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퇴진 투쟁을 앞에 두고 함께 나누고 싶은 고민들(전문)

ㅡ 전반적 사회퇴행을 막고자 하는 이들, 사회의 근본변화를 원하는 이들이 굳게 손잡아야 한다

* 이 글은 지난 6월 14일 윤석열 퇴진을 위한 기독교시국행동 2차 포럼 <192석 정녕 행복하십니까> 발표문 전문입니다.

사전에 전달받은 토론회 웹자보 제목이 <192석 정녕 행복하십니까>였습니다. 이 짧은 토론제목 하나만 봐도 만감이 교차하고 깊은 고민과 사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제목을 단 분들이나 이 사회 진보와 발전을 위해 각자 영역에서 분들의 고뇌와 고민, 우려, 기대가 이 제목에서 복합적으로 묻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번 총선의 주된 초점은 ‘정권심판’ 대 ‘야당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표수로만 보면 정권의 기본 지지자들이 여전히 이 정권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도 확인되고 있지만 이번 총선은 정권심판의 승리로 결론이 났습니다. 총선 이후 윤석열의 지지가 20프로대나 30프로 초반대로 떨어지고 정권 내부가 윤석열을 중심으로 구심력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균열되고 한동훈의 차기 대표설이 부상되고 있고 현실화 되고 있음을 볼 때도 권력 내부가 분열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총선 직전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윤석열 정권의 패배는 이번 총선 패배의 전조였습니다. 이번 총선에서 야당의석 192석은 윤석열 정권의 정책기조, 행보가 국민적 심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번 총선의 심판이 정권퇴진의 전조가 된다는 점에서 커다란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입니다. 이번 총선은 승리이지만 전면적이고 완전한 승리도 아니고 절반의, 과도적인, 위태위태한 승리입니다.

이번 총선이 전면적이고 완전한 승리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총선 승리의 여세를 몰아 윤석열 정권을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진정한 승리가 될 수 없습니다.

정권 퇴진은 이를 통해 정권의 반노동자적, 반민중적, 반민생적, 반민주적, 반민족적, 반평화적 정책기조와 행보를 전면 중단시킬 때 그것이 진정한 승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 사회의 적폐를 청산하는 것입니다. 적폐란 사전적으로는 오랫동안 쌓여왔던 이 사회의 폐단과 부조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회과학적으로는 이 사회의 역사적, 구조적 모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그러나 2024년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역사적 산물입니다. 

한국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는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불평등, 저임금과 빈곤, 차별, 착취, 실업, 정리해고, 비정규직, 중대재해, 노동악법 등 사회문제가 나타납니다. 이는 보편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한국사회의 역사적 모순은 이 사회의 특수성을 규정합니다.

이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면서도 특수하게는 외세 제국주의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모순으로 인해 분단과 예속, 자주권 말살, 대북적대와 전쟁위기, 민주주의 말살 등이 나타납니다. 

보편성과 특수성, 구조적 모순과 역사적 모순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된 문제입니다. 

연인원 1800만이 참여하는 위대한 항쟁이었던 촛불투쟁으로 박근혜 정권이 퇴진했습니다. 그리고 민중의 압도적 지지로 촛불혁명 정부라 자처하는 문재인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문재인 정권은 노동존중을 내걸고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실업문제의 일소, 소득주도 성장을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2018년에는 4.27판문점 선언과 9.19평양공동 선언을 체결하면서 국민 절대 다수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2022년 21대 총선에서 민주당 180석이라는 압도적 총선 승리를 안겼습니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은 촛불투쟁으로 박근혜를 탄핵시켰던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와 사회의 진보와 변화, 분단의 척결과 남북의 화해와 협력, 통일 추구라는 열망을 여지없이 “배반”했습니다. 

노동존중은 노동자를 이 사회의 생산자로서 사회발전의 주역인 노동자를 변혁의 중심이자 존엄한 주체로 부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대상화 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존엄한 주체가 아니라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억압 받고 착취 받는 존재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문재인 정권은 청와대 집무실 전광판에 실업 수치를 두고 매일 실업문제를 들여다본다고 하더니 실제 만성적 실업문제는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전광판을 들여다보고만 있었나 봅니다.

