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맑스엥겔스주의만이 희망이다!! ㅡ 전국노동자정치협회의 《21세기 혁명적 맑스엥겔스주의 》를 읽고
사드 저지 평화활동가 은영지
민주당 소속 서울과 부산시장의 성추행 사건으로 치러진 지난 4월7일 보궐선거 결과는 진보정당의 참패라는 낭패감을 맛봐야 했다. 짝퉁 보수인 국민의힘과 짝퉁 진보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이전투구 선거에서 이 신자유주의 꼴통 양당 패거리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진보정당의 약진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민주노총이 지지한 진보당 송명숙 후보는 0.25%, 무소속 신지예는 0.37%로, 두 후보 표를 합쳐봐야 0.62% 언저리에 머물고 있었다.
도대체 노동계급은 뭐하고 있으며 이런 결집력으로 무얼 도모할 수 있을까? 못된 자본가 세상을 뒤엎는 일 가능이나 할까? 민주노총 조합원과 가족들만이라도 정신차리고 계급투표를 했다면 이 따위 치욕스런 결과가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자본가와 야합하는 신자유주의 정권을 심판하는 정치투쟁과 변혁운동엔 관심조차 없고 노예처럼, 기계처럼 착취당하며 납작 엎드려 살기로 작정한 건 아닌지…… 밀려오는 절망과 비통함에 목구멍에서 자꾸만 쓴 물이 올라온다. 의회 민주주의라곤 하지만 저잣거리의 야바위꾼보다 못한 정치판 갈아엎고 세상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해도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치권 바깥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외쳤던 맑스와 맑스주의에 대한 열풍이 불고 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까. 물론 지난 2018년 탄생 200주년을 맞은 맑스에 대한 재조명 차원에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본다.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착취를 더욱 지능화, 노골화 하면서 벼랑에 내몰린 노동자 계급이 혁명을 갈망하면서 등장한 맑스와 맑스주의에 대한 열광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이거나 감성적인 접근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민중이 그 어느 때보다 양극화와 불평등, 생존의 위기에 몰려 ‘사회주의 부활’이 절실해지고 있는 이때 혁명적 과학적 변혁이론을 갖춘 맑스엥겔스주의야말로 간절한 응급처방이라는 걸 다수가 동의하고 있다.
맑스엥겔스주의 이론에 어떻게 접근하고 실천투쟁으로 나아갈 지 잘 정리한 책으로 《21세기 혁명적 맑스엥겔스주의 》가 눈에 띄었다. 전국노동자정치협회(이하 노정협)가 2012년부터 발표해온 주요 논문들을 모아 펴냈다. 이 책은 자칭 맑스주의자인 전 세계 진보적인 학자들이 맑스의 사상, 맑스주의, 소련 사회주의를 얼마나 자의적으로 해석, 비난하고 왜곡시켜 왔는지 소개하는 한편 맑스 엥겔스와 레닌, 스탈린의 저작들을 분석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맑스주의자라고 하면서 반소, 반공논리에 젖어 변혁성이 거세된 채 자본주의를 비호하는 학자들이 유럽 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그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이 책은 1917년 레닌이 주도한 볼세비키 혁명부터 스탈린 시대까지 소련 사회주의가 인류 최고의 진보이자 세계 프롤레타리아 계급 승리의 역사라고 서술하고 있다. 공감하는 부분이다. 1929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 민중은 세계적인 대공황으로 큰 고통을 겪었지만 소련 사회주의는 완전고용과 무상복지체제, 생산력 향상으로 안정된 사회적 소유와 계획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발전하는 모습을 보인 레닌과 스탈린의 사회주의가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흐루쇼프의 등장이었다.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고 ‘전 인민의 국가’와 ‘평화적 이행론’을 선언한 흐루쇼프는 자본주의 요소를 채택하고 ‘수정주의’로 흘러가면서 착취와 부패가 만연했고 자본주의에 포위되면서 결국 실패를 겪게 된다.
