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와 문화 냉전 재고찰
제임스 페트라스(James Petras)
먼슬리 리뷰
1999년 11월
프랜시스 스토너 손더스의 저서, 『누가 자금을 댔는가: CIA와 문화 냉전』 (런던: Granta Books)은 미국중앙정보국(CIA)이 위장단체(front groups)와 포드 재단, 록펠러 재단과 같은 친숙한 자선 단체들을 통해 방대한 문화 조직들을 어떻게 침투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는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제공한다.
저자 프랜시스 스토너 손더스는 CIA가 어떻게, 그리고 왜 문화 회의를 운영하고, 전시회를 열고, 콘서트를 조직했는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CIA는 또한 워싱턴의 입장을 따르는 유명 작가들의 출판과 번역을 지원했고, 어떤 사회적 내용이 담긴 예술에 대항하기 위해 추상 미술을 장려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맑스주의, 공산주의, 혁명 정치를 비판하고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을 변호하거나 못 본척하는 잡지들에 보조금을 지급했다. CIA는 이러한 정책들을 위해 서방의 지적 자유를 가장 목소리 높여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를 동원할 수 있었는데, 일부 지식인들은 CIA에 직접 급여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많은 이들이 CIA “사업”에 고의로 연루되었고, 다른 이들은 그 궤도를 벗어났다가 다시 들어갔으며, 1960년대 후반과 베트남 전쟁 시기 정치적 조류가 좌편향된 이후 그들의 CIA 후원자들이 공개적으로 폭로된 후에는 CIA와의 연계를 모른 척했다.
직간접적으로 자금을 지원받은 미국 및 유럽의 반공 출판물에는 『파르티잔 리뷰(Partisan Review)』, 『케니언 리뷰(Kenyon Review)』, 『뉴 리더(New Leader)』, 『인카운터(Encounter)』 등이 포함되었다. CIA의 자금 지원과 홍보를 받은 지식인들에는 어빙 크리스톨(Irving Kristol), 멜빈 라스키(Melvin Lasky), 이사야 베를린(Isaiah Berlin), 스티븐 스펜더(Stephen Spender), 시드니 후크(Sidney Hook), 다니엘 벨(Daniel Bell), 드와이트 맥도널드(Dwight MacDonald), 로버트 로웰(Robert Lowell),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메리 매카시(Mary McCarthy) 미국과 유럽의 그밖에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유럽에서 CIA는 특히 “민주적 좌파”와 전(前) 좌파들, 이그나치오 실로네(Ignacio Silone), 스티븐 스펜더(Stephen Spender),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 레이몽 아롱(Raymond Aron), 앤서니 크로스랜드(Anthony Crosland), 마이클 조셀슨(Michael Josselson), 조지 오웰(George Orwell) 등을 관심 있게 지원하고 선전했다.

조지 오웰의 반공주의 소설 《1984》
시드니 후크와 멜빈 라스키의 추진에 따라 CIA는 문화적 나토(NATO)와 같은 ‘문화자유회의(Congress for Cultural Freedom)’에 자금을 지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 모임은 모든 종류의 “반스탈린주의” 좌파와 우파를 한데 묶었다. 그들은 마음껏 서방의 문화적, 정치적 가치를 방어하고, “스탈린주의 전체주의”를 공격하며, 미국의 인종주의와 제국주의를 조심스럽게 피해다닐 수 있었다. 가끔씩 미국 대중 사회를 부분적으로 비판하는 글이 CIA의 보조금을 받는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이 CIA 자금 지원 지식인 집단이 특히 기이했던 점은 그들의 정치적 편파성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리사욕 없는 진실 탐구자, 반(反)권위적 인본주의자, 자유로운 정신의 지식인, 또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신봉자라고 가장하며, 스탈린주의 체제의 부패한 “범죄 집단” 내부 “고용인”들과 자신들을 대비시킨 것이었다.
