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출간으로 이 사회는 “야만이냐” “민주냐”의 시험대에 섰다

자유주의 반공투사 진중권은 《세기와 더불어》가 “판타지 소설”에 불과하기 때문에 출판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것이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소설에 불과하다면 8권짜리 판타지 소설 출판에 대해 눈에 핏발이 서서 난리법석을 떠는 이남사회야말로 판타지 소설 같은 사회라 할 수밖에 없다. 엘리스의 나라처럼 아주 이상하고 기묘한 나라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의 나라인 이남이라는 나라와 여기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일들은 가공의 것이 아니니 리얼리즘 소설에 가깝다. 그런데도 진보적 지식인을 자처하는 작자가 현실을 제대로, 있는 그대로 반영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전도되어, 망상을 가지고 거꾸로 반영하여 판타지 소설 운운하니 이 자야말로 판타지적 이상(異常)두뇌를 가지고 있는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는 엘리스다. 천진난만한 어린 엘리스가 아니라 자유주의 괴물이다.

보라.

이 회고록은 판타지 소설 취급을 받기는커녕 수십 년 동안 ‘학살자’, ‘반국가 수괴’의 저작으로 취급을 받고 금서 중의 금서로 낙인찍혀 왔다. 1994년 이 회고록을 출간하려했던 출판사 사장은 구속되고 회고록을 소지한 사람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회고록 독후감을 쓰라고 학생들에게 과제를 낸 대학교수 역시 구속됐다. 2011년 대법원은 회고록을 ‘이적간행물’로 판결 내렸다.

이번에 《세기와 더불어》가 출판되자 이 사회가 보이는 엄청난 소란은 여전히 극렬하기조차하다.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언론에서는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며 저들만 배타적으로 누리는 ‘표현의 자유’를 이용해 공세를 펼치고 있다. 극우단체에서는 즉각 출판 및 판매 금지가처분신청서를 냈다. 교보문고는 국가보안법의 망령에 지레 겁을 집어먹고 “고객보호 차원”을 빙자해 즉시 신규주문을 받지 않는 판매중단 조치를 취함으로써 서점보호에 나섰다.

통일부는 기관의 이름이 무색하게 반통일적으로 “취할 수 있는 조처를 검토해 보겠다”하고 있으며, 문화체육관광부는 간행물윤리위원회에 이 책의 심의를 요청했다.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유해 간행물로 지정되면 《세기와 더불어》는 수거·폐기될 수밖에 없다. 간행물윤리위에 따르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면 부정하거나 체제전복 활동을 고무 또는 선동해 국가의 안전이나 공공질서를 뚜렷이 해치는 것”으로써 “보편타당한 역사적 사실을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민족사적 정통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에 해당한다는 판정이 나면 유해간행물이 된다.

8권짜리 회고록이 “국가의 안전이나 공공질서를 뚜렷이 해치는 것”이라면 이 회고록은 판타지가 아니라 핵무기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녔음이 틀림없다. 8권짜리 회고록에 위협 당하는 사회라면 국가권력을 자진 해산함이 옳지 않겠는가. 그런데 “보편타당한 역사적 사실을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민족사적 정통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라는 간행물윤리위원회 심의 기준에 따른다면 현대사를 전면 왜곡하는 대한민국 교과서야말로 유해간행물 중 으뜸이 아닌가? 조선일보를 위시로 조중동이 가장 유해한 간행물인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고, 한경오(한겨레, 경향, 오마이) 같은 소부르주아 자유주의 매체 역시도 국가보안법의 인식에서 현대사의 진실을 왜곡해왔으니 수거·폐기됨이 마땅하다.

 

2

 

4.19직후인 1960년 10월 6일 일찍이 김수영 시인은 다음의 ‘김일성 만세’라는 시를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 보냈으나 발표되지 못했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진보적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이 1977년 박정희 정권 하에서 《우상과 이성》으로 반공법으로 구속됐을 때 검찰은 공소장에서 “농민 중심의 모택동의 공산혁명 사상을 은연중 찬양 고무하여 중국의 활동을 찬양고무했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검찰의 이러한 공소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8억인과의 대화》에 대해서는 “중국인민은 밥을 먹고 살고 있다”는 묘사를 가지고 반공법의 4조 2항인 고무·찬양·동조행위로 규정했다. 리영희선생은 상고이유서에서 당시 국가권력의 저열함에 대해 통렬하게 항의했다.

