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은 반미투쟁에 기권해야 하는가?
이번 8.15대회에서의 반미자주 대회의 기조가 일부 잘못되었다면 그것을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반미자주 운동을 왜곡된 관점으로 비판하면서 이 투쟁에 기권하고 심지어 가로막는다면 심각하게 비판받아야 한다.
이번 8.15행사관련해 [노동해방을 위한 좌파활동가 전국결집](이하 전국결집)에서 발표한 입장은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협소한 경제주의로 축소시키고 반미반제국주의 투쟁에 기권하라 종용하면서 이것을 계급적 관점이라 정당화 하고 있다.
전국결집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보기] 관념적 정치 구호를 넘어, 현장의 삶을 바꾸는 노동자의 통일을 향해!
전국결집의 이 입장 제목은 “노동자의 통일을 향해!” 나아가자고 호소하고 있다. “노동자의 통일을 향해!” 나아가자면서 “관념적 정치 구호를 넘어, 현장의 삶을 바꾸”자는 호소는 옳다. 그런데 여기서 “노동자의 통일을 향해”는 노동자가 통일운동을 향해 나아가자는 주장이 아니다. 실제 글은 분단을 척결하고 노동자가 통일운동을 전면에 내걸고 나아가자가 아니라 엉뚱한 얘기를 하고 있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와 미국의 경제 수탈 폭로를 앞세우며 자주와 평화를 외친다. 그러나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 잔업과 야근을 버텨내고, 물가 상승으로 가계 빚에 시달리는 대다수 현장 조합원들은 질문을 던진다. 거창한 반미 구호와 정치적 통일 담론이 과연 매일 아침 출근도장을 찍는 우리 노동자의 삶에 무엇을 더해주는지…
과연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 잔업과 야근을 버텨내고, 물가 상승으로 가계 빚에 시달리는 대다수 현장 조합원들은” 반미구호에서 기권하고 “정치적 통일담론”을 부정해야 하는가? 과연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와 미국의 경제 수탈 폭로를 앞세우며 자주와 평화를 외”치는 것은 노동자의 삶과 무관한가?
이들은 그렇다고 한다. 이들은 또 이렇게 주장한다.
오늘날 노동자가 원하는 통일은 관념적이고 이념적인 정치 구호가 아니다. 노동자가 바라는 통일은 군사적 긴장과 전쟁 위협이 사라져 우리의 생명과 일터가 안전하게 보호받는 평화다. 매년 막대한 국방비로 소모되는 국가 예산이 노동자의 사회안전망 구축, 안전한 작업환경 조성, 사회보장 확대라는 민생 예산으로 전환되는 평화 경제다. 분단 체제가 만드는 전쟁의 공포를 없애고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는 삶의 터전을 만드는 것이 노동자가 바라는 진정한 통일이다.
그 누구도 노동자가 외치는 통일이 “군사적 긴장과 전쟁 위협이 사라져 우리의 생명과 일터가 안전하게 보호받는 평화다. 매년 막대한 국방비로 소모되는 국가 예산이 노동자의 사회안전망 구축, 안전한 작업환경 조성, 사회보장 확대라는 민생 예산으로 전환되는 평화 경제다. 분단 체제가 만드는 전쟁의 공포를 없애고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는 삶의 터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는다.
“군사적 긴장과 전쟁 위협이 사라”지지 않는데 “우리의 생명과 일터가 안전하게 보호받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않는가?
더욱이 미국의 패권전략과 정권의 전쟁책동, 대북적대 정책과 싸우지 않고 “평화공존””이나 평화경제”라는 게 가당키나 하나?
“매년 막대한 국방비로 소모되는 국가 예산”을 민생예산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미국의 대북, 대중 적대정책에 따라 진행되는 군사적 긴장이 사라지고 평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이처럼 군사적 긴장과 전쟁 위협에 맞서 싸우는 것은 일터의 안전뿐만 아니라 적대화된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한반도와 동북아 전체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
반미투쟁은 노동자의 삶과 무관하지 않고 이 사회 변혁을 위한 요구다
이들은 반미투쟁은 노동자의 삶과 무관하다고 하면서 반미투쟁을 기권하고 이와 분리된 “노동 현안”에 대한 집중을 주장하고 있다.
