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한국 젊은이들의 패션이 되다!” 맑스 ‘노동가치론’을 부정하는 자본주의 옹호자의 서푼짜리 논리

최근 “좌파, 한국 젊은이들의 패션이 되다!”(박정자 객원논설위원 상명대 명예교수, 2017-02-17)라는 칼럼이 제법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 수준과 상관없이 맑스의 ‘노동가치론’을 비판하는 내용도 그렇거니와 반자본, 반기업 세태를 언급하며 결국 자본주의 옹호를 이끌어내는 유산 계급적 태도도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3포, 4포, 5포도 모자라 7포에 이어 삶 자체를 포기할 지경에 이른 헬대한민국 청년들이 “몸은 명품소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나, “영유아 보육비를 국가가 보조하고 온 국민이 저렴한 의료 혜택을 받고 있”다는 근거를 들어 “현재 한국은 거의 전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다”라는 이 주장은 터무니없는 생억지다.

반면, “대기업에 대한 증오와 조롱”, “뇌물의 파라다이스 대한민국!!”이 판치는 드라마에 많은 청년들이 열광하고 이것이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 청년들이 “머리는 사회주의”에 빠져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청년 절대 다수는 헬대한민국 현실을 저주하지만 대다수가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박정자 교수가 청년들 다수가 “머리는 사회주의”에 빠져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사실은 실제로 청년들이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는 것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한 수작에 불과하다.

노동가치론에 대한 터무니없는 공격

박정자 교수는 이를 위해 시골 빵집 주인을 등장시켜 맑스의 ‘노동가치론’을 공격한다.

“집에서 내가 뜨개질한 한 켤레의 장갑, 내가 구운 한 덩이의 빵은 내 가족에 대한 사랑일지언정 거기서 잉여가치는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본도 형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빵 기계를 도입하고 종업원도 채용하여 노동을 조직했을 때 비로소 시골 빵집 주인도 자본론을 굽게 되는 것이다. 노동은 그 스스로 가치를 발생시키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을 조직하고 사회화하는 자본이 있을 때에만 가치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 노동보다 자본이 우위에 있는 것이다. 자본가의 지위가 고정돼 있는 것도 아니다. 노동의 열등한 지위가 싫다면 스스로 자본이 되려 노력하면 된다. 자본이 활발하게 움직일 때 사회는 활력을 되찾고 개인들은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다.”(같은 기사)

박정자 교수가 가정 내에서 소비하기 위해 만드는 장갑이나 빵을 만드는 노동으로는 잉여가치가 발생하지 않고, 따라서 “자본도 형성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왜냐하면 자본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가정 내에서의 소비가 목적이 아닌 시장에서 판매를 위한 목적으로 상품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노동력을 고용하여 판매하기 위한 상품을 만들어내면 잉여가치가 만들어지고 이를 상품으로 판매하면 애초 투하 자본보다 증식된 자본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박정자 교수는 ‘노동가치론’을 부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위 주장을 했다.

왜 하필 ‘시골’ 빵집의 예를 들었는가?

먼저 한 가정에서의 노동과 대비해 시골 빵집 주인의 예를 든 박정자 교수의 의도는 여우처럼 교활하다. 아무리 자신이 뻔뻔한 자본의 대변자라 하더라도 “노동의 열등한 지위가 싫다면 스스로 자본이 되려 노력하면 된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대자본의 예를 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청년들에게 “스스로 자본이 되려 노력하”는 태도로 대자본가의 위치에 오르라고 하는 것은 전혀 현실성이 없는 허황된 주장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박정자 교수는 왜 하필 ‘시골’ 빵집의 예를 들었을까?

