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에 운동이 없(었)다”! 그것을 채워나갈 운동을 부정하는가?> 글을 둘러싼 구제불능 자본주의 신봉자와의 논쟁

사진은 스웨덴 사회적 협약 체결 장면

우리안의영웅’이라는 필명을 쓰는 한 인물과의 논쟁이 종료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안의영웅’이 더 대응을 한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내용이 나올 것은 없어 보인다. 익명의 한 인물과의 논쟁이지만, 이 논쟁이 중요한 것은 ‘우리안의영웅’이 일정한 정도의 사회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일관된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데 변혁적 관점을 상실한 것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반동적인 입장으로 경도될 수밖에 없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안의영웅’은 스웨덴 사민주의를 정치적으로 지지하는데, 반쏘반공주의적 입장으로 인해 결국 극우파쇼적 입장과도 통해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 노선’은 반쏘 반볼셰비키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카우츠키주의(한국에서는 대표적으로 강신준)는 사민주의 정치를 낳았는데, 이 역시 반쏘 반공주의 입장이다. ‘노동자연대’ 역시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하며 쏘련과 현실 사회주의를 타도해야 하는 반동적인 국가자본주의 입장인데 이 역시 반쏘 반공주의다.

‘우리안의영웅’처럼, 수정자본주의, 사민주의, 트로츠키주의가 정치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반쏘 반공주의 노선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제국주의, 자본주의 입장의 대변자로 전락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안의영웅 2017.02.13

노정협의 주장대로 쏘련 사회주의와 “현실 사회주의”가 해체되었다면 왜 사회주의를 다시 지향해야 되는지부터 설명되어야 하는것 아닙니까?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7.02.14

쏘련 사회주의가 해체 됐다는 거지 현실 사회주의까지 해체 됐다는 건 아닙니다. 현실 사회주의는 제국주의의 포위, 압살 공세에 맞서 분투하고 있으니까요?

쏘련 사회주의가 해체됐는데 왜 사회주의를 다시 지향하나구요?

그 기치가 맞다면 한 번이 아니라 열 번이라도 계속 지향해야지요. 왜? 자본주의는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될 끔찍한 체제이니까요?

전쟁과 공황, 실업만 보더라도 그렇지요. 자본주의 세계 대공황 이래 자본가들 내에서도 이 점을 인정하고 있지요. 그러다보니 자본주의 체제의 수호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걸 인정하면서도 그 체제를 수정, 보완해서 자본주의 체제를 존속시키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지요. 최근 몇년 동안 발행된 책만 보더라도 착한 자본주의,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등 자본주의 미화 서적들이 십여 권 이상 발행되고 있지요. 그러나 케인즈의 수정자본의가 그렇듯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의 지배, 이윤추구와 착취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그 근본이 수정되지 않는 거죠. 착한 자본주의,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는 없다는 거죠.

자본주의 하에서는 더 이상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억압, 수탈이 종식될 수 없는 것이죠. 그렇다면 진보적 인류의 사회주의에 대한 염원이 실현됐던 쏘련은 왜 해체된 것일까요? 그에 앞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는 무수한 오류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나아간 최대의 진보였다는 것이죠. 반대로 쏘련 사회주의의 해체는 진보적 인류가 당한 가장 치명적인 패배였던 것이죠. 자본주의의 복지도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진보적 성취와 이를 전망으로 투쟁한 자본주의 국가 내부의 노동자들이 투쟁한 덕분이라고 봅니다.

파시즘의 격퇴와 연이은 민족해방도 2800만 쏘련 인민들이 희생 속에 이뤄진 것이지요. 그런데 이 승리는 쏘련 사회주의 사회적 생산력, 당의 지도력, 전 인민의 단결이 없이는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쏘련 사회주의는 왜 해체됐을까요? 그 거대한 역사적 격변을 한 마디로 여기서 해명할 수는 없겠죠. 먼저 제국주의 포위 공세가 있을 것이고 내적으로는 수정주의의 발흥이 있겠죠.

자본주의는 시장이 지배적이고 심지어 인간의 노동력조차도 상품이 되는 체제인데 사회주의는 시장의 절멸을 추구하고 이윤이 아니라 착취를 철폐하고 인간의 필요를 우선시 하는 체제죠.

그런데 쏘련 사회주의와 동유럽 사회주의 내에서 수정 사회주의가 등장했죠. 유고의 시장 사회주의가 대표적인 것이죠.

사회주의 원칙과 원리, 맑스주의 혁명적 원칙이 약화되면서 시장 활용, 이윤 활용에서 시장과 이윤이 점점 더 늘어나다가 종국에는 계획체제가 폐기되고 시장 자본주의 체제로 복귀하게 된 거죠.

이것이 무엇입니까?

자본주의는 이윤추구라는 자신의 고유한 원리, 원칙 때문에 파국에 빠지고 인민 다수를 억압하고 고통에 빠뜨리죠. 반면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는 사회주의 원칙, 원리의 문제가 아니라 그 원칙과 원리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해체된 거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맑스주의 혁명적 원칙에 충실해야 하고 역사의 진보적 발전을위해 투쟁해야 하는 것이죠.

혁명적 원칙과 전망을 가진 투쟁과 그렇지 않은 것은 확연하게 다르죠. 원칙과 전망이 없을 때는 현실의 투쟁에서도 타협적으로 가고 운동을 교란시키는 것이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뭐래도 80년대 한국사회 모순과 질곡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어떤 측면에서는 더 고도화 됐다는 거죠. 누군가가 혁명적 입장을 버렸다고 해서 이런 모순이 사라지는 것일까요?

우리안의영웅 2017.02.14

맑스가 자본주의의 역사적 한계를 주장하면서 내놓은 것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생산력 해방을 가로막는다는것 아니었나요? 자본주의 사적 소유제가 생산력 해방에 질곡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했죠? 북한과 한국을 비교하는 것은 민망한 수준이고.. 전통적 계획경제체제를 수정한 중국이 수정 이후에 십년 넘게 10퍼센트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것은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물론 중국의 경제제도는 소위 서구권 자본주의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적어도 소련식 계획경제는 아니죠. 현실에서는 이렇듯 전통적 계획경제, 사회주의 경제제도는 자본주의 경제제도보다 생산력 해방이란 관점에서 열등하다는것이 입증된 것이죠. 그렇다면 사회주의를 한다고 해도 북한 처럼 가난한 사회주의 밖에 못하는데 어째서 이게 인류가 지향해야할 길이라는 겁니까?