인천공항을 전례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전환으로부터 정규직화의 마중물이 되겠다고 했지만 마중물이 구정물이 되었는지 여전히 비정규직 확대 추세는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청년 신규 취업자들 태반이 불안정노동 비정규직으로 고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년 이후 노년의 노동자들 대다수는 비정규직입니다. “죽음의 외주화”에서 외주화가 멈추지 않으니 비통한 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소득주도 성장의 핵심은 임금주도 성장인데 문재인 집권 첫 해 비교적 올랐던 최저임금은 2018년 “줬다가 도로 뺏냐”는 항변이 있을 정도로 정기상여금과 식비·숙박비·교통비 등 복리후생비 등의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 결정이 나면서 역대급 낮은 인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주택가는 끝없이 상승하고 전세비도 천정부지로 올랐습니다.

남북 간 자결선언은 문재인 정권에서 사실상 파기되고 남북화해 상징인 연락사무소가 북에 의해 파괴되고 오늘날 윤석열 정권 들어서는 민족ㆍ동족관계가 적대관계로 전환되어 일촉즉발의 전쟁위기, 전쟁이 나지 않으면 그것이 도리어 이상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남북 간 적대와 충돌이 점점 더 가속이 붙고 있습니다.

실현은 못시켰지만 노무현 정권 당시에는 국가보안법 철폐 시도라도 있었는데 180석의 압도적 의석을 자랑하는 문재인 정권은 국가보안법 철폐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국민의 사회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을 배반하고 무엇보다 윤석열을 검찰총장으로 임명하고 끝까지 신임함으로써 오늘날 이 무도한 정권을 만든 게 문재인 정권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민주당의 태생적 정치적 한계, 문재인 정권의 의지의 부족, 정책적 실수…

이런 것들도 문제입니다만 문제는 보다 근원적인데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적폐는 이 사회의 구조적, 역사적 모순이라고 했는데, 맑스는 파리꼬뮌으로부터 국가기구를 그대로 인수해서 사용할 것이 아니라 관료기구, 억압기구를 분쇄하지 않으면 사회의 근본변화는 있을 수 없다는 피의 교훈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한 사회의 근본변혁뿐만 아니라 실질적 변화, 개혁에도 해당하는 교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재인 정권은 착취, 수탈자들인 국내외 재벌들의 기업, 토지소유 등 소유권을 건드리지 않고 심지어 탐욕의 이윤을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비호하면서 노동존중을 외쳤습니다. 정리해고, 파견법 등 악법을 그대로 둔 채 실업해결, 노동자의 권리 증진을 외쳤습니다. 실질임금을 삭감하고 가계부채를 온존시킨 채 소득주도 성장을 외쳤습니다.

미국의 이 사회 전반에 대한 지배와 대북적대, 미·일·한 전쟁동맹을 온존시키며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을 외쳤습니다.

조중동, 종편 같은 반사회적 언론을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자유롭게 활개 치게 영업활동을 보장하여 거짓과 악질선전을 방치하면서 “언론의 자유”를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구조적, 역사적 모순에 발을 깊게 담그고 입으로만 적폐 청산을 외치니 무엇이 변화하고 달라지겠습니까?

 

인민생활의 거대한 문제들은 오직 힘에 의해서만 해결된다

 

다시 애초의 토론회 제목으로 돌아가서 살펴 보건데, <192석 정녕 행복하십니까>는 과거 박근혜 퇴진 이후 국민적 기대와 열망을 한 몸에 안고 집권한 문재인정권이 국회 180석을 얻고도 실정을 거듭한 결과 오늘날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게 된 상황에 대한 깊은 우려와 지금 우리의 투쟁이 이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고민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총선에서 야당이 압도적인 192석 의석을 얻었지만 마냥 이 상황에 취해  있을 수만은 없다는 긴장감도 있는 거 같습니다.

실제 총선 패배 이후 윤석열은 처음에는 기가 꺾이고 고개를 숙이면서 영수회담까지 하며 총선 여론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였지만 역시 총선“심판”만으로는 정권이 국민의 의사에 따르게 하는데 한참 역부족이라는 게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과거 박근혜 퇴진투쟁 초기에 “명예로운 퇴진” 운운하는 말이 나왔듯이 벌써부터 임기 단축 연임이 담긴 개헌을 수용하면 명예로운 퇴진을 보장하겠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우물에서 숭늉 찾고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입니다. 그리고 이는 정권퇴진을 원하는 국민의 진정한 의사도 아닌 월권입니다. 

