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혁명가 호치민 사망 50주기를 맞으며 돌아본 반제국주의 투쟁의 생애

김남기(학생)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9년 9월 2일 베트남의 위대한 혁명가는 미국과의 전쟁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사망하기 24년 전인 1945년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했던 날이었고, 그는 사망하기 직전에는 독립기념일 축하 연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80평생을 베트남의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의 삶을 살아왔던 호치민이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에서 여러 논평이 쏟아졌다. 세계 주요 국가에서 조문을 했으며, 북베트남 정부는 121개국으로부터 2만 2천통의 조문을 받았다. 수많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들 나름대로 추모식을 열었으며, 우호적인 사설들을 게재했다. 소련은 공식 성명을 통해 호치민을 “영웅적인 베트남 인민의 위대한 아들이며,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뛰어난 지도자이며, 소련의 훌륭한 친구”라고 찬양했다.

당시 서방의 종군기자로서 호치민 장례식에 참가했던 기자이자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의 저자인 마이클 매클리어는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비탄과 감동, 혼란이 함께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넋을 잃은 듯이 행동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정치 지도자를 잃고 애도하는 그런 슬픔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슬픔을 꾹 참고 견디는 모습이었다. 호치민의 인민들은 ‘호 아저씨’가 부르기만 하면 누구라도 달려와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순간들이었다”라고 기사를 썼고, 미국 방송국인 CBS의 월터 크론카이트는 호치민 사망 소식을 톱 뉴스로 보도하면서 상업 광고 없이 7분을 할애했다. 이처럼 호치민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상관없이 많은 관심을 받은 전 세계적인 인물이었다.

호치민 주석 서거 50주년을 기념하며 그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호치민은 1890년 5월 19일 베트남의 킴 리엔에서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태어났을 당시 그의 이름은 응우옌 신 꿍이었다. 이후 10살이 되던 해 응우옌 탓 타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그는 아버지와 함께 고전 공부를 하며, ‘삼국지’나 ‘서유기’같은 책들을 읽었지만, 17세가 되던 1907년 베트남의 옛 황궁 도시 후에에 있는 프랑스식 국립학교인 국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반프랑스 시위에 참여하는 바람에 국학에서 퇴학당했고, 베트남을 떠돌다가 1911년 6월 사이공에서 프랑스의 기선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에 취직함으로써 베트남을 떠났다. 즉 그는 20대 초반부터 50대까지 대략 30년간 해외 생활을 하게 되었다.

호치민은 프랑스의 파리와 미국의 뉴욕과 보스턴 그리고 영국 런던에서 알바생으로 일하며, 노동조합 활동에도 관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17년 그는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노동자들을 선동하는 작업에 관여했다. 1919년 그는 파리강화회의 때부터 ‘응우옌 아이 쿠옥’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베트남의 독립을 강대국들에게 청원했고, 안남애국자연합을 결성하기도 했었지만, 서방 제국주의자들은 이를 무시했다.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 사람들과 교류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과정에서 호치민은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1920년부터는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했다. 1921년 호치민은 국제식민지연맹을 결성하기도 했으나, 베트남 식민지배에는 반대하지만 베트남 자체에는 무관심 했던 프랑스 공산당하고 많이 갈등했다고 한다. 1922년 호치민은 ‘르 파리아’를 창간하고 편집인으로서 활동했다. 르 파리아의 신문사는 주로 프랑스 식민정책을 비판하고 특히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비판했다. 이런 신문이었기에 프랑스 당국은 이 신문사를 탄압했고, 호치민을 체포하려 했었다. 그 외에도 호치민은 파리에서 발행되는 다른 좌파 신문이나 정기간행물에도 꾸준히 글을 썼다.

