혁명사상의 흡수로 인해 노동자들은 점점 더 급진적으로 변해갔다.

제국주의와 탐욕에 빠진 원숭이      

이 책에서는 독점자본주의의 발전과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독점자본은 과잉상품과 자본의 배출구를 찾기 위해 시장을 향한 사냥을 계속한다. ‘걸출한’ 제국주의자인 세실 로우즈는 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거의 모두 분배되었고, 그 중에 남아 있는 것은 분할되고, 정복되고, 식민지화하고 있네. 자네가 밤에 머리 위로 바라보는 저 별들,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저 광대한 세계를 생각하면, 나는 참을 수가 없다네. 내가 만약 혹성을 합병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텐데. 나는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네. 그토록 또렷한데도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그 별들을 바라 볼 때면, 나는 슬픔에 잠긴다네

우리가 별을 보며 고작 사랑과 낭만 따위를 이야기 할 때 저자가 ‘걸출한’ 제국주의자라고 칭찬 아닌 칭찬을 한 세실 로우즈는 밤하늘에 빛나는 혹성마저도 합병할 수 있다면 하고 싶다고 할 정도로 식민지 건설에 대한 열망과 투지를 불태웠다. 과학기술발전의 제한으로 부르주아지는 혹성을 합병하지는 못했지만 대신에 지구의 대부분을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로 만들어버렸다.

휴버먼은 “자본가들은 개인적 악의에서가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방법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집중의 정도 때문에 세계를 분할한다. 그리고 그들은 세계를 ‘자본에 비례하여’, ‘힘에 비례하여’ 분할한다. …. 그러나 힘은 경제적 및 정치적 발전의 정도에 따라 변화한다”고 제국주의 시대에 레닌의 대표적 경제저술인 《제국주의론》도 인용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1929년의 전 세계적 대공황과 제국주의 전쟁, 파시즘에 대해서 다룬다. 아마 어떤 이들은 대공황의 현실은 맞지만 제국주의 전쟁과 파시즘은 오늘날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닥이 어디인지 모르는 전 세계적 대공황이 더 전면화 될 때, 노동자계급이 이러한 파국적인 경제위기에 맞서 사회주의 전망을 가지고 제대로 싸우지 못한다면 자본주의는 자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마지막 출구로 제국주의 전쟁과 파시즘을 대안으로 내세울지 모른다.

물론 세계자본주의는 제국주의 국가 간의 전면적인 전쟁의 형태가 아닐지라도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하는 이라크전쟁이나 북한에 대한 압살 기도에서 보듯 약소국에 대한 제국주의 국가의 전쟁과 폭력, 고립분쇄 책동은 계속되고 있다. 제국주의 질서 속에서 민족 간, 인종 간 전쟁과 내전도 끔찍하게 벌어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제국주의 국가 간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오늘날의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제국주의 국가 간의 전면적인 전쟁은 배제할 수 없으며, 전면적 전쟁이 아니더라도 제국주의 국가 간, 제국주의 국가와 비제국주의 국가 간, 비제국주의 국가 간의 국지전이나 무력의 형태가 아닌 무역경쟁, 경제전쟁과 알력, 다툼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세계경제 위기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프랑스와 미국의 미묘한 신경전과 미국 달러를 기축통화의 지위에서 끌어내리려는, 그리하여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끌어내리려는 중국의 움직임, 그루지야에 대한 러시아의 침공과 미국과 러시아의 패권적 힘겨루기가 이뤄지고 있다. 미국의 패권이 당장에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미국발 전 세계 대공황을 기점으로 미국 제국주의의 헤게모니가 약화되고 여기에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 등의 국가가 새로운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다툼이 강화되고 있음을 볼 때, 레닌의 제국주의론과 불균등발전법칙은 여전히 더욱 강력하게 현실을 밝히는 진리의 등불이 되고 있다. 더욱이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전쟁 예언서 따위가 아니다. 레닌이 제국주의론을 쓸 때는 이미 제국주의 전쟁이 발발한 뒤였다. 레닌은 경제분석을 통해 이미 발발한 제국주의 전쟁의 계급적 성격을 밝히고 이를 계기로 내전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하려 했던 것이다.

레닌은 “제국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이다.”라고 했다. 자본주의는 자유경쟁 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의 단계로 전화했다. 독점자본주의는 이후 국가와의 강력한 유착을 통해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변모했다. 물론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가 아니라 독점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인 것이다. 독점자본주의 시대는 자유경쟁이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독점적 질에서의 새로운 격렬한 경쟁과 다툼, 알력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것이 식민지 쟁탈과 재분할을 둘러싼 제국주의 전쟁으로 나타났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로 새로운 단계는 오직 사회주의 혁명밖에 없다. 레닌은 실제 1917년 10월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를 끊었다.