김건희 특검법을 물타기, 전가하기 위해 김정숙 특검법을 쟁점화 하는 것이나 해병대 채상병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10번째 거부권을 행사하는 윤석열은 총선 이전 거부권 정국에서 한 치도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윤으로서는 여기서 물러서면 식물정권이 되거나 조기퇴진하고 심지어 부부가 구속하게 될 것을 예상하기에 배수의 진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유력 야당 후보가 사법처리 된다면 이로써 정권을 연장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검찰권 장악과 사법기관에 대한 영향력을 놓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와 종편에서 이러한 기조로 보도를 하고 한동훈을 비롯해 여당대선 후보들도 여기에 동조하며 잔뜩 기대하고 있습니다.

“정녕”이라는 완곡한 수사까지 곁들여 192석에 마냥 행복해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윤석열은 3대개혁 운운하며 “노동·교육·연금” 개혁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개혁”이라고 하지만 이는 유사 이래 계급적대 사회에서 통치자들의 “분열하여 통치하라” 모토에 따라 충실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노동개혁 목표는 노조의 분쇄입니다. 윤석열은 조직된 운동, 즉 노조로 조직되어 자본의 착취에 저항하고 이를 제어하며 친자본적 권력에 맞서 정치투쟁을 하는 노동운동을 적대시 하고 분쇄하려 합니다. 이를 위해 노조와 노동자들이 사회 전체의 이해, 열악한 노동자들의 이해는 아랑곳하지 않는 이기주의 집단주의 세력이라고 매도합니다.

자본의 요구에 맞춰 노동유연화로 미조직 노동자들의 다수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양산시켜오고 저임금 열악한 노동조건을 정권이 마치 미조직 노동자들의 대변자인 냥 사기 치며 정규직 노동자, 조직된 노동자들과 미조직 노동자들을 이간질시키고 대립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권이 특수고용노동자인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노동자성 인정과 안전운임제 요구에 대해 공권력으로 협박하는 한편 업무개시 명령으로 결사의 자유를 전면 부정하는 폭압적 탄압을 자행했습니다. 

윤석열은 법과 원칙 운운하며 “선량한 화물차 기사들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최선을 다했고, 결국 사태를 해결할 수 있었다”며 파업불참자의 선량함에 비해 화물연대 노동자들은 불량한 기사들로 취급하여 매도하고 고립시키고 탄압을 자행했습니다.

가장 위험하고 열악한 조건에서 윤석열은 퇴직금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건설노동자들을 건폭 취급하여 범죄자 취급하고, 원희룡은 국토교통부 장관 재직 시 건설노조에 “경제에 기생하는 독”, “조폭들이 노조 탈 쓰고 설쳐”, “노동자들의 빨대”라며 사회악으로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말살시키려 기도했습니다.
 
급기야 2023년 8월 기준으로 1300여 명의 조합원과 간부들이 연행되어 조사 받고 30여 명이 구속되는 파쇼탄압을 자행했습니다. 이런 폭압적 분위기 속에서 건설노조 양회동 조합원이 노동절에 분신하여 열사가 되는 비통한 일도 벌어졌습니다.

정규직 임금삭감을 시발로 전 노동자의 임금삭감, 전 민중의 복지후퇴로 나아가려는 정권이 미조직 보호를 말하는 것도 다 분열 통치 전략의 일환입니다.

더 내고 늦게 받고 덜 받는 목표로 추진되는 연금개악도 개혁으로 포장돼 있습니다. 이 때에도 어김없이 분열전략으로 현 세대와 미래 세대의 대립과 분열을  연금 개악의 명분이자 수단으로 삼습니다.

평생을 생산과 서비스에 복무함으로써 이 사회의 존립과 발전에 이바지했던 중장년 노동자들과 퇴직자들은 마치 청년 세대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거머리 같은 존재로 취급하여 연금개악을 정당화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중장년 노동자들과 퇴직자들의 권리가 당장은 청년들의 부모들의 권리이고 자연적으로 노년이 될 수밖에 없는 오늘날 청년들 이 미래에 보장 받을 권리가 아니겠습니까?