한 마디로 생산력 해방, 경제성장에서 자본주의가, 적어도 자본주의의 특정한 모델 가령 동아시아 모델이나 베이징 모델이 사회주의와 비교했을때 높은 성과를 내는데 왜 사회주의가 인류가 구현한 최대의 진보일까요? 가난한 사회주의.. 그거 아무 의미 없지 않나요?

그리고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없다고 하는데..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추상적 문구라 이런것을 갖고 얘기하는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적어도 복지수준을 놓고 얘기한다면 하다못해 복지국가가 아닌 한국을 놓고 얘기하더라도 건강보험이 있는 한국과 그런것도 없는 미국을 비교한다면 한국 인민들의 의료환경이 훨씬 더 좋은거 아닌가요? 이것을 다시 스웨덴 같은 곳이나 영국의 공적의료체계와 비교한다면 그쪽이 훨씬 더 좋은 것이구요. 이처럼 자본주의는 어떤 제도와 정책을 쓰느냐에 따라 실질적으로 인민의 생활수준을 높일 수있는데 사회주의는 어떻습니까?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스웨덴 인민이 소련 인민보다 낮은 복지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수 있나요? 북한은 뭐.. 가난한 사회주의의 정확한 표본이니 언급할 가치도 없고..

마지막으로 저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훨씬 더 민주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사회주의에서 다당제 있어본적 있나요? 뭐 이렇게 얘기하면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를 전제로 하는 정당만 허용하지 않냐고 하는데 유럽으로 나가면 공산당 사회당도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들은 개량 사민주의 정당이라고 하시겠지만서도..) 근데 공산당 사회당 이런걸 논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를 전제로 하는 복수정당이 민주적으로 경쟁하는데 사회주의는 사회주의를 전제로 하는 다당제도 성립된바 없지 않습니까? 이런 현실을 두고서도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할수 있나요?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이 있는 한국에서도 사회주의 서적이 서점에서 유통되는데 소련 북한 등에서 자본주의 서적이 합법적으로 유통되었나요?

가난하고 일당제 밖에 안되는 사회주의 정말 인류의 진보입니까??

전국노동자정치협회님 2017.02.14

맑스의 주장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맑스는 생산력의 고도의 발전과 부조응, 부조화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라고 하는 것이지요. 또한 생산수단은 점점 더 사회화하는데 그 소유는 점점 더 한 줌도 안 되는 자본이 전유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모순은 깊어진다고도 했지요. 이는 자본주의 생산력은 고도로 발전하는데 사적소유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때문에 생산력 발전이 전쟁과 공황, 실업처럼 과잉생산 공황과 끔찍한 파괴와 심지어 살육을 낳는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절대 다수 노동자 인민은 자본의 지배와 소유의 집중 하에서 빈곤과 장시간 노동, 노동통제 하에서 고통 받고 있는 것이구요.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은 전쟁무기 개발뿐만 아니라 난개발, 환경의 파괴 등으로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기도 하죠.

자본주의 자본가들의 기생성과 부패와 타락은 우리가 지금 박근혜-최순실 일당과 이재용 재벌 일가의 모습에서 적나라하게 목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이는 한국에서 특수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기생성과 부패는 모든 자본주의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죠.

자본주의는 생산력 발전이 전체 인류의 복지와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 줌도 안 되는 자본의 이윤을 위해 작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전쟁과 공황을 두고 볼 때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은 파괴적이고 후퇴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자본주의 생산력은 고도로 발전하고 있기도 하죠. 그런데 그 생산력 발전이 그 자체가 과잉생산 공황을 낳을 뿐만 아니라, 자본의 성장과 확대되는 규모에 비해 노동력 고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심각한 실업문제를 낳고 있는 것이죠. 과학기술 발전과 자동화의 진전이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청년실업을 포함한 실업문제를 심각하게 낳고 있다는 것이지요.

중국의 생산력 발전에 대해서 경탄만 하지 말고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지 그것부터 봐야지요.

북에 대해서는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제대로 인식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알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제대로 얘기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국과 미국의 보험체계를 비교하면서 건강보험 체제를 가진 한국이 더 낫다고 하는데, 그거 박정희 파쇼 체제에서 생겼는데, 그게 왜 생겼나요? 과연 박정희가 온정적이어서 생겼을까요?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토지의 유상몰수 유상분배가 된 것처럼, 민중의 혁명적 투쟁과 함께 누구 흉내라도 내기 위해서 된 것 아닌가요? 근데 국가건강보험 체제가 있다는 한국에서 무상의료가 가당키나 한가요?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은 병들어도 치료 제대로 못 받고 있는 게 현실 아닙니까?

대신 미국의 포위, 압살 공세 속에서도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완강하고 고수, 발전해 가고 있는 쿠바에 대해 말해보죠.

쿠바는 제국주의 포위,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해체라는 난관 속에서도 무상복지 체제를 일궈가고 있죠. 극단적 포위 속에서 일군 성과이니 얼마나 대단한 성과입니까? 만약 제국주의 포위 압살 공세가 없다면 쿠바 사회주의 체제는 지금 보다 얼마나 발전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쿠바 인민들이 풍요와 행복을 더 누리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회 인민들의 삶의 목표는 자기만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니라 인류의 진보적 발전에 복무하는 것이지요. 티브이에서 쿠바 소개 영상을 봤는데, 젊은 의학생의 삶의 목표가 뭐냐는 질문에 인류 전체의 삶의 진보에 복무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윤추구가 지상명령인 사회와 다른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쿠바는 이밖에도 제국주의 포위라는 난관이 만든 산물인 동시에 계획경제 체제의 결과물이기도 한데, 친자연적인 농업, 도농복합체를 일궈가고 있지요.