1923년 6월 ‘르 파리아’에서 활동하던 호치민은 프랑스 당국의 감시를 피해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탈출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호치민은 코민테른 극동국에서 근무하였고,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했다. 모스크바에서 생활할 당시 그는 아쉽게도 만나고 싶어 했던 레닌을 만나 뵙지는 못했다. 1924년 12월 호치민은 중국 광둥성에 있는 광저우로 갔고, 거기서 베트남 혁명 청년회를 결성하여 교사로 활동했다. 국공합작과 국공내전을 겪으며 호치민은 1927년에 중국을 떠났다. 1930년 호치민은 베트남 사회주의 조직들의 분파 싸움을 해결함으로써,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당했다. 그게 바로 현재 베트남 공산당의 전신이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창설되기가 무섭게 베트남의 통킹과 안남 지역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는데, 그 봉기는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고, 호치민 또한 1931년 홍콩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고문을 받다 석방된 호치민은 1934년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레닌대학에 입학했고,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 참가 했고, 스탈린대학교에서 교사로도 활동했었다.

이 시기 그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레닌의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을 베트남어로 번역했다. 1938년 호치민은 모스크바를 떠나 중국으로 들어갔고, 중국 구이린성에 있는 팔로군 본부에서 보건담당 간부로 일했다.

1940년 호치민은 중국 쿤밍에서 팜반동과 보 웅우옌 잡 장군을 만나 베트민 창설을 위해 노력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1년 30년 만에 베트남으로 돌아와 팍 보 동굴에서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을 창설했다. 그리고 그때부턴 그는 호치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0년 나치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일본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접수했는데, 당시 베트남 사람들은 일본군을 해방자로 생각하기도 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잘 알고 있던 호치민은 일본을 “프랑스와 다를 게 없는 제국주의 침략자”로 간주하며, 그들과 투쟁을 전개했다.

1941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그는 중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국민당측으로부터 스파이로 오인 받아 대략 1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그가 감옥에 있을 시기 집필한 것이 바로 ‘옥중일기’다.

1943년 석방되고 난 뒤 호치민은 중국국민당의 도움을 받아 중국 남부에 혁명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2차 세계대전이 사실상 막바지이던 1944년 12월 보응우옌지압이 지휘하는 베트남해방군을 창설했다. 또한 그는 미국 CIA의 전신인 OSS와 접촉하여 대일전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1945년 중반에 베트민은 대략 1만 명 이상의 군대를 가지게 되었고, OSS와 협력하여 일본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45년 일본 제국주의가 세계연합국에게 항복하자 베트남 전역에서 총봉기를 일으켜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켰고, 그해 9월 2일에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연합국들은 베트남을 16도선으로 분단시키기로 했고, 남쪽에는 영국군 북쪽에는 중국국민당군이 입성했다. 중국국민당군은 결국 내전이 격해지며 그냥 철수했지만, 영국은 프랑스를 내세운 뒤 철수하는 바람에 호치민과 베트민 지도자들은 프랑스를 상대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전쟁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46년 11월 23일 프랑스군이 북베트남의 항구 도시인 하이퐁을 군함으로 무차별 포격하여 6000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 프랑스는 레아 작전을 전개하여 베트민의 본거지를 접수했지만, 1949년 중국 국공내전이 마오쩌둥의 승리로 끝난 뒤, 전선에서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마오쩌둥의 중국은 호치민의 베트남을 물적 인적으로 지원하며 도왔고, 1950년 소련의 스탈린 또한 호치민의 베트남을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했다. 호치민과 공산당 지도자들은 1954년 5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섬멸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대략 2300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하고, 10000명 이상이나 되는 프랑스군이 포로로 붙잡힌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군은 230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프랑스 식민지 통치를 종결시키고,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베트남과 프랑스가 디엔비엔푸에서 전투를 치르는 동시에 제네바에선 평화회담이 열렸다. 결국 베트남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17도선을 기점으로 북과 남으로 나뉘게 되었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분단 이후 2년 이내에 남북을 아울러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해야 했고, 호치민과 북베트남은 처음에는 제네바 협약을 기초로 한 통일정부를 위한 2년 이내의 선거를 주장했다. 그러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부터 반공주의적인 관점에 따라 베트남 문제에 지속적으로 개입해오던 미국은 만일 총선이 치러지면 민중의 80%가 호치민을 지지할거라 예상했다. 따라서 미국은 통일선거를 치르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그와 동시에 호치민과 북베트남 공산당 지도자들은 1954년부터 1956년까지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그 과정에서 호치민 자신도 인정했듯이 유혈사태가 있긴 했지만,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베트남 인민들이 더는 지주 계급의 횡포를 겪지 않게 되었다. 토지개혁을 잘 마무리한 호치민의 북베트남과는 달리 남베트남은 부패와 혼란의 연속이었다.