만약 박정자 교수가 도시 소자본의 예를 들었으면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어떤 측면에서는 노동자 임금보다도 더 열악한 수익, 대자본의 침투에 의해 연일 파산하는 현실, 대자본을 피해 소자본 간의 날로 증대하는 경쟁, 프랜차이즈 체인점 하에서 매일 같이 거대 자본에 종속당하고 쥐어 짜이는 도시 소자본의 현실을 누구나 금방 떠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시골 소자본 역시 이러한 현실을 피해갈 수는 없지만, 대자본의 침투가 상대적으로 적고, 소자본 간 경쟁이 도시 보다 덜하며 도시 소자본 보다 지역적으로 고립되어 눈이 잘 안 띠기 때문에 한적한 시골 빵집을 선택한 것이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 현실을 은폐하기 위해 가상의 한 시골 빵집 주인을 불러낸 것이다.

자기 노동과 착취노동

시골 빵집 주인이 빵기계를 도입했다고 하더라도 가족 무급노동을 사용하거나 자신도 같이 일한다고 하면 자본가가 아니다. 가족 무급 노동은 노예노동도 아니고 착취노동도 아니다. 빵집 주인 자신이 종업원을 고용했으나 자신도 노동에 참여 할 때 그는 반(半)은 자본가요 반(半)은 노동자다. 그런데 빵집주인이 “빵 기계를 도입하고 종업원도 채용하여 노동을 조직했을 때” 보통 그는 소생산자 역할을 할 뿐이다. 대개 이런 상황에서 애초에 투하한 자본 보다 자본 규모를 증식해 가지 못하고 영세적으로 기존 규모를 유지할 뿐이다. 시골 빵집 주인이 소생산자가 아니라 수십, 수백 명의 노동력을 고용하여 계속적으로 자본을 증식해나갈 때 명실공히 빵자본가가 될 수 있다.

애초에 시골 빵집 주인이 구입한 빵기계는 다른 노동자의 노동의 산물이지만 그것을 시골 빵집 주인이 자기 노동의 성과로 구매했을 때 빵집 주인은 남의 노동을 착취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만약 수십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빵생산을 할 때에는 밀가루를 직접 반죽하고 기계를 가동하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빵재료 구입 운반, 판매, 회계 노동자들까지 고용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빵집 주인은 노동자들에게 지불하고 남은 노동의 결과물을 독차지하여 일부는 자본으로 재투자하고 나머지 가치를 독차지하게 된다. 이럴 때 그는 착취자가 되는 것이다. 애초에 빵기계 구입은 빵집 주인의 노동의 결과물이지만, 그 이후 빵자본가로서 그는 수십 명 노동자를 착취해서 자본을 증식시킨 것이다.

박정자 교수는 “노동은 그 스스로 가치를 발생시키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을 조직하고 사회화하는 자본이 있을 때에만 가치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 노동보다 자본이 우위에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 주장이 맑스의 노동가치론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맑스의 노동가치론은 노동이 가치의 궁극적인 원천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노동이 오로지 아무런 생산수단 없이 나 홀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주장은 아니다. 농촌의 소농이라 할지라도 토지와 함께 최소한의 생산수단이 있어야지만 생산이 가능하다. 특히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와 자본의 생산수단이 결합해야지만 가치를 창출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노동이다.

자동화된 무인공장의 경우는 어떠한가? 물론 이때에도 보전노동, 관리노동이 필요하지만, 완전 무인공장이라고 칠 때, 이때는 더더욱 자본이 생산 결과물을 독차지할 이유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컴퓨터를 만들 때 인간노동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것을 빼면 무인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생산물은 인간노동이 들어가지 않고 점점 더 무가치하게 생산물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점점 더 강화되는 자동화 생산은 인간 노동력 사용을 불필요하게 함으로써 대량 실업의 원인이 된다. 하지만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을 극복한다면 이 무인공장에서 만들어낸 생산물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무상으로 생산 결과물을 향유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자본은 사회적 관계다라는 말의 의미

그런데 “그것을(노동을) 조직하고 사회화하는 자본이 있을 때에만 가치가 발생한다”고 할 때 “노동보다 … 우위에 있”다고 하는 자본은 무엇인가?