근데 세계 최강의 부와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미국은 왜 그래요? 쿠바보다 생산력 발전만을 놓고 본다면 열배는 더 잘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스웨덴의 복지는 인상적이지요. 그런데 스웨덴의 복지를 쏘련 사회주의의 존재와 스웨덴에서 파업의 물결 같은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 같은 것을 빼고서 얘기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흔히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 북유럽의 복지국가 체제는 계급타협주의의 산물이라고 하죠. 스웨덴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계급타협 체제는 인근 동유럽과 쏘련 사회주의 체제의 안정적 발전과 함께 노동자들의 격렬한 총파업 등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계급지배 체제를 위협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자본의 양보로 이뤄졌지요. 노동자들은 그 대신에 총파업을 접었구요. 계급타협 체제를 강제할만한 강력한 총파업, 높은 조직력,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존재 같은 역사적 문제들 없이 그러한 자본의 양보가 가능했겠습니까?

유럽도 마찬가지죠. 자본이 양보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본주의 대공황이라는 조건 속에서 그러한 계급타협주의는 다 무너지고 있죠. 그것을 신자유주의라고 말하기도 하고요. 특히 유럽 전역에서의 긴축 공세에 맞서 노동자들이 격렬한 파업과 가두 투쟁에 나서고 있죠. 북유럽에서의 계급타협 체제 역시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더 이상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못하고 사민주의 정권도 권력을 내놓는 경우가 생기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스웨덴의 계급타협체제를 말하면서 사회적 협조주의 등 계급협조주의가 근간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에서 그 계급협조주의가 어떻게 됐습니까? 노조관료들을 끌어들여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도입 하는 창구로 전락하고 노동악법 하려는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았나요?

스웨덴에서 착취가 종식됐나요? 스웨덴에서는 실업 문제가 종식됐나요? 스웨덴에서는 제3국에 대한 초과착취로 악마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고 있지 않나요.

국가보안법이 있는 한국을 가지고 다른 체제와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바로 국가보안법의 노예임을 입증하는 것이지요. 북과 소련에서 자본주의 서적이 지금 한국보다 더 합법적으로 유통되었냐니요? 노동자의 책 국가보안법 탄압에서 보듯, 이쪽에서 탄압받는 자본론, 페다고지, 어머니, 두만강 등 진보적 서적과 소련, 북에서 탄압받던 부르주아 저질 서적과 비교 가능합니까? 그걸 가지고 일률적으로 어느 한 쪽에서 더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누린다고 할 수 있습니까? 표현의 자유라는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가 누구를 위한 표현의 자유인지를 봐야지요. 이 더러운 사회에서는 일베도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지요. 자랑스런 대한민국 아닌가요?

일당제요? 자본주의 다당제가 그토록 부러운가요? 특히 독점자본주의를 번갈아가며 대변하는 자본주의 양당제가 그토록 부러워할 민주주의인가요?

당신은 구제불능의 자본주의 노예요, 자신이 노예의식에 찌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그런 진짜 노예인거요.

* 그건 그렇고 원래의 쟁점인 노동운동, 민중운동의 전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총파업과 가두투쟁 등 이 정권을 끝장낼 노동자 계급의 투쟁 전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구요? 80년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남아 있는 구조적, 역사적 모순은 어떻게 척결해야 한다고 보는가요? 계급타협으로요? 아님 정권교체로요?

우리안의영웅 2017.02.14

장황한 연설 잘 봤습니다 객관적인 사실만 정리해봅시다

동아시아모델과 사회주의 북한의 경제성장률 생산력 측면에서의 비교. 전자가 월등합니다 역사적 사실1

계획경제체제에 대한 수정으로 장기간 고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중국 역사적 사실2

스웨덴을 비롯한 복지국가에서 인민이 누리는 복지수준이 사회주의 국가들의 그것보다 월등함 역사적 사실3

다시말해서 사회주의는 창시자들의 구상과는 달리 생산력 발전이란 측면에서 볼때 자본주의보다 열등하다는건데 열등한 생산력 수준의 사회가 진보일순 없죠

그리고 다당제 얘기하니 자본주의 정당간 다당제나고 말하는데 사회주의에선 사회주의 복수정당이 존재한 역사가 없죠 그리고 일베가 왜 나옵니까 분명 여기선 자본주의에 반하는 정치사상서적물도 자본주의에서 합법적으로 유통될수있다는 다시말해 자본주의에서의 사상의 자유 정도를 말한건데 말이피다 일베는 반사회적 패륜집단인데 노정협은 이를 사상의 자유로 해석합니까?

제가 여기서 일부 극좌적 단체의 정치성명 보니 결국 결론은 사회주의 하자는 건데 가난한 사회주의를 인민을 진정 생각한다면 어찌 대안이라 주장할수있죠? 노정협은 진정으로 북한인민의 생활수준이 남한보다 낫다 주장하려 드는 겁니까?

마지막으로 본래 쟁점에 대해 물어보니 답변드리는건데 적어도 자본주의 폐절이 대안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가난한 사회주의는 인민을 더 가난하게 만들 뿐이니까요.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7.02.14.

장황한 것과 논리적인 것 구별도 못하는 건가요.

맑스가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의 진보적 측면에 대해 말했지만, 그것의 계급적 성격이 반노동자적이고 반민중적이라고 한 거는 생각을 못합니까? 제국주의 지배로 식민지 국가의 생산력이 발전되면 그것으로 그 식민지 체제를 진보적으로 승인하며 제국주의 지배를 받아들이겠습니까?

생산력 발전이 자본주의 생산관계로 인해 어떻게 그것이 파괴적으로 작동하며 노동자 민중을 고통과 질곡으로 몰아가는 이 체제의 모순은 안 보나요.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대해 말했더니 왜 생산력 발전이라는 한 측면만 말하는 겁니까?

동아시아 발전 모델 중에서 경제성장률 같은 성장으로 따지자면 한국만한 예가 없죠.

그 체제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1948년부터 국가 체제를 다지고 그 국가체제 하에서 어떻게 고도성장을 했나요?

100만 이상 민중을 학살하면서 그 국가적 발전의 토대를 다졌죠. 그리고 박정희 체제, 전두환 체제에서 고도성장을 했죠.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노동자 민중을 압살하면서요.