지도부가 목청껏 외치는 ‘반미’가 과연 곧바로 노동자의 실질적 이익으로 이어지는가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미국의 통상 압박이나 글로벌 경제 패권주의가 국내 산업과 고용에 미치는 부작용을 비판적으로 감시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노동 현안을 맹목적인 반미 투쟁으로 귀결시키는 방식은 현장 노동자의 삶에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거대한 외세 비판에만 집중하다 보면, 정작 우리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부의 양극화, 비정규직 차별, 위험의 외주화라는 본질적인 노동 문제가 뒷전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오늘날 반미투쟁은 “미국의 통상 압박이나 글로벌 경제 패권주의가 국내 산업과 고용에 미치는 부작용을 비판적으로 감시하는 일”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이들은 “맹목적인 반미 투쟁으로 귀결시키는 방식”이라고 오늘날 반미투쟁을 왜곡하고는 반미투쟁에 기권한다.
이들은 “거대한 외세 비판에만 집중하다 보면, 정작 우리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부의 양극화, 비정규직 차별, 위험의 외주화라는 본질적인 노동 문제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이 문제라고 하는데, 자신만의 고유한 노동문제에만 집중(그 자체로 중요한 문제지만) 하면서 반미자주 투쟁, 분단척결 투쟁, 통일투쟁 등을 거대담론이라 비판하며 노동자계급을 협소한 경제주의로 내모는 것이다.
이는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그토록 비판한 경제주의다. 레닌 당시 경제주의자들이 짜리즘 타도라는 정치투쟁을 외면하면서 이미 자생적으로 분출하는 노동자투쟁을 지역적으로 분열되고 고립적인 경제투쟁의 꽁무니를 따라 갔다면 이들은 미군 철수, 평화협정, 자주화 투쟁, 국가보안법 투쟁이라는 정치투쟁에 기권하면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 역사의식의 발전과 계급투쟁의 확장을 뒤로 당겨 후퇴시키고 있다.
이들은 노동자국제주의도 같은 방식으로 경제적 “국제주의”로 호도하고 있다.
노동운동의 뿌리는 ‘국경을 넘어 모든 노동자는 하나’라는 노동자 국제주의 관점에 있다. 노동자에게 국가라는 울타리는 자본의 수탈에 맞서 연대하기 위한 수단일 뿐, 맹목적인 애국심이나 이념적 진영 논리의 도구가 아니다. 진정한 노동자 국제주의는 거대 강대국만을 향해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국경을 넘어 모든 노동자의 노동권을 옹호하고, 국내외 모든 일터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수탈에 맞서 함께 연대하는 실천에서 출발한다.
“진정한 노동자 국제주의는 거대 강대국”, 즉 미제국주의 전쟁책동, 자주성 말살과 싸우는 것이다.

8.15자주평화대회에 참가한 국제연대 미국대표단. 출처: 민주노총 사진방
진정한 국제주의가 이들의 주장대로 “국경을 넘어 모든 노동자의 노동권을 옹호하고, 국내외 모든 일터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수탈에 맞서 함께 연대하는 실천에서 출발한다.”면 과연 팔레스타인에 대한 미제국주의와 이스라엘 시오니스트의 침략과 학살에 맞서는 국제연대는 “노동권을 옹호하고, 국내외 모든 일터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수탈에 맞서 함께 연대하는 실천”과 무관하기 때문에 이러한 국제연대를 접어야 한다.
이란에서 아이들 학살참극으로 개시된 이란의 자주성을 말살하는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은 “노동권을 옹호하고, 국내외 모든 일터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수탈에 맞서 함께 연대하는 실천”과 무관하기 때문에 접어야 한다.
미국의 일본을 내세운 군국주의 책동과 여기에 영합하여 한일협력을 외치는 정권과의 투쟁은 “노동권을 옹호하고, 국내외 모든 일터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수탈에 맞서 함께 연대하는 실천”과 무관하기에 접어야 한다.
“북한 비핵화”라는 명목으로 대북적대 정책을 강화하고 중국적대시 정책으로 확장하는 패권전략에 맞서는 투쟁도 접어야 한다.
트럼프의 통상압박과 경제 수탈에 대한 투쟁도 계급문제가 아닌 국가 대 국가의 애국주의적 투쟁이기에 접어야 한다.
쿠팡에 대한 생존권 투쟁을 미정치권을 동원해 압박하는 미국과의 투쟁도 접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들의 정치(?)적 결론은 무엇인가?