어떤 사람의 긴 생애에서 국민학교 때의 글짓기 연습장에서 ‘김’(金)자를, 중학교 때 물리 노트에서 일(日)자를, 고등학교 시절의 연애편지에서 성(成)자를 그리고 대학 졸업논문 속에서 만(萬)자 등으로 골라낸다. 그것을 이으면 ‘김일성 운운’이 될 것이다(리영희, <상고이유서>, 《역설의 변증》, 두레, 374-375쪽)

국가보안법과 국가보안법적 인식은 이 사회를 야만이냐 민주냐를 가리는 시금석이다. 이때로부터 5-60년이 지난 2021년 이 사회는 다시 야만이냐 민주냐의 시험대에 올랐다.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오늘날 까지도 이처럼 똑 같은 수준의 저열한 광적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가?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그대로 존속해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의 칼날과 이 국가보안법이 조장하는 전 사회적인 반공주의 망령은 이 사회를 1960년, 1970년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게 하고 있다. 이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다는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법률적 원칙이 이 시대착오적이고 반민주적인 국가보안법을 정당화 하고 있다. 그런데 “방어적 민주주의”는 “방어적”이기는커녕 1948년 제정된 이후부터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간첩으로 내몰아 살해하고, 구속시키고 고문을 하는 등 초극단적으로 공격적인 백색테러‘민주주의’였다. 통합진보당 해산 역시도 바로 이 법률적 원칙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방어적 민주주의”는 프락치 공작과 미행과 불법녹취와 녹취록 조작을 통한 내란음모 조작처럼 반인권적인 중세기적 조치조차도 정당화 하고 있다.

이번 사안에서도 여전히 “방어적 민주주의” 운운하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우겨대는 언론들과 수천, 수만 명의 조지훈들이 득시글거리고 있다. 국가보안법을 존속시키는 것이 표현의 자유고,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우겨대며 국가보안법 철폐를 거부하는 민주당과 민주당 장면 같은 정신 나간 정권이 21세기에도 그대로 있다.

반면 한껏 위선을 과시하지만,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세기와 더불어》 출간을 옹호하는 입장도 있다. 국민의힘 의원 하태경은 “김일성 회고록은 상당 부분이 허구”니 “이제 국민을 믿고 표현의 자유를 보다 적극 보장하자”며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 과시하자”고 했다.

자유기고가 홍기표는 “국가보안법 위반은 핀트가 안 맞는다”, “책이나 신문에 대해 경계하는 것은 인간이 저지르는 대표적인 바보짓 중 하나다”,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글자로 적혀 있다고 그걸 다 믿지는 않는다”, “김일성 회고록은 내 기억에 거의 공짜로 읽을 수 있었던 옛날에도 지겨워서 중간에 내던졌던 것 같다”(‘김일성 회고록 판매 중단 소동과 국가보안법’)며 《세기와 더불어》를 조롱하며 출간을 옹호하고 있다.

옛 쏘련과 현존하는 조선과 쿠바를 반동적인 국가자본주의로 간주하고 타도해야 한다는 자칭 맑스주의 조직 <노동자연대>는 “북한 체제 옹호의 관점에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이 상당히 부풀려져 있다.”(김영익, 히틀러 회고록은 출판됐는데, 김일성 회고록은 왜 안 될까?, 노동자 정치 신문, 365호 , 2021-04-25)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앞서 진중권이든, 하태경이든, 홍기표든, 김영익이든 모두 김일성 주석 회고록을 한 번쯤은 다 읽어봤음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세기와 더불어》에 대해 한 마디 하는 모든 이들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 번쯤은 이 저작을 읽어보았으니 저마다 앞 다퉈 비평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세기와 더불어》가 “판타지 소설에 불과”하고 “상당 부분이 허구”이고,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고 공짜로 읽으라 해도 “지겨워서 중간에 내던”질만큼 터무니없으며, “상당히 부풀려져 있”는 데다 당국의 탄압을 받는 불법저작임에도 은밀하게 이들 모두가 이를 소지하고 암암리에 읽었던 대중적인 저작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저들 자유주의 위선자들은 읽어보지도 않은 채 그저 편견과 독단에 가득 차 제멋대로 떠들어대고 있는 것이다.

 

3

 

그런데 “체제경쟁에서 승리”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 과시”할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는 승리자들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왜 국가보안법을 철벽처럼 유지하며 8권짜리 저작에 체제위협 운운하며 호들갑을 떨고 있는가?

왜 파쇼 “히틀러 회고록은 출판됐는데, 김일성 회고록은 왜 안 될까?”

김일성 주석 회고록이 1930년대부터 1945년 무렵까지 만주와 백두산일대에서의 항일무장항쟁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특히 1930년대부터는 항일투쟁사는 상당부분이 왜곡되거나 침묵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1920년대 민족주의자들의 항일민족해방투쟁은 1930년대부터는 사실상 명맥이 끊길 정도였고, 실질적인 거대한 항일무장항쟁은 공산주의 계열이 주도했다. 1919년 러시아혁명이 1920년대 영향을 미치고 민족주의자들 내부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참된 민족주의’라고 명명되기도 하는)로 분화되며 1930년대에는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중국공산당과 연합하는 공산주의 운동을 펼치는 공산주의자들이 항일무장항쟁사를 주도했다. 이남에서도 반일 노동자계급투쟁이나 농민투쟁 같은 대중투쟁도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거나 영향을 미쳤다.