그 성장을 찬양하려면은 자본주의 체제에 투항해서 노예가 되지 무슨 진보운동에 몸담고 있을 이유가 어디에 있나요? 물론 댓글을 단 분이 자본주의에 찬사를 보내는 극우인사라면 더 할 말이 없지만요.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오늘날 노동자 민중이 누리는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그 체제의 결과입니까? 그 체제 하에서 목숨 걸고 투쟁한 노동자 민중의 희생 때문인가요?

제국주의 체제는 또 어때요? 자국, 타국 노동자 민중을 짓밟고 전쟁과 파괴를 일삼고 있지 않아요.

쏘련에서는 짜리즘과 봉건적 잔재, 내전, 혁명초기 제국주의 침략과 히틀러 파쇼의 전쟁과 침략에도 불구하고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을 했지요. 그 출발점이 이미 자본주의 발전 100년을 거친 나라와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죠. 극도의 난관 속에서도 그 생산력 발전은 실업의 일소와 무상 복지체제의 성과로 나타났죠. 그것도 제국주의적 착취체제를 만들었던 미국와 유럽, 일본 제국주의처럼 다른 국가,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착취하면서 이룬 수치적 성장이 아니라 오히려 스페인 내전 원조나 팔레스타인 지원처럼 진보적 운동 속에서 성장을 한 것이지요.

쿠바의 생산력 발전 수준이 제국주의 체제 하에서 포위되어 극심하게 정체된 적이 있었고, 지금도 악전고투 속에서 발전하고 있는데 그건 제국주의 포위 탓이지 사회주의 계획생산 체제 때문은 아니죠. 그 악조건 속에서도 무상체제를 유지하면서 국제적 지원과 연대를 하는 게 대단한 거죠. 쿠바 인민이 착취 없는 해방된 노동을 하고 권력의 주체가 된 점도 봐야죠. 자본의 노예가 된 체제의 노동자들의 삶과 인간 존엄이 박탈당하고 쓰레기 취급당하는 현실은 안 보나요?

북에 대해서는 쿠바를 통해 간접적으로 인식하면 될 듯 하구요. 그런 제국주의 포위 조건 속에서 악전고투하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 당신이 조금의 진보적 입장이라도 있다면 제국주의 체제에 맞서 싸워야지 그걸 가지고 자본주의, 제국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계기로 삼는 겁니까?

한국에서 얼마 전에 계란 파동났었죠? 곧바로 미국에서 계란 수입 안했으면 난리가 났겠죠. 단 한 번의 계란파동에도 난리법석을 떠는 게 자본주의 현실이죠. 석유 수입이 한 달 동안만 방해를 받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어요.

그런데 수십 년 동안 군사적 침략 공세를 당하고 경제봉쇄를 당하면 어떻겠어요? 당신이 말하는 그 생산력 발전이라는 게 가당키가 하겠어요? 1년은커녕 6개월도 못 버틸걸요.

자본주의 다당제가 민주주의 척도가 된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자본주의 노예의식에 쩔어 있는 겁니다. 일당독재,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처럼 어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그런데 말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부르주아 다당제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입장을 당파적으로 대변하는 정당이 필연적이에요.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다른 계급의 부양, 즉 노동자 계급의 노동에 의한 부양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체제니까요. 물론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의 존재도 부르주아의 존재가 없다면 마찬가지지만요.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하에서는 지배계급 정당은 당연한 거구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존재도 필연적일 수밖에 없어요. 합법적으로 존재하든 탄압으로 비합법적으로 존재하든 노동자계급의 존재와 그 존재를 전투적으로 대변할 정당이 존재해야 하는 건 당연하니까요. 그런데 사회주의는 어떤가요? 부르주아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필요도 없는 체제에요. 존재할 이유도, 존재하지도 않는 계급의 이해를 대변할 필요가 없는데 부르주아도 포함하는 다당제가 왜 필요한 거죠.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여러 정당으로의 난립은 그게 무조건적으로 민주주의 척도가 아니라 그 단일 정당이 계급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거나 하는 문제일 수는 있어도 일당의 문제 자체가 문제는 아닌 겁니다. 여기서도 당신은 구제불능의 자본주의 노예의식에 쩔어 있는 거에요.

당신은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이 있는 한국에서도 사회주의 서적이 서점에서 유통되는데 소련 북한 등에서 자본주의 서적이 합법적으로 유통되었나요?”라고 묻습니다. 합법적으로 유통되지 않은 자본주의 어떤 서적이 있을까요? 잘은 모르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숭배하거나 부르주아 썩은 문화와 문학 등이 탄압을 당했겠지요. 그래서 일베 예를 들었던 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형식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의 내용이 중요하다고 했던 거에요. 가령 누가, 어떤 것이 자유를 누리고 반대로 어떤 것이 탄압을 당하고 이런 계급적 내용이 중요하다는 거에요.

쏘련 고르바초프 당시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다당제가 도입되면서 쏘련이 본격적으로 해체되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글라스노스트라고 해서 퇴폐적이고 반인민적인 부르주아 영화, 연극, 문학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들어왔죠. 그게 당신이 찬양하는 다당제와 함께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자본주의 서적의 사례에요.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이 있는 한국에서 사회주의 서적이 유통되는 것을 보면서 국가보안법의 악법을 보지 않고 대신에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서적이 있다며 체제를 찬양하는 사람은 살다 살다 처음 보겠군요. 국가보안법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사회주의 서적이 유통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는데요. 그런데 아직도 국가보안법 때문에 사회주의 서적을 유통했다고 잡혀 들어간 노동자의 책 대표 얘기는 못들어 봤어요?

참 구제불능의 자본주의 체제의 노예님이시군요.

