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은 현재다 외세 척결ㆍ자주통일 ㆍ민중해방이 4.3정신 계승이다
역사는 흐른다. 역사가 흐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가 세월 저 너머로 흘러 흘러 가버린다는 말인가
과거 역사가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버린다면 역사를 되돌아본다는 것은 회고 외에는 그다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저 흘러 지나가지 않는다.
역사는 인류 집단의 삶과 경험, 투쟁의 집단적 축적물이다. 인류 집단이 만들어온 역사는 지금 우리 삶을 규정하고 우리의 미래도 규정한다.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역사의 성격을 규정하는 결정적 사건들은 특히 현재와 미래를 강력하게 규정한다.
1948년 4.3항쟁이 바로 그렇다. 2025년은 4.3항쟁 77주년이다.
공교롭게도 2025년 4.3은 윤석열 내란ㆍ외환 탄핵을 하루 앞둔 날이다.
윤석열 탄핵을 반대하는 극우들은 광주항쟁에 대해 그런 것처럼, 4.3은 여전히 폭도들의 준동이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광주항쟁이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규정된 것에 반해 4.3은 아직도 ‘사건’에 머무르고 있다.
2025년 4.3 추념식의 공식 명칭은 ’77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이고 슬로건은 ‘4·3의 숨결은 역사로, 평화의 물결은 세계로’이다. 추념식에서는 제주4·3의 비극을 화해와 상생의 기회로 삼자는 결의를 다진다.
도대체 4.3은 무슨 사건이란 말인가? 4.3의 진정한 역사적 성격은 무엇인가? 4.3의 역사적 성격을 제대로 규정하지 못하면서 무슨 정신 계승이 있는가?
‘4·3희생자’가 있으면 최소 3만에서 최대 8만 여에 달하는 희생자들은 누구에 의해, 왜 학살당했다는 말인가? ‘4·3의 숨결은 역사로’ 라는 구호는 역사를 언급하지만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애국가 가사만큼이나 아무런 역사성이 없이 공허하다. 그런데 살아 있는 항쟁의 역사를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허한 말로 뒤덮는 것은 실은 역사의 진실을 감추는 것이고 역사왜곡이다.
‘평화의 물결은 세계로’가자는 호소 역시 현실을 은폐하고 미화분식하는 상투적인 위선과 거짓에 불과하다.
‘평화의 섬’이란 말이 무색하게 제주 강정마을에 건설된 해군기지는 물론이고 지난 해 11월 3일에는 제주 동쪽에서 한국 전투기 4대와 ‘죽음의 백조’로 불리는 B-1B 초음속 전략 폭격기와 미국 공군 전투기 2대, 일본 항공자위대 전투기 40대까지 참여하는 한미일 연합공중훈련이 실시되기도 했다.
1930년대 일제는 제주를 중국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거점으로 삼고 곳곳을 요새화 했다. 알뜨르 비행장은 중국을 폭격하는 폭격기의 중간 기착지였다. 난징대살육 배후 거점이 바로 알뜨르 비행장이었다.
도대체 제주를 도륙하고 전쟁섬으로 만들어온 침략자들과 또다시 대중ㆍ대북 침략전쟁 연습을 한단 말인가?
그러면서 무슨 ‘평화의 물결은 세계로’ 가자며 전쟁을 재촉하는 현실을 이토록 철저하게 은폐하는가?
포천 접경지대 전투기 2대 ‘오폭’사건은 한미침략전쟁 연습이 얼마나 주민 목숨을 위협하고 전쟁을 부르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전투기 조종사가 미군인지, 책임자는 처벌됐는지 그 무엇도 공개하지 않은 채 사고는 은폐되고 있다.
대북적대에 이어 대중적대와 대러적대 역시 ‘세계로’가는 것은 ‘평화의 물결’이 아니라 전쟁과 적대의 물결임을 보여준다.
내란 수괴 윤석열이 미국의 대리전인 우크라이나에 경제적ㆍ군사적 지원을 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고대에서 봉건 조선왕조 조선사 전체를 통털어도 4.3처럼 권력이 민중을 무참히 대량학살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학살진상 규명이 되지 않고 누구도 반성과 사죄가 없는 현실에서 화해와 상생은 무참히 학살당한 제주의 영령들을 부관참시하는 또다른 국가폭력에 다름아니다.