그들이 CIA 연계를 모른다는 주장은 믿을 수 없다. 그들은 어떻게 그 기간 동안 미국 남부 전역에서 수많은 린치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비판이 그 잡지들에 전혀 실리지 않는 것을 무시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어떻게 수백만 명의 사망자를 초래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과테말라, 이란, 그리스, 한국)에 대한 비판이 그들의 문화 회의 동안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무시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어떻게 그들이 글을 쓰는 잡지들에서 당대의 모든 제국주의 범죄에 대한 노골적인 변명이 나오는 것을 무시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모두 병사들이었다. 후크와 라스키처럼 말재주 좋고, 신랄하고, 무디고, 논쟁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었고, 스티븐 스펜더처럼 우아한 에세이스트나 조지 오웰처럼 독선적인 정보 제공자도 있었다. 손더스는 CIA 내 WASP* 아이비 리그 엘리트들이 실세로 있고, 신랄한 유대인 출신 전(前) 좌파들이 좌파 이질분자들에게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묘사한다.
* WASP는 “White Anglo-Saxon Protestant”로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백인 중에서 특히 잉글랜드 출신의 영국계, 기독교 중 신교도인을 말한다.(역주)
1960년대 후반 진실이 드러나고 뉴욕, 파리, 런던의 “지식인”들이 이용당했다고 분개하는 척했을 때, CIA는 보복했다. CIA 국제기구 부를 지휘했던 톰 브라덴(Tom Braden)은 그들이 모두 누가 자신들의 월급과 보조금을 지불했는지 알았어야 했다고 상세히 설명하며 그들의 정체를 폭로했다(397-404).
브라덴에 따르면, CIA는 그들의 “문학적 허세”(CIA 강경파 코드 메이어(Cord Meyer)가 후크, 크리스톨, 라스키의 반스탈린주의 지적 연습을 지칭한 말)에 자금을 지원했다. 자칭 “민주적 좌파”의 가장 권위 있고 유명한 출판물(『인카운터』, 『뉴 리더』, 『파르티잔 리뷰』)에 대해, 브라덴은 그 자금이 CIA에서 왔으며 “한 요원이 『인카운터』의 편집자가 되었다”고 썼다(398). 1953년까지 브라덴은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국제 기구를 운영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고 썼다(398).

손더스의 책은 CIA 지식인 요원들이 문화 전선에서 어떻게 미국 제국주의 이익을 방어했는지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질문들에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CIA 지식인들이 옹호한 이데올로기 및 예술적 입장의 장기적 결과에 대한 중요한 논의를 시작한다.
손더스는 (후크, 크리스톨, 라스키가 주장한) CIA와 그 친화 재단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원조를 제공했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그녀는 “CIA의 보조금을 받은 개인과 기관들은 선전전의 일부로서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가장 효과적인 선전은 CIA에 의해 “대상이 자기 스스로 했다고 믿으면서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종류로 정의되었다. CIA는 그들의 “민주적 좌파” 자산들이 가끔 사회 개혁에 대해 지껄이는 것은 허용했지만, 그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가장 관대하게 자금을 지원하고, 집중적으로 홍보한 것은 서방 맑스주의자들과 소련 작가 및 예술가들에 대한 “반스탈린주의” 논쟁과 문학적 비난이었다. 브라덴은 이를 공산주의와의 싸움에서 CIA와 유럽 “민주적 좌파” 사이의 “수렴”이라고 불렀다. “민주적 좌파”와 CIA의 협력에는 프랑스에서의 파업 파괴,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한 정보 제공 (오웰과 후크의 정보 제공), 그리고 좌파 예술가들이 인정을 받지 못하도록 비밀 비방 캠페인 (1964년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의 노벨상 후보 지명 포함 [351])이 포함되었다.
문화 냉전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미국 정부의 기관으로서 CIA는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기간에 유럽에 집중했다. 약 20년에 걸친 자본주의 전쟁, 경제 대공황, 그리고 전후 점령을 경험한 유럽의 지식인과 노동 조합원들의 압도적 다수는 반자본주의였으며 특히 미국의 패권적 야망에 비판적이었다. 공산주의의 매력과 유럽 공산당(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성장을 막기 위해 CIA는 두 단계의 프로그램을 고안했다. 한편으로, 손더스가 주장하듯이, 일부 유럽 작가들은 명시적인 “반공 프로그램”의 일부로 장려되었다. CIA 문화 위원의 “적합한 원고”에 대한 기준에는 “우리가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으며 시의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소련 외교 정책과 통치 형태로서의 공산주의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포함되었다. CIA는 실로네, 쾨스틀러, 지드(André Gide)*처럼 환멸을 느낀 전(前) 공산주의자들의 출판을 특히 열망했다.