연금고갈론도 기만적 이데올기에 불과합니다. 당장 상당수 외국에서 채택하고 있는 부과식으로 전환하면 그해 기금을 걷고 나머지는 국가재정으로 충당하면 2054년 연금고갈 따위 협박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나라가 없어지지 않는 한 연금고갈로 연금을 지급하지 못했던 사례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연금은 사실 현재 주어져야 할 노동자의 임금인데 이를 지급하지 않고 미래에 기금으로 제공하여 노후보장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과거 소련에서는 노동자가 연금을 분납하는 대신 국가재정으로 연금을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적립식과 국가재정을 혼합한 우리 사회에서는 막대한 연금을 가지고 주식이나 채권, 부동산 시장에 자금을 투입했습니다. 그런데 적립된 연금을 한꺼번에. 청구하게 되면 주식, 채권 등에 투자하여 자본금으로 사용되던 자본을 한꺼번에 빼야 하는 사태가 초래되어 자본에게는 손해인데 이것이 오늘날 자본과 정권, 언론이 협박하는 연금고갈론의 실체입니다.

더욱이 연금생활자들이 궁극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생활필수품과 서비스입니다. 당대 생산성이 파괴되지 않는 한 이들이 궁극적으로 필요로 하는 생산물과 서비스가 지급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윤석열의 교육개혁에 대해 중앙대학교 김누리 교수는 “한국교육 100년 중 30년간 식민교육, 40년간 반공교육, 또 30년간은 인적자원교육이었다. 사람을 위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교육다운 교육을 해 본 일이 없다.”라고 신랄하게 비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교육자유특구”처럼 윤석열 교육개혁은 공교육을 강화하고 무상교육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시장 논리와 무한경쟁에 바탕을 귀족학교 설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방이 소멸되고 수도권 집중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지방학교가 살아날 리도 만무합니다. 도시와 지방의 대립, 도시의 집중과 과밀, 지방과 농촌의 점차적 사멸과 폐허화는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레닌은 고전적 저작 중 하나인《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 당의 두 가지 전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민생활의 거대한 문제들은 오직 힘에 의해서만 해결된다. 가장 반동적인 계급들이 통상 제일 먼저 폭력에, 그리고 내전에 의지하여 “의사일정에 총검을 들이대는데”, 총검이 진정으로 정치적 의사일정의 선두에 서게 되면, 봉기가 필요하고 절박하게 되면, 그때 입헌적 환상과 의회주의라는 학교 숙제는 부르주아의 혁명 배반을 은폐하는 것, 즉 부르주아가 혁명에서 “물러서는” 것을 은폐하는 것에 불과해진다. 진정으로 혁명적인 계급이 그때 내세워야만 하는 것이 바로 독재라는 슬로건이다.

박근혜가 퇴진 위기에 직면하여 계엄을 고려한 바 있듯이, 박근혜보다 훨씬 더 권력의지가 강한 검폭 수장 출신인 윤석열은 정치적 위기에 내몰리면 권력에서 순순히 내려오기는커녕 이판사판으로 국회의 “의사일정에 총검을 들이”댈 가능성이 높습니다.

총검이 진정으로 정치적 의사일정의 선두에 서게 되면, 극단적인 상황에서 봉기까지는 몰라도 비평화적 방식의 전민항쟁이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국제적으로도 강대강의 대결전으로 힘과 힘이 부딪쳐 그 결과에 따라 정세가 결정될 것이고 이는 우크라이나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대결과 중동에서의 전 세계적 성격의 지역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국내정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야당이 192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국회 투쟁의 근본한계는 명백한 것입니다. 윤석열이 권력을 잡고 있고 검찰집단과 조중동이 윤을 비호하고 있고 그 배후에는 미국도 있습니다.

대중투쟁이 언제나 우선입니다. 역사적으로도 대중의 집단적 투쟁이 사태를 결정하는 중심 동력이었습니다. 국회에서의 투쟁은 이 힘의 관계를 반영하여 움직입니다. 선거에서도 선거 이후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국회 192석 야당이 노동자 민중의 의사를 철두철미 대변하는 전투정당이 아니라 기득권 양당체제의 부속물이라는 근본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중투쟁 우선이라고 선거에 기권하거나 무시할 수 없듯이 야당 의석 192석을 무시하거나 가벼이 볼 수도 없습니다. 

