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서 주는 시간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하루를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 구속자 석권호
동지들께 드립니다.
아침에 창밖을 내다보면 담장 너머 그리 높지 않은 작은 언덕과 숲이 보입니다. 온갖 새소리가 아침을 알립니다. 지금은 좀 덜합니다만 봄에는 언덕살이하는 새들의 분주한 지저귀는 소리가 제법 요란스러웠습니다.
교도소측에서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언덕 가까운 곳, 한 평 남짓한 독거실에 배정되어서 저의 ‘혼잣말’ 말고도 기분 좋게 들려오는 ‘새소리 듣는 맛’이 있습니다.
이름을 말하면 누구나 알만한 어떤 분이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반복된 일상에 지치지 말자”는 것이 생활에 각오라고 하더군요. 저 역시 “감옥에서 주는 시간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하루를, 단 한 시간이라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의 소식을 전해드린 지가 오래된 듯합니다. 자주 편지드리고 안부 묻는 것이 동지들께 도리겠으나 그렇지 못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지난 2월 두 동지의 재판에 증인으로 소환된 적이 있습니다. 두 동지에 대한 국정원과 경찰의 말도 안 되는 재판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슬프고 기가 막혔습니다.
얼마 전 두 동지의 ‘무죄’ 소식을 들어서야 큰숨이 쉬어졌습니다. 그동안 고생하셨다는 말, (국정원과 검찰이 다시 항소할 텐데) 당분간 고생하시라는 말밖에 전할 수가 없어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저는 요즘 1943년부터 1953년 시이, 이 땅에서 일어났던 역사를 뒤져보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막바지, 이른바 ‘태평양전쟁'(식민지 재편을 위한), 2차 세계대전의 종결, 한반도에서 일제의 퇴각과 미군정, 민중들의 건국운동, 분단과 전쟁, 전쟁과 분단의 고착화 등 현재 대한민국의 반공체제가 있기까지, 당시 10년이 어떻게 현재를 규정하고 작용하고 있는지, 노동자·민중들의 눈물들과 엉킨 실타래처럼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언제부터 첫 단추는 잘못 끼워졌는지, 엉켜버린 실타래의 실마리를 찾아보기 위해서입니다.
그 실마리 중 하나가 국가보안법이 아닐까 합니다.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지고 현재까지 간첩, 빨갱이, 불순분자로, 불가촉 천민으로 몰려 죽거나 갇히고 사상당한 사람이 기백만 명이 넘을 것입니다.
지난 세월을 기억하여 반공체제에서 생명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숨죽이며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이 기천만 명이라는 현실이 암울하기까지 합니다.
지금 이 엉키고 설킨 피묻은 실타래를 이제는 끊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쟁, 분열, 냉소, 혐오, 적대, 폭력을 조장하는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 합니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먼저 나서는 동지들, 함께 연대하는 동지들, 모든 분들께 응원의 마음을 보냅니다.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는 그날이 오면 구속된 동지들이 깔았던 자리를 거두어 감옥문을 나서겠습니다.
시작을 이곳 담장 너머 언덕과 숲으로 했으니 마무리도 그 숲 이야기로 할까 합니다.
더운 한낮에는 퇴약볕이라 밖을 내다보기가 주저되지만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 때 바람 타는 숲을 보면서 저는 ‘투쟁하는 동지들이 어깨 걸고 부르는 함성이고 노래소리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서간 이들이 있어 그 이들이밟고 지나간 발자국이 길이 되고, 그 길을 따라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동지들과 함께하겠습니다.
모두 건강살피시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부족한 저에게 격려와 응원해주신 동지들께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2026. 6. 30. 대구에서
석권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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