김일성 가짜설도 나오지만 회고록에는 김성주라는 본명이 분명하게 나온다고 한다. 회고록 출판을 극렬하게 반대하는 극우집단들 내에서도 김일성 가짜론은 이제는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

저들이 《세기와 더불어》 출간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것이 항일무장항쟁사를 상세하게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서 친일파에서 친미파로 변신해오면서 지금까지 대한민국이라는 이남체제를 통치해온 지배계급의 정당성이 뿌리 채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극우들이 반신반인으로 모시는 테러 독재자 박정희만 보더라도 만주군 장교로 복무하며 철두철미 반민족주의자였다가 파쇼추축국이 패배하고 역사의 추가 기울자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던 기회주의자였다. 그러다가 미제국주의의 지원을 받고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이후에는 다시 악랄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했다. 이러한 이남의 통치자들과 회고록에 나오는 이북의 지도자와 지도자 집단들이 분명하게 대비되지 않겠는가?

회고록이 과장됐든, 부분적으로 왜곡이 있든 여하튼 이들이 항일빨치산들이었음은 분명한데, 항일무장항쟁을 했던 인물들이 주도해온 이북사회와 친일 친미 반민족 분자들이 주도해온 이남사회는 그 역사적 뿌리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진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일제와 결탁하여 민족을 팔고 민중을 짓밟으며 호의호식하던 파렴치한 인간들과 그 정치집단들과 인간이 견디기 어려운 혹한의 날씨와 싸우며 얼어 죽을 각오, 총 맞아 죽을 각오, 굶어 죽을 각오를 하며 일제와 목숨 바쳐 싸워온 사람, 정치세력들이 판이하게 대비될 수밖에 없다.
외세를 등에 업고 백만 이상의 민중을 대량학살하며 잔혹한 백색테러 체제 위에 건설한 대한민국과 이민위천을 기치로 삼은 빨치산들이 세운 자주의 나라가 적나라하게 대비되며 이 체제의 “민족사적 정통성”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될 수 있다. 또한 “보편타당한 역사적 사실”이 전면 부정된다면 지금껏 백색테러 반공체제를 떠받쳐온 국가보안법의 정당성도 여지없이 흔들릴 것이 분명하다.

간행물윤리위원회 심의 기준은 이 점에서 보면 자의적인 것도 아니고 저들 지배계급의 처지와 이해를 속속 반영한 것이 된다.

극우들도 울고 갈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노동자연대>는 제국주의자들의 친근한 벗답게 파쇼 히틀러 회고록과 김일성 회고록을 넌지시 비교해서 그 둘의 폭력독재의 연관성을 은근 비교하며 중립을 가장한 도찐개찐 논리를 전개하며 위선적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사상의 자유를 운운한다. 그러나 “히틀러 회고록은 출판됐는데, 김일성 회고록은 왜 안 될까?”에 대해 진중권, 하태경, 홍기표 같은 자유주의를 빙자한 위선의 무리들과 참칭 맑스주의자들이 진실을 말할 수는 없다.

야만이냐? 민주냐? 판타지적, 맹목적 이상한 사회냐? 구체적 현실과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사회냐?

자유 대한민국은 《세기와 더불어》로 첨예한 갈림길에 섰다. 이 사회를 사상과 양심의 자유, 정치적 자유, 출판의 자유가 없는 야만사회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

《세기와 더불어》 출판 중단 위협에 맞서 싸워야 한다.

4.3, 여순항쟁, 광주, 천안함…

현대사의 왜곡을 바로 잡고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철폐해야 한다.

우리 안의 삼팔선, 국가보안법적 인식을 혁파해야 한다.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를 읽자. 읽고 나서 남아 있는 쟁점들, 즉 그것이 진실에 기초한 것인지, “상당 부분이 허구”인지 조작인지, 과장인지는 각자 판단해보자.

《세기와 더불어》는 판타지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고, 인물들을 다루는 회고록이다. 수백 명의 살아 있었던, 있는 인물들을 등장시킨다고 하고 북의 인물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국제주의 전사”였던 중국의 장울화와 쏘련의 노비첸코 같은 인물들, 주보중 같은 많은 중국쪽 혁명가들이 등장한다고 한다. 자신들의 경험담뿐만 아니라 일본측, 쏘련측, 중국측 자료들을 인용하여 현대사의 구체적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기도 한다고 한다. 따라서 회고록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등장인물들의 벗들과 후손, 친인척들의 취재 등으로도 진실의 일단을 파악할 수 있고, 국내외적 학문 토론과 역사학자들의 고증으로도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오로지 진실을 추구하고 진리를 향해 나가자.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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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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