백비에 4.3의 정명(正名)을 새겨야 한다
4.3은 “내외 침공자에 대한 정의의 방어 항쟁”
제주4.3평화기념관의 비석은 여전히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은 백비로 누워 있다. 제주 4.3 77주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역사적 의미를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올바른 이름, 정명(正名)을 찾지 못하고 있다.
《화산도 저자 》 저자 김석범 선생은 2017년 9월 17일 서울시 은평구 제정 제1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수상 소감을 통해 4.3의 역사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남북을 통해 단선 단정 반대 운동이 치열하게 확대되는 과정에서 단정 반대 남북통일을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4월 초에 <4・3> 무장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소위 <4・3> 사건. 교통사고도 사건, 이웃 사이의 폭력 싸움이 일어나도 사건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국가 권력에 의한 대학살, 대학살 사건… 편의상 쓰고 있는 것이지만 그만 두어야 할 호칭입니다. 아직 <4・3>은 정명을 못 하고 있습니다. 이름 바로 짓기, 역사 바로 세우기, 내외 침공자에 대한 정의의 방어 항쟁이 왜 이름 없는 무명비로 제주 평화공원 기념관에 떳떳한 이름을 새기지 못 한 채 아직 고요히 누워 있습니까? 이름 없는 백비에 정명을 해서 바로 세워야 합니다.
4.3의 정명은 “내외 침공자에 대한 정의의 방어” 전쟁이다. 내부 침공자는 대한민국 국부로 숭배 받는 이승만 도당이다. 외부 침공자는 미국이다.
무엇보다도 『화산도』는 반제국주의 통일 투쟁으로서의 4·3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는 작품이다. 일본과 미국에 의한 연이은 식민 상황과 한반도 분할 점령에 따른 분단 극복의 염원이 제주도에서 분출된 것이 4·3이라는 인식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계속되는 식민 상황에 대한 제주도 민중과 지식인들의 인식, 점령군을 자처한 미군의 존재, 4·3의 발발과 진압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 미군정 정책에 따른 친일파의 득세등을 문제 삼았다.(김석범 『화산도』에 나타난 4·3의 양상과 그 의미 김동윤 (제주대학교), 2016.8.)
화산도는 소설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금기를 뚫고 가장 역사적 진실에 접근한 역사서라고도 할 수 있다.
김석범 선생은 4.3이 역사적 성격을 인정 받지 못하는 이유는 기억을 강제 말살당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오랫동안 기억을 말살당한 <4・3>은 한국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 입 밖에 내지 못 하는 일, 알고서도 몰라야 하는 일이었다. 하나는 막강한 권력에 의한 기억의 타살, 다른 하나는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이 스스로 기억을 망각 속에 집어 던져 죽이는 기억의 자살이었다.
왜 4.3은 집단적으로 기억이 타살 당하고 망각 속으로 사라졌는가? 해방 이후 한국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먼저 100만이나 되는 이들이 학살을 당해 기억의 주체가 사라졌다.
살아남은 이들, 피학살자들의 가족, 이웃들이 체험한 학살의 공포 때문이다. “골로 간다”는 집단학살의 공포는 아직까지 백색테러 반공 파쇼체제로 한국인들을 집단망각, 집단 최면 속으로 내몰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기세등등 시퍼렇게 살아남아 종북몰이, 반국가세력 척결 국가 폭력으로 남아 윤석열 내란의 배경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제주 4.3의 외부 침공자 미국 강점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침공자 미국을 자유와 인권의 화신으로 떠받드는 미국에 대한 노예적 숭배가 정치권은 물론이고 이 사회 전반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4.3학살 배후는 이남 강점 미군이었다
4.3은 현대사 최대 비극이기도 하지만 동지에 그 비극 속에서도 장엄하게 솟구쳐 오른 현대사의 가장 영웅적인 인간들의 항쟁이기도 했다.
1948년 4월 3일 한라산을 중심으로 점화됐던 유격대의 봉화는 1954년 9월 21일 제주경찰국장 신상묵의 명의로 포고문을 발표하며 한라산에 내려진 금족령이 해제되면서 공식적으로 끝나는 6년 동안의 기나긴 처절한 대항쟁이었다.
제주섬의 4.3은 또한 현대사의 가장 아름다운 한 장면인, 동포학살을 거부하고 항쟁을 일으켰던 육지 여순으로 퍼져 나갔다.
4.3의 직접적인 학살자는 이승만이 보낸 군경이었지만, 실제 대다수 잔학한 학살에 앞장선 토벌대는 반공 우익 서북청년단이었다.