* 소설 《좁은 문》의 작가이기도 한 앙드레 지드는 한 때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다. 지드는 1936년 소련을 여행하고 와서 《소련 기행》을 남겼는데 이 내용이 반소비에트적이어서 파문을 일으켰다.
한국의 극우 언론에서도 이를 소개하고 있다.
“지난 3년간 마르크스주의 서적에 몰두해 있었는데 소련에 들어서면서 마치 미지의 나라에 온 기분이 들었다. … 나는 최상의 것과 보통의 것의 차이가 엄청난 것에 놀랐다. 너무나 비참한 일반 소련인들의 것과 비교할 때 나에게 주어진 특권이 지나친 것으로 보였다. … 나는 한창 번성하고 있는 콜호즈(колхо́з, 소련 집단농장)의 주택들을 여러 곳 방문했다. 나는 이제 그때 그 주택 내부에서 번져 나오던 기이하고 서글픈 인상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것들은 전혀 개성이 없었다. 어느 집이나 모두 똑같은 초라한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아주 조그만 물건조차 전혀 없었고 사소한 개인 물품도 없었으니 각자 개인의 주택은 얼마든지 맞바꿀 수 있을 듯했다. 여기 소련에서는 모든 사람의 행복은 개인의 비개성화로 얻어진다. 그러므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모두가 서로 닮고 생각도 일치해야만 하는 것이다. – 『소련 방문기』 중”
https://www.npknet.org/news/articleView.html?idxno=1137
(역주)
CIA는 파리, 베를린, 벨라지오(코모 호수를 내려다보는)에서 호화로운 회의에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반공 작가들을 활성화 시켰는데, 그곳에서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 다니엘 벨, 체스와프 밀로슈(Czesław Miłosz) 같은 객관적인 사회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그들의 가치(그리고 서방의 자유와 지적 독립의 미덕)를 그들의 CIA 후원자들이 정의한 반공 및 친(親)워싱턴의 범위 내에서 설교했다. 이 권위 있는 지식인들 중 그 누구도 식민지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의 대량 학살, 미국 지식인들에 대한 마녀 사냥, 또는 미국 남부의 준군사 조직(쿠 클럭스 클랜 KKK)에 의한 린치에 대한 미국의 지원에 대해 의심이나 질문을 제기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한 평범한 우려들은 시드니 후크, 멜빈 라스키, 그리고 거의 파산 상태인 자신들의 문학 사업을 위해 열심히 자금을 구걸하던 『파르티잔 리뷰』 무리들에게는 오직 “공산주의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에 불과했다. 소위 권위 있는 반공 문학 및 정치 잡지들 중 상당수는 CIA의 보조금(수천 부를 사서 나중에 무료로 배포한)이 없었다면 오래전에 문을 닫았을 것이다.
CIA가 운영한 두 번째 문화 트랙은 훨씬 더 미묘했다. 여기서는 교향곡, 미술 전시회, 발레, 극단, 그리고 유명한 재즈 및 오페라 연주자들을 지원하여 유럽 내 반제국주의 정서를 중화시키고 미국 문화와 정부에 대한 이해를 창출하는 것을 명시적 목표로 삼았다. 이 정책 뒤에 있는 아이디어는 미국 문화를 선보여, 그 군사-경제 제국을 지지하는 문화적 패권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CIA는 특히 유럽에 흑인 예술가들 – 특히 가수(메리언 앤더슨(Marian Anderson) 같은), 작가, 그리고 음악가들(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같은) – 을 보내는 데 열성적이었는데, 이는 워싱턴의 인종차별적 국내 정책에 대한 유럽의 적대감을 중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만약 흑인 지식인들이 미국의 예술 각본을 따르지 않고 명시적 비판으로 빠진다면, 작가 리처드 라이트(Richard Wright)의 경우 처럼 그들은 정치적 명단에서 추방되었다.