자본가가 보유한 생산수단은 노동자의 과거 노동의 산물이다. 과거 노동을 죽은 노동, 축적된 노동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맑스는 자본주의에서는 과거(노동자의 축적된 노동의 산물인 자본)가 현재를 지배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가치를 만들어내지만 그 생산의 성과를 독차지 하는 것은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이기 때문이다. 가치를 만들어낸 “노동 보다 자본이 우위에 있는 것”은 노동가치론을 부정하는 근거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전도된 현실을 보여줄 따름이다.

맑스는 자본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가진 것이 노동력밖에 없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결합시켜 생산을 해야만 자본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자본과 노동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자본은 생산수단의 소유자로서 노동자를 착취해서 자본가로서의 지배관계를 지속하고 노동자는 노동력을 제공해서 자본의 가치와 부를 가져다주면서도 자본가에게 예속된 임금 노동자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착취와 피착취라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본과 부가 소수의 자본가들에게 집중이 되고, 노동자들은 생산의 주체이면서도 점점 더 자본에 종속되고 착취 받는 현실을 면할 수 없게 된다. 빈부격차, 불평등은 점점 더 심화된다.

그러나 자본가는 독불장군이 아니다. 자본가가 착취자로서의 지배 관계를 박탈당하고 피착취자가 없어질 때, 자본가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일개 자연인 신세가 될 뿐이다. 자본주의를 극복한 사회에서 자본가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오직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전 사회적 계획 속에서 생산과 분배를 한다. 이때 그 사회는 이윤의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전 사회의 필요, 전체 인민의 정신적, 물질적 풍요와 행복을 위해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재벌을 볼 때, 자본은 존재할 하등 이유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제 현실을 은폐하기 위해 동원된 가상의 시골 빵 자본가를 떠나 삼성, 현대 같은 자본주의의 일반적이고 지배적인 대자본을 보자. 이들 재벌은 최초 자본을 친일 부역, 해방 이후 적산 불하와 삭카린 밀수, 독재정권과의 결탁, 쌀장사 등 다양하게 범죄적, 비범죄적 방식으로 형성할 수 있다. 자본가의 최초 자본이 비범죄적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할지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오늘날 삼성, 현대 같은 재벌은 최초 자본이 자신들의 노동의 결과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아주 보잘 것 없다. 대신 현재의 재벌기업은 수십 년 동안 수만, 수십만 노동자의 집단적 노동의 결과로 거대 자본을 형성할 수 있었다. 현대의 자본가들은 심지어 관리노동에서도 벗어난다. 단지 자본의 소유자라는 이름으로 거대한 사회적 노동의 성과물들을 독차지 한다.

오늘날 보편적인 기업 형태인 주식회사의 경우에, 거대 자본인 재벌은 고작 5%도 안 되는 자기 자본으로 전체 계열사에 대한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다. 주식회사는 사회적 자본을 집중시킨 것인데, 그 기업의 지배자는 자본가다. 자기 자본조차도 최초 자본을 제외하면 노동자를 착취한 결과물인데, 주식회사 제도 하에서는 사회적 자본을 일방적으로 자기 것으로 독차지 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병철, 이건희, 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삼성재벌가는 불법, 탈법적 방식으로 경영권을 승계 받아 대대손손 자본가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촛불투쟁으로 이재용이 구속되었지만 이 기업에 대한 소유권, 지배권을 박탈당한 것은 아니다. 재산을 몰수당한 것도 아니다. 이재용은 집행유예나 병보석으로 나올 가능성도 있다. 석방된 이후 이재용은 다시 삼성재벌의 지배자로 복귀하게 될 것이다. 형제자매 자본과의 경쟁에서 밀려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반면 노동자들은 백혈병 대량 사망에서 보듯 자본에 의해 집단적으로 사회적 살인을 당하고 있다. 무노조 삼성을 위해 권리를 송두리째 박탈당하고 있다. 삼성이 만든 국가 권력에 의해 공격을 당하고 있다.