미국은 토벌 군인과 경찰에게 무기와 군수품을 지원하고 서북청년단을 경찰과 군대에 적극 편입시키기도 했다. 미국은 또한 유격대를 진압하기 위해 만든 군대 안에도 장교 출신의 미군고문단들을 적잖게 배치하고 이들이 실제로 군사작전을 지휘하고, 진압군이 민간인들을 체포하고 사살하도록 했다.
《4.3, 미국에 묻다》 저자 허호준은 이 책에서 미국이 제주4.3 학살의 배후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무부는 제주도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 보고받으면서 “제주도에서 일어난 공산반란으로 최소 15,000명 이상이 공산주의자들이 살육되었다.”고 기술할 정도로 소상히 알고 있었다.
하지 사령관이 제주도에 파견한 브라운 대령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 뿐이다.”라며 초강경의 태도로 토벌작전에 임했다. 이 때문에 토벌대와 유격대 간의 협상 시도도 무산되었다.
허호준은 이 책에 제주 4.3사건 관련한 영상물에서는 “상공을 날아다니는 미군 연락기, 미군 함정이 내뿜는 해안의 검은 연기, 낯선 이방인이 산야를 누비며 작전을 진두지휘하는 모습, 그 옆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두려운 눈빛의 제주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고 썻다.
이남만의 단독선거가 4.3항쟁으로 무산될까봐 초조해진 미국은 5.10 단독선거일이 가까워지면서 본격적으로 초토화 작전과 대량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그해 2월 UN의 결정으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현실화되자 전국이 요동쳤습니다… 4‧3봉기 이전에 본토에서 소요사태가 빈발하게 일어났고, 제주 상황도 그런 사건 중 하나로 인식되었습니다…
미군정은 경찰총수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초기 진압작전의 총대를 메게 했습니다. 조병옥은 1947년 3.10총파업이 발생하자, “조선의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제주사람들을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고 발언할 정도의 강경파였습니다. 조병옥은 본토 경찰관들을 제주에 급파하는가 하면 서북청년회(서청) 본부에 단원 500명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4월 하순에 이르자 미군정의 전략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 당시를 회고한 김익렬 유고에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무장대와의 협상에 주력하던 김 연대장 앞에 딘 군정장관 고문이 나타나 초토화작전 실행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4.28평화협상이 진행되었지만, 5.1오라리방화사건을 계기로 깨어집니다. 미군 촬영반이 이 방화 현장을 입체적으로 촬영해서 무성기록영화 ‘제주도 메이데이’(May Day in Korea : Cheju-do)를 제작하는데, 우익단체가 저지른 방화를 무장대가 한 것처럼 조작합니다.
이제 미군정의 갈 길은 뻔히 보입니다. 결정적 쐐기를 박은 것이 5‧5 미군정 수뇌부 비밀회의입니다. 딘 군정장관과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 사령관 등 미군정 수뇌부가 제주에 내려와 제주 치안 담당자 등 9인이 참석한 회의에서 김익렬 연대장이 주장하던 화평방안이 묵살되고, 강경 진압을 요구한 조병옥 경무부장의 강경론이 채택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일이 다가온 것입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는 영구적인 남북 분단을 의미했기에 당시 좌파뿐만 아니라 김구, 김규식 등의 민족지도자들도 반대했습니다. 제주도민 상당수가 선거를 피해 산에 오릅니다.
당시 선거는 50% 이상 투표해야만 인정되는 제도인데,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북제주군 갑구(43%), 을구(46.5%) 등 2개 선거구만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습니다. 결국 제주도는 미군정이 실시한 5‧10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충격을 받은 미군정은 즉각 전면대응에 나섰습니다. 제주 앞바다에 미 구축함 ‘크레이그’ 호를 파견해 봉쇄하고, 제9연대와 부산 제5연대 1개 대대 이외에도 수원에서 창설된 제11연대, 대구 제6연대 1개 대대를 차출합니다. 경찰력도 본토로부터 크게 증강시켰습니다.(5.10선거 보이콧, 미군정 토벌전략 어떻게 달라졌나?…“날이 갈수록 강경일변도…결국 초토화로”
[특별기고] 양조훈 전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제주의 소리, 2023.05.10)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같은 미군의 역할을 일부 엿볼 수 있는 이승만의 발언도 나온다.