겉으로는 비정치적 예술 활동들의 지적 의제에 대한 CIA의 정치적 통제 정도는 드와이트 맥도널드가 제출한 독단적인 기사에 대한『인카운터』 편집자들(라스키와 크리스톨 등)의 반응을 통해 분명히 드러났다. 독단적인 아나키스트 지식인인 맥도널드는 CIA가 운영하는 문화자유회의와 『인카운터』의 오랜 협력자였다. 1958년, 그는 『인카운터』에 “America America”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는데, 그곳에서 그는 미국 대중 문화, 그 거친 물질주의, 그리고 예의 없는 태도에 대한 혐오감을 표현했다. 그것은 CIA와 『인카운터』의 공산주의에 대한 문화 전쟁에서 주요 선전 자료였던 미국적 가치에 대한 반박이었다. 맥도널드의 “타락한 미국 제국”에 대한 공격은 CIA와 『인카운터』 내 그들의 지식인 요원들에게는 너무 지나친 것이었다. 브라덴이 지식인들에게 한 지침에서 명시했듯이 “CIA 자금을 받는 조직들은 미국 정책의 모든 측면을 지지하도록 요구받아서는 안 되지만”, 변함없이 한계점 – 특히 미국 대외 정책과 관련된 – 이 존재했다(314). 맥도널드가 『인카운터』의 전(前) 편집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기사는 거부되었다. 『인카운터』 두 번째 호에 글을 쓴 니콜라 키아로몬테(Nicola Chiaromonte) 같은 냉전 작가들의 신앙고백 같은 주장, 즉 “어떤 지식인도 타락하지 않았다면 외면할 수 없는 의무는 허구를 폭로하고 ‘유용한 거짓말’을 진리라고 부르지 않을 의무이다”는, 서양의 ‘유용한 거짓말’은 『인카운터』와 그 유명한 필자들에게 확실히 적용되지 않았다.
손더스의 책에서 가장 중요하고 매혹적인 논의 중 하나는 CIA와 그 동맹자들이 뉴욕현대 미술관(MOMA, Museum of Modern Art)에서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사회적 내용이 담긴 예술에 대한 해독제로서 추상 표현주의(AE) 회화와 화가들을 지원했다는 사실이다. 추상 표현주의를 지원함으로써, CIA는 의회의 우익을 떨쳐냈다. CIA가 추상 표현주의에서 본 것은 “반공 이데올로기, 자유 이데올로기, 자유 기업 이데올로기”였다. “비구상*적이고 정치적으로 침묵하는 그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반대였다”(254).
* 구상미술(Figurative Art) 추상미술과는 달리 자연을 보이는 대로 묘사하는CIA이다.(역주)
그들은 추상 표현주의를 국민 의지의 진정한 표현으로 보았다. 우익의 비판을 우회하기 위해 CIA는 민간 부문(즉 현대 미술관과 그 공동 설립자 넬슨 록펠러)로 눈을 돌렸으며, 그는 추상 표현주의를 “자유 기업 그림”이라고 불렀습니다. 뉴욕 현대미술관의 많은 이사들은 CIA와 오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추상 표현주의를 문화 냉전의 무기로 선전하는 데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 추상 표현주의의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받은 전시회가 전 유럽에서 열렸고, 미술 비평가들이 동원되었으며, 미술 잡지들이 아낌없는 찬사 글을 쏟아냈다. 뉴욕 현대 미술관과 CIA가 운영하는 페어필드 재단(Fairfield Foundation)의 결합된 경제적 자원은 유럽의 가장 권위 있는 갤러리들의 협력을 보장했고, 이들은 차례로 유럽 전역의 미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자유 예술” 이데올로기로서의 추상 표현주의(조지 케난(George Kennan), 272)는 유럽의 정치적으로 헌신적된 예술가들을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다. 문화자유 회의(CIA 전면 조직)는 명시적인 정치적 행위로, 구상적 또는 사실주의 미학보다 추상 회화를 지지하며 그 영향력을 행사했다. 추상 표현주의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 논평하며, 손더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미국 미술이 문화 냉전에서 수행한 역할의 놀라운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이 그 사업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렇게 고의로 비정치적이라고 선언한 운동이 그렇게 강렬하게 정치화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275)
CIA는 비정치적 예술가와 예술을 자유와 연관시켰다. 이것은 유럽 좌파의 예술가들을 중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아이러니는 그 비정치적 태도가 좌파에게만 해당된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IA와 그 문화 조직들은 전후 예술관을 깊이 있게 형성할 수 있었다. 많은 유명 작가, 시인, 예술가, 그리고 음악인들은 정치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신념을 선포했다. 정치적 참여와 단절된 자유로운 예술가 또는 지식인이라는 맹목적 신념이 우위를 점했으며 오늘날까지도 널리 퍼져 있다.