주류 야당이 민중의 이해대변자는 아니지만 192석에는 민중의 정권에 대한 분노와 사회변화 요구와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국회 입법에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되겠지만 국회가 정권과 싸우고 진보적 입법을 하게끔 강력하게 압력을 넣어야 합니다.

윤석열 퇴진은 필연이지만 누가 어떤 요구를 가지고 투쟁을 주도하느냐, 퇴진의 양상에 따라 권력재편의 상과 폭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최대치는 노동자민중의 이해를 철저하게 대변하고, 자주성을 정치적 생명으로 하는 새로운 진보적인 권력에 의한 제헌입니다. 우리는 퇴진 투쟁에서 이를 당면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헌법개정으로 사회변혁, 개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헌법제정은 혁명이나 권력투쟁의 산물입니다. 엥겔스는 “전투가 끝난 후 승리한 계급이 확립한 헌법”이라고 했습니다.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되는 상황은 외세를 척결하고 자주적 민중권력(인민위원회) 쟁취하기 위한 전국적인 항쟁이 벌어지는 상황이었고, 특히 헌법 제정 몇 달 전인 4월 3일에는 제주 민중항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제주민중 항쟁을 대량학살로 진압하고 그 피바다 위에서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됐습니다. 그 헌법은 민중권력을 분쇄하고 승리자가 된 미제 점령 학살자들과 그 주구들인 이승만 도당의 요구, 이해가 반영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한민국 헌법에는 나중 박정희 군사 쿠데타 이후 삭제됐지만 “근로자의 이익균점권” 같이 노동자의 초보적 권리를 명시한 내용이 들어가고 제헌헌법안의 기본정신에 “민족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내용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질 정도로 6공화국 헌법보다도 전진적인 내용이 담겨 있기도 했습니다. 헌법이 승리자들의 것이지만 제주4.3의 저항이 계속되고 그 해 10월 19일 여순항쟁처럼 민중의 항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민중의 불만을 잠재울 필요성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6공화국 헌법은 직선제라는 6월 항쟁의 성과가 일부 담겨 있지만, 노태우 군사독재가 연장되고 민중이 권력에서 철저하게 배제되는 상황에서 지극히 미완의, 당시 권력자들, 자본가들의 사적소유권 보장이라는 계급적 이해를 반영하는 헌법입니다. 더욱이 헌법상의 일부 미문(美文)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이 무소불위로 헌법의 상위에 서 있는 그런 법체계입니다.

민중의 투쟁이 항상 우선이지만, 현재 개헌 요구가 나왔고 앞으로 쟁점이 될 수 있습니다. 개헌 국민이 되면 국가안전 보장 질서유지로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내용을 없애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보안법 철폐 요구를 전면화 해야 합니다. 개헌에서 사회권 요구를 담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사회권의 핵심에는 노동권이 있습니다. 

개헌국면이 노동악법 철폐와 국가보안법 철폐로 나아가는 기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윤석열 명예퇴진과 대통령 연임제로 축소되고 노동악법 철폐와 노동3권 전면 보장과 국가보안법 철폐가 없는 개헌은 민중의 의지와 열망을 배반하는 변죽을 울리는 행위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레디컬하게 사고하되 손잡고 함께 나아가자

 

총선 시기 대파 논쟁의 핵심은 천정부지로 오른 물가고와 생활고의 문제입니다. 특히 사치품은 노동자ㆍ서민들의 직접적인 구매와는 별 상관없고 생활물가의 급등이 문제입니다. 거기에 윤석열의 천지분간 못하는 대파 발언이 국민들을 분노케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파논쟁은 총선 이후 최저임금 대폭인상과 생활임금 인상 요구로 전면에 나타나야 합니다.

현재 윤석열 정권은 법인세 인하를 비롯해 종합부동산세, 금융투자소득세, 상속세, 주식양도세 등 자본가감세와 부자감세, 더 나아가 종합부동산세 폐지를 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습니다. 초록이 동색이라고 의원들 대다수가 자산가들인 민주당도 여기에 일부 동조하고 있습니다. 