우리안의영웅 2017.02.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라면 더 이상 논쟁을 이어나가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회주의 국가들이 초기에 높은 성장률을 달성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중국 사회주의가 노정협이 말하는대로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해체’하였는데도'(실상은 해체하였기 때문이나, 그 쪽 논지에 따르면)장기간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은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한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국이 이토록 놀라운 성장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것이 어느날 미국이 갑자기 봉쇄를 풀었기 때문입니까? 뭐 여기에도 이것저것 갖다대려고 시도는 하겠습니다만 정말 그런식으로 주장한다면 어이상실입니다. 여튼 역사는 사회주의 생산관계는 초기 사회주의 구상자들의 전망과 달리 후진적이라는걸 여러 국가와 지역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일찍이 등소평은 가난은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일갈하면서 사회주의 생산관계에 일대수정을 가져올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고 오늘날 중국은 그에 따라 발전을 거듭하고 있죠. (물론 자본주의적 개혁이 서구권 자본주의식으로 편향되면서 중국 내부에서도 다양한 논쟁과 실험이 지속되고 있긴 하나 그것이 사회주의로 돌아가자는 식은 아니지요)이런 현실을 부정하면 안되는것이구요. 그런데 여기까지 얘기하다 보니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기는데 말입니다.

설령 노정협과 같은 극좌조직의 말대로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우월한것이라고 하더라도 한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는 순간 그쪽들이 말하는 봉쇄와 고립 때문에 생활수준이 북한과 쿠바 수준으로 전락할것인데 이는 인민에게 상당한 고통이 될것 아닌가요? 물론 이는 전 세계 동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다면 일거에 해결되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구요 그렇다면 당신들은 인민들을 적어도 오십년 백년 이상(이 또한 전세계가 사회주의가 된다는 전망이 실현되고 사회주의가 우월하다는 전제가 깔려야겠지만) 낮은 생활수준과 복지로 고통을 겪을텐데 그럼에도 사회주의를 주장한단 말이군요? 당신들에게는 실제 살아가고 있는 인민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고 맑스가 주장한것을 현실에 구현하는것에만 급급하고 있군요. 착각들마세요. 사상은 오로지 대중을 위해 존재하는것이 대중이 사상을 위해 존재하는게 아닙니다. 대중의 이익을 증진시키지 못하는 사상이 왜 필요합니까? 단언컨데 만약 맑스가 100년간의 사회주의 전개를 목도했다면 다른길을 천명했으리라 확신합니다. 적어도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정서를 깔고 있었을테니까요.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와 사상의 자유에 대해서 언급하고 가자면… 제가 보기에는 노정협 쪽에서 의도적으로 말귀를 못알아먹는것처럼 연극을 하시는거 같은데 그건 정직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지금 노정협은 뜬금없이 일베를 들먹거리는데 노정협의 눈에는 반사회적이고 패륜적인 범죄집단과 그 주장을 실제 현실에서 높은 성과를 낸 동아시아 모델이나 유럽의 복지국가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를 동일시하는겁니까? ㅡㅡ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적어도 제가 아는바로는 지금 자본주의 국가에서 반자본주의 서적이 유통되는것만큼 공공연하게 적법하게 자본주의 서적이 유통된적은 없는것으로 압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심지어 국가보안법이 있는 한국에서조차도 !! 반자본주의 사상의 자유를 대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서점에 자본론이니 공산당선언이니 깔려있는 현실을 보고 말하세요. 이런 현실을 부정하려고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는 다 쓰레기 같은거니까 유통될 필요도 없다? 그쪽 스스로가 스웨덴 복지의 높은 수준을 인정해놓고도? 그쪽 스스로가 동아시아 발전모델의 높은 성장률을 인정해놓고도?? 이건 정직하지 못해도 한참 정직하지 못한것이지요. 그리고 노동자 정당이라고 퉁치지 마세요. 저는 분명히 공산주의 사회주의 정당을 얘기한것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자본주의를 인정하는 그쪽들 표현에 따르면 합법주의개량주의 노동정당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내거는 정당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은 약간의 특수한 상황이 있긴 하지만 그쪽들이 자주 인용하는 그리스 공산당.. 거기는 자본주의 아닙니까? 반면에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자본주의 정당이 존재한바 있습니까? 끝으로 노동자 정당은 일당이 맞다고 하는데 ㅡㅡ 이보세요들 노동자들의 의식이 다 균질합니까? 노동자들의 생각은 다 동일합니까? 하다못해 사회주의 국가들 국가들 사이에는 모델적 차이가 없었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대안을 가지고 복수정당을 조직할 권리가 당연히 노동자 인민에게 있어야되는데도 사회주의 국가에서 정당이론은 오직 일당만을 허용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민주주의죠? 합법적으로 집권정당을 교체할수 없는 민주주의도 민주주의인가요?? 만에 하나 천만분의 하나라도 노정협이 전위정당을 만들면 천년만년 노정협이 다 해먹으면 그래도 노동자 민주주의 입니까?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7.02.15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과 스웨덴 등 복지체제 같은 역사적 사실을 누가 부인했나요? 지금까지 논쟁은 그 발전의 계급적 성격을 가지고 논한 것 아닌가요?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고도로 발전시키고 경제성장을 이룩했지만 그것이 노동자 민중을 착취하고 수탈하고 억압한 결과 이뤄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복지체제의 구가, 특히 스웨덴 등 복지체제의 계급타협주의도 그 계급타협을 가능하게 했던 러시아 혁명과 쏘련에서의 경제발전, 실업의 일소와 무상복지 체제라는 역사적 성과, 그것을 전망으로 하는 격렬한 계급투쟁이 자본, 자본주의로 하여금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양보를 하도록 했다는 것 아닙니까?

계급타협이 존재한다는 것은 계급타협의 역사적, 물적 조건, 주체적 조건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집니까? 아니면 자본이 옛다 이거나 먹어라 라고 던져주기라도 합니까?

그런데 그 계급타협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들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쏘련 해체, 자본주의 대공황, 신자유주의와 긴축공세 등이 그것이죠.

그 때문에 북유럽에서도 사민주의 정권이 무너지고 있고 계급타협 체제 대신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세가 자행되고 있는 거죠. 남유럽을 대표적인 예로 해서 유럽전반에서 대량실업, 임금삭감, 복지후퇴 등으로 노동자 총파업과 격렬한 가두투쟁으로 노동자투쟁이 다시 거세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요?

그리고 사회당, 노동당, 사민당 등 대다수 유럽의 사민주의 정당은 반노동자적 지배계급 정당으로 변모된 지 오래되지 않았나요?