손더스가 CIA와 서양 예술가 및 지식인들 사이의 연계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CIA의 기만과 반대 세력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에 대한 구조적 이유를 탐구하지 않고 있다. 그녀의 논의는 주로 소련 공산주의와의 정치적 경쟁과 갈등의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CIA의 문화 냉전을 계급투쟁, 토착적 제3세계 혁명, 그리고 미국 제국주의 경제 지배에 대한 독립적인 맑스주의적 도전의 맥락에서 위치시키려는 진지한 시도는 없다. 이것은 손더스로 하여금 다른 것들을 희생시키면서 일부 CIA 사업을 선택적으로 칭찬하고, 다른 요원들보다 일부 요원들을 칭찬하게 만든다. CIA의 문화 전쟁을 제국주의 체제의 일부로 보기보다는, 손더스는 그 기만적이고 독특한 반응적 성격을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동유럽과 구소련에 대한 미국-나토의 문화적 정복은 문화 전쟁이 방어적 행동이었다는 어떤 생각도 떨쳐버려야 한다.
문화 냉전의 기원 자체는 계급 투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초기부터 CIA와 그들의 미국노동총동맹-산별노조협의회(AFL-CIO)* 요원들인 어빙 브라운(Irving Brown)과 제이 러브스톤(Jay Lovestone) (전(前) 공산주의자들)은 사회 민주주의 노조에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급진적인 노동 조합을 전복시키고 파업을 파괴하는 데 수백만 달러를 쏟아부었다(94). 문화자유회의와 그 계몽된 지식인들은 1948년 마르세유의 갱스터들을 고용하여 부두 노동자들의 파업을 파괴한 바로 그 CIA 요원들에게 자금을 지원받았다.
* 1955년 미국노동연맹(AFL)과 산별조직회의(CIO)가 합병하여 만들어진 미국 노총은 노사협조주의를 표방하며 철저한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미제국주의의 도구 역할을 수행했다. 이에 대해서는 “블루칼라 제국: 미국노총의 은밀한 관행
[리뷰] 미국 노동계의 글로벌 반공주의 운동에 관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루스 니들먼(Ruth Needleman), 참세상, 2024.11.19.) 기사에 잘 나와 있다.(역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유럽에서 구(舊) 우익(파시스트 및 허약한 자본주의 체제와의 연계로 신뢰를 잃음)이 신뢰를 잃으면서, CIA는 반(反)나토 노동 조합원들과 지식인들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 전쟁을 수행할 민주적 좌파를 찾아내거나(발명하거나)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CIA의 특별 부서가 우익 의회의 반대를 우회하기 위해 설정되었다. 민주적 좌파는 본질적으로 급진 좌파와 싸우고 유럽에서의 미국 패권에 이데올로기적 명분을 제공하기 위해 이용되었다. 어느 시점에도 민주적 좌파의 이데올로기적 투사들은 미국의 전략적 정책과 이익을 형성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는 질문하거나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방의 민주적 가치”라는 이름으로 제국을 섬기는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대규모 반대가 미국과 유럽에서 표출되고, 그들의 CIA 위장막이 폭로된 이후에서야, CIA의 지원과 자금을 받은 지식인들 중 많은 이들이 배를 떠나 미국 대외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커리어의 대부분을 CIA 급여를 받으며 보낸 후, 스티븐 스펜더는 미국의 베트남 정책 비판가가 되었고, 『파르티잔 리뷰』의 일부 편집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깊이 관여한 수많은 잡지들과 공짜 관광(convention junkets)에 대한 애정이 어느 정도의 인지 없이도 일어날 수 있었다고 믿는 비판자들은 거의 없었다.
CIA의 미국, 유럽 및 기타 지역의 문화 생활에 대한 관여는 중요한 장기적 결과를 낳았다. 많은 지식인들은 그 기관이 설정한 이데올로기적인 편견 내에서 활동한 덕분에 명성, 공공의 인정, 그리고 연구 자금으로 보상을 받았다. CIA 자금 지원 회의와 잡지들로부터 주목을 받은 철학, 정치 윤리학, 사회학, 그리고 예술 분야의 가장 유명한 인물들 중 일부는 CIA가 수립한 정치적 범위를 기반으로 차세대의 승진을 위한 규범과 기준을 확립하게 되었다. 능력이나 기술이 아니라, 정치 – 워싱턴의 노선 – 가 “진실”과 “탁월성” 그리고 권위 있는 학계, 재단, 박물관의 미래 지위를 정의했다.