“1991년 12월 소련 사회주의 해체는 맑스주의 패배도 사회주의 패배도 아니다. 레닌 스탈린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전진했고, 흐루쇼프 고르바초프 수정주의는 자본주의로 후퇴했다. 맑스주의는 승리했고 수정주의는 패배했다.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 유지, 강화, 발전은 수정주의와의 단호한 투쟁에 달려 있다. 역사의 가르침이다.”
맨 앞 추천사에서 김병기씨가 쓴 글을 참고로 하면, 자본주의 착취구조를 도입한 수정주의자들이 소련을 후퇴시키고 말아먹은 건 확실했다.
이러한 수정주의의 사상적 뿌리는 베른슈타인, 카우츠키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맑스의 이름을 빌어 맑스와 맑스주의를 호도한 정치적 원조인 베른슈타인는 “맑스주의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시대에 맞지 않아 수정한다”고 하면서 맑스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말장난을 늘어놓았다. “베른슈타인은 맑스의 계급과 계급투쟁 대신에 중산층 이론과 계급화해 사상을 부르짖고 자본주의 붕괴론을 카르텔과 신용기관 발전으로 공황 없는 자본주의 발전이론으로 대체하고 협동조합 노선을 주창하며 기존 국가기구 타도를 부정했다”고 노정협은 밝히고 있다.(본문 97쪽)
서유럽 좌파들이 반맑스레닌주의와 반소, 반공주의라는 자기 모순에 빠지는데 베른슈타인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유로 코뮤니즘, 트로츠키주의, 신좌파, 포스트 맑스주의, 프랑스 현대철학 사조,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 이탈리아의 자율주의가 다 그 부류에 속한다. 그들은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는 소부르주아 사상에 심취한 나머지 시대가 달라졌다고 우기면서 맑스주의를 역사적 유물로 치부하고 맑스주의 과학성과 혁명성을 부정하는 것도 모자라 맑스주의 해체까지 시도하는 반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계급투쟁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인식을 확장하는 자만이 진정한 맑스주의자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좌파들은 이를 무시하고 맑스주의에서 혁명성을 빼버리고 비혁명적으로 순화하고, 순치하여 착취계급도 수용할 수 있는 맑스주의를 전파하여 지배계급에 대한 투항과 항복을 맑스주의 이름 아래서 위장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한국의 진보적인 경제학자들의 맑스주의 인식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천박하기 짝이 없었다. 사민주의자인 홍기빈은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으로 사회적 경제(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 등)를 주장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파국을 막고자 하는 논리였다. 이들이 맑스주의를 부정하고 있다는 걸 은폐하기 위해 맑스와 맑스주의를 분리시켜 반맑스 사상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 전형적인 방법으로 소련 사회주의와 현실 사회주의를 부정하기 위해 스탈린을 비방하는 것으로 포문을 열었다.
“스탈린과 소련 사회주의를 부정하고, 스탈린 사상의 출발이 레닌에게 있다며 레닌을 부정하고 레닌 사상의 출발에 엥겔스가 있다고 엥겔스를 부정하고, 더 나아가 맑스의 영원한 벗이자 맑스주의를 떠받치는 기둥 중 하나인 엥겔스와 맑스를 분리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이제 맑스만이 남았다. 홀로 된 맑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본문 103쪽)
노정협은 “휴머니즘과 소외를 말했던 초기 맑스”와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말했던 후기 맑스”를 구분하고 급기야 맑스와 맑스주의를 분리시켜 맑스주의 흔적을 없애는 수법을 쓴다고 지적하고 있다. 급진적 민주주의자로서의 맑스, 엥겔스의 초기 저작과 《독일이데올로기 》와 《공산당선언 》을 기점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자로서 성숙한 맑스주의는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통일되어 발전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닌 휴머니즘으로서의 맑스의 초기 저작을 강조하며 자본주의 체제에 투항하는 것으로 사회민주주의 개량주의자들의 뒤를 따라갔다.(본문 104쪽)
이 책에서 특히 돋보이는 부분이 스탈린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스탈린 체제하의 당내 관료주의자들의 숙청과 제국주의와 내부 반당 행위, 반혁명적 테러와 생산파괴 책동과의 계급투쟁 속에서 계급독재가 극단화되는 과정에 보인 다양한 경향들을 뒤이어 등장한 흐루쇼프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일환으로 스탈린 사회주의를 왜곡하고 과장했다. 수정주의 입장으로 자본주의 요소를 채택,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약화시키고 소련경제를 악화시켜, 자본주의적 착취와 부패구조로 소련 붕괴를 초래했다고 한다.
