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고전읽기: 《국가와 혁명》(레닌) – “부르주아 학자, 작가 그리고 철학자들에 의해 혼란스럽게 된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 중 하나”인 국가의 본질을 인식하자!

교재 출판사: 논장, 돌베개, 새날, 아고라

2020년 8월 6일(목) 19시 30분

(* 이번 주만 목요일에 하고 격주 월요일에 합니다.)

장소: 노정협 사무실(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93-45 4층)

문의: 010-3398-0248

이미 다른 글에서 언급했듯, 레닌의 빛나는 저작인 《국가와 혁명》은 《무엇을 할 것인가》, 《제국주의론》과 함께 레닌의 3대 저작 중 하나입니다. 박정희가 저자로 되어 있는 《국가와 혁명과 나》와 제목이 비슷합니다만, 친일파 장교에서 미제의 주구로 변신한 박정희가 반동적 군사 쿠데타를 은폐하기 위해 갖다 붙인 “혁명”과 위대한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이 말한 “혁명”을 어찌 감히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레닌은 1916년 가을에서 1917년 초까지 당시 망명 중이던 스위스 취리히에서 국가와 관련한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연구했는데, 실제 집필은 1917년 8월에서 9월 사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서쪽 교외의 작은 오두막집에 몸을 숨긴 채 집필을 했습니다.(핀란드에서 집필되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핀란드가 상페테르부르크 옆에 있으니 장소는 비슷할 것입니다.)

당시 레닌의 처지가 참으로 초라한 것 같지만, 이 때는 2월 혁명으로 짜리즘(러시아 황제체제)을 타도한 몇 달 뒤이며 진보적 인류 전체의 등불이었던 위대한 10월 혁명이 일어나기 고작 한두 달 전에 불과합니다.

이 당시 2월 혁명과 10월 혁명 사이에는 짜르 시대의 장군이었던 코르닐로프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가장 반동적인 시기였지만 레닌은 이것이 혁명 직전 반동의 단발마적 발악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고 혁명이 임박해 있다는 것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혁명을 앞두고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 레닌은 《국가와 혁명》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국가와 혁명》은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지막 장인 7장은 “1905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 7장은 단 하나의 문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레닌은 이 문단에서 “이 소책자에서는 당연히 혁명의 와중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권력에 관한 임무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경험이 가져다준 가장 중요한 교훈들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는 것으로 원고를 마칩니다. 레닌은 이에 대해 ‘초판 후기’에서 “10월 혁명의 전야라는 정치적 위기가 나의 저술을 ‘중단시켰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레닌은 그것을 도리어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혁명을 경험’하는 것이 그것을 쓰는 것보다는 훨씬 기쁘고 유익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국가와 혁명》은 맑스와 엥겔스의 국가에 대한 일련의 저작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 본질을 밝힌 저작인데, 특히 우리가 이후 공부하게 될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습니다.

《국가와 혁명》 제1장 제목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맑스주의에서 국가의 실체는 신비한 그 무엇도 아니고, 계약의 산물도 아니고, 이성의 산물도 아닙니다. 국가는 “화해불가능한 계급 적대감의 산물”이자 “피억압계급을 착취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국가는 군대와 감옥 등의 특수기관을 지배계급의 통치와 지배와 억압의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화폐와 종교에 대한 물신숭배처럼 국가의 본질에 대해서도 물신숭배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마치 계급적대와 모순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중립적인 존재라는 인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특히 부르주아 체제는 교육과 종교와 언론 등 갖가지 수단을 총동원해 국가가 계급지배와 착취의 수단이 아니고 계급초월적인 존재인 것으로 대중들의 인식을 마비시킵니다.

레닌은 혁명 이후 1919년 7월 11일 볼셰비키 혁명가의 이름을 딴 ‘스베르들로프 대학’에서 “국가에 대하여”(임채희 러시아어 번역, 노동자정치신문, 2008-03-01)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는 데 이 주제에 대하여 거듭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어려운 문제

국가에 관한 문제는 아마도 무엇보다도 더 부르주아 학자, 작가 그리고 철학자들에 의해 혼란스럽게 된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 중 하나”

“이것은 모든 정치의 너무나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문제”

레닌이 그토록 이 문제를 강조했던 것은 “혁명의 근본문제는 국가권력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국가권력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고 국가권력의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의회주의이자 개량주의이고, 수정주의이자 무정부주의이기도 합니다.

맑스는 72일의 단명으로 끝났지만 최초의 민중권력이었던 1871년 파리코뮌의 교훈을 총괄하면서 ”기존 국가권력을 그대로 인수하여 사용할 수 없다. 철저하게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맑스주의의 가장 핵심적 원칙입니다.

맑스주의의 이 혁명적 원칙을 부정했기 때문에 베른슈타인 같은 수정주의자들이 등장했고, 카우츠키 같은 기회주의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도 흐루시초프의 등장 이래 “전 인민의 국가”론이 등장하면서 맑스주의 국가론의 혁명적 원칙이 폐기되고 이후 이 수정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로 가는 각국의 길”이라는 명목으로 유로꼬뮤니즘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유로꼬뮤니즘은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심각하게 우경화 시키고 타락시켰습니다.

심지어 혁명 이후에도 이 원칙을 무시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약화시키는 티토의 시장 사회주의 노선이 나왔고, 흐루시초프, 고르바초프 같은 수정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사회주의권이 해체되는 주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횡행하는 자율주의, 해체주의 같은 소부르주아 이론 역시도 국가문제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맑스 코뮤날레는 맑스주의 복원을 기치로 내걸고 있지만 반맑스주의 무정부주의자 대회로 전락했습니다.
한국에서 ‘사회주의’를 내걸고 있는 대다수 이른바 ‘좌파’들도 무정부주의의 특성인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에 대한 왜곡 내지 적대시, 지도자에 대한 부정, 민주적 계획이라는 명목으로 중앙집중주의의 부정과 자치주의의 강조 등 무정부주의의 특성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내걸고 있지만 실은 그 정치적 본질에 있어서 무정부주의의 아류인 범무정부주의에 불과합니다.
위에서 레닌은 “‘혁명을 경험’하는 것이 그것을 쓰는 것보다는 훨씬 기쁘고 유익할 일이”라고 했는데, 백 마디 말보다는 《국가와 혁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 “훨씬 기쁘고 유익할 일”일 것입니다.

레닌이 국가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학습 방법에 대해 당부하는데 이는 맑스주의 저작을 읽는 우리들 모두에게 해당될 것입니다.

“또한 나는 강연과 강의의 보충으로 여러분들이 맑스와 엥겔스의 가장 주요한 저작들 중 가령 일부라도 독서에 일정한 시간을 바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도서관에서 소비에트와 당학교의 학생들에게 제공된 문헌목록과 참고서들 속에서 의심할 바 없이 여러분들이 그 주요한 저작들을 찾아낼 것이고, 그리고 비록 역시 단번에 몇몇 사람들이 서술의 어려움에 놀라서 물러서게 될 수도 있겠지만 이것에 당황해 하지 않아야 하고 처음 읽을 때 이해되지 않는 것이 반복해서 읽을 때 이해될 것이며 혹은 여러분들이 나중에 약간 다른 측면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 때 이해될 것입니다.”(“국가에 대하여”)

맑스주의 고전은 평생 동안 시간을 내서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끼는 것은 비단 문화유산뿐만이 아닙니다. 맑스주의 고전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반복해서 읽으면 이해될 것이며 “약간 다른 측면에서” 보다 풍부하고 다채롭게 인식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인식의 수단에서 현실을 변화, 변혁시키는 무적의 창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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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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