당신이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과 복지체계 운운할 때 현실은 자본주의 대공황과 장기불황으로 막다른 길로 빠져 들어가고 있고 노동자 민중은 거대한 투쟁을 일궈나가고 있는 거죠.

게다가 자본주의는 이 위기 속에서 침략 전쟁을 일으키고 내란을 부추겨 수십만, 수백만 인민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런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모순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이 체제를 찬양하기 바쁩니다. 그러니 당신을 자본주의의 구제불능의 노예, 자본주의 신봉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또한 동아시아 발전모델에 찬사를 보냅니다. 당신이 한글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걸로 봐 한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얘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자본주의 발전의 반노동자성, 반민중성을 보지 않고 발전에 취해 거기에 경배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일명 식민지 근대화론을 바탕으로 한 일단의 반동적 무리들입니다.

일제의 지배에 대해서는 제국주의 지배가 조선을 근대화 시켰다고 이 지배를 정당화합니다. 조선 민중의 피와 땀과 눈물을 뽑아낸 일제의 잔혹한 자본주의 근대화에 머리를 조아립니다. 민중의 희생을 외면하고 은폐합니다.

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모태로 뉴라이트가 생겨납니다. 이들은 박정희 파쇼 체제와 전두환 파쇼 체제를 발전상에 도취되어 반동적 역할을 자처합니다.

현대 한국 뉴라이트의 이론적 원조가 안병직과 그 자의 제자인 이영훈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자들이 왜 진보적 사상과 양심을 버리게 됐는지 일화를 하나 소개하죠.

“안 교수는 1980년대 들어서면서 자신의 이론에 의구심을 갖기 시작한다. 식민지 사회에서는 경제발전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그는 당황했다. … 안교수는 제3세계에서도 자립적인 자본주의 성립이 가능하다는 나카무라 교수의 주장에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일본에 유학하며 제3세계 경제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면서 안병직의 역사관은 뿌리부터 달라졌다. 전향한 안교수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흔쾌히 동의하지 못했다. … 지리산 산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던 봉고차 안에서 이영훈은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으로 명성을 얻었던 당대 대표적 좌파지식인 박현채 선생에게 ‘저 도시의 불빛을 보십시오. 저것이 어떻게 신식민지입니까.’라고 도발했다.”(뉴데일리, 안병직과 이영훈의 깊고 폭넓은 대화, 2009. 5.4.)

당신의 사유방식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극우적 결론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뉴라이트 변절자들은 바로 자본주의 발전상에만 주목했지 그 발전의 반노동자성, 반민중성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발전이 가져온 공황과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에 대해서는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저 자본주의 도시의 휘황찬란한 불꽃에만 취했지 그 불꽃 아래서 장시간, 야간노동에 시달리고 저임금과 직업병으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의 삶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찬양하고 경배하는 동아시아 발전모델은 이승만의 민중 대학살과 박정희 군사파쇼의 착취와 억압, 인권유린, 고문과 학살, 노조파괴, 전두환의 광주학살과 민주주의 말살 속에서 이뤄진 것입니다. 공돌이, 공순이 천대와 인간성 말살 속에 이뤄진 것입니다. 그 발전모델도 대공황과 장기불황을 오가며 노동자를 대량해고하고 실업의 만연과 비정규직화로 파탄 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맑스는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부조응하여 파탄날 수밖에 없다고 한 것입니다.

당신의 동아시아 발전 모델에는 중국이 있습니다. 중국의 발전모델 뒤에도 역시 농민공으로 대변되는 대량실업, 부동산 등 과잉생산 공황, 중국에 투자한 해외독점자본의 노동자 착취 증대, 빈부격차와 각종 불평등 증대, 상하이 자본의 쌍용차 매각 과정에서 보여준 대량해고의 폭력성이 있는데 당신은 그러한 자본주의적 모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자본주의적 발전이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 고르바초프와 그 이후 옐친 권력에 의한 정치, 경제개혁까지는 이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자본주의 노예적 신봉자답게 다당제가 민주주의의 척도라도 되는 듯이 주장합니다. 중국에서 형식화, 형애화 됐지만 공산당 일당독재 대신 러시아처럼 다당제가 이뤄지고 시장개혁주의가 진행되면 무슨 일들이 벌어지게 될까요?

러시아나 유고연방 사례처럼, 제국주의 개입과 민족분규 증대, 내전격화로 전쟁과 대량 살육이 자행되고 사유화(민영화)로 대량해고가 만연하고 그나마 남아 있는 복지체계가 붕괴되는 것이죠.

중국에서도 마찬가지 일들이 벌어지겠죠.

중국의 발전상에 대한 찬사와 당신이 경배하는 다당제는 필연적으로 이런 모순적인 일들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사회주의 일당의 문제는 그 당이 법적으로 일당이다 선언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도력을 인정받고 확고한 지지를 받느냐의 문제죠. 당이 얼마나 통일적으로 인민들 내부에 뿌리내리냐, 검증되고 신뢰 받느냐 문제죠. 그게 없이 일당이니 따라라 선포하고 법적으로 못 박는다고 되겠어요. 관료적, 행정명령적 포고로 그렇게 한다면 인민들이 그 당을 부정하고 거부하겠죠.

당신은 자본주의 발전과 복지를 말하고 사회주의 빈곤을 운운하는데 어디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한국에서 노동자 민중 중에서 풍요와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 좀 데리고 와 봐요. 예시라도 해봐요.

청년실업과 저임금 알바 노동으로 고통받고 고시원을 전전하는 청년들이 그 자본주의 발전의 풍요와 혜택을 누리고 있나요? 절대다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런 가요? 퇴출제 도입 위기에 빠지고 퇴직 이후 삶의 보장이 없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어떤가요?

병고, 고독고, 무위고, 빈고로 여생을 비참하게 마치는 노인들은요?

대자본 진출로 파산당하는 소상공인들요? 농민들은요?

도대체 당신이 말하는 이 잘나가는 자본주의 헬대한민국에서 자본가들, 부자들 말고 대다수 노동자 민중 중 누가 풍요롭게 살고 있나요?

구제불능의 자본주의 신봉자에게는 이런 비참한 현실이 보이지 않는 것이죠.