이를 목격한 변혁운동가들은 진의를 파악하지 않고 맑스주의가 파산 선고를 했다는 성급한 판단을 하면서 운동판을 떠나거나 개량주의적인 시민운동으로 변질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빈틈을 자율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무정부주의가 비집고 들어왔다. 트로츠키주의가 득세하는 한편 맑스이론을 가지고 출세를 꿈꾸거나 상품화, 혹은 자본주의 선전도구로 역이용되는 맑스 현상도 불편한 마음으로 지켜봐야 했다.
맑스주의자(실제론 트로츠키의 영향받음) 행세를 하지만 자본주의 첨병 역할을 한 이정인의 글을 보면서도 안타까웠다. 그는 스탈린과 스탈린 시대를 무지막지하게 비판하다가 비난의 화살을 레닌에게 돌렸다. 1990년 소련과 동유럽의 붕괴 후 “소련은 사회주의가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죽은 마르크스와 산 마르크스를 가려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레닌을 살리기 위해 스탈린을 죽였더니 레닌과 스탈린의 연관성을 부정하기 어려워 레닌까지 죽이게 되었다. 레닌과 스탈린 모두 제2인터내셔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인식이 생겨났으며 그럼 제2인터내셔널에 영향 끼친 사람은 엥겔스니 엥겔스까지 죽이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마르크스라도 살리자고 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연관성을 도저히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마르크스까지 죽이고 나아가 사회주의 이론 전체를 부정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이정인, “마르크스주의의 체계?”)
이게 도대체 ‘말’인가 ‘막걸리’인가?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이정인은 사회주의는 끝났다고 주장하면서 레닌을 부정하기 위해 사이먼 클릭과 같은 부르주아 사회학자를 소환하기도 했고 노동자계급에게 “유물론적 사고를 가지고 민주주의 투쟁의 전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레닌을 두고 사회주의자라기 보다는 혁명적 민주주의자(급진적 부르주아)라고 왜곡된 딱지를 붙이기도 했다.
이진경 역시 “기존의 맑스주의, 근대적 맑스주의를 다른 것으로 변형시켜야 한다”고 우기면서 혁명적, 과학적 원칙을 훼손시키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뒤섞어 맑스 이론을 짓뭉개 버렸다. 그는 푸코, 들뢰즈, 가타리, 네그리 등 유럽의 반맑스주의를 표방하는 소부르주아 잡사상의 유포자가 되었다. 노정협은 “맑스주의 혁명적 계승자인 맑스레닌주의자들은 그 누구도 ‘마르크스조차 죽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며 일침을 가했다.
독일어판 《자본론 》의 번역자인 강신준 교수 역시 경향신문에 《자본론 》을 연재하는 글에 카우츠키 사상에 뿌리를 두고 소련을 맹비난하면서 맑스주의를 왜곡시키고 자본론을 임의적으로 해석했다. 강교수는 “자본주의 개혁은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존속시키면서 그 위에 건설된다” 라는 황당한 주장을 했다. 그는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자라는 한 사람의 변화와 성숙이 변증법적 발전의 예”라고 하면서 “러시아가 미성숙한 상태에서 사회 발전법칙을 어기고 인위적으로 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에 망했으니 때가 올 때까지 완만한 자본주의의 성숙과정을 기다려야 한다”는 수정주의 입장을 취했다. 강교수의 인식은 “맑스주의 변증법에서 비약과 소멸, 재탄생이라는 혁명성을 거세한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고 노정협은 비판의 날을 세웠다.