장상환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고의적으로 누락한 제21장인 ‘계획의 원리’는 바로 레닌이 혁명을 통해 탄생시킨 사회주의 운영원리를 말하고 있다. 휴버먼은 오직 사회주의만이 공황과 전쟁, 폭력과 억압, 파시즘이 판치는 야만의 자본주의에 맞서는 대안이라고 하면서 30년대 소련사회주의가 작동되는 구체적 현실과 운영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휴버먼의 마지막 22장 ‘그들은 설탕을 포기할 것인가?’ 역시 사회주의에 빗대서 탐욕과 모순에 빠진 자본주의 비판과 극복의지를 밝히고 있다. 휴버먼의 2편 전체는 바로 자본주의의 현실에 비추어 새로운 대안, 현실적인 강력한 대안인 소련 사회주의를 말하기 위함이었다.​

휴버먼은 21장에서 소유권의 국가집중 즉, 국유화와 계획화를 핵심적인 사회주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휴버먼은 원래 교사출신이었는데 나중에 노동운동가가 되어 자신의 장점을 살려 노동자교육에 종사했다. 휴버먼은 이 책을 쓰기 전에 교사직을 그만 두고 36년 미국에서 영국으로 건너가 경제학을 배웠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와 이 책을 썼다.

휴버먼은 《자본주의 발전이론》을 썼던 폴 스위지와 더불어 먼쓸리 리뷰의 공동 창립자였다. 휴버먼에 대한 먼쓸리 리뷰의 전기적 기사에서는 그를 ‘급진적 선동가, 사회주의 교사’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 휴버먼은 맑스레닌주의적 관점으로 노동자 교육과 투쟁에 종사했다. 휴버먼은 어려운 이론을 대중적으로 알기 쉽게 풀어썼다. 휴버먼의 1951년 글에는 ‘사회주의만이 답이다’라는 글도 있다.

당시 휴버먼에게 29년 전 세계를 휩쓸었던 세계 대공황의 모순으로 인해 전쟁과 기아, 실업의 고통에 빠져 있는 자본주의의 현실에 비춰서 소련 사회주의의 존재는 자본주의를 극복해낸 구체적으로 강력한 대안이자 전망이었다. 휴버먼에게 소련은 맑스의 가르침이 현실화된 체제였다. 따라서 휴버먼은 “여기 있다. 보라, 그것이 효과를 내고 있다”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었다. 물론 휴버먼은 소비재 생산이 부족한 상황에서 미래를 위해 일정 정도 현실을 희생해야 하는 생산재 즉, 공업에 대한 집중이 가져오는 어려움 등 후진적인 국가에서 혁명으로 탄생한 소련 사회주의가 갖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가장 발전한 미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다면 소련 사회주의가 안고 있는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회주의 원리를 더 잘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장상환이 누락한 21장은 소련 사회주의로서 휴버먼과 당시 노동자계급에게는 가장 강력한 전망이자 희망이었다. 91년 소련이 패배했다고 해도 저자의 글을 번역하면서 당시 저자의 핵심적 주장이 담긴 부분을 임의로 누락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휴버먼이 자신과 노동자계급의 대안으로 제시했던 소련 사회주의의 작동원리와 현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역사적 저술이기 때문에 원저 그대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것에 대한 판단은 오직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야 한다.

장상환이 21장 계획의 원리를 번역에서 누락한 것은 소련의 붕괴로 인해 현실과 맞지 않거나, 사회주의가 대중적인 인기가 없거나 아니면 사회주의의 핵심 원리인 국유화와 계획화를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할 것이다. 어떤 이유가 됐든 장상환의 번역자로서의 학문적 몰염치는 피해갈 수 없다.  

휴버먼이 이 책을 쓸 당시처럼, 아니면 그 이상의 파국적인 양상이 될지도 모를 정도로 자본주의는 ‘전대미문’의 세계적 공황에 빠져 있다. 휴버먼은 이러한 자본주의 모순에 대해 자신 있게 소련을 전망으로 제시하면서 ‘사회주의만이 답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휴버먼의 당시 상황과 다르게 비록 현실 사회주의는 지금 패배했지만 우리는 소련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과와 한계, 오류를 균형 있게 바라보면서 여전히 ‘사회주의만이 답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휴버먼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권과 이윤 동기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모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풍자적으로, 우화적으로 돌려서 말하고 있다.

동인도제도 사람들이 원숭이를 잡는 방법에 관한 아아더 모르간의 이야기 속에는 자본가들을 위한 교훈이 있다.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은 코코야자 열매를 나무에 매단다. 원숭이는 코코야자 열매에 손을 밀어 넣고, 설탕을 잡고는 주먹을 빼내려고 애쓴다. 그러나 구멍이 작기 때문에 원숭이의 꽉 쥔 주먹은 나올 수 없고, 그래서 탐욕은 원숭이가 파멸하는 원인이 되는데, 그 이유는 원숭이가 목표물을 결코 단념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의 탐욕은 개인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무정부적 경쟁이라는 체제의 원리와 모순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이 체제의 모순 때문에 파멸해갈 것이다. 그런데 이윤이라는 목표물을 결코 단념하지 않으려는 탐욕에 빠진 자본주의라는 원숭이는 그냥 파멸해가지 않는다. 동인도제도 사람들처럼, 탐욕에 빠진 자본주의라는 원숭이를 두들겨 잡을 때만이 파멸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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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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