반면 당신이 말한 현실 사회주의 빈곤은 어떤가요? 쿠바 예를 다시 들어볼까요? 완전고용과 무상체제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 않나요?

그것도 미제 날강도들의 말살 포위 공세 속에서 계획경제 체제를 고수하고 있지 않나요?

그럼에도 쿠바가 겪는 경제적 난관이 있다면 그건 체제 자체의 모순 때문인가요?

제국주의 포위 말살 정책 때문인가요?

당신이 조금이라도 진보성이 있다면 자주적 사회주의 건설을 파괴하려는 이 제국주의 봉쇄와 말살 정책을 규탄하고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당신은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자본주의에서 자본론 등이 유통되는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서적이 유통되지 않으니 자본주의가 더 민주적이고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우월적 체제가 아니냐?고 주장합니다.

참 구제불능 노예다보니 별걸 다 찬양하네요. 당신이 국정원 직원이나 공안검사라고 의심이 들 정도군요.

그런 자본론 같은 진보적 위대한 서적유통이 지배계급 관용 때문인가요? 민중의 투쟁 덕분인가요?

사회주의에서는 자본론 번역이 국가 지원으로 이뤄졌지요. 사회주의 사회에서 인류의 지적 자산, 위대한 문학작품이 어디 탄압을 받습니까? 사회주의는 반달리즘이 아녀요. 문화유산도 국가의 보호 아래 전 인민적 공유 자산이 되는 거죠. 레닌과 볼셰비키 권력의 포고령을 보세요. 사회주의 문화의 발전을 보세요.

단 사회주의도 검열이 있겠죠. 반노동자적 반민중적 반인륜적 문화, 문학이 검열과 탄압을 당하겠죠. 나머진 비평의 문제일 것이구요. 중립적 표현의 자유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의 계급적, 진보적 내용이 중요한 거에요. 그래서 일베조차도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패륜적 행위를 합리화 하는 현실을 비판한 것이구요.

혁명의 현실성은 자본주의 현실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거에요. 인공지능만 보더라도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 자동화와 합리화가 인간 노동력을 폐기하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나요?

폐기된 노동력은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의 노동자들이에요. 전쟁위기는 인류를 절멸시킬 수도 있지요. 환경재앙은 어떻구요? 소비자로서도 안전하게 먹고 마실 게 없어요.

다행히 우리의 입지점은 당신이 경배하는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 자체에 있지요. 그 거대한 생산력 발전의 혜택을 이재용, 정몽구 같은 자본가 범죄자들이 독점하고 있으니 노동자 민중이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어요?

당신의 로망, 스웨덴 얘기를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에서 실현해볼까요? 당신은 스웨덴 계급타협체제를 대안으로 떠받들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사회적 타협주의, 노사정위 아닙니까?

예전 노사정위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질 때 노사정위 참가론자들은 대뜸 “그럼 사회주의 하자는 거냐?”라고 했죠. 당신도 그 작자들과 똑같지요.

울산노동포럼 변절자들이 당신처럼 스웨덴 모델을 대안으로 치켜세우고 있지요.

당신같은 사민주의 극우 반공주의자들의 갈 길을 저들 변절자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군요. 껍데기는 가라!

“저는 초지일관 갖고 있는 원칙이 있어요. 그거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라는 이 헌법적 체제가 인류가 발명한 최선은 아니지만 우리 인류의 자유를 확대하고 또 국민의 복지를 증진시키는데 차선의 제도라고 믿어요. 그거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요. 그런 신념이 투철하기 때문에 보수다 그렇게 말한다면 난 보수임을 자처할 수 있습니다.”

당신처럼 초지일관 반북반쏘적이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지 않습니까?

누군지 궁금하죠? 이번에 민중의 투쟁으로 구속된 김기춘 옹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에요. 한국 현대사의 최대 악마가 왜 그 짓을 태연하게 저질러왔는지 보여주는 거죠.

당신이 저 악마 같은 짓을 했을 리는 없겠지만 그 신념체계는 똑 같아요. 반공사민주의자들은 언제나 극우파쇼와 일통하는 거죠. 다만 전자는 지배계급 일원이었고 당신은 극우반공 사민주의 자본주의 노예라는 점에서는 다르지만요.

우리안의영웅 2017.02.15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해서 성장이 이루어져요? 황당합니다. 노정협은 박근혜 정권을 파쇼정권이라 칭한것으로 아는데 아마도 박근혜 정권도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정권이거나 그것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정권이겠죠? 근데 지금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왜 이렇죠? 동아시아모델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이 보이는 성장률은 왜 차이가 나는거죠? 당신들 논리대로라면 억압과 착취가 순화되었기 때문입니까? 억압과 착취로 성장을 한다?? 노정협의 몰역사적이고 반과학적인 주장..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뉴라이트를 말씀하셨는데 지난번엔 일베를 들먹거리지 않나 이번엔 뉴라이트.. 아마 쏘련과 북한에서 대규모 숙청이 있었을때 그런식으로 혐의 씌우고 조작해서 그리했겠지요? 재미나네요. 정치적 입장과 호불호를 떠나서 저의 그간의 주장을 봐온다면 적어도 (그리고 당신들 스스로도 저를 ‘반공 사민주의자’라고 칭해놓고도) 뉴라이트와는 다르다는 것을 상식에 비추어 알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점을 인용해놓고 제 관점과 유사하다는식으로 몰고가려고 하는걸 보니 황당할 따름입니다. 뭐 여기에 대해서는 얘기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구요.

다만 종말론적이고 숙명론적인 노정협의 정세인식에 대해서는 얘기를 하지 않을수가 없군요 노정협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건데 맑스는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부조응하여 파탄날 수밖에 없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스웨덴 모델은 건재하고 노정협 스스로가 인정한것처럼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해체하고 있는 중국은 여전히 고성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일반이 저성장과 공황으로 간다기 보다는 모델에 따라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보는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노정협은 자본주의 모델 다양성을 부정하고 스웨덴도 한국도 일본도 미국도 다 똑같은 자본주의라고 합니다. 각 국가들의 인민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은 크게 다른데 말입니다. 이런것이 전형적인 관념론적 사고방식 아닙니까? 파탄난것은 한때 세계를 양분했던 사회주의 권이잖습니까? 북한 쿠바 외에 사회주의 국가 다 파탄나지 않았습니까? 역사적 사실이 이럴진데 자본주의를 향해 파탄 운운하는것기 가당키나 한가요?