미군도 진압작전에 나섰다. 미군이 어느 정도 작전에 참여했는지는 불확실하나 “미 해군이 기항하여 호결과를 냈다.”
4.3의 진실이 이제 수면 위로 올라 오고 있다. 4.3은 대내외 침공자들의 민중자치권력 강제 해산과 쌀공출 등 생존권 문제에 더해 결정적으로 이남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으로 분단을 영구화 하려는 미군정과 이승만 도당에 맞서는 항쟁이다.
미국이 제주 4.3항쟁을 진압하고 대량학살을 자행한 주범이자 학살 배후라는 점은 위 자료만으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학살 백색테러에 대한 공포로 인한 집단 강제망각과 미국이 인권과 민주주의 국가라는 집단최면, 미국 강자 숭배라는 굴종적 노예의식이 어우러져 이미 밝혀진 역사의 진실을 백비로,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4.3제주도민들이 양민, 즉 선량한 민중인 것은 두 말할 필요 없이 분명하다. 그러나 ‘거창양민학살 사건’이라는 명명에서도 보듯, 이러한 구분은 양민과 비양민으로 나눠 희생자들을 분열시킬 뿐만 아니라 위대한 민중항쟁이라는 역사를 은폐하기도 한다.
제주4.3민중은 양민이었고 희생자 상당수에는 어린이와 노약자, 여성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들 4.3제주 민중은 동시에 일제에 의한 식민지 경험에 피끓는 분노를 안고 있었고 해방을 맞았지만, 미제의 (신)식민지배와 분단을 막고 남북의 자주통일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 정치의식과 역사의식이 있는 자각한 민중이었다.
4.3은 현재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무엇이 꽃이 만개하는 이 찬란하게 아름다운 계절 사월을 4.3의 대학살과 11년 전 한미연합 군사훈련 와중에 벌어진 4.16세월호의 비극과 4.19의 학살로 고통과 상처로 얼룩진 달로 만들었는가?
역사가, 반역의 역사가 이 찬란한 계절 4월을 잔인한 비극의 달로 만들었다. 이 역사의 비극은 저마다 사안들이 다르지만 그 배후에 미국이 도사리고 있거나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공통지점이 있다.
4.3의 학살자들은 친일에서 반공 친미로 변신한 제국주의 부역자들이었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미제와 일제를 숭배하고 분단과 분단에 기생하며 국가보안법의 칼을 휘두르는 자들이 이 땅의 현지 통치자들이 되도록 했다.
이들의 정점에 내란ㆍ외환수괴 윤석열이 있다. 미국은 윤석열을 대북적대 침략책동의 돌격대로 삼아 내란ㆍ 외환의 직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심지어 미국은 탄핵에도 공공연히 개입하여 노골적인 내정간섭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4.3항쟁 하루 뒤에 윤석열 탄핵선고가 있다.
윤석열은 역사를 45년 전 살인마 전두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을 넘어 정권을 반대하는 수천, 수만의 민중을 반국가세력으로 몰아 수거하고 수장하는 7, 80년 전의 대학살 시대로 단숨에 복고하려고 했다.
윤석열은 잔학무도한 학살과 그 수십, 수백배나 끔찍한 파괴와 학살 재앙을 초래할 전쟁을 기획하고 도발한 파시스트 내란ㆍ외환수괴다.
그 내란ㆍ외환수괴의 배후에는 대북적대ㆍ 전쟁책동ㆍ 난폭한 내정간섭자 미국이 수괴의 수괴로 도사리고 있다. 분단과 민족 간 대립과 적대는 극우 파쇼와 미국이 암약하는 온상이다.
이제 이 역사적 비극의 달 4월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희망으로 만드는 것은 생동하며 투쟁하는 살아 있는 우리들이 만들어가야 하는 역사적 과제다.
4.3은 현재다. 4.3영령이 살아 있는 우리들에게 명한다.
현대사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단죄하고 피학살 원혼들을 신원하라!
4.3배후 점령자 미국은 내정간섭 전쟁책동 중단하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
간첩조작 인권말살 대북적대 분단고착법ㆍ 내란조장법 국가보안법 철폐하라!
77년 전 4.3학살ㆍ여순학살 자행한 반공 서북청년단, 2025년 서청 후예 내란옹호 인간혐오 반북ㆍ반중 극우를 척결하자!
* 그림: 제주출신 강요배 화가 작품 ‘한라산 자락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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