국세청이 발표한 2023년 귀속 주택분 종합부동산세 납세대상이 40만 8천 명인데, 이들 자산가들의 세금 전폭 감면을 출발로 부자, 자본가들의 천국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목숨 걸고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을 “조폭”이라며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정권이 동족의식으로 부자와 자본가들한테는 한없는 따뜻함과 관대함으로 미소 짓는 모습을 보노라면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윤석열 정권은 때려잡아도 시원치 않을 정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난으로 동반자살하는 가정들, 가난이 불씨가 되어 자식과 부모, 부부 간에 불화가 생기고 가정이 파탄 나는 가정들이 속출하고 평생을 주택부채로 시달려야 하는 수천만의 서민들, 국민들의 삶에는 관심조차 없고 그러지 않아도 모든 부와 모든 행복을 다 독점하는 부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현재 한국사회의 정치 모리배들입니다. 야당이라고 해서 이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종합부동산세를 둘러싼 논란은 자본주의 사회의 주택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감세되기 전의 종합부동산세라 하더라도 조족지혈의 세금 문제만으로 이 사회의 주택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종합부동산세를 둘러싼 논란, 세금 논란은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인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문제를 흐리고, 우리의 원대한 정치적 시야, 정치적 전망을 자본주의 내에서의 오십보백보의 정책에 따라 울고 웃고 휘둘리게 만들고 다람쥐 쳇바퀴 같은 착취와 수탈의 정치를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엥겔스는 주택문제와 관련해서 혁명적 해결책, “유산계급이 가지고 있는 화려한 주택들의 일부를 수탈하고 그 나머지 부분에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거주시킴으로써 곧 제거될 수 있는 것이다”라면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주택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사회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회문제를 해결함으로써만,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폐지함으로써만 주택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대도시를 보존하는 조건하에서 주택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도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폐지에 의해서만 제거될 것이며, 또한 이 생산양식이 폐지되기 시작하면 그때에는 이미 모든 노동자에게 그의 불가분의 소유가 되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오늘날의 국가가 주택난을 해결할 수 없으며 또 하려고도 않는다는 것은 불을 보듯 것 같이 명백하다. 국가는 곧 피착취 계급들, 즉 농민과 노동자를 반대하는 유산계급들, 즉 지주와 자본가의 조직된 총권력일 뿐이다.(엥겔스, 《주택·토지문제》, 김정수역, 두레)

 주택문제는 실제로는 토지의 문제입니다. 인류가 공동으로 누리고 후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지구의 일부분을 사적으로 점유하고 법은 소유권으로 이를 보호하는 체계로부터 지대를 수취하고 삶의 기본터전인 주택이 상품이 되어 매매의 대상이 되고 부를 축적하는 수단이 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문제로부터 비롯됩니다. 

더욱이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 필연적이고 이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촌은 공동화 되고 심지어 점차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데 반해 도시로의 집중과 주택과 상가의 건축(재건축)이 막대한 투기적 이윤의 원천이 되고 주택 없는 사람은 천지로 넘쳐나는데 과잉생산된 주택이 미분양되는, 은행이 신용을 움켜쥐고 채무난을 일으키는 이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났고 앞으로도 어떠한 정책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입니다.   

윤석열 없는 윤석열 시대의 사회모순이 남아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궁극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정권의 “비정상”적인 행태의 “정상성”을 위한 요구들, 가령 배우자와 친인척 비리와 부패와 검찰권력을 이용한 법의 자의적 적용과 정적 제거 수단으로 사용, 비선권력이 권력을 농단하고, 제 눈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티끌에는 추상같은 파렴치한 이중잣대를 혁파해야 합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우리는 “비정상”이 제거된 “정상화”된 권력을 넘어서 정권퇴진 투쟁이 이 사회의 질곡을 혁파하고 역사와 사회의 진보로 나아가는 기회가 되도록 투쟁해야 합니다. 

더욱이 권력의 “비정상성”과 부패, “국정농단”은 인민대중의 권력으로부터의 배제 되어 있고 금권정치와 정경 유착 속에서 또 정경과 유착된 언론이 진실을 호도하고, 고위관료와 선출되지 않은 검찰과 법관들이 국민들 위에 군림하고, 폭력적 국민감시와 통제기관이 존속하고, 초록이 동색인 정치 모리배들이 판치는 이 체제에서 필연적으로 반복되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과거 촛불혁명 정부라 자처했는데 실제 혁명정부라면 이 체제의 모순들, 적폐에 맞서 주저하지 않고 싸우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역인 민중의 무궁무진한 힘을 끌어내어 이 사회의 근본변화와 진보를 앞당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와 정치지도자가 의당 할 일입니다.