이것이 “노동보다 … 우위에 있”다고 하는 자본주의의 적나라한 현실이다. 온정적이고 규모가 작은 시골 빵집의 예보다는 거대 재벌의 예를 들어 볼 때 자본은 기업의 소유자가 될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자본가의 지위가 고정돼 있는 것도 아니다. 노동의 열등한 지위가 싫다면 스스로 자본이 되려 노력하면 된다. 자본이 활발하게 움직일 때 사회는 활력을 되찾고 개인들은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다.”(같은 기사)

청년들이 빵집 기계를 도입한 소자본가 될 수는 있지만, 아무리 “노동의 열등한 지위가 싫”다고 해도, “스스로 자본이 되려 노력”한다고 해도 절대다수가 자본가가 될 수는 없다. 대자본가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자본의 지배가 강화되면 될수록 점점 더 많은 노동자가 실업자와로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하고 있다. 청년들은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기는커녕 상당수는 고시원과 원룸을 전전하고 있으며 빈곤으로 고통 받고 있다. 이 속에서 자존감은 철저하게 무너져 있고 절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 때문에 우울증으로 고통받거나 삶의 벼랑 끝에서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국내외 독점자본의 현실을 볼 때, 동아일보라는 극우 언론과 자본의 옹호자가 한 주장이 얼마나 가당찮게 현실을 호도하고 있으며 악랄하게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노동자 민중을 개돼지로 보지 않고서 어찌 이런 논리가 나올 수 있는가?

결국 종북몰이로 끝나는 것의 정치적 의미

이제 마지막 남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무기는 무엇인가?

“노동만 있는 사회, 그것은 북한과 같은 사회다.”(같은 기사)

앞서 박정자 교수는 “색깔론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말해 보자면” 이라고 글을 시작했으나 결국 남은 것은 상투적인 종북몰이다.

“영유아 보육비를 국가가 보조하고 온 국민이 저렴한 의료 혜택을 받고 있는” 현실에 비춰 볼 때 “현재 한국은 거의 전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다.”라는 주장은 터무니없지만, 그로 짐작컨대 그가 생각하는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가들이 없고, “노동만 있는 사회”, 무상의료, 무상주택, 무상보육, 무상교육이 사회의 기초로 자리 잡은 사회다.

이에 비춰 오늘날 “북한과 같은 사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지배계급의 최후의 피난처이자 전가의 보도인 종북몰이와 국가보안법이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다”고 자부심에 넘치는 이 체제가 북을 방문하거나 있는 그대로 알려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구금하고 탄압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근거 없는 ‘고무 찬양’이 문제라면 교류협력을 고무, 조장하고 ‘북한’ 사회주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알게 하여 ‘친북 세력’들이 환멸에 빠져 자발적으로 사라지도록 유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국가보안법을 철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또 모 인사의 의문투성이 해외 사망사건을 통해 거대한 반북 종북몰이가 시작되고 또 그 종북몰이가 어김없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지 않은가.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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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

전국노동자정치협회

“좌파, 한국 젊은이들의 패션이 되다!” 맑스 ‘노동가치론’을 부정하는 자본주의 옹호자의 서푼짜리 논리”의 1개의 생각

  • 2017년 2월 22일 7: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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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빵집 하니까 예전에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라는 도서를 연상하는 군요. 물론 이 도서엔 ‘자본(론)’을 제목에서 언급하고 있으나 실제 주장내용은 ‘사회경제(이란, 위내서랍/베네수엘라, … 등지에서 실시한 변형 또는 수정 경제 체제)’였지요. 암튼 시골빵집은 ‘자본(론)’으로 위장하기 위해서도 ‘노동가치론’을 부정하기 위해서도 호출한 도구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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