그리고 자꾸 쿠바를 얘기하는데 쿠바 성장률이 낮은게 봉쇄때문이라구요? 제가 지금까지 말한것을 다 흘려들으셨나 봅니다. 쿠바가 전통적인 계획경제를 고수하는 한 봉쇄가 있든가 없든가 저성장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전통적인 계획경제의 초기성과와 곧바로 닥치는 한계에 대해서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한때 북한이 한국보다 높은 성장률을 기록한건 다 알지 않나요? 그것도 갑자기 봉쇄가 풀렸다가 강화되서 그런건가요? 무엇보다 경제 분석에 있어서 국가의 제도 및 정책의 결과를 도외시하고 오로지 외부 요인에 의해서만 분석을 하려드는 방법론 정말 오늘 두번 세번 놀랍니다.

이어서

“당신은 자본주의 발전과 복지를 말하고 사회주의 빈곤을 운운하는데 어디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한국에서 노동자 민중 중에서 풍요와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 좀 데리고 와봐요. 예시라도 해봐요.”

한국에서 노동자 민중의 생활 수준이 사회주의 북한보다 못합니까? 적기도 귀찮네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전국노동자정치협회님 2017.02.15.

한국 자본주의 성장이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한 결과라는 사실을 부정하다니 참 황당하군요?

그렇다면 지금 당신은 한국자본주의 성장이 노동자 민중을 존엄시하고 착취하지 않고 이뤄졌다고 강변하는 건가요?

박근혜 정권 들어 성장이 낮은 건 전 세계적 공황과 장기불황 때문 아닙니까?

그러니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규제완화에다가 노동법 개악하고 비정규직 늘려 자본에게 이윤 보장해주려는 거 아니에요. 파쇼공세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고요.

자본의 착취와 억압은 자본주의 발전의 주된 견인차이자 요소인거죠. 대외 경제에서도 경쟁력을 가지려고 그걸 더 강화하기도 하는 거구.

근데 자본주의의 노동자 착취증대와 공세는 이윤을 낳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대중의 빈곤을 낳아 공황을 더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는 것 아닙니까? 자본의 축적을 증대시키기 위한 자본의 노력이 이윤율 하락을 낳는 것도 그렇고.

자본주의 성장, 발전의 반노동자성, 반민중성을 안보니 뉴라이트와 사고체계, 방식이 똑같고 그들과 같은 결론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거에요. 봐요.

노동자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해서 자본주의 성장이 이뤄진다는 주장에 황당해하는 걸 보니 뉴라이트와 다를 게 없는 걸 스스로 입증해주는 거죠.

반공주의에 빠져 자본주의를 경배하는 것도 전형적인 뉴라이트죠. 자본주의 모순에 철저하게 침묵하면서 성장이데올로기를 유포하는 것도 그렇죠.

대규모 숙청 운운하는 것도 국정원 식 공안 담당자들 인식과 한 치의 차이도 없고.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를 강조하는 것도 전형적인 뉴라이트 아닌가요? 역사왜곡, 미화도 그렇고요. 착취와 억압으로 얼룩진 한국자본주의 성장의 반노동자성, 반민중성을 부정하니 그게 뉴라이트 아니면 뭡니까?

반공 사민주의와 뉴라이트는 이렇게 합치될 수 있는 거에요. 특히 분단사회인 한국에서는요.

툭하면 북과 비교하며 체제를 옹호하는 것도 뉴라이트의 전형적 특성이니까요. 그것도 반공주의 국가보안법이 심어 놓은 인식을 가지고요.

우리는 고도로 발전한 한국에서의 변혁의 필연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에요.

북에 대해서는 자주적으로 발전하도록 제국주의 말살 공세를 규탄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진보적 인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취할 기본적 태도 아녀요?

스웨덴의 계급타협주의의 조건에 대해서는 누차 말했는데 한국에서는 그걸 어떻게 구현하겠다는 겁니까?

노사정위요?

뉴라이트 반공사민주의 양반!

그래서 결국 이 논쟁의 출발점이 됐던 쟁점, 촛불의 운동성을 어떻게 채워나가겠다는 거요?

적폐라고 하는 현재 노동자 민중의 산적한 요구를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거요?

쏘련은 해체됐고 현실 사회주의는 가난하니 한국사회 적폐가 아무리 많아도 참고 견뎌야 한다는 거요?

자본주의가 최고니 개똥밭에서 굴러도 행복해하란 거요?

스웨덴 복지체제라도 맛보려면 어찌 해야겠소? 노/정/협

이 기사를 총 421번 보았습니다.

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촛불에 운동이 없(었)다”! 그것을 채워나갈 운동을 부정하는가?> 글을 둘러싼 구제불능 자본주의 신봉자와의 논쟁”의 1개의 생각

  • 2017년 2월 18일 12:44 오전
    Permalink

    청산주의 그리고 반변혁주의의 철분(쇳가루)이 침전한 것들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저런식으로 과잉 소신을 확인하는 중입니다. 다만 언급했던 서전/스웨덴을 포함한 이미 상당수의 자본주의 체제는 ML(M) 당들만 해도 최소 2개 이상(서전/스웨덴의 경우는 KP/S(공산당/서전; 마리오 소사 선생의; 1967)와 SKP(서전/스웨덴 공산당; 1985))존재하는 상황은 일반적인데 굳이 일시적으로 전국 모두에 갖추는 경우가 불가능하다면 이런 식 정도는 용인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유산 정당이 존재하는 복수정당제의 옹호는 문제가 크지요. 물론 어떤 당건설 추진 단체의 견해처럼 사회적 복수정당제도 있기는 합니다. 원체 정당활동을 하기 힘든 사회들 중의 하나이다보니 이런 것도 이행 후 누려야 할 권리에 속하는 상황입니다. 당연 서전/스웨덴은 아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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