당시 미국의 내세운 제국주의 하수인 응오딘지엠은 가족정치를 일삼고 반대파들을 숙청하며 민중의 90%인 불교를 탄압했기 때문이다. 그런 지엠정권의 통치는 1960년 남베트남에서 베트콩을 창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북베트남은 이 사태를 지켜보며 호치민루트를 통해 베트콩을 물적 인적으로 지원했다. 미국은 남베트남 정권을 유지시키기 위해 대대적으로 지원했지만,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미국의 기대에 못 미쳤다. 1963년 틱광둑 스님이 소신공양 하는 일이 있자, 미국은 응오딘지엠을 암살하여 새로운 정부를 만들었지만, 그 정부 또한 무능했기에 남베트남의 혼란을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미국은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을 침략했다.

베트남을 침략한 미국은 ‘롤링썬더 작전’이라 하여 베트남 전역에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고, 수많은 민간인을 도륙했다. 미국이 참전함에 따라 대한민국과 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등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미국은 자신들이 베트남에서 이기고 있다고 착각했다. 그런 믿음은 남베트남에 주둔한 미군의 숫자를 점진적으로 증강시켰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1967년이 끝나갈 때쯤에 남베트남에 주둔한 미군은 50만 명을 돌파했다. 1967년까지만 해도 미국은 베트남에서 이기고 있다고 착각했지만, 그것은 미국만의 믿음이었다. 그런 미국의 믿음은 1968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감행한 구정 공세가 깨뜨려버렸다.

1968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감행한 구정 공세는 사상자만 놓고 보았을 때 미군의 승리였다. 구정공세 1달 기간 동안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3만 명 이상이 죽었던 데에 비해 미군 2천 명 이상이 사망하고 3천 명이 부상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미국이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공세 초기에 사이공에 있던 미대사관 1층이 잠시나마 베트콩에게 점령당했고, 그런 장면들이 미국 전역에 보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구정 공세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라는 미국의 선전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미국국민들은 분노했다. 이후 미국에서 반전운동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구정 공세 이후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은 1968년 11월 하노이에 대한 폭격을 일시적으로 멈춰야 했고, 결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호치민의 일과는 대국민 연설 및 중국을 오가며 요양하는 것이었지만, 1966년 7월 호치민이 남긴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라는 말은 북베트남인들과 베트콩들의 통일전쟁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는 주제, 구호가 되었다는 점에서 크나큰 의의가 있다. 이런 호치민의 일상은 1969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망하는 해에도 몇 차례 연설을 했고, 심장마비로 죽게 되는 날에도 베트남 독립기념일 연설을 준비했었다.

1969년 9월 2일 그가 사망하자 베트남은 큰 슬픔에 빠졌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은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항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호치민이 사망한 해인 1969년에는 베트남 전쟁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구정 공세 이후로 미국에서는 대규모의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이 일어났고, 미국의 대통령이 된 리처드 닉슨은 베트남화 정책을 발표하여 단계적으로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또한 미군에 의해서 저질러진 최악의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사건인 미라이 학살의 진상이 전 세계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호치민을 따르던 북베트남 공산당 지도자들은 호치민의 정신을 이어받아 1973년 미군을 베트남에서 철수시켰고, 1975년 남베트남 괴뢰 정권을 전복시키고 자주적인 통일을 이룩했다. 이로써 베트남은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침략을 무찌르고 승리를 쟁취한 위대한 민중의 역사를 만들어 냈다. 당연히 이 과정에는 베트남의 위대한 지도자 호치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마지막으로 서방 기자로서 호치민의 장례식을 지켜본 마이클 매클리어가 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겠다.

“한 세기에 걸친 외국인의 지배가 그들을 연옥으로 몰아넣었고, 또 다른 한 세기의 전쟁이 그들을 질곡으로 이끌었지만, 그들은 의연하게 부활했다. 인류 역사는 베트남 민족의 용기와 불굴의 정신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아시아의 작은 국가가 스스로의 힘으로 민족 재통일을 이룩한 것보다 더 위대한 본보기는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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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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