노동자의 자주와 평화는 무대 위의 정치적 구호로 완성되지 않는다. 8월 15일 집회 현장에서 외치는 평화의 메시지가 조합원들의 가슴에 와닿으려면, 그것이 일터의 비정규직 철폐, 위험의 외주화 금지, 정당한 노동 대가 쟁취와 직접 연결되어야 한다. 노동자가 원하는 통일은 이념의 통일이 아니라, 노동자의 생명과 권리가 존중받고 수탈과 차별이 사라지는 평등한 노동 세상이다. 현장의 진짜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자의 삶을 지켜내는 것, 그것이 바로 노동조합이 나아가야 할 진정한 자주와 평화의 길이다.
노동자들이 “일터의 비정규직 철폐, 위험의 외주화 금지, 정당한 노동 대가 쟁취와 직접 연결되는” 투쟁에 전력을 다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적 문제, 정치적 문제에서 벗어나 “일터의 비정규직 철폐, 위험의 외주화 금지, 정당한 노동 대가 쟁취와 직접 연결되는” 투쟁만 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시야와 정치문제에 대한 관심을 협소하게 만든다.
외세의 눈치를 보고 있는 자본가들과 달리 노동자계급이야 말로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물리치고 분단을 척결하고 통일로 나아갈 수 있는 진보적 계급이다.
노동자들은 자주통일을 완성하는 민족문제 해결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자주적 권력을 쟁취할 수 있는 중심계급이다. 이것이 노동자들에 주어진 원대한 정치적 과제이다.
그런데 왜 세상을 개조하고 새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역인 노동자들의 정치적 지위를 끌어내리는가?
정치활동을 한다면서 노동자들의 역동성과 잠재력을 가두는 이러한 경제주의자들 때문에 한국의 노동자는 아직까지 별다른 혁명적 활동성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 아닌가? 레닌은 노동자들에게 원대한 정치적 전망을 제시하기는커녕 노동자들의 시야를 협소하게 하고 과업을 가로막는 21세기 한국의 경제주의자들에게 이렇게 질타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전횡과 탄압, 권력 남용이 행해지고 있는 – 그것이 어느 계급에 관계된 것이든 – 각종의 모든 사례들에 대응하는 법을 익히지 않는다면,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관점에서가 아닌 바로 사회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대응하는 법을 익히지 않는다면, 노동자 계급의 의식은 진정한 정치의식이 될 수 없다. 노동자들이 구체적인, 게다가 항상 절박한(당면한) 정치적 사건과 사례들을 통해 다른 사회 계급들의 지적, 도덕적, 정치적 생활이 표출되는 모든 현상에 걸쳐 그것들 각각을 관찰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리고 모든 계급, 계층, 집단의 생활과 활동의 모든 측면에 대해 유물론적 분석과 유물론적 평가를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노동자 계급의 의식은 진정한 계급의식이 될 수 없다. 노동자 계급의 주의, 관찰력, 의식을 배타적으로,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우선적으로 노동자 계급에게로 돌리려는 자는 사회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의 자기 인식은 이론적 지식만이 아니라, 아니 더 올바르게 말하자면 이론적 지식 보다는 정치 생활의 경험에서 생겨난, 현대 사회의 모든 계급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충분하고도 명료한 이해와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 노동자가 사회 민주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주, 성직자, 고급 관리, 농민, 학생, 부랑인 등의 경제적 본질과 그들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상을 분명히 이해하고, 그들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각 계급 및 계층이 자신들의 이기적 의도와 본 ‘마음’을 은폐할 때 흔히 사용하는 문구와 갖가지 궤변들을 분석해야만 한다. 또한 어떤 제도와 법률들이 누구의 이해 관계를 반영하는지, 또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를 분석해야만 한다 … 이러한 전면적 정치 폭로는 그 자체로 대중의 혁명적 활동성을 고양하는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조건이다.
인민에 대한 경찰의 야수 같은 대우, 이교도 사냥, 농민에 대한 구타, 추악한 검열, 병사들에 대한 학대, 이제 막 시작된 가장 순수한 문화 사업에까지 가해지는 탄압 등등에 대해 왜 러시아 노동자는 아직까지 별다른 혁명적 활동성을 보이지 않고 있는가?”(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 사진 출처: 민주노총 사진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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