노정협이 분명하게 정리했다. 자본주의는 생산의 사회화를 낳지만 한 줌도 안 되는 자본가들이 결과물을 독차지하고 압도적 다수의 민중들은 빈곤, 억압, 예속, 타락, 착취를 당하기 때문에 훈련되고 통일되며 조직되는 노동자계급이 반항과 저항을 통해 자본주의적 외피, 즉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타파한다는 명제를 강신준은 놓치고 있거나 귀를 막고 있다는 것이다.
맑스주의가 노동자계급 해방운동의 이론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국내 최대의 진보좌파 학술문화행사인 맑스코뮤날레(맑스+ 코뮤니스트+ 비엔날레의 합성어) 행사에서 맑스주의 정치학자인 김세균 교수는 맑스주의 해체를 선언하고 나섰다. 그는 “맑스주의 이론과 사상이 총화적 사상도, 유일무이한 변혁이론도 아니”라고 하면서 생태주의와 여성주의가 결합된 변혁운동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모호한 주장을 했다.
환경과 생태, 자원고갈, 여성문제는 맑스엥겔스 이론안에 탄탄하게 정리돼있고 사회주의 국가가 모범으로 실천하고 있음에도 억지 주장을 하며 맑스 엥겔스를 깎아내리고 있다. 무엇보다 맑스코뮤날레라고 명명하면서 맑스가 아닌 트로츠키를 전면에 내세우고 비변증법적 방법론으로 세계자본주의와 일국자본주의를 분리함으로써 개별을 통해 생생하게 포착되는 맑스주의의 현실 분석을 진부하고 상투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야비하기 짝이 없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날마다 분노하고 있는 우리 노동자들이다. 소득주도성장론, 경제민주화, 기본소득제, 재벌개혁 및 해체, 소액주주제, 선성장 후분배론 등 온갖 그럴듯한 정책이 즐비하지만 모두 눈 가리고 아웅하는 기만술책일 뿐이다. 나아가,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계급투쟁을 약화시키면서 자본가의 이윤증대를 꾀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계략에 불과했다. 절대로 속아 넘어가선 안 될 일이다.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없다면 생산관계의 모순에서 오는 착취구조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레닌도 《제국주의론 》에서 “대중의 반기아 상태와 빈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근본이고 불가결한 조건”이라고 했다. ‘착한 자본주의’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따위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자본가 계급과 신자유주의 정권의 속임수에 현혹되지 말고 싸워야 하는 이유다.
“계급투쟁은 착취를 제한하는 것을 넘어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계급관계를 철폐하여 계급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레닌의 말처럼 계급투쟁을 인정하더라도 ‘수탈자를 수탈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맑스주의자가 아니다.” (본문 311쪽)
가장 여운이 남고 가슴 뜨거워지는 탁월한 구절이다. 나 자신 20대에 맑스의 사상을 접한 이후 이론적 깊이가 부족한 ‘얼치기 맑스주의자’로 살아왔지만 레닌의 이 명제는 마음 속 깊숙히 꼬깃꼬깃 쟁여두고 있다.
노정협의 해박한 맑스주의 이론 정리에 감탄하며 《21세기 혁명적 맑스엥겔스주의 》를 정독하면서 우리가 꿈꾸는 야무진 세상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반소, 반공 이데올르기에 절어 혁명성, 과학성이 거세된 맑스주의 문제아들을 골라 분리수거하는 눈도 키우게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책만 파먹으며 좌파 지식인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변혁으로 무장한 실천투쟁에 복무해야 진짜 노동해방 세상,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실현될 거라고 믿고 있으며 이 책 마지막 장을 덮으며 더욱 확신이 들었다. 노/정/협
이 기사를 총 250번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