촛불투쟁으로 권력을 끌어내린 것을 프랑스대혁명에 비유할 수 있다면(실제 이 비유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프랑스대혁명은 정권교체가 아니라 봉건체제를 타도하고 그 정점에 있는 왕을 처단하는 체제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민중의 의지와 열망은 자코뱅이라 할 수 있고 문재인 정권은 이를 배신한 지롱드당의 테르미도르 반동과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문재인 정권 때 국민들은 개혁과 사회변화의 약속을 지키라고 싸웠다면 지금은 사회전반의 복고, 퇴행을 멈추라고 싸우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앞으로 나아가자고 싸웠지만 지금은 과거로 돌아가지 말라고 싸우고 있습니다.

오늘날 무도하고 무지하고 포악한 윤석열 정권은 촛불투쟁 앙시엥레짐(구체제)으로 복귀했을 뿐만 아니라 더 극렬하게 복귀했습니다. 윤석열 정권은 절반의 복고인 테르미도르 반동 수준이 아니라 이 사회의 전면적 퇴행이자 퇴보를 의미합니다. 7월 왕정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오늘날의 정치용어로 표현하면 파쇼 반동체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윤석열 정권이 아직 의회전반을 부정하는 전면적 파쇼체제로 전환한 것은 아니지만 이 행태, 행보를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필시 그 길로 질주할 것이 분명합니다.

파시즘은 가장 배외적이고 인종주의적인 백색테러 체제입니다. 이는 안으로는 노조 적대와 말살,민중의 제반 권리와 복지의 전면 후퇴, 민생고와 불평등 심화, 민주주의의 파괴를 의미합니다. 대외적으로 파시즘은 전쟁입니다. 대남 노동자ㆍ민중 적대시와 대북적대시가 윤석열이 파시즘으로 나아가는 권력임을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이 사회의 전반적 퇴행을 반대하고 변화를 원하는 이들, 더 나아가 이 사회 역사적·구조적 모순을 혁파하고 사회변혁을 원하는 이들이 정권퇴진이라는 당면 목표 아래 단결해야 합니다.

이 양자는 정권퇴진의 공통분모이기도 하지만 이 앙자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새로운 정치적 대안이 있다면 전자가 후자로 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사회의 질곡이 수박의 문제인지 구조적ㆍ역사적 모순에 있는지는 정권퇴진 투쟁 속에 동지적 협조와 열린 토론, 공동 지혜로 치열하게 논의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변증법은 진보적 철학이자 인류의 지혜와 지식, 경험의 논리적, 인식적 총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변증법적 인식은 사태와 사물을 볼 때 일도양단하는 극단적 사고를 경계하고 균형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 사고를 하는 것입니다. 총체를 보되 개별, 구체를 같이 보는 것입니다. 나무와 숲을 같이 봐야 합니다. 숲만 보고 나무를 보지 못하면 구체성과 생생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반대로 나무만 보고 숲전체를 조망하지 못하면 총체성· 전면성을 상실하고 미로 같은 숲길에서 길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궁극목표 없이 “운동이 전부다”라는 베른슈타인식 태도는 어디로 나아갈지, 청사진 전망 없어 맹목적이고 발본적이지 못합니다. 레디컬하다는 것은 급진적인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사물을 뿌리 끝까지 인식하고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레디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분위기 파악 못하고 마구 내지르거나 구체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결합하지 못하면서 “궁극목표가 전부다”라는 것이 된다면 공허해지고 고립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 홀로 앞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더불어 함께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부터 청산주의가 대세가 되면서 궁극목표, 혁명적 목표를 상실한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항해는 좌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회의 구조적ㆍ역사적 모순을 척결하고 전면 개조라는 정치적 목표를 확고하게 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인간 삶의 다양한 문제들과 마주하며 우리 사회의 어둠 속으로의 퇴보와 부패를 막으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이들의 삶과 투쟁이 진정으로 빛을 발하고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근본모순이 사라지지 않으면 어떠한 현상적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이 사회의 억압구조, 착취·지배구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와 분단, 외세의 지배를 혁파하는 운동과 각 영역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진보적 운동들이 서로를 배제하거나 배척하지 말고 만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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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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