미국과 유럽 민주적 좌파의 반스탈린주의 수사적 분출과 민주적 가치와 자유에 대한 그들의 신앙 고백은 서양의 추악한 범죄에 유용한 이데올로기적 면피였다. 다시 한번, 최근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많은 민주적 좌파 지식인들은 서방과 코소보해방군(KLA)*과 함께 수만 명의 세르비아인들을 피비린내 나는 숙청하고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을 살해하는 데 동조했다.
* 코소보 해방군은 알바니아계 분리주의 민병대로 나토의 지원을 받으며 민간인 학살과 전쟁범죄를 자행하였다.(역주)
반스탈린주의가 냉전 시기 민주적 좌파의 아편이었다면, 인권 개입주의는 오늘날 같은 마취 효과를 내며 현대 민주적 좌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CIA의 문화 캠페인은 오늘날 비정치적으로 보이는 지식인, 학자, 예술가들을 위한 원형을 창출했다. 이들은 대중 투쟁에서 벗어나 노동자 계급과 거리를 두고 권위 있는 재단과의 근접성으로 인해 가치가 올라간다. CIA의 성공적인 전문가 역할 모델은 이데올로기적 파수꾼으로서, 계급투쟁, 계급착취, 미국 제국주의 같은 용어는 “이데올로기적”이지 “객관적” 범주가 아니라면서 이에 대해 비판적 글을 쓰는 지식인들을 배제한다.
CIA의 문화자유회의 무리들이 미친 유일하고 지속적이며 해로운 영향은 그들의 미국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구체적 방어가 아니다. 그들의 성공은 영향력 있는 문화 및 정치 매체에서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일체의 지속적 논의도 배제한다는 관념을 이후 세대의 지식인들에게 주입시키는 데 있었다. 문제는 오늘날의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이 이러저러한 문제에 대해 진보적 입장을 취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작가와 예술가들 사이에 만연한 믿음, 즉 그들의 작품이 상당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려면 반제국주의 사회적 및 정치적 표현이 그들의 음악, 그림, 그리고 진지한 글에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다. CIA의 지속적인 정치적 승리는 지식인들에게 좌파의 진지하고 지속적인 정치적 참여가 진지한 예술 및 학문과 양립 불가능하다고 설득하는 데 있었다. 오늘날 오페라 하우스, 극장, 미술관, 그리고 학자들의 전문가 모임에서 CIA의 냉전 가치들은 눈에 띄고 널리 퍼져 있다. 누가 벌거벗은 임금님의 몸뚱이를 폭로할 용기가 있는가?
저자 소개
제임스 페트라스(James Petras)는 뉴욕 주 빙엄턴 대학교(Binghamton University)의 바틀 명예 교수(사회학)이다.(현재는 은퇴했다.)
그는 보스턴 대학교에서 B.A.,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9개 언어로 출판된 68권의 책과 『아메리칸 소시오로지칼 리뷰(American Sociological Review)』, 『브리티시 저널 오브 소시오로지(British Journal of Sociology)』, 『소셜 리서치(Social Research)』, 『저널 오브 컨템포러리 아시아(Journal of Contemporary Asia)』, 『저널 오브 페전트 스터디스(Journal of Peasant Studies)』 등 전문 학술지에 56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 『가디언(The Guardian)』, 『네이션(The Nation)』,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Christian Science Monitor)』,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 『파티잔 리뷰(Partisan Review)』, 『탕 모데른(Temps Moderne)』,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Le Monde Diplomatique)』 등 비전문 잡지에 2000편 이상의 글을 기고했다.
주요 저서
《미국 내 이스라엘의 권력(The Power of Israel in the United States)》

《가면을 벗은 세계화: 21세기 제국주의(Globalization Unmasked: Imperialism in the 21st Century)》(헨리 벨트마이어Henry Veltmeyer와 공저)

《신추출주의: 후기 신자유주의 발전 모델이냐 21세기 제국주의냐(The New Extracism: A Post-Neoliberal Development Model or Imperialism of the 21)(헨리 벨트마이어와 공저)
《위기에 처한 체제
자본주어 자유시장의 역동성
System In Crisis
The Dynamics of Free Market Capitalism)》(헨리 벨트마이어와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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